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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년(一千年,1000년) 백제왕조(百濟王朝)를 회상(回想)하다 [4편]
2022년 12월 04일
○ ‘21세기(世紀)’, 오늘의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삼류국가(三流國家)로 전락(轉落)해 버렸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국격(國格)”【한 나라의 대외적(對外的)인 품격(品格)】이란 것이 있기는 있었는가? 허긴 바로 “윤석열 정권(政權)” 이전(以前)의 ‘K-국격(國格)’만 해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성가(聲價)를 높였었다. 그러나 지금(只今)은?
오늘의 우리 사회(社會)에서 “국가(國家)는 없었다.”는 말이 또 다시 회자(膾炙)되었고, 국내외(國內外)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며, 조롱(嘲弄)당하는 처지(處地)에 놓이게 되었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언제까지 이등국민(二等國民)으로 손가락질을 당하며, 부끄러움을 달고 살아야 되는 건가?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國民)들 수준(水準)이 정말 이 정도(程度)밖에 안 되는 것이었던가? 그동안 과대평가(過大評價) 되어 있었다는 것일까!
그러나 바로 “윤석열 정권(政權)” 이전(以前)만 하더라도 “K-국격(國格)”은 성가(聲價)를 높이며, 이런 예(例)는 없었다. 기막힌 오늘의 현실(現實)이다.
이러한 현 상황(狀況)을 만든 것은, 두말 할 나위없이 국민(國民)들의 선택(選擇)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잘못된 선택(選擇)의 업보(業報)를 받고 있는 것이다. ‘카메라 영상(映像)’이 생생(生生)하게 살아있음에도 『“대통령(大統領)의 국민(國民)들을 향한 거짓말은, 나는 대한민국(大韓民國) 대통령(大統領)이 아닙니다.”라고 한 것과 무엇이 다른 건가? 국민들을 상대로 말끝마다 반말을 찍찍 해대는 이러한 대통령(大統領)은, 스스로 자신(自身)의 모든 것을 포기(抛棄)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날 이후(以後) 대한민국(大韓民國)엔 대통령(大統領)은 없다. 또한 인정(認定)하지 않는다.』 각설(却說)하고,
○ [제3편]에 이어 [제4편]에서는,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편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 “백제(百濟)”와 관련(關聯)된 것들을 원전(原典) 기록(記錄)과 함께 원문(原文) 내용(內容)에 충실(充實)하게 따르면서 “옛 백제(百濟)”를 회상(回想)해 보기로 하자.
(20)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 “옛 조선왕조(朝鮮王朝) 및 백제(百濟)”에 대해서 다시 설명(說明)해 보기로 하자. 우선(于先),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는 : 역사지리저작(歷史地理著作)으로, 원래(原來)의 이름은, ‘이십일사방여기요(二十一史方輿紀要)’이다. 청(淸)의 ‘고조우(顧祖禹)’가 찬(撰)한 것인데, 130권에 여지요람(輿地要覽) 4권이 붙어있다(附). 『순치(順治) 16년인 1,659년부터 시작해 강희(康熙) 31년인 1,692년에 완성(完成)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을 편찬(編纂)하는데 대량(大量)의 자료(資料)를 참고(參考)하여 만들어졌다.’고 하니, 대단한 역작(力作)이라고 할 만하다.
《讀史方輿紀要 本文 : 朝鮮在遼東都司東千八百里,其地東西二千里,南北四千里 : 조선(朝鮮)은 요동도사(遼東都司) 동(東)쪽 1,800 리(里)에 있다. 그 땅은 동서(東西) 2천리(千里)요, 남북(南北)이 4천리(千里)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 설명(說明)은 :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서도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기록(記錄) 남겨 놓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前提)로 보면 : 『‘반도(半島) 조선왕조(朝鮮王朝)’란 허무맹랑(虛無孟浪)하고,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이야기라고 자신(自信)있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논리(論理)에 따르면 : 반도(半島)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심양(瀋陽) 중심(中心)의 요동(遼東) 땅’에서, 어떤 경우(境遇)를 상정(上程)하더라도, 『동(東)쪽 1,800리에 존재(存在)할 수 없다.』 ‘원전(原典)의 원문(原文)’ 기록(記錄)대로 따르면 :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리(論理)에 따르면 : 요동도사(遼東都司)는, 오늘날의 하남성(河南城)과 산동성(山東省) 경계(境界)쯤에 설치(設置)되어 있어야 하며, 황해(黃海)는 바다(海)가 아닌 육지(陸地)였다.〉는 말과 같다. 곧 『요동도사(遼東都司) 동(東)쪽 1,800리에 조선(朝鮮)이 있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황해(黃海)가 바다(海)가 아닌 육지(陸地)였다고 하면 : “반도(半島)”라는 “삼면(三面)이 바다(海)였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여러 가지 지리적(地理的)인 조건(條件)을 찾아보면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 는 것이다.
‘고조우(顧祖禹)’가 찬(撰)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를 보면 : 수많은 역사서(歷史書)와 지리서(地理書)등을 참고(參考)했다고 하였음을 비춰보면, 『조선왕조(朝鮮王朝) 즉(卽) 고대(古代)의 여러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 땅에 존재(存在)할 수 없다.』 는 결론(結論)에 도달(到達)할 수밖에 없다. 이게 핵심(核心) 줄거리다.
(20) -1) 讀史方輿紀要 百濟 :《晉世高麗略有遼東,百濟亦分據其地,置遼西,晉平二郡.蕭齊永明六年後魏遣兵擊百濟,爲百濟所敗. : 진(晉)【西晉 265년-419년】나라 때에, 고려(高麗:高駒驪)가 요동(遼東)을 경영(經營)하고 있었는데, 백제(百濟) 또한 그 땅을 나누어 웅거(雄據)하고, 요서군(遼西郡)과 진평군(晉平郡) 2 군(郡)을 두었다. 소제(蕭齊) 영명(永明) 6년【488년】에, 후위(後魏)가 병사를 보내어 백제를 쳤으나, 백제에 의해 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
➊ 반도(半島) 백제(百濟) : 역사통설(歷史通說)【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논자(論者)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에 따르면 : ‘백제(百濟)는 한강(漢江)이남(以南) 땅에 있었다.’고 말한다.
백제(百濟)의 북(北)쪽에는 고구려(高駒驪)가 버티고 있었으니, 『요수(遼水)의 동(東)쪽 요동(遼東) 땅은, 고구려(高駒驪)가 차지해 버렸고, “요수(遼水)의 서(西)쪽 땅인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요수(遼水) 서(西)쪽의 땅과 하북성(河北省) 땅을 백제(百濟)가 점거(占據)하고는, 이곳에 요서군(遼西郡)과 진평군(晉平郡) 두개의 군(郡)을 두고, 다스렸다.”』고 한 것이다.
요수(遼水)의 서(西)쪽 “요서(遼西)” 땅은, 천자국(天子國)의 천지(天地)가 아니었던가! 당시(當時)를 말하면 서진(西晉) 때의 사건(事件)이다. 군국제(郡國制)를 표방하는 시대(時代)였음을 감안(勘案)해 보면, 두 개의 군(郡)은, “태수(太守) 즉(卽) 두 명의 왕(王)이 있었다.”는 것이고, “백제(百濟) 왕(王)은, 이들을 다스렸다.” 는 이야기인데, “요서(遼西) 땅은, 반도(半島) 서남(西南)의 본국(本國) 백제(百濟)보다도 그 면적(面積)이 몇 배 더 컸다.”는 것이다.
이게 가능(可能)한 것일까? 대륙(大陸)의 천자국(天子國)과 고구려(高駒驪)의 막강(莫强)한 힘(力)을 어떻게 대처(對處)했느냐? 하는 문제(問題)다. 전함(戰艦)을 동원(動員), 수륙군(水陸軍)을 파견(派遣), 점령(占領)한 것일까?
➨ ‘북로(北虜)’처럼 ‘기마대(騎馬隊)’를 출정(出征)시킨 것일까? 그러나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조선(朝鮮)’편에서는 이르기를 : “조선(朝鮮)은 요동도사(遼東都司) 동쪽 1,800리에 있다”라고 한 것이다. 이곳에 “조선(朝鮮)”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므로, ‘반도(半島)의 한수이남(漢水以南)’이라는 말은, 처음부터 성립(成立)될 수 없다. 본래(本來) 존재(存在)할 수 없다는 뜻이다.
➋ 또 말하기를, 『‘후위(後魏)=북위(北魏)=북로(北虜)’가 ‘백제(百濟)를 침공(侵攻)했으나, 백제에 의해 패하였다.』고 하였는데,
“북로(北虜 : 北魏 : 後魏)”는, 영명(永明) 6년[488년] 이전(以前)에도 백제(百濟)를 침공(侵攻)했으나, 격퇴(擊退)되었다. 이에 전일(前日)의 패배(敗北)를 설욕(雪辱)하고자, 또 다시 영명(永明) 6년[488년]에, “수십만(數十萬) 기(騎)”를 대대적(大大的)으로 출정(出征)시켰으나, 세작(細作)들에 의해 사전(事前)에 이를 간파(看破)한 백제군(百濟軍)은, 침공로(侵攻路) 주변(周邊)에 은밀(隱密)하게 매복(埋伏)하고 있다가 결정적(決定的)인 순간(瞬間), 기습공격(奇襲攻擊)을 감행(敢行)하여, ‘수십만(數十萬) 기마(騎馬)’를 격멸(擊滅)시켰다고 하였다.
반도(半島) 백제(百濟)! 가능키나 한 일인가? ‘반도(半島)백제(百濟)’는, 존재(存在)할 수 없는 가공(架空)된 얘기일 뿐이다.
(20) -2) 讀史方輿紀要 百濟 :《杜佑曰:百濟南接新羅 : 두우(杜佑)가 이르기를, 백제(百濟) 남(南)쪽에 신라(新羅)와 접해있다.》고 하였다.
이 또한 똑같은 이야기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를 찬할 때에 많은 옛 역사서(歷史書)들을 참고(參考)했다면, 백제(百濟)의 남(南)쪽에 “신라(新羅)는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음에도,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의 고조우(顧祖禹)는 말하기를, “두우(杜佑)의 기록(記錄)을 인용(引用)하여, 백제(百濟) 남(南)쪽에 신라(新羅)와 접했다.”라고 한 것이다.
두우(杜佑)의 통전(通典) ‘백제(百濟)’편은,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서 그대로 인용(引用)하였으니, ‘요서(遼西)를 점거(占據), 경영(經營)했다’는 것도 똑같다.
(20) -3) 讀史方輿紀要 休忍國 :《休忍國,在新羅之東,亦二韓之屬.東晉時有休忍國,服屬於燕,苻秦滅燕,遂屬秦.太元四年苻路以龍城叛,徵兵於鮮卑,烏桓,高句麗,百濟,新羅,休忍諸國,是也.後並於百濟. : 휴인국(休忍國)은, 신라(新羅)의 동(東)쪽에 있다. 또한 두 한(韓)에 속해 있었다. 동진(東晉) 때에 휴인국(休忍國)이 있어, 연(燕)에 복속(服屬)되어 있었는데, 부진(苻秦)이 연(燕)을 멸하자, 진(秦)에 속하였다. 태원(太元) 4년 부낙(苻洛)이 용성(龍城)에서 반역할 때, 선비(鮮卑)·오환(烏桓)·고구려(高駒驪)·백제(百濟)·신라(新羅)·휴인(休忍) 등 여러 나라에서 군사를 모집했다고 하였다. 뒤(後)에 백제(百濟)에 병합(倂合)되었다.》고 하였다.
● 위의 원문(原文) 내용(內容)은 :〈명일통지(明一統志),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통감(通鑑), 통지(通志),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동사강목(東史綱目), 해동역사(海東繹史), 소눌집(小訥集)〉 등에, 위의 내용(內容)과 똑같은 내용(內容)이 기록(記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 明一統志, 大淸一統志 : 《古休忍國,在新羅東亦三韓之屬東晉時有休忍國服屬於燕符秦滅燕遂屬秦及符洛以龍城叛徵兵於鮮卑烏桓髙句驪百濟新羅休忍諸國其後并於百濟. : 휴인국(休忍國)은 신라(新羅)의 동(東)쪽에 있으며, 역시 삼한(三韓)의 족속이다. 동진(東晉) 때 연(燕)에 복속하였다가 부진(符秦)이 연(燕)을 멸하자 드디어 진(秦)에 속하였다. 부락(苻洛)이 용성(龍城)에서 반란을 일으킴에 미쳐서 선비(鮮卑)ㆍ오환(烏桓)ㆍ고구려(高句麗)ㆍ백제(百濟)ㆍ신라(新羅)ㆍ휴인(休忍) 등 여러 나라에서 징병하였고, 그 뒤에 백제(百濟)에 병합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記錄)은,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는 : 《靑莊館全書卷之二十六 : 紀年兒覽.下 : 休忍國.明統志云.在新羅東亦三韓之屬.後幷於百濟.晉孝武帝太元庚辰.秦王苻堅.征苻洛時.徵兵於休忍國.》에도 똑같이 기록(記錄)되어 있는데, 이는 明(명)의 통지(通志)를 인용(引用)하여 말한 것이다.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別集 19 歷代典故 : 백제(百濟)의 속국(屬國) : 《休忍國.明統志云在新羅東亦三韓之屬後幷於百濟今未詳其地.晋孝武帝太元庚辰秦王苻堅征苻洛時徵兵於休忍國.》
➨ 동사강목(東史綱目) 부록(附錄) 하 : 《古休忍國,在新羅東亦三韓之屬東晋時有休忍國服屬於燕符秦滅燕遂屬秦及符洛以龍城叛徵兵於鮮卑烏桓髙句驪百濟新羅休忍諸國其後并於百濟.》
➨ 海東繹史 16권 / 세기(世紀) 16 제소국(諸小國) : 《휴인국(休忍國)은 신라의 동쪽에 있으며, 역시 삼한의 족속이다. 동진(東晉) 때 연(燕)에 복속하였다가 부진(符秦)이 연을 멸망시키자 드디어 진(秦)에 속하였다. 부락(苻洛)이 용성(龍城)에서 반란을 일으킴에 미쳐서 선비(鮮卑)ㆍ오환(烏桓)ㆍ고구려(高句麗)ㆍ백제(百濟)ㆍ신라(新羅)ㆍ휴인(休忍) 등 여러 나라에서 징병하였고, 그 뒤에 백제에 병합되었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진(晉) 효무제(晉孝武帝) 태원(太元) 5년(380)에, 진(秦)의 강북장군 유주자사 행당공(江北將軍幽州刺史行唐公) 부락(苻洛)이 스스로 진왕(秦王)이라 칭하면서 사신을 나누어 파견하여 선비(鮮卑)ㆍ오환(烏桓)ㆍ고구려(高駒驪)ㆍ백제(百濟)ㆍ신라(新羅)ㆍ휴인(休忍) 등 여러 나라에서 군사를 징발하였는데, 모두 “우리는 천자를 위하여 번방(藩邦)을 지키고 있으므로 행당공(行唐公)을 따라 역적이 될 수는 없다.” 하였다. [통감(通鑑)] ○ 살펴보건대, 휴인국(休忍國)의 지계(地界)를 지금은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 小訥先生文集卷之二十四 / 雜著 歷代國界攷 : 《休忍國.一統志曰休忍在新羅東.亦三韓之屬.東晉時屬燕.秦滅燕遂屬秦.及苻洛叛.徵兵於鮮卑,烏桓,高句麗,百濟,新羅.休忍諸國其後並於百濟》라고 하였다.
➊ “가장 핵심(核心)이 되는 내용(內容)”은 : 휴인국(休忍國)은, 『신라(新羅)의 동(東)쪽에 있는데, 삼한(三韓)에 속했다. 백제(百濟)에게 병합(倂合)되었다』는 것이다.
역사통설(歷史通說)【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논자(論者)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신라(新羅)는 반도(半島) 동남(東南) 모퉁이 땅에서 천년(千年)을 웅크리고 있었다.」고 하였다.
신라(新羅)의 동(東)쪽은 바다(海)다. 도대체 어디에 “휴인국(休忍國)”이 있었느냐? 수백(數百) 수천(數千)미터 용궁(龍宮)속에 있었다는 말일까? 아니면 오늘날의 열도(列島) 땅이 “휴인국(休忍國)”이었다는 것일까?
또 신라(新羅)의 동(東)쪽에 있는 ‘휴인국(休忍國)’을 백제(百濟)는, 무슨 재주로 병합(倂合)해버렸을까? 수륙특수전부대(水陸特殊戰部隊)를 싣고, 낙하(落下)시켜 전격적(電擊的)으로 병합(倂合)해버렸을까?
『南史 新羅』편을 보면 : 《魏時曰新盧:宋時曰新羅,或曰斯羅.其國小,不能自通使聘.梁普通二年,王姓募名泰,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語言待百濟而後通焉 : 위(魏)때는 사로(斯盧)라고 했고, 송(宋) 때는 신라(新羅)라고 했는데, 혹은 사라(斯羅)라고도 불렀다. 그 나라는 작아, 스스로 예를 갖춰 사신을 보낼 수 없었다. 양(梁) 보통(普通) 2년【AD 521】에, 처음으로 백제(百濟)사신(使臣)을 따라서 방물을 헌상하였는데, 왕(王)의 성(姓)은 모(募)이고, 이름은 태(泰)라고 하였다. 말은 백제(百濟)가 통하고 나서야 통하였다.》라고 했기 때문인데, 여기서 『양(梁 : 武帝) 보통(普通) 2년 : ‘AD 521’년이다.』
【교감기(校勘記)를 참고(參考)해보면 : 〈王姓’募’名’泰’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泰’汲古閣本, 金陵書局本及梁書作’秦’.‘使’ 下從梁書疊一’使’字.〉이라고 하였다.】
이런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은 : 남사(南史)에서 말하는 것을 참고(參考)해보면 : 사라(斯羅) 즉 신라(新羅)는 6세기(世紀) 때도 ‘작은 나라(小國)로 백제(百濟)의 도움을 받아 백제(百濟) 사신(使臣)을 따라 처음으로 통(通)하였다’고 라고 하였으니, 신라(新羅) 동(東)쪽의 “휴인국(休忍國)”을 백제(百濟)가 병합(倂合)해버렸다는 것은, 당시(當時)로서는 당연(當然)한 결과(結果)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백제(百濟)와 신라(新羅)를 반도(半島) 땅에 놓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기록(記錄)이다. 왜냐하면 신라(新羅)는 백제(百濟)의 정동(正東)에 있었고, 또 그 동(東)쪽은 바다(海), 열도(列島) 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歷史的事實)은, 반도(半島) 땅을 ‘옛 조선(朝鮮)의 터전’이라는 이야기 갖고는 일천(一千)년을 연구(硏究)하고, 반도(半島) 땅 모두를 파헤쳐 발굴(發掘)해봐도, 주춧돌 하나 건질 것이 없다.
즉(卽) “반도(半島) 백제(百濟)는, 가공 [架空 : 터무니없다. 근거(根據)가 없다] 된 역사(歷史)얘기일 뿐으로, 존재(存在)할 수 없는 것이다.”
(20) -4) 讀史方輿紀要 流鬼 : 《流鬼東夷也.唐貞觀十四年入貢.去京師萬五千里.其地直黑水鞂鞨東北.少海之北.三面接海.南與拂涅.鞂鞨鄰. : 유귀(流鬼)는 동이(東夷)다. 당(唐) 정관(貞觀)14년에 입공(入貢)했는데, 경사(京師)로부터 15,000리 떨어져 있다. 그 땅은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동북(東北), 소해(少海)의 북(北)쪽으로, 삼면(三面)이 바다(海)와 접했고, 남(南)에는 불녈(拂涅), 말갈(靺鞨)과 인접했다. 東南航海,行十五日乃至.人依島嶼散居,多沮澤.初附百濟,後附新羅. 杜佑曰:流鬼國在北海之北.是也. : 동남(東南)쪽으로 항해(航海), 15일 가면 도달하는데, 사람들은 도서(島嶼)에 의지하여 흩어져 산다. 땅이 낮고 물기가 많아 물풀이 무성(茂盛)하다. 처음 백제(百濟)에 부속(附屬)되었는데, 뒤에는 신라(新羅)에게 부속되었다. 두우(杜佑)가 이르기를, 유귀(流鬼)는, 북해(北海)의 북(北)쪽에 있다. 그렇다(맞다).》고 하였다.
동사강목(東史綱目) 3 상(上) :【안】 ‘통전(通典) 및 당서(唐書)’에 이렇게 적혀 있다. : 《“당나라 정관(貞觀) 14년에 유귀국(流鬼國)이 세 나라의 통역을 거쳐서 당에 조공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북부여의 후예로 고구려에게 멸망되어, 북으로 지루하(池漏河)를 건너가서 산다.’ 하였는데, 지루하는 동북으로 흘러서 흑수(黑水)로 들어가고, 그 나라는 말갈(靺鞨) 동북에 있어, 항해하면 15일 만에 이른다고 한다. 나라에서 북으로 한 달쯤 가면 야차국(夜叉國)이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돼지 같은 이빨로 사람을 문다고 한다.”》고 하였다.
➨ ‘유귀(流鬼)의 설명(說明)’중에서, “백제(百濟)가 반도(半島) 땅에 있었다.” 는 근거(根據)나 증거(證據), 논거(論據) 또는 고증(考證)이 될 수 있는 조건(條件)이 단 하나도 없다.
반대(反對)로, “백제(百濟)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는 것에 대한 증거(證據) 및 증명(證明)할 수 있는, 논거(論據)가 될 수 있는, 고증(考證)할 수가 있는 여러 가지 조건(條件)을 다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➊ 당(唐) 정관(貞觀) 14년(年)이면, 서력(西曆) “640”년이다. 이때의 경사(京師)는 “장안(長安)”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장안(長安)으로부터 15,000리는 어디냐?
㈠ 동북(東北)쪽은, 알라스카(Alaska) 서단(西端) 베링[Bering]해협(海峽)에 닿고,
㈡ 정북(正北)쪽은, 북극해(北極海)에 다다르고,
㈢ 서북(西北)쪽은, 백해(白海), 핀란드(Finland) 등지(等地)에 다다르며,
㈣ 정서(正西)쪽은, 흑해(黑海)에 이른다.
➋ “유귀(流鬼)”가 “경사(京師)로부터 15,000리 먼 곳에 있었다.”는 것이고, 백제(百濟)에 복속(服屬)되어 있었다는 것이 문제(問題)다. 백제(百濟)에 의지하여, 기대며 살았다는 것으로 볼 때, 이는 전형적(典型的)인 속국(屬國)이다. 이로 보면 당시(當時)의 백제(百濟)는, 반도(半島) 땅의 조그만 나라가 아닌 “대국(大國)”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➊에서 본대로 동북(東北)쪽, 정북(正北)쪽, 서북(西北)쪽, 정서(正西)쪽 어떤 방향이든, 장안(長安)으로부터 15,000 리 떨어져 있었다고 하면, 당시(當時)의 백제(百濟)도 “장안(長安) 근교(近郊) 또는 중원(中原) 대륙(大陸)에 있었을 때만이 유귀국(流鬼國)이 백제(百濟)에 복속(服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게 중요(重要)한 팩트(Fact)다.
➨➨➨ 진서(晉書)는, 『당(唐) 태종(太宗)의 명(命)으로 방현령(房玄齡) 등이 AD 644년 편찬(編纂)한 진(晉)의 정사(正史)인데, 제기(帝紀) 10권, 지(志) 20권, 열전(列傳) 70권외에 재기(載記) 30권등 130권이라고 전해진다.』
‘진서(晉書) 마한(馬韓)’편을 보면 : 《韓種有三: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在帶方南,東西以海爲限. : 한(韓)은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마한(馬韓)이고, 두 번째는 진한(辰韓)이고, 세 번째는 변한(弁韓)이다. 진한(辰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東)쪽과 서(西)쪽은 바다로 한계(限界)한다.》고 하였다.
대방(帶方)은 어딘가? 또 그 남쪽은 어딘가? 또 동(東)쪽과 서(西)쪽은 바다로 한계(限界)한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지세(地勢)를 가지고 있는 땅이 “반도(半島) 땅인가?”
● 책부원구(冊府元龜) 956 ‘총서(總序)’에서 말하기를 : 《太康失德夷人始畔【是時夷有九種竹書紀年云夏后泄二十一年命犬夷白夷赤夷𤣥夷風夷陽夷后相二年征黄夷七年于夷來賔少康即位方夷來賔是也】》라고 하였다.
즉(卽) 『하(夏) 태강(太康)이 덕망을 잃자 이인(夷人)들이 처음으로 반하였다』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 『이 때에 이(夷)는 9종류가 있었는데, 죽서기년(竹書紀年)에서 이르기를 : 하(夏) 후설(后泄) 21년에, 견이(犬夷: 畎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 馮夷)·양이(陽夷)를 명(命)하였고, 후상(后相) 2년에 황이(黃夷)를 쳤고, 7년에 우이(于夷)가 왔으며, 소강(小康)때는 방이(方夷)를 왔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구이(九夷)가 반도(半島) 땅에 있었다’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곧 하(夏)나라가 ‘반도(半島) 땅’에 있었다는 말과 같다. 즉(卽) ‘어처구니없는 망발과 다름없다’는 뜻이다.
생각해 보자. 하후씨(夏后氏)라면 기원전(紀元前: BC) 2,207년(年)의 “우(禹)”임금을 말하는 것인데, 4,200년 전(前)의 역사(歷史)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후씨(夏后氏)가 중원(中原)에 뿌리를 내렸고, 토착민(土着民)들이었던 그곳의 구이(九夷)들이 “태강(太康)”이 실덕(失德)하니, 등을 돌리고 반(畔)했다』고 한다면 이는 얼마든지 가능(可能)한 일이요, 이해(理解)될 만한 사건(事件)이 될 수 있다.
그러나 “4,200년 전(前), 대륙(大陸)의 태강(太康)이 덕망(德望)을 잃는 것과 반도(半島) 땅의 구이(九夷)가 뭔 상관(相關)이 있었겠는가!”
이게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한계(限界)다. 4,200년 전(前), 당시(當時)를 억지라도 추측(推測)해 본다면【4,200여 년 전(前)의 삶을 추측(推測)한다는 것 자체(自體)가 가능(可能)한 일이 아니지만】 : “태강(太康)이 실덕(失德)을 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것이 반도(半島) 땅이었을 것이다.”
● 책부원구(冊府元龜) 959 토풍(土風) 1 百濟國 편을 보면 : 《百濟國 [在帶方故地南與倭接]》라고 하였다. 즉(卽), 『백제국(百濟國)은, 대방(帶方)의 옛 땅에 있는데, 남(南)쪽에는 왜(倭)와 접(接)해 있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대방(帶方)의 옛 땅이 어딘가? 또 그곳 대방(帶方)의 옛 땅 남(南)쪽은 어디에 있으며, 그곳에는 왜(倭)가 살고 있었다고 하였는데, ‘도대체 그곳이 어디냐’는 것이다?
대방(帶方)이 황해도(黃海道)인가? 남대방(南帶方)이 남원(南原)인가? 도대체 어디가 “대방(帶方)의 옛 땅인가?”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에 따르면 : 한반도(韓半島) 땅의 한강(漢江)이남(以南) 땅은 “왜(倭)의 땅”이었다는 말과 같고, 이곳에 살고 있는 많은 국민(國民)들은 ‘왜(倭)의 후손(後孫)’들이라는 얘기다.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인가? 허무맹랑(虛無孟浪)한 유언비어(流言蜚語)인가?』
○ “백제(百濟)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 이게 관심(關心)일 뿐이며, 이건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한반도(韓半島) 땅’에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를 꼭 붙들어 매야 하는 이유(理由)는,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사서(史書)에서 숨기기 위한 것이다.』 이게 첫 번째다.
두 번째의 목적(目的)은,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를 반도(半島) 땅에 만들어 놓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된 대륙(大陸) 땅에 중국(中國)의 역사(歷史)를 새롭게 편집(編輯)해 만드는 것이고, 열도(列島) 땅엔 2,600년 황기(皇紀)를 가진 “왜(倭)”가 있었다.』는 것을 증거(證據)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야 만이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천천세국(千千歲國) 즉(卽) 제후(諸侯)의 나라(國)’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륙(大陸) 땅에 한족(漢族)이 없었다면? 열도(列島) 땅에 “왜(倭)”가 없었다면?
‘한족(漢族: 華夏)의 5천년(五千年) 역사(歷史)’와 ‘2,600년 왜(倭) 천황(天皇)의 역사(歷史)’ 이야기는, 허구(虛構)로 판명(判明)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국(中國)이나 일본(日本) 학계(學界)에서는, 『죽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반도(半島) 땅’에 ‘옛 조선왕조(朝鮮王朝)’가 버티고 있었다.』는 줄거리를 만들어야 했다. 학계(學界)에서 그동안 벌어진 모든 것들의 원인(原因)이 바로 이거다.
○ 이걸 간파(看破)하지 못하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반도(半島) 땅의 학계(學界)는, “사학계(死學界)”라는 비난(非難)과 조롱(嘲弄)을 당해도 싸다. 그렇다면 “국민(國民)들은 뭐냐?” 그에 대한 답(答)은, 필자(筆者)로써는 감당(堪當)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된다.
공맹(孔孟)이 어떻고, 조선(朝鮮)의 정치(政治) 체계(體系)가 어떻고, 신하(臣下)와 군주(君主)와의 관계(關係)가 어떻고… …를 백날 떠들어보아야 헛소리에 불과(不過)할 뿐이다. 선조(先祖)들이 살았던 ‘그 땅’이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공맹(孔孟)을 들먹여봤자 뭔 소용이 있겠는가?
인간(人間)의 삶은 자연환경(自然環境)과의 관계(關係)를 빼고는 설명(說明)할 수가 없다. 1만년(萬年)이든 5천년(千年)이든 ‘그 땅’이 어디에 있는 어떤 땅이었는가에 따라 조선(朝鮮) 백성(百姓)들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북조(北朝)와 남조(南朝), 서방(西方)과 동방(東方) 땅의 삶이 같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理致)다.
어디에 있는 어떤 땅인지조차 모르면서 어떻게 1만년(萬年) 조선(朝鮮) 백성(百姓)들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 하는 아주 기초적(基礎的)인 질문(質問)이다. 백의민족(白衣民族)이니, 단일민족(單一民族)이니, 배달민족(倍達民族)이니 하는 웃기는 이야기는, 모두가 목적(目的)을 가진 자(者)들에 의해 만들어진 얘기일 뿐이다. 이걸 반도(半島) 땅에 살고 있는 국민(國民)들은 모른다? 참 답답한 이야기다.
➨ 이러다보니 “국민(國民)들이 직접(直接) 선출(選出)한 지도자(指導者)”란 자(者)가 “방송카메라”에 생생(生生)하게 담겨져 있는 뻔뻔한 말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거나 기억에 없다거나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식(式)으로 국민(國民)들을 거짓말로 우롱(愚弄)하며,
하는 짓마다 거짓말[公約不履行]과 뻔뻔함으로 국민(國民)들을 무지몽매(無知蒙昧)한 “개돼지”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국민(國民)들이 “개돼지”라면, 자신(自身) 또한 “개돼지”라고 자폭(自爆)한 것이다.
또 “월북(越北)이냐? 극단적(極端的) 선택(選擇)이냐? 실족(失足)이냐?” 하는 등의 많은 의문(疑問)과 함께 북한군(北韓軍)에 의해 살해(殺害)되었다고 전해지는 “그 사건”의 진실(眞實)은 현재(現在)까지의 언론보도(言論報道)등으로 보면 : ‘누구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정권(政權)이 바뀌자 갑자기 해당(該當) 부처(部處)의 사건(事件) 결과(結果)가 처음과는 다르게 어처구니없게, 바뀌어 “이 사건(事件)”이 정치적(政治的) 쟁점(爭點)으로 변해버렸는데, “이건 정치보복(政治報復)이 확실(確實)하다.”
『확증(確證), 증거(證據)가 없는 상태(狀態)에서, 어떻게 같은 부처(部處)에서 정권(政權)이 바뀌었다고 결과(結果)가 다르게 발표(發表)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건 정치보복(政治報復)의 전형적(典型的)인 예(例)다.
그렇다면 “윤석열 정권(政權)”하에서 158명의 국민(國民)들이 억울하게 희생(犧牲)된 사건(事件)의 책임(責任)은 누구질 것인가?
➨ 단 한 명(名)의 “월북(越北)이냐? 극단적(極端的) 선택(選擇)이냐? 실족(失足)이냐?” 하는 사건(事件)에서 지금까지의 호들갑을 보면, “검찰(檢察)을 총동원(總動員)하여 수사(搜査)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 158명이 희생(犧牲)된 “이태원 참사(慘事)”는 “윤석열 대통령(大統領)이하 국무총리(國務總理). 행안부(行安部) 장관(長官), 경찰청장(警察廳長)등 대부분(大部分)이 일괄(一括) 사표(辭表)를 내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함은 물론(勿論)이며, 모조리 사형대(死刑臺)에 선다 해도 그 책임을 모면(謀免)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엄청난 참사(慘事)였다는 말이다. 누가 책임을 졌는가? ‘웃기는, 코메디’같은 오늘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정치현실(政治現實)이다.
헌데, 지금 “윤석열 정권(政權)”은 뭐하고 있냐? 취임한지가 언제인데, 도대체 뭔 짓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온갖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월북(越北)이냐? 극단적(極端的) 선택(選擇)이냐? 실족(失足)이냐? 아니면 또 다른 미스테리냐?』하는 것, 무엇하나 밝혀낸 것도 없다. 지금 뭐하냐?
오늘의 정치사(政治史)는, 곧 역사(歷史)의 한 페이지를 장식(裝飾)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의 정치사(政治史)가 중요(重要)한 것이고, 정권(政權)의 운명(運命)을 가르는 것이다.
이래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정통성(正統性)이 없다”는 말이 지속적(持續的)으로 회자(膾炙)되며, 정권(政權)의 ‘레임덕’을 앞당기고 있는 것이다.
⑴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후국(後國)인가? 반대(反對)로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선대국(先代國)인가?
⑵ ‘서세(西勢)와 일제(日帝)와 서남방세력(西南方勢力)’등에 의해 식민지(植民地) 시대를 청산(淸算)하면서 새롭게 만들어진 신생국(新生國)인가?
이 나라의 정체(正體)가 무엇이냐? 이 나라가 세워지게 된 진정(眞定)한 동기(動機)가 무엇이냐? 하는 점을 누구도 궁금해 하는 분이 없다는 것 또한 이해불가(理解不可)한 점이다. 2022년 12월 04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옛 백제왕조와 관계되는 역사서의 기록들은 같은 내용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 하나 걸러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중첩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많은 분들이 접해 본 내용들은 빼버렸습니다.
"백제는 반도에 없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며, 반도백제란 만들어진, 조작되어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다라는 것인데, 이것은 오늘날의 반도 땅에서 백제와 관련된 유물유적이 발굴되지 않는 것 또한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1000년 왕조가 그 조그마한 땅에서 이어져왔다면, 땅만 파면 나오는 것이 유물유적이라 그 처리에도 골치덩어리일 것이 분명하지만, 단 하나의 확실한 증거될만한 것도 없다는 점이 바로 "반도백제는 없었다"라는 확신으로 작용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내용이 너무 길어지면 식상해지기 마련, 4편으로 마무리를 했습니다.
다음 게재내용은 "글란"의 시원지에 대해 여러 사서의 기록을 참고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한강이남'으로부터,
충청도, 전라도 땅을 모조리 파헤쳐보아라!
그곳에서 옛 백제왕조의 무덤 단 한곳이라도 나오는가 말이다?
택국(澤國)이라는 별칭은 무엇을 말하며,
남조(南朝)란 말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 건가?
이 정도도 생각하지 못하는, 이해하지 못하는 학자들은, 스스로 '死學者'임을 실토하는 것이다. 학자라는 말 자체가 부끄럽다는 뜻이다.
똑같은 경우다.
경상도 땅을 모조리 파헤챠봐도, 경상도민들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옛 니라, 신라의 유물유적들은 나올 수가 없다.
그 땅이, 그 땅이 아님을 왜 인정하지 못하는가?
언제까지 식민사관 논자들의 휘둘림에 놀아나기만 할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