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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야드 위성의 개발 역사와 관련된 글입니다. 결국 실패로 돌아갔는데, 이만한 프로그램을 단순 갭을 채우기 위해 추진하고, 실패해도 관계자가 "이거 실패할 줄 알았어. 그래서 다음 계획에 집중했지."라고 말할 수 있는 거엔 참 냉전의 기상이 느껴지네요.
레몬으로 쓴 레모네이드를 만들다: 사모스 E-5에서 LANYARD 정찰위성으로 (2부)
드웨인 A. 데이
2026년 8월 10일 월요일
세 개의 고체로켓 모터를 추가한 개량형 토르 로켓의 예술가 상상도. 1963년 무렵 토르는 이미 주력 발사체가 되었고, LANYARD 위성은 이 로켓이 제공하는 더 큰 추력을 필요로 했다. (출처: Douglas Aircraft)
1962년 초 Samos E-5 정찰위성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그 장비를 비공개 프로그램, 즉 존재 자체가 공개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프로그램으로 이전하려면 어느 정도의 관료적 눈속임이 필요했다. 당시 록히드는 Itek의 E-5 카메라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에 NRO는 Itek이 록히드로부터 장비를 ‘다시 사들이는’ 형식을 마련했다. 실제로는 NRO가 그 비용을 지급했으며, 그 돈은 록히드가 LANYARD 작업을 시작하면서 받은 최초의 대금이기도 했다.[1]
잭 허더가 E-5를 재설계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무엇을 먼저 바꿔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E-5는 카메라 전체가 대형 재진입체 내부에 들어가도록 설계돼 있었다. 이 재진입체는 더 작은 CORONA 카메라에 Itek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탑재중량과 내부 공간을 제공했기 때문에 Samos E-5 카메라는 더 크고 강력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E-5 재진입 캡슐의 특성은 카메라에 다른 설계상의 제약을 부과했고, 이는 성능을 떨어뜨렸다. 허더는 이를 바로잡고자 했다.
LANYARD 우주선 내부. 이 그림에서 우주선 후방부는 영상 반사 거울을 강조하기 위해 측면에서 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출처: NRO)
E-5 카메라는 재진입체 내부에 있었기 때문에, 캡슐이 재진입 도중 회전하지 않도록 카메라의 무거운 부품을 열차폐판 가까이에 배치해야 했다. 이 때문에 대형 필름 공급 릴과 회수 릴은 카메라 운용에 더 적합한 위치가 아니라, 마치 통 안에 동전을 쌓아놓은 것처럼 열차폐판 바로 옆에 나란히 놓여야 했다. 릴의 회전축은 우주선의 롤축과 같았다. 카메라가 작동하기 시작할 때마다 매우 무거운 ‘도넛’ 형태의 필름 릴이 회전하기 시작했고, 가장 무거운 릴이 도는 반대 방향으로 우주선을 굴리려는 힘이 생겼다. 카메라에는 릴의 운동량을 상쇄하기 위한 균형장치가 설계돼 있었지만, 움직임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다. 남은 운동량은 감쇠시켜야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사진이 흐려졌다. 허더는 이 문제가 Samos E-5에서 완전히 해결된 적이 없었으며, 만약 E-5가 실제로 완전한 운용 단계에 들어갔다면 카메라 성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2]
“잭 허더가 E-5를 재설계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무엇을 먼저 바꿔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LANYARD를 설계하면서 허더는 E-5의 매우 큰 필름 릴을 없애고 더 작은 릴을 설치했다. 릴은 비행 방향과 우주선의 장축에 평행하도록 배치됐다. 이 릴들이 회전하기 시작하면 그 관성은 우주선의 요축에 작용하게 되는데, 무거운 우주선은 롤시키는 것보다 요시키기가 더 어려웠기 때문에 기체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작았다. 또한 Samos E-5가 무려 250파운드(113킬로그램)의 필름을 탑재했던 것과 달리, LANYARD는 75파운드(34킬로그램)만 탑재하도록 했다. 이는 당초 예상했던 40파운드보다는 늘어난 양이었다.[3]
Samos E-5는 기수에 영상 반사 거울을 달고 그 뒤에 파노라마 카메라를 배치했으며, 필름 공급 릴과 회수 릴은 우주선 하단의 열차폐판 근처에 있었다. 회수를 위해 거울은 투기했고, 무거운 렌즈 조립체는 무게중심을 낮추기 위해 아래쪽으로 당겨내렸다. 이 구조를 훨씬 단순한 LANYARD 설계와 비교해볼 수 있다. (출처: NRO)
Samos E-5에는 또 다른 요구조건이 있었다. 촬영 단계가 끝난 뒤 무거운 렌즈 조립체를 열차폐판 쪽으로 끌어내려 캡슐이 회전하지 않고 재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특수 장치가 필요했다. Itek 기술자들은 이 장치를 부품을 구입했던 일반 철물점 이름을 따서 ‘멘델슨 개조(Mendelson Mod)’라고 불렀다. 이제 임무가 끝나면 카메라 자체를 버릴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 장치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대형 재진입체를 없애고 CORONA에서 이미 검증된 부품을 사용하는 새로운 재진입체를 채택하면서, 다른 불필요한 체계도 제거할 수 있었다. Samos E-5는 원래 군 우주비행사를 태울 수 있는 우주선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가압식으로 설계돼 있었다. E-5 정찰우주선 내부는 0.5기압의 질소로 가압됐다. CORONA는 이미 진공 상태에서 작동한 경험이 있었고, LANYARD도 같은 폴리에스터 기반 필름을 사용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역시 진공에서 운용할 수 있었다. E-5 캡슐은 가압돼 있었기 때문에 카메라가 외부를 보기 위해 광학적으로 순수한 석영창이 필요했다. 가압 요구조건이 사라지자 카메라는 더 이상 석영창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제 카메라는 우주선의 지구 방향 면에 난 개구부를 통해 밖을 바라봤으며, 이 개구부는 발사 후 투기되는 덮개로 보호됐다.
E-5 카메라는 캡슐 안에서 길이 방향으로, 즉 지표면과 평행하게 설치돼 있었다. 압력용기 바깥쪽 기수에는 지상의 영상을 렌즈 조립체로 반사시키는 대형 거울이 있었다. 이 거울은 너무 무거워 회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임무가 끝나면 버렸다. 그러나 LANYARD는 CORONA 재진입체를 사용할 예정이었고, 이 재진입체는 로켓의 기수에 위치해야 했다. 필름 경로를 단순화하기 위해 허더는 카메라 전체의 방향을 뒤집어 후방을 바라보게 하고, 거울을 우주선 내부에 설치했다. 그 결과 거울은 임무 종료 시 따로 투기할 필요가 없어졌다. 대신 거울을 포함한 카메라 전체가 버려져 대기권에서 소각되도록 했다.
KH-6 LANYARD 카메라 체계. 필름 릴과 영상 반사 거울이 보인다. 필름 공급 릴은 카메라 옆에 있었으며, 필름 회수 릴은 우주선 전방의 재진입체 내부에 설치됐다. 이 사진들은 우주선에서 지구를 향하는 면을 보여준다. (출처: NRO)
더 작은 필름 릴과 새로운 릴 배치를 적용하면서 허더와 그의 기술팀은 카메라 내부의 필름 경로도 크게 단순화할 수 있었다. E-5의 필름은 노출 시 필름이 놓이는 곡면인 플래튼으로 이동하기 전에 한 번 비틀려야 했고, 이후 회수 릴로 이동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비틀려야 했다. 카메라 설계자들은 필름에 가해지는 응력을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응력이 커질수록 필름이 끊어지거나 궤도를 벗어나거나, 응력 자국 또는 정전기 방전 자국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LANYARD 설계에서는 필름이 공급 릴에서 풀려나와 몇 개의 롤러를 지나 플래튼까지 전혀 비틀리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이후 플래튼을 지난 필름은 역시 비틀림 없이 앞쪽의 재진입체 내 회수 릴로 향했다. 카메라 내부를 통과하는 필름 경로가 단순하고 직선적으로 바뀌면서 필름에 가해지는 응력이 줄고 신뢰성은 높아졌다.
LANYARD는 이전 Samos E-5와 비교해 카메라의 방향을 반대로 돌렸다. 그 결과 재진입체는 우주선 전방에, 영상 반사 거울은 후방에 위치했다. 카메라를 통과하는 필름 경로는 비교적 단순했고, 이는 신뢰성을 높였다. (출처: NRO)
LANYARD 카메라에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큰 변경이 있었다. 움직이는 영상 반사 거울을 경량 설계로 교체한 것이다. 영상 반사 거울은 단 하나의 카메라만으로 입체사진을 촬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용됐다. 거울은 지표면을 렌즈 조립체로 반사했으며, 먼저 전방 15도 위치에 고정해 16프레임을 한 ‘버스트’로 촬영한 다음, 후방 15도로 움직여 다시 16프레임을 촬영했다. Itek 팀은 Samos E-5용으로 이 거울과 지지대를 개발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신장 모양의 거울은 통짜 석영을 깎아 만들었고 무게는 무려 150파운드(68킬로그램)에 달했다. LANYARD는 이런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Itek 팀은 E-5의 거울을 완전히 새로 설계해야 했다.
LANYARD가 단 하나의 카메라로 목표물의 입체사진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사진군을 촬영할 때 영상 반사 거울을 한 각도로 두고, 두 번째 사진군을 촬영할 때는 다른 각도로 회전시켰다. 이 방식은 위성이 상공을 지나가는 동안 연속적으로 촬영할 수 있는 지상 범위를 제한했다. (출처: NRO)
이전의 Samos E-5 거울을 개발하면서 Itek은 대형 광학급 거울을 설계하고 제작하는 기술을 익혔다. 허더에 따르면 LANYARD는 회사를 그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밀어붙였다.
“우리는 그 크기의 거울을 가볍게 만들고 장착하는 방법에 관한 기술 개발을 해야 했습니다. 속을 파낸 석영유리도 써봤고, 서빗도 써봤고, 베릴륨에 카니젠 코팅을 한 것도 써봤습니다. 알루미늄도 써봤고, 달걀판 구조의 석영과 뒤쪽 지지대도 시험했습니다. 그리고 거울을 구면 방향이나 열적으로 변형시키지 않으면서 장착하는 방법도 연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완전히 하나의 기술개발 사업이 진행됐죠… 우리는 그냥 그 크기의 거울이라는 분야에 뛰어든 셈이었습니다.”라고 그는 회상했다.[4]
“정부 담당자가 거울 하나를 깨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거 제가 가져가도 됩니까? 커피 테이블로 만들고 싶습니다’라고 했죠. 담당자는 ‘그러시오’라고 했습니다.”라고 허더는 회상했다.
결국 이들은 베릴륨으로 원형 거울을 만들고, 광학적 허용오차 수준까지 연마할 수 있는 카니젠(Kanigen)이라는 니켈 합금으로 표면을 코팅했다. 베릴륨은 독성이 있기 때문에 제작 과정에서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그런 베릴륨을 다룰 수 있는 곳에서 가공해야 했습니다.”라고 허더는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카니젠 코팅이라고 부르던 방식으로 담금 코팅했습니다. 그다음 광학 가공 기술자들이 카니젠을 연마했죠. 정말 매끄러운 표면을 만들기 위해 카니젠을 약 16분의 1인치 정도 두께로 입혔습니다.”[5]
카니젠을 코팅한 베릴륨 거울의 무게는 40파운드(18킬로그램)에 불과했다. 원래 E-5 석영 거울 무게의 3분의 1도 되지 않았다.[6]
영상 반사 거울은 아래쪽에서 들어오는 빛을 카메라 조립체로 향하게 했다. Itek은 LANYARD 우주선에 최종적으로 채택된 설계에 도달하기까지 여러 재료와 구조를 시험했다. 완성된 거울은 Samos E-5의 거울보다 훨씬 가벼웠다. 거울에는 렌즈 조립체가 반사돼 보인다. (출처: NRO)
“아이러니하게도,” 허더는 회상했다. “프로그램이 취소된 뒤 렌즈를 비롯한 것들을 부수고 있었는데, 그 렌즈 가운데 하나가 우리 과학박물관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E-5 렌즈 하나를 직접 봤죠.”
남아 있던 또 다른 E-5 거울은 훨씬 더 특이한 운명을 맞았다. 커피 테이블이 된 것이다.
“정부 담당자가 거울 하나를 깨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거 제가 가져가도 됩니까? 커피 테이블로 만들고 싶습니다’라고 했죠. 담당자는 ‘그러시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연마하기 전 소재만 해도 3만 달러를 줬습니다. 연마까지 마치면 엄청난 가치가 있었죠…”
허더는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걸 커피 테이블로 쓰고 있었습니다.”[7]
LANYARD 카메라와 그 전신 E-5가 무게를 줄인 방법은 또 하나 있었다. CORONA 카메라는 렌즈 조립체와 셔터를 연결하는 스캔 암을 가지고 있었는데, 셔터가 필름 위를 휩쓸며 이동할 때 각각의 스캔에서 발생하는 관성을 크게 줄이는 역할을 했다. E-5에서 사용했고 LANYARD에도 이어서 적용한 한 가지 기능 덕분에 스캔 암은 필요하지 않게 됐다.
“작은 틈이 난 얇은 커튼 같은 것이 지나가고, 작은 서보가 렌즈를 따라갔습니다.”라고 허더는 회상했다. “스캔 암은 없었고, 틈이 하나 난 얇은 금속 조각만 있었습니다. 거기에 변기 뚜껑 같은 덮개가 있었죠.”[8]
LANYARD는 CORONA 우주선용으로 개발돼 이미 검증된 많은 체계를 사용했다. (출처: Giuseppe Di Chiara)
카메라 전체 무게는 610파운드(277킬로그램)였고, 필름 공급 카세트는 15파운드(7킬로그램), 여기에 75파운드(34킬로그램)의 필름이 들어갔다. LANYARD에는 Itek이 CORONA용으로 개발했던 것과 같은 형태의 항성 인덱스 카메라도 탑재됐다.[9]
항성 인덱스 카메라는 넓은 지역을 낮은 해상도로 촬영했다. 사진판독관들은 이 사진에 나타난 지형 특징을 고해상도 사진과 비교해 고해상도 영상이 어느 지역을 촬영한 것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파노라마 영상 10장마다 인덱스 영상 한 장을 촬영했다. 동시에 별의 위치도 촬영해 우주선의 위치를 결정했다.
완성된 우주선은 Samos E-5와 비교하면 상당히 많은 요소가 제거됐고 훨씬 단순해졌다. E-5의 주요 하위체계 가운데 10개가 LANYARD에 사용됐고, 7개는 제거됐으며, 5개는 크게 단순화됐다.
비틀림을 더한 파노라마
이러한 모든 변경을 통해 카메라 체계의 성능은 최대 40% 이상 향상될 수 있었다. Itek 기술자들은 위성이 3~5피트(0.9~1.5미터) 해상도의 영상을 촬영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으며, 비행 전 실제 카메라를 대상으로 실시한 실험실 시험에서는 정상 궤도에서 평균 지상해상도가 약 3.5피트(1미터)인 것으로 나타났다.[12] 그 밖에도 개선된 점이 있었다. 위성의 궤도 운용 수명은 4일이었으며, 서로 다른 다섯 개의 표적 프로그램을 체계에 입력할 수 있어 궤도상에서 서로 다른 표적을 촬영하고, 구름에 가려진 지역의 촬영을 피할 수도 있었다.[13]
LANYARD가 지상을 볼 수 있는 범위는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시야각은 22도였으며, 이에 따라 폭 42.3해리, 길이 7.5해리(78×14킬로미터)의 촬영 구역이 만들어졌다.[14] E-5는 비행 중 좌우 어느 방향으로든 30도까지 롤해 카메라가 지상궤적 양옆을 바라볼 수 있었다. LANYARD에서는 록히드 기술자들이 Agena 전방에 롤 조인트를 설치하고 그 위에 탑재체를 장착해 같은 기능을 구현했다. 이로써 전체 탑재체를 수직 아래 방향을 기준으로 좌우 어느 쪽이든 15도 단위로 최대 30도까지 기울일 수 있었는데, 어느 정도 잠수함의 잠망경과 비슷한 방식이었다.
이러한 궤도 바깥쪽 촬영 능력은 카메라가 지구를 수직으로 내려다보는 대신 비스듬한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므로 사진을 약간 왜곡시켰다. 각 필름 스트립 영상에서 먼 쪽은 가까운 쪽보다 넓어졌으며, 사진의 한 지점에서 1제곱센티미터가 나타내는 지상 면적과 다른 지점에서 1제곱센티미터가 나타내는 지상 면적도 같지 않았다. 그러나 롤 능력은 전체 관측 각도를 60도 늘려 LANYARD가 비행경로 아래의 더 넓은 지역을 잠재적으로 촬영할 수 있게 했다. 다만 필름상에서 카메라 자체의 최대 시야각은 여전히 22도로 제한됐다.
설계자들은 또 하나의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카메라가 움직이면 카메라 내부의 영상도 함께 움직인다.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 옆 창문을 통해 촬영한 사진이 흐릿하게 나오는 이유도 이것이다. 선명한 사진을 찍으려면 카메라가 이러한 영상 이동을 보정해야 한다. 그런데 LANYARD에는 새로운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더 높은 해상도의 영상을 촬영했고, 여기에 필름 감도 같은 다른 카메라 특성이 결합되면서 우주선 아래에서 회전하는 지구 자체의 움직임 역시 어느 정도 영상 흐림을 발생시킬 수 있었다.
록히드 관계자들은 이 영향을 줄이기 위해 촬영 중 우주선을 요 방향으로 회전시키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문제는 우주선을 명령하는 지상 관제요원들이 그 우주선이 실제로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있는 보안인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프로그램 관계자들은 관제요원들이 이러한 움직임이 촬영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기체가 정찰위성이라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위성 추적소 인력에게 추가 보안인가를 부여해야 했으며, 이는 “가능한 모든 추측의 여지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15]
프로그램 관계자들이 결국 어떤 해결책을 채택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사례는 극도로 비밀스러운 정찰 세계의 때때로 기묘한 규칙을 잘 보여준다. 심지어 정찰위성을 직접 운용하는 사람들조차 그 위성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알아서는 안 되는 경우가 있었다.
비행 준비
작업명세서에 따르면 록히드는 첫 번째 완성형 LANYARD를 1963년 2월까지, 두 번째와 세 번째 기체를 4월까지, 나머지 두 기체는 이후 매달 한 기씩 납품해야 했다.[16] 당초 예상보다는 늦어진 일정이었지만 여전히 빠른 편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정찰위성 프로그램이 이미 본격적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미 공군은 캘리포니아 중부 해안의 밴덴버그 공군기지 발사시설에서 매달 약 한 기의 CORONA 또는 ARGON 지도제작 위성을 정기적으로 발사하고 있었다.[17]
여러 정부 관계자와 계약업체 대표들은 1962년 10월 19일 ‘LANYARD 시스템 엔지니어링 회의’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시험 절차 등을 포함해 전체 카메라 체계의 상태를 평가했다. 그들은 LANYARD 전자장비가 Agena에서 분리될 예정이던 소형 부위성과 무선주파수 간섭을 일으키는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찾아냈다.[18] 록히드 기술자들은 카메라 스캔을 위해 필요한 대형 개구부에 대해 우려했고, 개구부를 가로지르는 문 지지대를 설치할 경우 영상 품질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시험해달라고 요청했다. 가능한 가장 작은 지지대조차 영상 품질을 10% 저하시킬 것으로 나타났으며,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채택되지 않았다.
“첫 번째 LANYARD가 발사체의 불운을 피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Itek의 잭 카터는 1964년에 사용할 카메라 여섯 대를 추가로 구매할 것을 제안했다. 남아 있는 기록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지만, NRO 국장 조지프 차릭은 1963년용으로 두 대를 추가했던 것으로 보이며, 전체 주문량은 다섯 대로 제한했다. 1962년 10월 차릭은 1964년 1월, 2월, 3월 발사를 위한 LANYARD 탑재체 세 개를 추가로 승인했다. 이는 GAMBIT이 계획대로 작동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한 또 하나의 안전장치였다. 당시 Itek은 추가로 아홉 개 체계에 사용할 광학유리를 구매할 권한도 부여받았다.[19]
1962년 말에는 항성 인덱스 카메라에 훨씬 더 많은 필름을 탑재하기로 결정하면서 설계를 변경해야 했기 때문에 일정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 항성 인덱스 카메라는 LANYARD의 주 카메라 운용에 필수적이었다. CORONA 체계와 달리 주 카메라가 작동할 때 어느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별을 촬영하는 별도의 카메라가 없었기 때문이다.[20]
첫 번째 LANYARD 카메라는 1962년 11월 21일 Itek이 납품했으며, 예정일보다 하루 빨랐고 예산도 상당히 절감됐다.[21] 발사는 2월로 예정돼 있었지만 3월로 연기됐다.[22]
1월 31일 Itek은 첫 비행용으로 예정됐던 베릴륨 거울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통보하고, 시험 단계에서 우주선에 탑재돼 있던 알루미늄 거울을 그대로 비행에 사용하는 방안을 권고했다. 록히드 기술자들은 이를 거부했고, 결국 Itek은 후속 우주선에 사용할 예정이던 두 번째 베릴륨 거울을 첫 번째 기체에 사용하도록 보냈다.[23]
첫 번째 기체의 열진공 시험은 2월까지 연기됐으며, 이후 시험 도중 연이어 문제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기체 인수가 지연됐고, NRO 지도부는 2월 말 최초의 추력증강형 토르-아제나(Thrust-Augmented Thor Agena) 발사에는 LANYARD 대신 CORONA 위성 탑재체를 싣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한 기술자가 엄빌리컬 커넥터를 충분히 깊게 밀어 넣지 않는 바람에 TAT의 고체로켓 모터 세 기 가운데 하나가 점화되지 않았고, CORONA 위성은 소실됐다. 첫 번째 LANYARD가 발사체의 불운을 피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24]
1963년 3월 밴덴버그 공군기지에서 최초의 LANYARD가 발사됐지만 발사체가 실패해 태평양으로 추락했다. 1963년 5월의 발사는 더 성공적이었지만 우주선이 궤도에서 고장 났다. LANYARD 재진입체는 회수됐지만 내부에는 필름이 없었다. (출처: Peter Hunter Collection)
최초의 임무들
모든 기밀 정찰 프로젝트에는 여러 개의 명칭이 붙었다. 프로그램 전체의 암호명은 LANYARD였다. 이는 ‘BYEMAN’ 보안체계상의 암호명이었다. BYEMAN은 일부 정보위성에 적용되는 최고기밀보다 높은 특정 보안등급이었다. 모든 정보위성이 BYEMAN 암호명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미 공군의 ‘프로그램’ 번호만 가졌고, 일부는 두 종류 모두를 가졌다. LANYARD에는 공군 프로그램 번호는 없었지만 KH-6라는 명칭도 부여됐다. 이는 ‘KEYHOLE’ 계열에서의 순번이었다. ‘KEYHOLE’은 사진을 열람할 보안인가를 받은 사람들을 위해 사진정찰위성에 적용된 보안 명칭이었다.
Itek 내부에서 LANYARD 사업은 프로그램 9040으로 불렸으며, CIA는 해당 카메라 모델을 ‘마크 1 파노라마 카메라 시스템’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25] 각 LANYARD 카메라에는 고유한 일련번호가 있었으며, 물론 토르 로켓과 Agena에도 각각 식별번호가 있었다. 밴덴버그 발사에도 별도의 명칭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탑재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발사요원들도 해당 발사를 지칭할 수 있었다. 최초의 LANYARD 발사는 ‘CAMP OUT’이라는 명칭을 받았다.
정찰 임무 자체는 8001로 지정됐다. 당시 KH-4A CORONA 임무는 9000번대 번호를 사용했으며, 이 번호에 ‘A’가 붙으면 ARGON 지도제작 임무를 뜻했다.
LANYARD 임무 8001에는 ‘Hitchhiker’라는 별명을 가진 소형 P-11 부위성도 포함돼 있었으며, 궤도상에서 방사선과 기타 측정을 수행하도록 설계됐다. P-11은 곧 신호정보 임무용으로 개조됐으며, 이후 수십 기가 광범위한 신호정보 프로그램의 일부로 비행했다.[26] (The Space Review, 2021년 8월 2일, 「Little Wizards: Signals intelligence satellites during the Cold War」 참조.)
첫 번째 LANYARD 임무는 주로 공학시험 비행이었고, 겨울철 태양 각도 때문에 소련 상공에서는 하강 궤도, 즉 북쪽에서 남쪽으로 지나가는 경로에서만 촬영할 수 있었다. 따라서 첫 번째 임무에서는 잠재적인 225개 표적 가운데 106개만 촬영하도록 계획됐다.[27]
1963년 3월 18일, 프로그램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지 불과 11개월 만에 첫 번째 LANYARD가 밴덴버그 공군기지 발사대에서 굉음을 내며 이륙했다. 더 강력한 TAT-Agena D 로켓을 사용한 두 번째 발사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기계통 고장으로 궤도 투입 도중 Agena의 자세 안정화를 제어하는 가스 밸브가 불과 1초 동안만 작동했다. 자세제어를 잃은 Agena는 롤하기 시작했다. 이후 엔진은 예정 시점보다 13초 일찍 연소를 중단했는데, 기체가 회전하면서 연료가 연소실까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됐다. 결국 기체는 궤도 진입에 실패했다.[28]
정확히 두 달 뒤인 1963년 5월 18일, LANYARD 임무 8002가 TAT-Agena D의 굉음과 함께 밴덴버그 발사대에서 시작됐다. 이번 임무에는 부위성이 탑재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Agena가 궤도에 진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곧 고장 났고, 카메라 탑재체는 한 번도 작동하지 못했다.[29]
두 번째 LANYARD 임무에서는 Agena의 ‘구명정(Lifeboat)’ 체계를 이용해 위성 회수체를 분리했다. 이 체계는 주 지휘회로와 독립돼 있었으며 자체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캡슐은 바다에서 회수됐지만 내부에는 필름이 들어 있지 않았다.[30]
P-카메라 실험
1963년 4월, 중앙정보국장 존 매콘은 NRO 국장 맥밀런에게 “GAMBIT 체계의 성공 여부가 상당히 불확실하기 때문에” 1963년 8월부터 1964년 8월까지의 기간을 보완하기 위해 LANYARD를 추가 구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썼다. 1963년 5월 24일 LANYARD 프로그램은 추가 탑재체 다섯 개를 포함하도록 확대됐다. 당시 원래 다섯 개 가운데 세 개가 남아 있었고, 별도로 승인된 예비체 세 개도 있었다.[31]
매콘은 소련에 대한 더 높은 해상도의 영상을 확보하는 문제를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LANYARD 발사가 실패한 뒤인 1963년 4월, 매콘은 보스턴으로 날아가 하버드대의 에드워드 M. 퍼셀 박사에게 정찰위성의 미래와 영상 성능 개선 방안을 검토하는 위원회의 의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매콘은 레닌그라드에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탄도탄요격미사일 시설의 영상을 확보할 필요성도 언급했다. 퍼셀은 영상을 신속히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했다. 레닌그라드 시설을 특별히 촬영하기 위해 CORONA 위성에 망원경과 스트립 카메라를 탑재하자는 것이었다. 매콘은 퍼셀의 제안을 CORONA 프로그램 사무국에 전달했고, 이 제안은 CORONA와 LANYARD 카메라를 모두 개발한 Itek으로 넘어갔다.
Itek 기술진은 ‘접이식 광학계(folded optics)’를 사용하는 초점거리 240인치(610센티미터)의 카세그레인 망원경에 127밀리미터 스트립 카메라를 결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것은 곧 퍼셀(Purcell)의 머리글자를 딴 P 카메라 실험, 또는 P-카메라로 불리게 됐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록히드 기술자들이 KH-4 CORONA-MURAL 위성의 필름 수송 구역에 남는 공간을 활용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이곳은 필름이 하나뿐인 재진입체로 이동하는 통로였다. 그들은 CORONA 우주선에 탑재할 모형 장치를 제작하고 우주선 측면에 개구부를 만들었다. 이 개구부에는 궤도 진입 후 화약식 장치로 날려버릴 수 있는 덮개를 설치했는데, 이는 CORONA-MURAL의 두 카메라용 덮개와 같은 방식이었다.
1963년 6월 12일, 모형 P-카메라를 탑재한 CORONA 임무가 밴덴버그 공군기지에서 발사됐다. 이 비행의 목적은 P-카메라가 주 카메라 운용을 방해하는지, 로켓이 증가한 중량을 궤도까지 운반할 수 있는지, Agena 우주선이 여전히 기체의 자세를 안정시킬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CORONA 임무는 정상적으로 진행됐다.
“‘P-카메라 실험’은 말하자면 백업 프로그램을 위한 또 하나의 백업이었다. 이제 그것마저 실패했으니, 성과를 내야 할 책임은 LANYARD에게 돌아갔다.”
6월 26일에는 두 번째 CORONA 임무인 9056호가 발사됐다. 이 임무에는 유일한 P-카메라와 표준 CORONA-MURAL 카메라가 함께 탑재됐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원격측정 자료는 P-카메라의 덮개가 계획대로 분리되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이것이 단순한 원격측정 오류이기를 바라면서, 미 서부 지역 CIA 위성작전 책임자인 버나드 웹 중령은 다음번 레닌그라드 상공 통과 때 카메라를 작동시키라고 명령했다. 6월 30일 위성 회수체가 궤도에서 이탈해 회수되고 필름을 현상했을 때, 필름은 아무것도 찍히지 않은 상태였다. 이는 광학 포트 덮개가 분리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32]
이른바 ‘P-카메라 실험’은 3월의 첫 LANYARD 발사 실패와 GAMBIT에 대한 매콘의 불신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있다. 말하자면 백업 프로그램을 위한 또 하나의 백업이었다. 이제 그것마저 실패했으니, 성과를 내야 할 책임은 LANYARD에게 돌아갔다.
1963년 7월 말 세 번째 LANYARD가 발사됐으며, 이번에는 우주선을 성공적으로 궤도에 올렸다. LANYARD 임무 8003은 필름을 회수하는 데 성공했지만 우주선이 과열돼 카메라 성능에 영향을 미쳤다. (출처: Peter Hunter Collection)
임무 8003
임무 8003은 1963년 7월 31일 발사됐으며, 경사각 74.94도의 168×467킬로미터 궤도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임무 기간은 5일로 계획됐다. 궤도에 도달한 뒤에는 렌즈 고정장치가 해제됐는지 확인하고 카메라가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입증하기 위해 한 차례 버스트 촬영을 실시했다.[33] 9번째 궤도 회전까지 원격측정 자료는 주 카메라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줬지만, 항성 인덱스 카메라는 지나치게 많은 사진을 찍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센서들은 탑재체의 온도가 너무 높다는 사실을 나타냈다.
16번째 궤도 회전에서 롤 조인트의 잠금이 해제됐다. 사진 촬영을 위한 롤 기동은 총 13차례 실시됐으며, 각 통과가 끝날 때마다 장비를 0도, 즉 수직 아래 방향으로 되돌렸다.[34]
하지만 탑재체는 여전히 지나치게 뜨거웠고, 이는 지상 관제요원들을 걱정하게 했다. 22번째 궤도에 이르자 카메라는 단락 때문에 작동을 멈췄다.[35] 23번째 통과에서는 주 카메라도 항성 인덱스 카메라 체계도 시작되지 않았다. 고장의 가장 유력한 원인은 밴덴버그 지상국 상공을 통과하는 동안 카메라의 영상이동보정 속도를 수정하려 했던 조치였다. 그 수정 조치의 직접적인 결과로 어떤 체계가 고장 났고, 카메라는 이후 다시는 작동하지 않았다.[36]
25번째 궤도에 이르자 우주선은 더 이상 명령에 응답하지 않았고, 원격측정 자료는 아마도 열 때문에 Agena 배터리의 전력 소모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이후의 통과에서는 지상에서 계속 명령을 보냈음에도 카메라가 작동하고 있다는 징후가 전혀 없었다. 전력 소모 증가는 계속됐다. 지상 관제팀은 탑재체를 회수하기로 결정했고, 33번째 궤도에서 우주선은 회수 모드에 들어갔다. 위성 회수체(SRV)를 분리했고, 회수체는 대기권에 재진입해 낙하산을 펼친 뒤 하와이 북서쪽 태평양 상공에서 C-130 허큘리스 항공기에 의해 공중 회수됐다.[37]
LANYARD가 처음 촬영한 영상은 지상에서 실제 크기를 측정해 위성사진과 비교할 수 있는 미국 내 표적들이었다. 이후의 표적들은 소련에 있었다. 주 카메라에서는 총 908프레임, 약 1,900피트(579미터)의 필름이 회수됐고, 인덱스 카메라에서는 500피트, 항성 카메라에서는 250피트(각각 152미터와 76미터)의 필름이 회수됐다. 주 카메라 촬영분 가운데 약 60%는 입체사진이었다.[38]
1963년 7~8월 LANYARD 임무 8003이 촬영한 지구상의 지역을 보여주는 지도. (출처: Harry Stranger)
위성정찰 초기에는 정찰위성의 지상해상도가 대체로 근사치로 표현됐으며, 가능한 최고 해상도와 전체 임무 동안의 평균 해상도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Itek 기술진은 4~5피트(1.2~1.5미터) 해상도를 기대했지만, 실제 해상도는 약 8~10피트(2.4~3미터)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자료에 따라 수치는 서로 다르다. 임무 후 보고서는 이러한 낮은 성능의 원인으로 높은 온도를 지목했다. 열 때문에 카메라 구조가 변형되고 초점이 이동하면서 영상이 흐려졌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또한 9번째 궤도에서 성능이 갑자기 저하됐으며, 이는 어떤 구조물이 버티지 못하고 변형됐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39] 다른 자료에 따르면 전체적인 해상도는 4~5피트였고, 이 정도면 차량과 소형 항공기, 활주로 표식을 식별할 수 있었다.[40]
카메라 설계자인 잭 허더는 거의 40년이 지난 뒤에도 그 임무를 기억하고 있었다. 사진판독관, 즉 PI들은 필름을 보고 무엇이 찍혔는지 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카메라 기술자들도 카메라의 성능을 평가하기 위해 필름을 분석했다.
“필름이 돌아왔을 때 저는 웨스트오버로 올라가 몇몇 PI들과 함께 직접 봤습니다.”라고 허더는 말했다. 메인주의 웨스트오버 공군기지에는 미 공군의 필름 처리시설이 있었다.
허더는 임무 8003의 필름 스트립들을 살펴봤던 일을 기억했다.
“누군가 [1995년] CORONA 심포지엄에서 LANYARD의 최고 영상은 2피트(0.6미터)였지만 대부분은 4~6피트(1.2~1.8미터)였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라고 허더는 말했다.
“처음 영상을 봤을 때, 카메라가 처음 켜진 직후 촬영된 사진에 둘레 1피트(0.3미터)짜리 고리가 달린 가스 탱크가 있었습니다. 아주 거대한 저장탱크 중 하나였죠. 그건 선명했습니다. 꽤 좋아 보였어요. 하지만 그 이후에는 선명한 것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는 아마 카메라 초점에 영향을 미친 열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계산해보니 그 초기 영상의 경우 2피트 해상도라는 수치가 합리적이었습니다.”[41]
허더가 언급한 것은 임무 초기에 촬영된 몬태나주 빌링스의 정유시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무 8003 초기에 촬영된 몬태나주 빌링스의 LANYARD 사진. 잭 허더가 보고 대형 석유 저장탱크가 매우 좋은 해상도로 보였다고 회상한 사진이 아마 이것일 가능성이 높다. 인터넷에 공개된 이 버전은 훨씬 낮은 해상도지만, 허더는 원본이 매우 선명했다고 기억했다. 이후 촬영된 사진들은 훨씬 덜 선명했다. (출처: Harry Stranger)
우주선은 소련 상공에서 14차례 촬영 통과를 수행했으며, 시베리아의 두딘카, 톰스크, 틱시를 비롯해 노바야제믈랴, 고리키, 그리고 중국 중부의 한 지점을 촬영했다.[42]
운용요원들은 이번 임무에서 발생한 열 문제에 실망했다. 우주선 설계에 분명히 문제가 있었고, 반사도료 등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탑재체를 수동적으로 냉각하려 했던 조치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 문제를 연구하고 해결할 때까지 남아 있던 LANYARD 비행은 모두 중단됐다.
“첫 GAMBIT 임무의 목표는 좋은 사진 한 장을 회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첫 GAMBIT 임무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성과를 냈고, 체계가 요구된 방식대로 작동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Itek은 열변형을 막기 위해 탑재체에 두 가지 수정을 제안했다. 첫 번째 방안은 필름 플래튼과 렌즈 사이의 거리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온도조절장치가 달린 가열식 마그네슘 봉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방안은 거울을 수평으로 수납해 거울 전체의 온도 구배를 최소화하고, 거울의 복사냉각이 렌즈 초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이러한 개조를 적용하고 시험하는 데는 두 달이 걸릴 예정이었다.[43]
LANYARD 프로그램의 목표는 GAMBIT 위성이 실전 운용에 들어가기 전에 영상을 회수하는 것이었다. 1963년 7월 12일, 첫 GAMBIT 우주선이 밴덴버그 공군기지 발사대에서 굉음을 내며 이륙했다. 첫 GAMBIT 임무의 목표는 좋은 사진 한 장을 회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첫 GAMBIT 임무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성과를 냈고, 체계가 요구된 방식대로 작동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44]
이제 LANYARD가 더 이상 과도기적 프로그램이 아니게 된 상황에서, 설령 제대로 작동하도록 만들 수 있다 해도 여전히 쓸모가 있었을까?
유일하게 성공한 LANYARD 임무는 소련을 수백 장 촬영했고 미국 내에서도 일부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열 문제 때문에 임무 후반에 촬영한 영상의 품질은 저하됐다. (출처: Harry Stranger)
프로그램 종료
9월이 되자 두 번째 GAMBIT 촬영분까지 현상·분석이 끝났고, GAMBIT이 제대로 작동할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LANYARD 기체는 여전히 비행 준비가 진행 중이었지만,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45]
1963년 9월, 추가 LANYARD 임무가 여전히 중단된 상태에서 CIA는 당시 운용 중이던 다른 두 주요 정찰위성과 LANYARD를 비교 평가했다. 하나는 MURAL이라는 암호명으로 개발됐다가 곧 다시 CORONA로 명칭이 바뀐 KH-4 CORONA로, 1962년 초 실전 배치됐다. 다른 하나는 그해 7월 운용을 시작한 KH-7 GAMBIT이었다.[46]
1963년 LANYARD 임무에서 촬영된 소련 북서부의 산업 및 도시 지역. 정보분석가들은 이런 영상에서 새로운 건설 현장과 전략무기체계의 위치를 탐지하고, 가능하다면 확실히 식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세부 정보를 얻기를 원했다. (출처: Harry Stranger)
이 평가는 앨버트 D. ‘버드’ 휠런 박사의 지휘 아래 수행됐다. 휠런은 허버트 스코빌 박사에게서 CIA 연구국을 넘겨받은 뒤, 이를 훗날 여러 야심차고 혁신적인 위성체계의 개발을 담당하게 될 강력한 과학기술국으로 키워가고 있었다. 휠런이 초기에 취한 조치 가운데 하나는 전체 정찰 요구조건과 기존 체계가 이를 얼마나 충족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연구팀을 구성한 것이었다.
이제 휠런은 LANYARD가 CIA의 정보 요구사항인 탐색·감시, 징후정보, 기술정보를 충족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CORONA는 당시 탐색·감시 및 징후정보 요구를 부분적으로 충족하고 있었지만, 임무마다 영상 품질의 편차가 컸다. 카메라가 보내오는 사진의 해상도는 10~20피트(3~6미터)였다. 영상 품질을 개선해 지속적으로 10피트(3미터) 해상도를 확보할 수 있다면 CORONA만으로도 요구조건 대부분을 충족할 수 있었다. CIA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개발 프로그램에 집중하고 있었다.[47] GAMBIT은 4피트(1.2미터) 또는 그보다 나은 해상도로 기술정보를 제공하도록 설계됐다.
평가는 LANYARD가 CORONA만큼 많은 표적을 촬영할 수 없고, GAMBIT만큼 높은 해상도도 제공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LANYARD의 가장 큰 결함은 운용 측면에 있다. 입체촬영 범위에 공백이 있고 궤도 바깥의 표적을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롤시켜야 하므로 LANYARD의 임무 프로그램 작성은 훨씬 어렵다. 또한 획득 가능한 표적들의 지리적 간격에도 제한이 생긴다. LANYARD의 임무 프로그램이 복잡해질수록 그에 따라 더 정교한 지휘통제 체계가 필요해지며, 이는 본질적으로 신뢰성을 낮춘다. 촬영 폭이 좁기 때문에 실제 기체의 비행경로와 비행 전 계획된 경로 사이의 차이를 보정하도록 임무 프로그램을 수정해야 한다.”[48]
분명 LANYARD는 탐색 임무에도, 기술정보 임무에도 이상적인 체계가 아니었다. 그러나 휠런은 GAMBIT이 지상의 매우 좁은 폭만 촬영하기 때문에 궤도 오차로 표적을 놓칠 수도 있으며, 사진판독관들은 임무가 끝날 때까지 이를 알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휠런은 이렇게 썼다.
“따라서 G도 L도 우리의 기술정보 요구를 충족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으며, G보다 촬영 폭은 넓고 해상도는 낮지만, L과 M보다는 촬영 폭이 좁고 해상도는 높은 체계를 개발해야 할 수도 있다. 또한 위성체계에서 GAMBIT 수준의 지상해상도를 제공하면서 실용적으로 운용 가능한 체계를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49]
LANYARD는 CORONA보다 더 좋은 지상해상도로 넓은 지역을 촬영하도록 설계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능력은 CORONA와 GAMBIT 양쪽에 점점 더 겹치게 됐다. (출처: Harry Stranger)
휠런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의 판단으로는 LANYARD 체계가 달성한 지상해상도는 MURAL보다 충분히 뛰어나지 않으며, 따라서 임무 프로그램 작성과 표적 획득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상쇄할 정도가 아니다. 정보공동체가 기술정보를 위해 필요로 하는 고해상도 사진은 다른 체계로 충족해야 한다.”[50]
소련의 아스피드노예 공군기지는 1960년 건설이 시작됐으며 미국 CORONA 정찰위성에 의해 발견됐다. 그러나 건설은 끝내 완공되지 않았다. 이 LANYARD 영상에서는 비행장 표면이 거칠다는 점이 분명하고, 활주로 주변에는 연료탱크나 정비건물 같은 주요 지원시설이 보이지 않는다. (출처: Harry Stranger)
그러나 CIA 평가에는 한 가지 일관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LANYARD, GAMBIT, CORONA의 성능을 비교한 첨부 표에서는 LANYARD 비행에서 실제 달성한 해상도를 8~10피트(2.4~3미터), 예상 해상도를 5~8피트(1.5~2.4미터)로 적었다. 후자의 수치는 이전에 예상했던 4~6피트(1.2~1.8미터), 심지어 3피트(0.9미터)보다 상당히 낮았다. 게다가 어느 수치도 33년 뒤 공식적으로 공개됐고 카메라 설계자 잭 허더도 기억하고 있던 2피트(0.6미터) 해상도와 일치하지 않았다. 이것이 CIA가 LANYARD에 대한 기대치를 낮췄다는 의미인지, LANYARD의 매력을 떨어뜨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해상도를 낮게 잡았던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오류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51]
휠런의 서한에 대한 후속 조치로 보이는 문서에서 중앙정보국장 존 매콘은 다음과 같이 썼다.
“현재 1964년 지출과 1965년 예산의 기초가 되는 NRO 계획에서 LANYARD 19기를 조달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만 이는 확인되지는 않았다. 반면 나는 CORONA와 LANYARD 사이에 해상도 면에서 눈에 띄는 차이가 없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 조사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성공한 LANYARD 임무의 결과도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4일간의 LANYARD 임무는 약 70만 제곱마일을 촬영하는 반면, 4일간의 CORONA 임무는 1,050만 제곱마일을 촬영하고, CORONA J는 두 캡슐이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할 경우 그 두 배를 촬영한다고 알고 있다. 다만 이 경우 촬영에는 8일이 걸릴 것이다. LANYARD와 CORONA의 발사비용은 거의 같으며, 각각 약 [삭제]라고 들었다.”[52]
매콘은 또 2주 전인 9월 6일 발사된 두 번째 GAMBIT 임무가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지적했다. 다만 사진의 품질이나 어떤 표적이 촬영됐는지는 알지 못했다.
매콘은 이어 이렇게 썼다.
“따라서 문제는 이렇다. 위 내용이 맞고, LANYARD의 해상도가 개선되지 않았으며, GAMBIT이 성공했다면 지금 LANYARD를 중단해야 하는가? 아니면 LANYARD를 연구개발 상태로 유지하면서 카메라 두세 대를 조달하고 적절한 시기에 발사한 뒤, 그 결과를 검토하고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53]
발라코보 댐은 1960년대 초 볼가강에서 건설이 시작됐으며 1967년에 완공됐다. (출처: Harry Stranger)
임무 8003 이후에도 남아 있던 다섯 개의 탑재체는 계속 제작과 발사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54] 프로그램 취소 당시 후속 탑재체 다섯 개는 완성도가 80~100%였고, 나머지 다섯 개는 그보다 낮은 제작 단계에 있었다.[55] Itek은 카메라 두 대를 보유하도록 허가받았다. 완성된 렌즈 두 개와 LANYARD용 광학유리 다섯 세트는 라이트-패터슨 공군기지의 사진정찰 연구소로 이전됐다. 나머지 모든 LANYARD 장비는 보세 보관소에 들어갔다.[56] 매콘이 향후 구매 대상으로 언급한 LANYARD 19기에 발사되지 않은 기존 탑재체 다섯 개가 포함돼 있었는지, 아니면 전부 신규 기체를 의미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0월 23일 NRO 국장 브록웨이 맥밀런은 마침내 LANYARD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록히드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즉시 효력을 발휘하여 LMSC는 LANYARD에 관한 모든 작업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록히드는 계약에 따라 더 이상의 비용을 발생시키지 말라는 지시도 받았다.[57] 이에 따라 Itek과의 계약 두 건과 록히드와의 계약 세 건 등 총 다섯 개 계약을 취소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맥밀런은 Itek에 02, 07, 08번 카메라 세 대를 완성하라고 지시했다. 이들은 계약상의 인수시험 단계까지 완성돼 정부가 인수한 뒤 곧바로 최종 발사 준비를 할 수 있는 상태가 돼야 했다.[58] 프로그램이 완전히 종료됐을 때 완성된 LANYARD 탑재체 다섯 개가 보관돼 있었으며, 두 개는 록히드에, 세 개는 캘리포니아의 CIA 기밀 보관시설에 있었다.[59]
한편 CIA가 정보 요구사항 평가를 계속하면서 앨버트 휠런은 Itek에서 더욱 발전된 연구개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FULCRUM으로 불린 이 사업은 CORONA를 대체할 훨씬 더 강력한 체계를 개발하는 것이 목표였다. 탐색 임무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기술정보 수집이 가능하도록 더 높은 해상도를 제공하려는 것이었다.[60] LANYARD를 위해 경량 거울을 제작한 Itek의 경험은 이 새로운 사업에서 유용하게 활용됐다.
소련의 산업지역 확대사진. LANYARD 임무에서 발생한 열 문제 때문에 카메라는 최고 수준의 해상도를 달성하지 못했다. (출처: Harry Stranger)
죽지 않은 프로그램
LANYARD는 취소됐지만 거의 완성된 카메라 체계 몇 대가 록히드가 운영하는 기밀 보관시설에 여전히 남아 있었고, 이들을 그냥 무시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이후 1년 동안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정보당국 관계자들이 완성된 장비를 활용해 프로그램을 되살리자는 여러 제안을 내놓았다.
마지막 비행으로부터 1년이 넘은 1964년 8월, CIA 또는 NRO 본부의 누군가가 LANYARD 프로그램 부활 문제를 제기했다. 이번에는 LANYARD를 이용해 중국 남부의 표적, 아마도 란저우의 핵연료 처리시설을 촬영하자는 제안이었다. 간단한 검토 결과, 승인 후 16주면 첫 번째 LANYARD를 비행시킬 수 있고, 나머지 네 개 체계는 이후 매달 한 기씩 발사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61]
“NRO가 애초에 왜 쿠바를 대상으로 한 LANYARD 임무를 검토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제안에 관한 현재 유일한 문서에는 어떤 표적이 검토됐는지, 그리고 왜 GAMBIT이 아니라 LANYARD가 이 임무에 제안됐는지가 적혀 있지 않다. 당시 중국의 핵시설은 정보수집의 최우선 표적이었다. CIA는 대만 조종사들이 중국 상공에서 수행하는 일련의 위험한 U-2 정찰비행을 지원하고 있었다.[62]
LANYARD가 제안된 이유는 GAMBIT이 표적을 촬영하는 데 필요한 높은 정확도를 실제로 달성할 수 있을지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 LANYARD는 극궤도를 따라 비행하면서 GAMBIT보다 동서 방향으로 더 넓은 지역을 촬영했다. 대형 산업시설이나 로켓 발사시설처럼 표적이 수 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져 있다면 GAMBIT은 한 장의 영상에 전체를 담을 수 없었다.
또 다른 고려사항은 단순한 궤도역학이었을 수 있다. 소련은 북쪽에 위치해 있어 극궤도 위성이 남쪽 지역보다 북위도 지역을 더 자주 통과했기 때문에 촬영하기 쉬웠다. 위성은 중국 상공을 훨씬 덜 자주 통과했으므로, 중국만을 위한 전용 LANYARD 임무가 정당화될 수도 있었다.
이전 비행에서 발생한 LANYARD의 열제어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고 반드시 해결해야 했다. 해결책은 세 가지였다. Itek이 이전에 제시했던 두 가지 방법에 더해, 카메라가 작동하지 않는 동안 이를 보호할 열차폐용 문이나 커튼을 추가하는 새로운 방안이 있었다.[63] 어느 것도 구현하기 어려운 방법은 아니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NRO 국장은 중국 임무를 실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964년 12월 LANYARD는 다시 검토 대상이 됐다. 이번에는 밴덴버그 공군기지에서 더 강력한 Atlas Agena 발사체로 LANYARD를 저경사 궤도에 올려 쿠바를 촬영하자는 제안이었다. 밴덴버그에서 저경사 궤도로 발사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LANYARD는 TAT Agena-D용으로 설계됐지만 Atlas Agena 발사체와도 완전히 호환됐다. 사실 Atlas는 진동을 많이 발생시키는 고체로켓 모터를 사용했던 TAT보다 우주선에 더 온화한 발사환경을 제공했다.[64]
이 제안에는 LANYARD 카메라 자체의 본질적인 한계 외에도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촬영된 사진의 지상 위치를 결정하는 데 사용되는 항성 인덱스 카메라가 쿠바 상공의 일부 궤도 구간에서 햇빛을 직접 받아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해결책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항성 인덱스 카메라가 바라보는 방향을 반대로 돌리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해당 구간에서 항성 인덱스 카메라 대신 기체 유도체계의 데이터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우주선은 경사각 23도의 궤도를 비행하며 하루 네 차례 쿠바 상공을 지나도록 계획됐다. 두 번은 쿠바를 길게 종단하고, 나머지 두 번은 약 40도 각도로 가로질렀다.
이 낮은 궤도경사각은 지상 지휘통제체계에도 문제를 만들었다. NRO가 이 저경사 궤도의 위성과 통신할 수 있는 지상국은 하나뿐이었으며, 아마 하와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성이 하루 네 번 상공을 지나기는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적절한 지휘통제에 부족했고, 이 임무를 위해서는 당시 이미 개발 중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동식 지상 지휘통제소가 필요했다.
NRO가 애초에 왜 쿠바를 대상으로 한 LANYARD 임무를 검토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미국과 소련이 합의한 사항 가운데 하나는, 위기가 절정에 달했을 당시 루돌프 앤더슨 소령이 격추된 뒤 미국이 중단했던 쿠바 상공 U-2 정찰비행을 재개하는 것이었다. CIA는 이제 이러한 쿠바 상공 정기 정찰비행으로 상당한 양의 정보를 지속적으로 확보하고 있었다.
아마 이 때문에 Atlas Agena를 이용한 LANYARD 쿠바 임무도 앞서 제안됐던 중국 임무와 마찬가지로 승인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프로그램 종료 뒤에도 상당한 양의 LANYARD 장비가 남아 있었지만, 이후의 행방은 알려져 있지 않다. 국가정찰국은 이 최고기밀 장비가 어떻게 처리됐는지 확인하지 못하고 있으며, 가장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는 1960년대 또는 1970년대 초에 폐기됐다는 것이다.[65]
후기에 제안된 ‘LANYARD Prime’ 설계는 임무 수명을 늘리기 위해 두 번째 재진입체를 추가하는 방식이었다. 이 구상이 진지하게 검토됐다는 증거는 없다. (출처: NRO)
개량형 LANYARD
Itek은 마크 1 파노라마 카메라 외에도 두 가지 LANYARD 개량안을 제안했다.
첫 번째 제안은 ‘LANYARD Prime’으로 불렸으며 1963년 여름에 검토됐다. 기본 카메라 체계에 두 번째 재진입체를 추가하는 방식이었다.
복수 재진입체를 사용하는 우주선은 일찍이 1958년부터 제안됐지만, 로켓이 이를 운반할 만큼 강력해진 1960년대 초에야 현실적으로 가능해졌다. 1963년 8월 처음 발사된 KH-4A CORONA는 두 개의 재진입체를 갖고 있었으며, 이는 위성의 수명과 작전 유연성을 크게 늘리고 사실상 능력을 두 배로 확대했다.
CORONA의 두 카메라는 하루 동안 작동한 뒤 첫 번째 재진입체를 분리할 수 있었다. 이후 카메라는 작동을 멈추고 위성은 최대 2주 동안 ‘좀비 모드’에 들어갔다. 그 뒤 카메라를 다시 켜 두 번째 재진입체를 채웠다. 이 방식은 임무 수명을 늘리는 동시에, 궤도에서 회수되는 사진이 비교적 최근에 촬영된 것이 되도록 보장했다.
LANYARD Prime도 비슷한 방식으로 운용될 예정이었다.[66]
날짜가 적혀 있지 않은 LANYARD Prime 스케치 한 장이 남아 있다. 이 구성은 기본 카메라에 큰 개조를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필름 공급 릴을 더 크게 만들고 궤도상 운용기간을 늘리기 위해 다른 우주선 하위체계들을 개조해야 했다.
기존 LANYARD 우주선도 큰 어려움 없이 이 구성으로 개조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궤도에 올리기 위해 Atlas Agena가 필요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LANYARD 프로그램이 계속됐다면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성능개량 방향이었을 것이다.
후기에 제안된 ‘Quad LANYARD’ 설계는 카메라 두 대를 탑재해 동시에 입체사진을 촬영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이 역시 진지하게 검토됐다는 증거는 없다. (출처: NRO)
Itek이 제안한 두 번째 LANYARD 개량안은 ‘Quad-L’로 불렸으며 훨씬 더 복잡했다.
LANYARD 설계의 근본적인 한계 가운데 하나는 카메라가 한 대뿐이라는 점이었다. 설계진은 단일 카메라로 입체영상을 만들 수 있는 영리한 방법을 개발했지만, 이 운용 방식은 촬영 가능한 사진 수를 제한했다. 다른 각도에서 다시 촬영하기 위해 거울을 움직이는 동안에는 카메라가 촬영을 중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Itek의 개량안은 첫 번째 카메라와 평행하게 두 번째 카메라를 추가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위성이 궤도를 따라 비행할 때 두 번째 카메라는 첫 번째 카메라의 ‘위쪽’에 배치되는 형태였다.
두 번째 카메라에는 약간 다른 각도로 기울어진 자체 반사거울이 있었다. 카메라 두 대와 거울 두 개를 사용하므로 거울 자체를 더 이상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두 카메라를 수용하기 위해 우주선 전체 직경은 더 커졌다.
그러나 이 제안 역시 종이 위의 구상을 넘어 발전하지 못했다.
“프로그램 종료 뒤에도 상당한 양의 LANYARD 장비가 남아 있었지만, 이후의 행방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Itek은 MURAL-2 또는 M-2로 불리는 훨씬 대형화된 CORONA도 제안하고 있었다. 전체적인 구성은 기존 CORONA와 같지만, 초점거리가 두 배인 카메라를 탑재하는 방식이었다. 기존 CORONA의 초점거리는 24인치(61센티미터)였지만 M-2는 48인치(122센티미터)였다.
해상도는 LANYARD만큼 좋지는 않았겠지만 더 넓은 지역을 촬영할 수 있었고 구조도 덜 복잡했다. M-2는 승인되지 않았다.
LANYARD 카메라 설계자인 잭 허더는 어느 LANYARD 개량안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저는 이미 새로운 체계를 위한 위험저감 작업을 하고 있었고, LANYARD가 부활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67]
다음: Samos E-6에서 SPARTAN으로.
주석
드웨인 데이에게는 zirconic1@cox.net으로 연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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