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아쉬움을 탓하기 전에 상대의 강함을 이야기하고 싶다. 유희관이 대단히 훌륭했다. 시범경기의 유희관과 본경기의 유희관은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타이밍을 제대로 잡지 못할 이유는 충분히 많았다. 빼어난 제구로 실투가 거의 없었고, 결정구로 활용된 싱커는 위력적이면서 매력적었다. 간간히 던진 느린 커브는 어떤지 타자의 신경을 살살 긁는 듯 했으며, 사인을 주고 받은 후 지체 없이 던지는 짧은 인터벌은 타자들이 공을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는 듯 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느린 공을 공략하지 못한 우리 팀이 진거다. 다음에는 그에 대해 조금 더 적극적인 공략법이 나왔으면 좋겠다.
- 유희관과 한화의 수 싸움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대국은 번트 출루였다. 전날 김성근 감독은 유희관의 훌륭함을 칭찬하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내 밑에 있었으면 뱃살을 뺐을 거라고. 이게 기억할 만한 지나침이었다. 김경언 부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약간 빠른 발을 가진 타자들이 주자가 없는데도 번트를 데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유희관의 큰 체구가 번트 수비에 약하리란 걸 간파한 김성근 감독의 수싸움이었다고 본다. 이용규의 안타 이후, 다시 시도된 김경언의 번트. 그 번트가 바로 번트 안타가 되면서. 경기의 흐름이 한화 쪽으로 기울어졌다. 다시 김태균이 볼넷으로 출루하였고, 무사 만루의 상황에서 유희관은 모건과 대치하게 된다.
- 모건 입장에서 뭐 이런 놈이 있나 싶었을 것 같다. 134Km가 최고 구속인 유희관의 공은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는데, 타이밍 잡기가 쉽지 않았 던 것 같다. 적시타가 나왔다면, 모건은 이날 한화의 영웅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희생플라이로 1점을 추가한데 그쳤다. 여러모로 아쉬운 대목이었다. 이것이 유희관에게 얻어낸 단 한 점의 점수였다. 휴희관 공략법도 참 훌륭했지만, 이를 1점으로 꾸역꾸역 막아낸 유희관이 잘 한거다.
- 결정적인 패인은 유창식의 15연속 볼이다. 유창식에 대한 생각은 다시 덧붙이기로 하고, 여기서 김성근 감독님에 대한 생각을 적어본다. 아직 한화가 많이 아슬아슬해보이는 이유는 김성근 감독님이 선수들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습할 떄 던지는 공은 좋지 않은 공이 없고, 좋지 않은 선수가 없다. 하지만 타자와 대치하면 다르다.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타자와 대치하면 더더욱 공의 패턴이 다르다. 어제 유창식에게 부여된 단 하나의 미션은 컨디션 조절이었다. 그는 선발 자원이니, 조만간 선발로 콜업될 순간을 대비하여 감각과 타이밍을 갈고 닦으라는 감독님의 안배였을 것이다. 단 하나의 이닝. 어느순간 유창식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건 김성근 감독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임경완과 권혁이 투입되면서 그런대로 묘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점수차이가 이미 너무 크게 벌어져버렸다. 승리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진하게 남은 건 승패가 아니라, 유창식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 승패가 거의 결정된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두 가지 면에서 긍정적인 모습을 발견했다. 하나는 7회까지 던진 유희관 이후에 투수를 4명이나 더 불러냈다는 것이다. 8회에 함재관 공략에 성공함으로써 김강률과 마무리 윤명준까지 불러낸 것은 훌륭했다. 물론 이것이 오늘 경기에 영향을 주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끈덕지게 따라붙는 것이 시즌을 지날 수록 상대를 힘들게 만들 것이라고 확신한다. 두 번째로 긍정적이었던 것은, 역시나 막내 김민우의 호투였다.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대 선배들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씩씩하게 자기 공을 던지는 김민우의 투구는 많은 한화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을 것이다. 그가 쑥쑥 자라났으면 좋겠다.
- 그리고 유창식에 대해. 사실 어제 유창식을 보며 몇 마디 감상을 끄적였는데, 그의 경기력에 지나치게 흥분한 사람들의 글에 뭔가 쌩뚱맞은 것 같아 지웠었다. 나는 어제 유창식이 던진 15개의 볼을 모두 지켜봤다. 언젠가 이 장면이 생각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유창식이 겪고 있는 시련은 기술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사람이 살면서 겪는. 희노애락과 같은 것일 것이다. 어제 그가 아쉬웠지만,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의례 나타나는 성장통과 같은 것이다. 성장통이라는게 말은 쉽지만, 겪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참 괴롭고 힘든 것이 아닐 수 없다. 영국시인 TS 엘리엇은 성장통을 보며, 생명이 자라나는 4월이 가장 잔혹한 달이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만으로 22세인 그의 삶, 그의 야구 인생에 있어서 지금이 바로 4월. 잔혹하게 자라나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나는 그가 지금 겪고 있는 아픔을 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마주하며. 스승과 동료를 믿고 한 신중히 한 걸음씩 내딛으며 성장했으면 좋겠다. 아픔은 시간이 지나면 나이테가 되어 있다. 그 나이테를 겹겹히 쌓아가며 시간을 버티며 자라난 나무를 우리가 '거목'이라 부르지 않나. 나는 몇년이 지난 후, 그가 우리 한화의 좌완 에이스가 되어 있으리라 의심하지 않는다. 단지 지금은 과정일 뿐이다.
첫댓글 금과옥조 입니다. 매우 좋네요. 날카로운 분석. 차분하면서 분발을 당부하는 짜임새가 좋네요. 제 생각에도 역으로 하루라도 빨리 좋지 않은 모습 보인것이 좋았습니다. 그래야 고쳐서 써먹죠. 유창식은 제 생각에 감독님이 반드시 고칠거고, 감독님 60년 야구 인생최대의 숙제이자 최대의 업적으로 기록될 것 같아요. 계속 볼 나올때 바꾸면 그 선수 데미지가 너무커서 은퇴해야 합니다. 아웃카운트 잡고 스스로 이닝을 끝내고 내려온게 그나마 좋았습니다. 앞으로 유창식 변해가는 재미도 하나의 큰 관전포인트고 재미겠네요. 글이 아주 좋았습니다.
저도 마지막까지 유창식을 내려보내지 않은 것은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선수니 상처를 받지 않을 순 없겠지만, 이런 사소한 배려 하나 하나가 모여 과정이 줄어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격려 감사합니다. ^^
성장을 하면서 겪는게 성장통인데.. 성장이 없는 상태라 더 걱정되네요.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점이지만, 멀리서 보면 그 점들이 모여 선이 되죠. 성장하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적어도 그의 성장을 빌고 싶군요.
근데 유창식은 하체가 부실한듯...착지할 때 너무 불안해보여요. 그러다 보니 릴리스 포인트가 엉망이고..
좋은 글입니다. 공감~
근데 임경완이가 아웃카운트 잡앗나요?
부상 여파로 훈련을 많이 하지 못한게 무척 아쉽습니다. 이태양, 유창식 모두 말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5년 뒤, 한화 마운드를 이끌어가는 선수가 이태양, 유창식, 김민우. 이 3명의 선발이 되리라 믿어 의심하진 않네요. 임경완 부분은 제가 잘 못 봐서,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장을 해야 성장통인데 유창식은 늘 제자리인 것 같네요...
그동안 토양이 척박했던 것도 있으니 조금 더 애정을 갖고 지켜봐주면 합니다. 이제 22살이면 어린 나이입니다.
@나키 우리나이로는 24살입니다...군입대도 생각해보면 그렇게 시간이 많이 남지는 않은 것 같네요..
빨리 피는 꽃도 있고, 늦게 피는 꽃도 있듯이 선수 자신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열심히하면 언젠간 포텐을 터트릴꺼라 생각합니다. ^^ 오늘 [파울볼] 보고 왔는데 창식군과 범모군 회성군 자책하지 않고 더 열심히 하라고 응원 더 해줘야겠어요.
공은 이미 좋은 것 같더군요. 유창식의 포텐이 터지는 순간, 우리팀이 상위팀이 되어있으리라 확신 한다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