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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다른 종교의 관계’에 대한 원효의 입장
- 원효의 화쟁론을 중심으로 -
김 영 일 / 동국대학교 강사
목 차
Ⅰ. 머리말
Ⅱ. 원효의 화쟁론
Ⅲ. ‘서로 같다’는 견해
Ⅳ. ‘서로 다르다’는 견해
Ⅴ. 원효의 최종입장
Ⅵ. 맺음말
국문 요약
본고에서는,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 대해서, 원효는 어떠한 입장에 있는가?”에 대해서 검토하고 있다. 원효의 화쟁론에 입각한 그의 견해는 대체로 다음의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원효는 ‘불교와 다른 종교는 궁극적으로 같다’고 한다. 법화종요에서 말하기를, 비록 여래가 여러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이러저러한 방편으로 다양한 가르침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는 하지만, ‘불교와 다른 종교는 근본적으로 서로 같다’고 한다.
둘째, 원효는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다르다’고 한다. 대혜도경종요에서 불교의 가르침과 유교의 가르침은 서로 그 성격이 다르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당시 외도들에게 하였던 말씀과 유사한 점을 갖는다.
셋째, 원효는 위와 같은 상반된 견해에 대해서, ‘궁극적으로는 앞의 견해가 맞고, 현실적으로는 뒤의 견해가 맞다’고 하여 양쪽의 입장을 화해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궁극적’과 ‘현실적’이라는 ‘복수의 기준[二門]’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기준들은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일심(一心)과 이문(二門)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여기에 원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 주제어
종교, 불교, 불교와 다른 종교의 관계, 원효, 화쟁론
Ⅰ. 머리말
오늘날은 소위 ‘지구촌시대’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우리는 세계 각지의 문화와 문명이 서로 만나서 교류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은 정신문화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종교’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니,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와 같은 기성종교는 물론이고 수많은 신생 종교와 사상들도 이제는 서로 다른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만나서 교류를 하여야만 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종교는 본래 절대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까닭에 어느 정도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종교가 서로 만나게 되는 과정에서 우호적인 관계만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배척하고 적대시하는 경우가 일어나곤 한다. 그리고 갈등이 심한 경우에는 전쟁의 참화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러한 때에, 종교간의 만남이 과연 바람직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불교’의 경우에는, 약 2,500년 전에 인도에서 성립한 뒤에 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되었고, 근년에는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도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다양한 종교들과 나름대로 적절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노력하여왔다. 다만, 오늘날과 같이 타종교와의 만남이 급격히 증가되는 시대를 맞이하여, “과연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관계는 적절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라는 점은 우리에게 새로운 문제로 다가 온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1,300년 전 우리나라에서 살았던 위대한 불교사상가 중의 한분인 ‘원효’에게서 그 대답을 들어보고자 한다. 그 분은 분명 우리와는 다른 탁월한 안목을 지녔기에,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경청해보는 것도 바람직하리라 여겨진다. 더구나, 그가 살았던 시대는 정치적인 환경이나 종교적인 배경이 오늘날의 한반도와 어느 정도 유사하다는 점에서, 이러한 시도를 더욱 의미 있게 하는 것 같다.
아래에서는, 원효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그분의 저서 내용을 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그는 특히, 대혜도경종요와 법화종요에 이와 관련된 의견을 주로 적어놓았는데, 여기에 적힌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연구된 원효사상과 관련된 연구성과를 참고하였다. 그리고,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와 관련된 선행연구들도 함께 참고하였다.
Ⅱ. 원효의 화쟁론
본고에서는 “원효사상 특히 그의 화쟁론을 바탕으로 해서, 그는 불교와 다른 종교의 관계에 대해서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원효는, 아래[Ⅲ, Ⅳ, 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러한 점에 대해서 그 특유의 화쟁논리로 대답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에 한해서, 원효의 화쟁론에 관한 대체적인 검토를 해보고자 한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원효사상의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로 ‘화쟁’을 말한다. 한 분야의 이론만을 주장하지 않고 모든 분야를 아우르며 그것들 각각에 중요성을 부여하여 조화시켜서 보고자 하는 것이 원효의 화쟁정신이라고 한다. 그는 특히 깨달음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일심(一心)의 원천에로 돌아가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일심을 기본으로 해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이것을 바탕으로 현실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이론들을 조화시켜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원효 화쟁론에 대한 그 동안의 연구 성과를 살펴보면, 크게 세 분야로 나누어 질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원효의 화쟁론이 실제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그 대체적인 ‘윤곽’을 살펴보는 일이고, 둘째는 원효가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여 화쟁을 하고 있는지를 규명하기 위해서 그 ‘방법’을 살펴보는 일이며, 셋째는 그러한 화쟁방법은 어떠한 사상적인 근거에서 사용하고 있는지를 추정해보기 위해서 그 방법론의 ‘근거’를 살펴보는 일이다.
첫째, “원효가 화쟁을 전개하는 대체적인 모습은 어떠한가?” 이에 관한 현대적인 연구는 193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37년 조명기는 여러 저술에 인용된 십문화쟁론의 단편적인 인용문을 소개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원효의 화쟁사상과 관련된 여러 자료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견등(見登)과 균여(均如)의 저술에 인용된 십문화쟁론의 단편적인 내용을 찾아서 소개하였다. 다만, 그의 글에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후 해인사에서 발견된 잔간(殘簡)을 아직 보지 못하고 이점을 논의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해인사에서 십문화쟁론의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제9매와 제10매는 공(空)과 유(有)에 관한 화쟁이고, 제15매와 제16매는 불성(佛性)의 유무(有無)에 관한 화쟁이며, 제31매는 대부분이 파손된 채로 남아 있었다. 최범술은 이것을 복원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는데, 나중에 김지견은 이러한 최범술의 연구노트를 소개하였다. 다만, 제31매를 복원한 내용이 이장의의 끝에 있는 내용과 거의 같기 때문에 십문화쟁론의 잔간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다소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일찍이 조명기는 십문화쟁론의 ‘십문(十門)’을 원효가 화쟁의 대상으로 삼았던 ‘여러 가지의 주제’라고 파악하였지만, 이종익은 이것을 ‘열 가지의 주제’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1977년 이종익은 원효저술의 몇몇 작품을 통하여 십문화쟁론의 십문을 구체적으로 복원하려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원효사상의 연구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1978년 김운학, 1983년 이만용, 1989년 오법안 등은 각각 이와 비슷한 논의를 전개하였다.
한편, 십문화쟁론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경향을 벗어나서, 원효의 현존본에서 실제로 화쟁을 전개하는 모습을 포착하려는 노력도 등장하였다. 사실, 원효의 화쟁은 십문화쟁론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대부분의 저서에서 등장하고 있다. 특정한 논점에 대해서 마치 당사자인 것처럼 ‘논쟁’을 하고, 마지막에 가서 마치 제3자인 것처럼 제기된 여러 학설을 ‘화해’하는 모습은, 그의 여러 저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원효의 현존본에서 이러한 소위 ‘화쟁사례’를 실제로 67개나 발견할 수 있다.
둘째, “원효는 화쟁을 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는가?” 원효의 화쟁방법에 관한 연구는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1966년 박종홍은 말하기를, 원효의 화쟁논리란 개합(開合)으로써 종요(宗要)를 밝히는 논리이고, 평등한 입장에서는 모두가 허용되어 입파(立破)와 여탈(與奪)이 자유자재한 논리이며, 유도 무도 아니어서 이변을 멀리 떠날 뿐만 아니라 중도에도 집착하지 않는 논리이고, 말에도 얽매이지 않는 절언지법(絶言之法)의 논리라고 한다.
이러한 박종홍의 연구는 학계에 영향을 주어서 이후에 비슷한 연구가 등장하였다. 1977년 이한승, 1978년 김운학, 1983년 김선근, 1987년과 1991년 최유진 등에 의한 연구가 있었다. 이 중에서 최유진은 원효의 화쟁방법을 ‘극단을 떠남’, ‘긍정과 부정의 자재’, ‘경전 내용에 대한 폭넓은 이해’ 등으로 고찰하였다. 그리고 화쟁과 언어의 문제에 관한 그의 고찰은, 박종홍이 주장한 ‘일미와 절언’이라는 화쟁방법을 더욱 심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원효가 화쟁을 하는 특징적인 모습을 포착하는 연구풍토와는 달리, 화쟁방법의 최고원리를 탐구하는 연구도 비슷한 시기에 등장하였다. 1979년 오성환은 사법계(四法界)의 ‘사사무애적(事事無礙的)인 방법론’이 화쟁논리의 궁극적인 핵심이라고 주장하였고, 1987년 김형효는 ‘융이이불일(融二而不一)’라는 일원적인 원리로 원효의 화쟁방법을 풀이하였으며, 1993년 사토시케키(佐藤繁樹)는 금강삼매경론의 고찰을 통하여 원효화쟁의 논리적인 특징을 ‘무이이불수일(無二而不守一)’이라고 하였다.
최근에는, 원효가 실제로 화쟁을 하였던 사례들을 현존본에서 수집하여, 거기에서 화쟁의 방법을 귀납적으로 추출한 연구가 등장하였다. 연구에 따르면, 총67개의 화쟁사례들은 각각 ‘주장–논란–회통’이라는 구조를 대부분 가지고 있는데, 원효는 이 중 ‘회통’ 부분에서 제기된 여러 학설에 대해서 ‘5가지 유형’으로 판정을 내린다. 이 중에서 ‘여러 주장이 모두 옳다’고 판정한 경우에는 ‘단일한 기준[一門]에 의한 방법,’ ‘복수의 기준[二門]에 의한 방법’이라는 2가지 화쟁방법으로 회통한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주장이 동시에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고 판정한 경우에는 ‘언어를 초월하는 방법,’ ‘긍부에 자재한 방법,’ ‘유무에 자재한 방법,’ ‘동이(同異)에 자재한 방법’이라는 4가지 방법으로 회통한다고 한다.
셋째, “원효가 사용하는 화쟁방법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 것인가?” 화쟁론의 근거에 관한 연구는 1980년대부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88년 최유진은 ‘화쟁의 근거’와 관련하여, 분명하게 입장을 밝히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원효의 현존본에서 ‘일심사상’과 관련된 부분을 하나하나 제시하며 논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일심사상’이 원효 화쟁론의 사상적 근거라는 점을 말하고자 하였다.
이기영은 비록 상세한 논증은 하지 않았으나 원효 화쟁론의 사상적 전제와 관련하여 논하였다. 그에 의하면, 원효의 화쟁론은 반야사상에서 말하듯 제법의 실상을 통찰하여 무명(無明)을 불식하고, 유식사상에서 말하듯 모든 차별상과 대립을 넘어서서 주객(主客)의 분별이 사라지며, 불성사상에서 말하듯 중생이라면 누구나 여래의 평화롭고 자유가 충만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고 한다.
또한, 1998년 전호련은 원효화쟁론의 근거로 화엄사상을 지목하여 논하였다. 그는 원효의 화쟁론이 성립하는 근거로 일단 ‘일심’을 들고, 이러한 원효의 일심관은 진망화합의 여래장심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래성기의 화엄일심으로까지 발전하였다고 보고 있다.
한편, 최근에는 화쟁의 근거를 탐구하는데 있어서, 이러한 선행연구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원효가 실제로 화쟁한 사례들을 염두에 두면서, 원효의 교판에 등장하는 사상들을 하나씩 검토해 가는 연구가 있다. 이 연구에서는 원효 화쟁론의 근거들을 원효의 교판에 따라서 배열하고 있는데, 삼승통교의 중관사상과 유식사상, 일승분교의 일승사상과 불성사상, 일승만교의 일심사상과 화엄사상 등이 각각 화쟁론과 관련된 점을 하나하나 나열하고 있다.
Ⅲ. ‘서로 같다’는 견해
불교가 다른 종교를 만났을 때, 불교인들은 여러 가지 반응을 나타낼 수 있다. 그 반응들을 크게 구분해 보면, 대체로 엇갈린 두 가지 견해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하나는, 불교의 가르침과 다른 종교의 가르침은 ‘서로 같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의 가르침과 다른 종교의 가르침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원효는 자신의 저서에서 여러 가지 견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이 장[Ⅲ]에서는 먼저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같다’는 견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대혜도경종요 「대의」에 보면, 원효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대저, 반야는 지극한 도(道)이다. …… 그러므로 진실한 모습은 무상(無相)인 까닭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곳이 없고, 진실한 비춤는 무명(無明)인 까닭에 밝게 나타내지 않은 것이 없다. …… 이와 같이 거짓 이름과 허망한 모습이 참된 성품이 아닌 것이 없지만, 사변(四辯)과 같은 거리낌 없는 말로도 그 모습을 설명할 수 없으니, 실상반야는 현묘하고도 현묘한 것이다. 또한, 욕심의 더러움과 어리석음의 어두움이 모두 지혜의 밝음이지만, 오안(五眼)으로도 그 비춤을 보지 못하니, 관조반야는 덜어내고 또 덜어내는 것이다.
이 글에서, 원효는 반야경에 등장하는 ‘반야’의 의미를 실상반야와 관조반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진실한 모습’[實相]은 ‘특별히 정해진 모습이 없다는 것’[無相]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습을 나타내지 못한 곳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이처럼 일상적인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실상반야야 말로 ‘현묘하고도 현묘한 것이다’라고 한다. 또한, ‘진실한 비춤’[眞照]는 ‘특별히 정해진 밝음이 없다는 것’[無明]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밝게 나타내지 못한 것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이처럼 일상적인 관찰로는 보기 어려운 관조반야는 ‘덜어내고 또 덜어내는 것이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원효가 반야경에 등장하는 핵심개념인 ‘반야’의 의미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도교의 경전에 주로 사용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상반야는 ‘현묘하고도 현묘한 것이다’[玄之又玄之也], 관조반야는 ‘덜어내고 또 덜어내는 것이다’[損之又損之也]라는 표현에서, 불교와 도교는 궁극적인 차원에서 서로 밀접하게 만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생각건대, 원효는 위 인용문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불교의 진리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도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러한 점을 놓고 그가 ‘불교와 도교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서로 같다’는 생각을 드러낸 것으로 단정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실상반야’와 ‘관조반야’와 같이 차원 높은 개념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불교적 표현을 쓰지 않고 그 대신 도교적 표현을 썼다는 점을 보면, 단순히 불교와 도교를 같이 공부하였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즐겨 사용하고 있다기보다는, “불교의 진리와 도교의 진리가 보다 깊은 차원에서 서로 통한다는 생각을 드러낸 것은 아닌가?” 느껴진다.
그렇다면, 원효가 ‘불교를 포함한 모든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서로 같다’는 생각을 ‘명확하게’ 드러낸 곳이 있는가? 법화종요 「소승법(所乘法)」에 보면 이러한 생각을 볼 수 있다.
니건자경 「일승품(一乘品)」에서 부처님께서 문수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내 국토에는 상키야학파, 자이나교 등이 있다. 그들은 다 여래의 주지력(住持力)으로 말미암아 방편으로 이러한 여러 가르침[外道]들로 나타난 것이다. 선남자들이여, 그들은 비록 갖가지 다른 가르침의 모양을 하고 나타나지만, 다 같이 불법이라고 하는 다리를 건너는 것이니, 별도의 또 다른 다리가 없기 때문이니라.”
이 글에서, 원효는 니건자경을 인용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불교와 다른 종교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즉, 니건자 등 다른 종교는 모두 여래의 주지력으로 말미암아 방편으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비록 그들 다른 종교가 불교와는 다른 모양을 하고 있을 지라도 ‘건너는 다리’[수행의 방법]는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결국 불법이라는 다리를 건너는 것이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원효가 이 글에서 ‘불교와 다른 종교는 궁극적으로 서로 같다’는 점을 분명하게 표명하였다는 점이다. 비록 여래가 여러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이러저러한 방편으로 다른 종교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는 하지만, 불교와 다른 종교는 근본적으로 서로 같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원효는 어떠한 근거에서 불교와 다른 종교는 궁극적으로 서로 같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어지는 글에서 그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생각건대, 이러한 글에 의하여 불법의 오승(五乘)과 여러 선(善) 그리고 다른 가르침의 갖가지 다른 선 등 이러한 모든 것이 다 일승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 불성을 의지한 것이고 다른 본체가 없기 때문이다. 법화론에는 이 뜻을 밝혀서 말하기를, “어떤 것을 법의 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이치에 두 가지 체가 없으니, 두 가지 본체가 없다 함은 무량승이 다 일승이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 글에서, 원효는 어찌하여, “불교와 다른 종교는 모두 ‘일승’ 혹은 궁극적인 가르침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즉, 법화론의 말씀과 같이, 불교와 다른 종교는 모두가 다 궁극적인 가르침[一乘]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가르침이 불성을 의지하고 있고, 모든 가르침의 본체가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글에서 중요한 메시지는, 불교와 다른 종교가 궁극적으로 같다는 결론을 내리는 이유가, 첫째 불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가 불성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둘째 모든 종교의 본체가 서로 다르지 않고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생각건대, 첫 번째 이유인, ‘불성이 같다’는 말은, ‘모든 중생이 다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성품을 지니고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함께, 불자라면 누구나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사실, 모든 중생들이 이러한 불성을 지니고 있기에, 모든 가르침이 불성에 의지할 수 있고, 그러기에 마침내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같은 가르침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불(佛)’이라는 말은 불교에서만 사용하는 용어이므로, 다른 종교인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이유가 쉽게 가슴에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두 번째 이유인, ‘본체가 같다’는 말은, 원효가 불교와 다른 종교의 관계를 보다 심도 있는 차원에서 보고,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우리가 보통 ‘체(體)’라고 하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깊은 내면적인 측면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것은 보통 겉으로 드러난 것, 즉 현상이 아닌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본체가 같다’는 말은, ‘겉으로 드러난 차원’에서 보면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다른 가르침으로 보이지만, ‘보다 심도 있는 차원’에서 보면 불교와 다른 종교는 모두 궁극적으로 같은 가르침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Ⅳ. ‘서로 다르다’는 견해
위에서, 원효는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같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원효의 저서에는 그와 반대로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다르다”는 견해로 추정되는 구절도 발견할 수 있다. 원효는 대혜도경종요의 「대의」에서 ‘반야’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요제(堯帝)와 순제(舜帝)는 덕이 천하를 덮고 주공과 공자는 모든 선인들 중의 제일이다. (비록) 그들이 모든 천인(天人)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지만, 감히 하늘의 법칙[天則]을 거스르지는 못하였다. 이제, 우리의 법왕인 ‘반야’라는 참된 경전은, 모든 천인들이 받들어 우러러 믿지만, 감히 부처님의 가르침[佛敎]을 어기지는 않는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저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어찌 한 날에 논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글에서, 원효는 반야경에 등장하는 ‘반야’의 의미가 매우 깊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유교의 가르침과 불교의 가르침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요, 순, 주공, 공자와 같은 ‘유교의 성현들’은, 비록 모두 훌륭한 분들이어서 그 덕이 천하를 덮고 있지만, 그들이 가르침을 베풀 때 감히 하늘의 법칙을 거스르지는 못하였다. 이에 비하여, 진리를 말하는 이 참된 경전인 ‘ 반야경’은, 비록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믿는 경전이지만, 감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지는 못한다고 한다. 이처럼, 유교의 성현들은 하늘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하고, 불교의 훌륭한 경전인 반야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지 못한다는 점에서, ‘유교의 가르침과 불교의 가르침은 서로 성격이 다르다’고 한다.
생각건대, 대혜도경종요은 반야경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일종의 개론서와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원효는 이 책의 핵심을 담은 「대의」를 서술하는 데 있어서, 반야경의 핵심사상을 선명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반야경의 내용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무아 내지 공의 사상을 소박하지만 꾸밈없이 그대로 드러낸 경전이다. 이처럼 불교의 핵심진리를 드러내는 반야경의 사상을 보다 뚜렷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현세적인 삶에 많은 무게 비중을 두는 당시의 유교사상을 대비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다르다’는 생각은 비단 원효만의 생각은 아니다. 이러한 생각의 근원은, 불교를 이 세상에 연 석가모니부처님 자신의 생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중아함경 「도경(度經)」에 보면, 석가모니부처님은 당시 전통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브라만교와 새로운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혁신사상들을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여 논하고 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부처님은 자신의 가르침[佛敎]과 다른 가르침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도경」에서 말하는 외도 중에서, 제1유형은 숙작인론(宿作因論; Pubekatahetu-vāda)을 말하는데, 이 설에서는 인간이 행한 고, 락, 비고비락은 모두 인간이 과거에 행한 행위의 결과라고 한다. 제2유형은 존우론(尊祐論; Īssaranimmānahetu -vāda)을 말하는데, 이 설은 자재신(自在神)의 자재력에 의해서 모든 존재와 현상이 전개되었다고 하는 브라만교의 전통사상을 말한다. 제3유형은 무인무연론(無因無緣論; Ahetuapaccaya -vāda)을 말하는데, 이 설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원인이 없이 발생하여 일어난다고 하여 행위의 인과를 부정한다.
이와 같은 외도에 대하여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 중에서 만일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사람의 하는 바는 모두 다 숙명을 원인으로 한다”고 보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곧 그에게 가서, “여러분, 진실로 사람의 하는 바는 모든 것이 다 숙명을 원인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고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까?”하고 물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렇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다 생명을 죽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다 숙명으로 이루어진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분은, 모두 주지 않는 물건을 훔치고, 사음을 하게 되며, 거짓말을 하게 되고, 내지 사특한 소견을 가진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다 숙명으로 이루어진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모든 것이 다 숙명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진실하다고 여긴다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에 대해서 도무지 욕망도 없고 방편도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에 대해서 진실 그대로 알지 못한다면, 곧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를 잃게 되나니, 그렇게 되면 제대로 교화할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이 글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은 ‘숙명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숙명론에 따르면, 행위 당사자에게 그 행위의 책임을 물을 수가 없으므로, 도덕적으로 타락할 우려가 있고, 수행을 할 필요도 없게 된다고 한다. 즉, 모든 것이 숙명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면, 모든 사람의 뜻과 무관하게 거짓말을 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혹은 심지어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니, 이러한 점은 도덕적인 측면에서 중대한 문제가 초래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모든 것이 숙명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면, 수행자의 의지와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수행의 결과가 일어나므로, 모든 사람들을 교화하고자 노력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을 한 뒤에, 부처님은 이러한 취지의 지적을 ‘존우론’과 ‘무인무연론’에 대해서도 계속한다. 그리하여,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숙명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신의(神意)에 의해서 이루어지거나, 아무런 이유 없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행위자 각자의 책임이 아닌 것으로 세상의 모든 일들이 이루어진다면,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되거나 진지한 수행을 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며 우려를 표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외도의 문제점을 지적한 뒤에, 부처님의 가르침인 중도에 입각한 연기설에 대해서 설명을 해 나아간다.
생각건대, 당시 불교는 신흥종교로서 내외에서 많은 도전에 직면하였다고 추정된다. 그러한 도전을 맞이하여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불교 고유한 가르침을 내외에 천명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기존 다른 종교의 가르침 중의 일부를 예로 들어가며 거기에 드러난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불교의 입장에서 제시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다른 점이 부각되었다고 이해된다.
Ⅴ. 원효의 최종입장
위에서,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원효가 서로 상반된 입장을 표명하였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어느 곳에서는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같다’고 하였고, 다른 곳에서는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다르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그의 궁극적인 입장은 과연 무엇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여기에서는, ‘Ⅱ. 원효의 화쟁론’에서 기술한 순서에 따라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첫째 본고의 논점에 대해서 논의한 화쟁사례의 내용을 검토하고, 둘째 이 화쟁사례가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 회통되었는가를 살펴본 뒤에, 셋째 이러한 회통방법이 내용적으로 어떠한 사상적인 배경을 가지고 등장하였는지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먼저, 원효가 남긴 ‘화쟁사례’ 중에서, 우리는 이 논점에 부합하는 의미심장한 논의를 발견할 수 있다. 법화종요 「묘용(妙用)」에서, 그는 “인천승(人天乘)은 일불승(一佛乘)에 포함되는가?”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묻는다. 방편교(方便敎) 가운데 인승(人乘)과 천승(天乘)이 있는데, 어찌하여 이 이승은 회통을 하지 아니 하고, 오직 저 삼승만을 회통하였는가?
이 글에서, 아직 각설의 주장이 뚜렷하게 전개되고 있지는 않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불교 이외의 ‘인천승’이라는 가르침이 불교의 궁극적인 가르침인 일불승에 ‘포함될 수 있다는 설’과 ‘포함될 수 없다는 설’로 대립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원효는 2가지의 대답을 하고 있는데, 이 중에 첫 번째 대답을 들어본다.
대답한다. ‘삼승을 회통한다’란 말이 또한 2가지를 포함하였다. 왜냐하면, 법화교 가운데 삼승을 설한 것에 2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3가지 차의 비유로 「비유품」에 나온 것이요, 둘째는 3가지 풀의 비유로 「약초유품」에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인승과 천승의 이승을 합하여 소승(小乘)으로 삼으니 이것은 소약초와 같고, 성문과 연각을 중승(中乘)으로 삼으니 이것은 중약초와 같으며, 저 별교에 의하여 발심한 보살은 대승(大乘)이라고 말하니 대약초와 같다. (바로) 이러한 삼승을 회통하면 곧 오승(五乘)을 포함하게 된다.
이 글에서, 원효는 ‘인천승이라는 가르침이 삼승에 포함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법화경에는 삼승을 말한 것에 2가지가 있는데, 「비유품」에 나오는 3가지 차의 비유와 「약초유품」에 나오는 3가지 풀의 비유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약초유품」에 나온 3가지 풀의 비유에서, 비유로 말한 소약초(小藥草)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인승과 천승의 이승을 합한 소승(小乘)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원리에 의하여 ‘인천승은 당연히 일불승에 포함된다’고 말하고 있다.
생각건대,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에게 궁극적으로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은 인생과 우주에 관한 영원한 진리일 것인데, 불교와는 다른 형태를 가진 가르침에서도 이와 유사한 가르침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 이외의 다른 가르침인 인천승이 불교의 궁극적인 가르침인 일불승에 포함된다”고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불교 이외의 가르침이 궁극적인 불교의 가르침에 포함된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궁극적인 측면에서 불교와 다른 종교의 가르침은 서로 같다”는 취지를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다음, 이 논점에 대한 원효의 두 번째 대답을 들어본다.
그러나 저 인천(人天)은 ‘원인’을 회통할 수 있지만 ‘결과’를 회통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결과’는 무기(無記)이어서 일승의 원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원인’ 가운데 선법에는 2가지의 공릉(功能)이 있는데, ‘보인(報因)’의 공릉은 받아서 다함이 있기 때문에 회통하지 못하고, ‘등류인(等流因)’과 같은 것은 받아서 다함이 없기 때문에 회통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 원효는 ‘인천승의 내용 중에서는 일불승에 포함되는 것도 있고, 포함되지 않는 것도 있다’고 한다. 포함되는 것으로는, 원인 중에서 등류인을 든다. 왜냐하면, 등류인은 선인선과(善因善果)나 악인악과(惡因惡果)처럼, 원인과 같은 결과를 받게 되는 원인을 말하는 것이어서, 받아들이는데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는 첫째, 원인 중에서 보인(報因)을 든다. 왜냐하면, 보인은 즐거움과 괴로움의 결과를 받는 선업과 악업의 원인을 말하는 것이어서, 받아들이는데 다함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결과도 포함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결과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무기(無記)이어서 일승의 원인을 짓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생각건대, 오늘날 불교와 다른 종교에는, 현실적으로, ‘등류인’처럼 공통적인 요소를 가지는 부분도 있으나, ‘보인’과 ‘결과’처럼 이질적인 요소를 가지는 부분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천승의 내용에는, 불교의 궁극적인 가르침인 일불승에 포함되는 면도 있고 포함되지 않은 면도 있다”라고 말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불교와 다른 종교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부분과 상이한 부분을 지적한 것을 볼 때, “불교와 다른 종교의 가르침은 서로 다르다”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상과 같이, 원효는 “인천승은 불교의 궁극적인 가르침인 일불승에 포함되는가?”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궁극적인 측면에서 보면 인천승은 일불승에 포함된다.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인천승은 일불승에 포함되는 점도 있고 포함되지 않은 점도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필자는 “궁극적인 측면에서는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같다.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는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다르다”고 해석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본 화쟁사례에서 원효는, 제3장[Ⅲ]에서 언급한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같다” 는 견해와 제4장[Ⅳ]에서 언급한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다르다”는 견해를 서로 화해시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양설을 회통하고 있는 본 화쟁사례의 경우에, “원효는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화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제2장[Ⅱ]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러 가지 화쟁사례에서 원효는 제기된 여러 주장에 대해서 5가지 유형으로 판정을 내리고 있다. 그런데, 본 화쟁사례에서는,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같다’는 설과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다르다’는 설이 모두 옳다”고 판정하고 있다. 따라서, 본 사례는 그 중에 [유형1] ‘여러 주장이 모두 옳다’는 판정을 내린 경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유형1] ‘여러 주장이 모두 옳다’는 판정이 내려진 경우에, 원효는 일반적으로 2가지 방법으로 회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첫째는 ‘단일한 기준[一門]’에 의해서 회통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원효가 회통의 이유를 밝히는데 있어서 ‘오직 한가지의 기준’만을 제시한 뒤에, “제기된 여러 주장들은 모두 이 기준에 부합하기 때문에 모두 옳다”라고 회통하는 방식이다. 둘째는 ‘복수의 기준[二門]’에 의해서 회통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회통의 이유를 밝히는데 있어서 ‘서로 다른 2가지 기준’을 제시한 뒤에, “제기된 주장들은 각각의 기준에 부합하기 때문에 모두 옳다”라고 회통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본 화쟁사례는 위의 2가지 방법 중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회통이 된 것일까? 본 사례를 내용에 중점을 두어서 다시 검토해 보면, 비록 문자로 표현되지는 아니하였으나 본 화쟁사례에는 ‘내용상’ 2가지 기준이 제시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즉, 내용상 ‘궁극적인 측면’이라는 기준에 의해서 첫 번째 대답이 도출되었고, ‘현실적인 측면’이라는 기준에 의해서 두 번째 대답이 도출된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먼저 ‘궁극적인 측면’이라는 기준에 의해서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같다’는 결론을 내렸고, 다음 ‘현실적인 측면’이라는 기준에 의해서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다르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판단된다. 이처럼, 2가지 기준에 의해서 대답이 각기 달라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본 화쟁사례는 ‘복수의 기준[二門]에 의한 방법’으로 양설을 회통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복수의 기준[二門]에 의한 방법’으로 회통된 본 화쟁사례의 경우에, “원효는 어떠한 사상적인 근거에서 양설을 회통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선행연구에 의하면, 제2장[Ⅱ]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거의 대부분의 불교사상이 원효 화쟁론의 사상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삼승통교(三乘通敎)의 중관사상과 유식사상, 일승분교(一乘分敎)의 일승사상과 불성사상, 일승만교(一乘滿敎)의 일심사상과 화엄사상 등이 모두 원효의 화쟁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 중에서, 과연 어떠한 사상이 본 화쟁사례에 특히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일까?
이점과 관련하여, 본 화쟁사례에서 특히 필자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원효가 결론에 이르기 전에 내용상 ‘궁극적인 측면’을 하나의 기준으로 하고, ‘현실적인 측면’을 다른 하나의 기준으로 한 뒤에, 이것을 바탕으로 판정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차원’과 ‘현실적인 차원’이라는 2가지 차원이라는 것이, 사실은 “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일심(一心)과 이문(二門)의 관계에 관한 설명’을 염두에 두고 원효가 이것을 원용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들게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대승기신론은 다른 여타의 경론에 비하여 원효에게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경론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원효를 원효이게끔 만든 그 깨달음의 노래가 사실은 대승기신론에 있는 구절과 매우 흡사하고, 원효의 그 방대한 저술에서 대승기신론에 대한 주석서가 가장 많은 종류를 가지고 있으며, 원효의 대표적인 저서로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가 인정하는 기신론소가 바로 대승기신론에 대한 주석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대승기신론의 핵심내용에는 바로 ‘일심과 이문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러니까, 대승기신론에서는 먼저 대승을 법(法)과 의(義)로 나눈 다음에, 다시 법을 중생심[一心]이라고 하고, 이것을 진여문(眞如門; tathātā paryāya)과 생멸문(生滅門; utpāda nirodha paryāya)이라는 이문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이 이문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이문’의 관계에 대해서, 원효는 대승기신론소에서 해설하기를, 일심의 고요한 상태를 심진여문(心眞如門)이라고 하고, 일심의 생멸한 상태를 심생멸문(心生滅門)이라고 한다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진여문’은 ‘본질’로서 이법(理法)을 가리키지만, ‘생멸문’은 ‘현상’으로서 사법(事法)을 가리킨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문은 서로 원융상통해서 그 한계를 엄격히 나눌 수가 없으니, 각각 모든 이법과 사법을 포함하여 서로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이와 같은 점들을 고려해 볼 때, 본고의 주제와 관련해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첫째, 본 화쟁사례에서 말한 ‘궁극적인 측면’이라는 것이 사실은 ‘일심의 고요한 상태, 즉 심진여문의 경지’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만일 그러하다면, ‘궁극적인 차원’에서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관계를 재점검해 볼 때, 다른 종교의 가르침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불교와 마찬가지로 궁극적인 가르침[一乘]이라는 큰 틀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고, 설령 그들의 주장이 실제로 궁극적인 가르침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은 궁극적인 가르침으로 다가가기 위한 방편으로 간주할 수 있기에,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같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둘째, 본 사례에서 말한 ‘현실적인 차원’이라는 것이 사실은 ‘일심의 생멸한 상태, 즉 심생멸문의 경지’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현실적인 차원’에서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관계를 재점검해 볼 때, 종교는 현실적으로 역사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각각의 종교가 속해 있는 서로 다른 사회적 문화적 환경이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공통적인 사항과 상이한 사항이 존재하게 되고, 그 결과,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셋째, 궁극적인 차원의 출처인 ‘진여문’과 현실적인 차원의 출처인 ‘생멸문’은 서로 원융상통해서 그 한계를 엄격히 나눌 수가 없는 까닭에, ‘궁극적인 차원’과 ‘현실적인 차원’도 또한 원융상통하여 그 한계를 엄격하게 나눌 수가 없게 된다. 그리하여, 어느 하나가 성립된다고 하여 다른 하나가 성립되지 않는 법은 없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불교와 다른 종교가 같다’는 견해와 ‘불교와 다른 종교가 다르다’는 견해는 서로 다른 견해를 해치지 않고 동시에 조화를 이루어 성립하게 된다.
Ⅵ. 맺음말
지금까지,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 대해서 원효는 어떠한 입장에 있는가?”라는 문제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그의 견해는 대체로 3가지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었는데, 첫째는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같다’는 것이며, 둘째는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고, 셋째는 ‘궁극적인 측면에서는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같지만,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첫째, 원효는 법화종요에서 ‘불교와 다른 종교는 궁극적으로 서로 같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하였다. 즉, 비록 여래가 여러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이러저러한 방편으로 다양한 가르침의 모습을 나타내지만, 불교와 다른 종교는 근본적으로 서로 같다. 왜냐하면, 불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가 하나같이 불성에 의지하고 있으며, 모든 종교의 본체는 서로 다르지 않고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원효는 대혜도경종요에서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다르다’는 생각을 표현하였다. 즉, 그는 반야경의 의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언급을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불교의 가르침과 유교의 가르침은 서로 그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드러내었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언급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당시 인도의 전통사상인 브라만교와 혁신사상인 6사외도의 가르침이 자신의 가르침과 다르다고 말한 것을 연상케 해 주었다.
셋째, 원효는 위와 같은 상반된 견해에 대해서 하나의 화쟁사례를 갖추어 결론적으로 언급하였다. 즉, 그는 “궁극적으로는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같다’는 견해가 맞고, 현실적으로는 ‘불교와 다른 종교는 다르다’는 견해가 맞다”고 하여, 양쪽의 입장을 화해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궁극적으로’와 ‘현실적으로’라는 ‘복수의 기준[二門]’이라는 방법으로 화쟁을 하였는데, 이러한 기준들은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일심과 이문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그가 이것을 원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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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Wonhyo's Viewpoint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Buddhism and Other Religions
- Focused on the Wonhyo’s Theory of Harmonization –
Kim, Yeongil
Dongguk University
On this paper, you can hear the opinion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Buddhism and other religions' which were submitted by Wonhyo who may be the representative of Korean Buddhism. If we summarize his attitudes on this issue, they are in this way.
Firstly, Buddhism and other religions are same. In the Essentials of the Lotus Sutra, he suggested that in order to save the sentient beings, Buddhas produced many kinds of teachings in the world. And then, he concluded that the teachings of Buddhism are fundamentally same to the teachings of other religions.
Secondly, Buddhism and other religions are different. In the Essentials of the Great Sutra on Perfection of Wisdom, he pointed to the fact that characteristics of Buddhism are different from the characteristics of Confucianism. Then, his opinion is very similar to the Sakya-muni Buddha's teaching which was said to the followers of other religions in those days.
Finally, he harmonized the above two opposed assertions, saying that the former opinion is right at the aspect of nature and the latter opinion is right at the aspect of phenomenon. Here, he used 'The Harmonizing Method of Two Standards' which have 'at the aspect of nature' and 'at the aspect of phenomenon' in this case. And it is inferred that those two standards are from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one mind and the two aspects in the Treatise on the Awakening of Mahayana Faith.
*Key words
Religion, Buddhism, The Relationship of Religions, Wonhyo, The Theory of Harmoniz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