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사(趙南史)는 우리나라 최초의 연속방송극인 <청실홍실>를 집필한 드라마 작가이다. 그는 “청실홍실 엮어서 무늬도 곱게 티없는 마음속에 나만이 아는 수를 놓았소”라는 주제가로 시작되는 주간연속극을 창시한 인물이다. 조남사는 해방 후부터 서울중앙방송국에서 다양한 분야에 걸쳐 활동하다가 1956년 이 드라마를 계기로 정상급 방송드라마 작가로 부상했다.
조남사가 방송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서울중앙방송국에서 모집한 성우(聲優) 1기로 출발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당시 방송국에서 필요한 성우는 단순히 방송극에 나오는 것만 아니라 <뉴스 속의 뉴스> <뉴스 레뷰> 등에 출연하는 인물이었다. 그 때 마이크 앞에 섰던 연기가로는 장민호(張民虎), 민구(閔九-연출가, 작가), 위진록(韋辰錄-아나운서) 등이었고, 방송극 출연자는 복혜숙(卜惠淑), 김승호(金勝鎬) 등 연기자들이었다.
조남사는 성우생활을 잠시 한 후, 연출자(디렉터) 생활도 했다. 그 당시 연출은 제작을 포함한 개념이다. 그래서 해방 후에는 연출자는 어느 프로그램이고 따라 있게 마련이었다. 조남사와 연출가 생활을 함께 한 이는 이백수(李白水), 김영수(金永壽) 등이었다.
조남사는 1948년 정부수립 후 본격적인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시기에 김성민(金聖珉), 김희창(金熙昌), 유호(兪湖)가 작가의 길을 그만두고 한운사(韓雲史)가 스크립트 라이터로 들어왔다. 이 때의 방송작가진은 김영수(金永壽), 이익(李翼), 최요안(崔要安), 조남사 등이었다. 조남사는 1950년대 들어서 방송작가로서의 길을 열정적으로 걸었다. 특히 조남사가 1956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주간ㆍ매일 연속극을 개척했다는 점은 한국방송사에 길이 기록될 것이다. 그는 연출계장 자격으로 1956년 9월 명 아나운서 윤길구(尹吉九), 명 엔지니어 한기선(韓基善) 등과 6개월 여 동안 미국연수를 마치고 돌아왔다. 조남사는 이 때 미국 일본 등의 연속극 현황을 보고 우리나라에서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집필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 방송사상 첫 일요연속극인 <청실홍실>은 1956년 12월 2일에 시작하여 다음 해인 1957년 4월 28일
종료되었다. 이 드라마는 ‘나 기사’라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남성을 둘러싸고, 성격은 다르지만 지극히 착한 두 여성이 아기자기한 애정 갈등을 벌이는 멜로드라마였다는 점에서 청취자들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했고, 그것이 전쟁으로 허전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와 닿아 교감을 일으켰던 것이다.
조남사는 1957년 10월, 주간 연속극의 성공을 기반으로 서울중앙방송국이 기획한 매일 연속극에 첫 작품 <산 넘어 바다 건너>를 집필했다. 이 드라마는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저녁 7시 45분부터 15분간 방송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반응이 좋아 20분으로 연장 방송했다.
조남사는 그 후에도 KBS 연속극 <동심초>를 비롯해 <단막극> 등, 여러 형식의 프로그램에도 적극 참여하여 활발한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또한 그는 1961년 12월 서울의 첫 민간 상업방송인 MBC가 개국되자 첫 연속극 <하늘과 땅>를 발표해 장안의 화제를 모으는 등 연이어 시리즈물 작품을 내놓았다.
조남사는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64년 10월 제7회 방송문화상(문예부문)을 수상했다. 직전 수상자는 한운사(韓雲史)이고 그 뒤로는 유호(兪湖)였다. 이 두 원로 작가는 2002년도 제2회 <방송인 사이버 명예의 전당>에 나란히 헌정되었다. 이들 노 작가와 조남사와의 인연은 깊고 각별할 수밖에 없다.
조남사는 1967년 2월부터 1970년 2월까지 한국방송작가협회 4ㆍ5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원로들이 명예직으로 맡는 자리에, 그는 2대에 걸쳐 40대 중반에 방송작가의 대표가 되었다. 그의 전임자는 한운사, 후임자는 이용찬(李容燦)이었다.
조남사는 70년대, 80년대에 들어서 두드러진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다. 이 때 들어서는 매체가 늘어나긴 했지만 후배 작가와 신예들이 대거 등장하여 발표의 공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그의 과작(寡作)은 후진들을 배려하겠다는 생각의 일단으로 보여진다. 조남사는 1980년 6월 TBC-TV(동양텔레비전방송국)에서 방송된 드라마<욕망>을 장편소설로 출간했다. 그는 이 작품집 말미의 <작가의 말>을 통해 “방송극은 전파를 매체로 하기 위한 작품”임을 분명히 하면서 활자화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한국방송작가협회원들은 조남사와 동시대에 함께 활동했던 원로작가 한운사를 묶어 2사(二史)라고 불렀다. 두 사람의 성명 끝자 ‘사(史)’가 같다하여 존칭의 의미를 가미하여 호칭한 것으로 보인다. 한운사는 그를 추모하는 글에서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온다. 그의 특출한 필력이 세상을 웃기고 울린 시대는 ‘조남사의 시대’였다. 그의 마지막이 다소 비참하다는 기분은 갖지만 그것 역시 인생의 한 장면이 아니겠는가.”라고 회고했다.
「한국방송과 50년」의 저자 노정팔(盧正八)은 “조남사씨는 <청실홍실> <산 넘어 바다 건너> 등 연속극 집필의 1번 타자로 드라마의 지위를 끌어올린 공로도 있지만 애정극에서는 단연 돋보이는 작가다. 젊은이들의 심리를 잘 파악해 대사에 실감 있고 드라마 구성에 변화가 많아 멜로드라마의 정석을 달리는 작가”라고 평가한 바 있다. 조남사는 말년에 미국으로 갔었다. 그는 1996년 8월 22일 73세로 별세했다.
(김성호 씀)
|
첫댓글 맞아요. 최초의 라듸오연속극이 '청실홍실' 이라는 것을...56년이면 ...제가 어릴 때군요.ㅎㅎㅎ 감사합니다 구경꾼님..^^*
우리 언니들 세대가 노래방에 가면 부르는 노래....부지런하신 구경꾼님
구경꾼 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자세하게 발췌해주실줄은 .....제가 아직 어릴때 어머님이 흥얼흥얼 입노래부르시며 연속극에 심취하시던 모습이 생각나서 글 에 삽입했었는데 이런 역사를 알려주시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노래도 잘 듣고 갑니다.
흠...난 왜 이노래가 익숙한걸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