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늬바람에 실린 빗방울이 차갑다. 가끔 된바람도 기웃거리는 아침이다. 서둘러 사무실로 향했다. 수강생들이 오기 전에 썰렁한 공기를 데워놓기 위해서다. 9월 초부터 12월까지 일주일에 2회씩 캘리그래피와 꽃 누르미를 정보센터에서 가르친다. 캘리그라피 강사는 태안군청에서 지원을 받고, 꽃 누르미는 아내가 봉사한다. 그렇다면 나는, 멍청하게 바라만 보고 있을까? 절대로 아니다. 수필가라는 명찰을 앞세워 이런저런 어원에 대하여 가르친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사용하는 말이나 글에(단어)대한‘어원(語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 때문에 매주 여섯 단어씩 선정하여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준다. 어떤 날은 아는 것이 바닥이 났다는 핑계로 수필에 대한 개념도 이야기해준다.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수업에 들어가자 곧바로 손을 들었다.
캘리 선생님의 나이는 큰아들과 엇비슷하거나 조금 뒤처진 것 같다. 하지만 스승임은 분명하다. “다른 게 아니고요. 오늘 캘리 연습은 이 문장으로 하면 안 될까요?”나는 어제 도착한 김기순 수필가님의 “마침표는 없었다”란 마침표 없는, 캘리그래피(calligraphy)로 쓴 표제를 디밀었다.
강사는 쾌히 응했고, 수강생들의 눈빛은 일제히 들고 있는 수필집으로 향했다. 순백의 표지 속에는 열린 새집이 있고, 단풍 색 닮은 붉은 새가 자유를 찾아 날아가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 밑으로 “마침표는 없었다”라고, 자유로운 필체인 캘리그라피가 그려져 있다. 회원들의 눈빛은 내가 들고 있는 책의 내용이 궁금한 것 같았다. 이쯤에서 나는 목청을 가다듬고 한마디 했다.
“여러분, 김기순 수필가님은 나와는 대전수필문학회 회원입니다. 내일 모레 금요일부터 이 책을 대여하겠습니다. 단 일주일을 초과하면 안 됩니다.”12명의 명단이 접수되었다. 책이 내 손에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약 80여일이 소요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모두 진지하게 읽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분들에게 김기순이란 수필가의 진정한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단 한 문장이라도 읽은 이의 생활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면 글쓴이의 의무는 다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내가 운영위원장으로 있는 만리포정보화마을 사무실엔 마을 사람들이 자주 찾는다. 그들은 컴퓨터를 배우거나 오늘처럼 캘리그래피, 꽃 누르미를 배우러오는 만학의 열정들이다. 가끔 젊은 세대들도 드나들지만, 대부분은 사계절을 오십 번 이상 경험한 분들이다. 그 때문인지 배움의 자세가 하나같이 진지하다. 어떤 날은 홀로 찾아오는 분도 있다. 세상살이가 답답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가장 복잡하고 난감한 고민거리는 가족관계다. 어떤 사연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도 있다. 그럴 때는 간접경험을 통하여(책)습득한 지혜로 해결한다. 덩달아 슬픔을 느끼는 사연도 참 많다. 그것은 ‘예의와 도덕의 상실’이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더 많은 대화를 해야 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공감하며 진지하게 들어 준다는 것은 위로 차원을 넘어선다. 무엇인가 털어 놓고 싶어 하는 사람과 그 말을 진지하게 들으려는 사람, 이 두 사람의 만남이란 요즘시대에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우린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대화마저도 단절하고 있는 경향이 깊다. 그 때문에 말하는 사람은 정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하고, 듣는 사람은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만이 진정한 대화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우편함에서 수필집을 만난 것은 어제 늦은 오후였다. 책을 받아들고 ‘김기순 수필가’에 대하여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만으로는 도저히 얼굴을 그려낼 수 없었다. 그때 아내가 참견을 했다. “여보, 39호 출판기념회 때 촬영한 사진 중 강표성 회장님 곁에 온화한 미소의 주인공이 김기순 선생님이 아닌가요?”나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당신도 잘 알쟌여~ 원래 당신 말고는 다른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
이제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책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가서, 가깝고도 멀 수 있는 2인칭으로 김기순 수필가와 대화할 것이다.
*김기순 수필가님, 아직도 얼굴은 기억 나지 않습니다. 회원이란 이름 하나 만으로 선 듯 귀중한 수필집을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 모임 때 정식으로 고마운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선생님의 문장 속에서 또 다른 앎을 제 마음 안에서 제대로 갈무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김기순 수필가님!
첫댓글 오...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털어놓고 싶어하는 이들은 많은데 듣고, 공감하고, 위로하려는 이는 천연기념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가을 멋진 독서의 기회를 주신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인정의 강이 메마르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 대전문학 식구끼리라도 따뜻한 정 나눠야죠. 바람이 차갑습니다. 감기 조심하십시오.
김기순 선생님의 수필집을 읽고 있는 중입니다.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작가의 삶을 알고 친숙하게 느껴집니다.
"이 가을 벗과 마주 앉아 막걸리 한 사발 기울이면서 만추의 정취에 흠뻑 젖어봄도 좋으리" <술>이라는 작품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아, 왜 이렇게 맘이 술렁거리는겨~~
가을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낙엽은 떨어져 흩어지고, 아, 저도 갑사에서 먹던 밤 막걸리 생각이 나네요.
육상구 선생님 제 졸저를 읽고 계시다니 감사합니다.
어제 늦은 저녁까지 모두 읽었습니다. 이성의 글편임에도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말씀대로 비슷한 시대에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장 또한 군더더기 없어 읽고 생각하기에 편했습니다. 술이라...
만리포가 풍성한 이유를 알듯 합니다. 나이 들어서도 배우려고 노력하는 어른들과 고향마을을 잘 지켜가는 이태호 선생님 내외분의 마을사랑도 무척 존경스럽습니다~^^*
가을비가 을씨년스런 아침입니다. 오전 10시부터 캘리, 꽃 누르미, 수필 공부가 시작됩니다. 너나할 것 없이 아는 것이 있으면 서둘러 나누어야죠. 돈드는 것도 아니고 가지고 가는 것도 아니니 열심히 봉사라도 해야지요.
김기순 수필가님의 깔끔한 표지에 마음이 끌려 거의 다 읽었답니다.
이 태호 선생님, 이 감동적인 순간에 할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대여까지 해주셨다니요. 감사한 마음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저를 모르시듯이 저도 선생님을 잘 모르지만
따뜻한 선생님의 마음은 알 것 같습니다.
오늘 강표성 회장님께서 수필예술에 가입하기를 잘했죠? 하시기에
예 하고 대답했습니다. 정말 수필예술에 가입하기를 잘 한 것 같습니다.
넘치도록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선생님 제가 책을 12권 더 보내드리면 어떨까요?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그러겠습니다.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염장을 한 물고기들이 장대 위에서 그네를 탑니다. 서둘러 아침 밥상을 차린 아내와 마주앉아 뜬금 없이 이런 질문을 했답니다. "여보, '둔녀'라는 분 알죠?" 어리둥절하는 아내의 얼굴 모습이 사랑스런 아침입니다. 10시부터 캘리와 꽃 누르미, 수필 강의를 합니다. 선생님의 수필집도 오늘부터 대여를 합니다. 그 때문에 서둘러 읽었습니다. 말씀대로 12권을 더 보내주시면 수강생들에게 각기 1권씩 선물을 할 수 있겠습니다. 아울러 선생님의 수필을 글쓰기 교재로 삼아 작법을 가르칠 수도 있고요. 그렇게 해주신다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기꺼이 보내드리겠습니다.
교재까지는 아니라도 12분이 편안히 읽을 수 있도록요.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는 것도 宣이고 아픈 사람을 돌보아 주는 것도 宣이고
선생님처럼 삶에 기쁨과 희망을 주는 것도 宣이지요.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