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1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하면 주례 사제와 모든 교우는 한 목소리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응답한다. 언제나 감동이다.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미사에 참례한 우리는 모두 한 자녀라고 고백한다. 그 이후 기도문은 이 호칭에 대한 설명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자녀답게 아버지를 온 세상에 자랑하고, 어린 자녀답게 필요한 것을 달라고 아버지께 청하고 보호해달라고 청한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이 산속에서 홀로 기도하실 때 바치시던 기도가 아니다. 예수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청해서 가르쳐주신 기도다(루카 11,1). 그래서 이 기도문 제목은 ‘우리 아버지 Our Father’라고 부르는 게 더 정감 있고 그 기도문 내용을 더 잘 요약하는 거 같다. 예수님과 스승 제자 관계보다 하느님과 딸 아들 관계가 더 친근하고 신성하게 느껴진다. 그러면 예수님이 내 큰오빠, 큰형이라는 고백이 된다(로마 8,29).
이렇게 자녀로서 하느님께 여러 가지를 청하는 중에 우리의 몫이고 또 결심인 게 딱 하나 있다. 용서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한다(마태 6,12). 언뜻 들으면 내가 하는 용서가 내가 용서받기 위한 조건인 거 같다. 그런 거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필요 없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감사와 감동도 없다. 내가 용서한 만큼 용서받고, 내가 노력한 만큼 구원받는 것이 되니 말이다.
용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가장 많이 닮은 부분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고 자비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하느님의 용서, 그분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증언한다. 또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위로고 격려다. 용서는 용서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내가 하느님 자녀, 예수님 형제라는 표지다. 내가 이웃을 용서하면 내가 용서받았고 또 용서받는다는 것을 더 깊이 확신하게 된다. 하느님이 내 안에 살아계심을 체험하게 된다. 하늘에서 내린 비가 증발해서 다시 하늘로 그냥 되돌아가는 게 아니라 땅속으로 들어가 곡식과 과일을 내어주게 하는 거처럼(이사 55,10), 하느님 말씀은 꼭 이루어지고 당신을 믿는 우리를 이롭게 한다. 바로 그 말씀이 예수님이다. 십자고상을 바라보며 우리는 힘을 얻고 용기 내어 용서한다. 예수님이 하셨으니 나도 할 수 있다. 그분은 내 형제고 그분의 피가 내 안에 흐르고 있으니까.
예수님,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길지 모르는 위험과 사고에서 보호해 주십시오. 그런데 그보다 더 지켜달라고 간절히 청하는 것은 주님께 대한 저의 믿음이고 신뢰입니다. 악이 승리하는 거처럼 보이고, 제가 사고를 당하고, 선하게 살아도 상처받고 손해를 보게 되더라도 참 좋으신 하느님이 살아계시며, 그분이 나를 죽도록 사랑하시고, 저는 모든 죄를 용서받으며, 주님 말씀은 모두 진리라는 걸 의심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제 믿음을 지켜주시고 제 발걸음을 아드님께로 인도해 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