기다린다 한들 올까, 붙잡는다 하여 아니 갈까. 천지간 애쓰지 않아도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기어이 간다. 오고 가는 일에 마음 쏟을 만큼 한가하지 않은 나에게 세월은 언제나 화살이다. 봄이 오나 싶어 산으로 꽃 따러 다니다 보면 금방 열므이고 내리는 장맛비 보고 있다가 보면 또 가을이다. 가을은 소리도 없이 왔다가 다시 눈 내리는 겨울이면 나는 또 총총 바빠진다.
작정하지 않았는데도 계절은 어김없이 오고 저절로 흐르는 시간은 그대로 떠나보낸다. 더러 오가는 길에 인연 깊어 내게 머무는 것이 있으면 기꺼이 받아들이고, 가겠다고 발바둥 치면 순순히 놓는다. 그리하여 몸 안에 고이는 것은 평생 나의 것이 되고 떠나는 것은 아쉽게 사라지니 그 또한 나에게 귀하다. 내게로 들이는 인연과 보내는 인연은 늘 반반이다. 빛과 그늘이 일하는 나에게 번갈아 찾아오듯이 내게 오는 만사가 다 그러하다.
먹감나무 이층장 하나가 내게로 왔다. 어느 곳 누구의 손에서 만고풍상을 겪었는지 온통 부서지고 패인 모습이 고단해 보인다. 경첩 사이 낀 땟국이 기미 오른 촌 아낙의 얼굴 같다. 말 한마디 서로 건네지 않았지만, 몸안으로 밀려드는 기운이 어찌나 팍팍한지 이틀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차마 입을 뗄 수는 없었지만 그냥 다시 버리고 싶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막막한 마음 탓에 집으로 들이지도 않고 베란다에 내버려뒀다.
햇살이 들이치는 아침, 마른 화분에 물 주러 나갔다가 이층장 옆구리를 우연히 봤다. 구불구불 드러난 핏줄 같은 나무의 결, 앞이 아니고 옆이다 보니 있는 그대로의 정직한 나무 모습이다. 몇 해를 땅에 뿌리를 박고 서 있다가 또 얼마의 세월의 이층장이 되어 살아왔는지 아침 햇살 아래 그 모습이 처연하다. 세상사 무심한 일 하나도 내게 그저 오는 법 없듯이 다 긴한 볼일이 있어 왔을 터인데 이를 사랑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리 생각하고 물을 주다 힐끔 돌아보니 햇살 든 이층장 옆구리가 자꾸 무어라 중얼거린다. 애써 외면했던 이야기들이 하나씩 마음에 와 박힌다.
한 이틀 눈길 주지 않은 것이 어찌나 미안한지 얼른 가 밀가루 풀을 쑨다. 지치고 고된 삶은 어디 삶이 아니던가. 밝고 빛나는 삶보다 더 귀할 수도 있는데 왜 우리는 그저 환하고 밝은 곳에만 눈길을 주는지. 기운 없는 이층장을 깨어나게 하려고 한지도 되도록 밝고 고운 색으로 준비한다. 칙칙한 수렁에서 환하게 건져 올리고 싶은 나의 마음이 간절했던 탓이다. 고가구에는 무색한지가 제격인데 색깔한지가 웬 말이냐고 식구들은 말했지만 내가 쓸 물건이니 내 마음이다.
언제부터인가 남의 눈 보다는 내 마음이 동(動)하는 대로 하는 것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가지 않는 곳에는 걸음도 줄이고 하고자 하는 일은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상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나는 요즘 고삐 풀린 망아지다. 자유로움 속에서 새로움이 생겨난다. 새로움은 또 다른 호기심을 낳고 그런 가운데 나만의 세계가 구축된다. 견고한 그곳에서 나는 다만 나만의 즐거움을 익히는데 골몰한다.
해진 곳은 문지르고 파인 곳은 살을 채워가며 목제 염료를 바른다. 고단해 보이던 상처들이 하나둘 사라진다. 겉은 푹푹 파인 상처가 가려지니 이층장 제법 무사해졌다. 겉은 어느 정도 멀쩡해졌으니 이제 나무속을 촉촉히 채울 차례다. 들깨 한 줌을 찧어 광목에 넣고 동그랗게 말아 나무에 문지른다. 한 듯 아니한 듯 나무의 피부가 윤택해진다. 그 어떤 광택제보다 더 빛난다. 은은하게 스미는 기름이 나무를 어루만지니 나무의 결이 선명하게 살아난다. 살아난 나뭇결 사이로 들깨 향 그윽하다.
겉옷을 챙겨 입혀 놓고는 이제 속옷을 입힌다. 이층장 위에는 살구색으로 아래는 푸른 바다색으로 도배한다. 머리를 작은 장에 들이밀고 엎드려 촘촘히 바른다. 땀이 한 바가지다. 마음이 실리지 않으면 보되 보이는 것이 없고 듣되 들리지 않는 법이다. 참말이지 사랑해야 보이고 서두르지 말아야 비로소 보인다.
탑탑한 세월의 냄새가 갓 쑨 풀 냄새에 묻히고 누런 얼룩이 금방 환해진다. 장롱 안에서 뒤척거리다 보니 굽이굽이 세월을 건너왔을 이층장의 속내가 헤아려지고도 남는다. 쓰임 다하고 그저 누추하다는 이유만으로 버렸다면 어떡할 뻔했는가. 아무리 허름한 세월도 분단장 하고나니 제법 곱다. 사랑하고 마음을 다해 쓰다듬어 세상에 곱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 다 바르고 일어나보니 환하고 출렁거린다. 복사꽃 핀 야산 언덕처럼.
분명 먼 시간 어느 아낙은 이 옷장에 모시옷 몇 벌, 솜바지, 시집올 때 가져온 사주단자, 자식들 생년월일이 적힌 종이가 고이 쟁여져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볕 잘 드는 남향 안방에 앉아 빛 좋은 호시절도 있었을 것이고 주인 팔자 따라 이리저리 고단하게 이사도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혀 다른 용도로 쓴다. 아래 푸른 방에는 유기그릇과 오래된 접시를 넣고 위에 살구색 방에는 떡살과 베보자기 여러 고명을 넣어둔다.
그새 음식 만진 세월이 쌓였는지 보물단지처럼 들고 다니는 음식조리 도구들이 제법 쌓였다. 지금 당장은 내게 가장 귀한 것이다. 씻고 닦아 이층장에 쌓는다. 시골집 구석방에 둬도 마음의 의지처가 하나 생긴 듯 든든하다. 한 이틀 사랑하고 정성을 쏟았더니 무심하던 이층장이 피가 돌고 생기가 난다.
모든 인연은 만났을 때 가장 그 인연을 풀어내기 좋은 때라고 한다. 무슨 연유인지 내게로 와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었으니 받아들여 내 안에서 녹여내고 가꾸어야 하지 않을까? 슬슬 이층장과 사랑을 나누며 혼자 중얼거린다.
"내게 오는 모든 인연이 환하게 생기 나기를, 내내 그러하기를"
- 김은주 -
첫댓글 글 잘 보고 갑니다
좋은글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