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김수환(金壽煥·87) 추기경이 2009년 2월 16일 오후 6시12분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善終)했다. 지난해 7월 노환으로 입원한 김 추기경은 10월 초 한때 호흡곤란으로 위독했다가 의식을 회복했지만 가슴에 꽂은 링거주사로 영양을 공급받아 왔다. 의료진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으니 무리하게 생명을 연장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김 추기경은 전날 갑자기 폐렴 증세를 보였고 이날 오후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다.
김수환 추기경의 일생은 그가 엄혹했던 유신정권 말기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 지은 자작시 그대로였다. 종교인 김수환은 남들이 모두 우러러보는 추기경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과의 만남과 합일(合一)을 갈구한 소박한 신앙인이었다.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 집무를 중단하고 피정(避靜·성당이나 수도원에서 묵상이나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살피는 일)을 떠났는데 하느님을 잘 만날 수 없어서 얼굴이 까맣게 탔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이 단순한 종교지도자를 넘어 온 국민이 존경하는 인물이 된 것은 천주교 신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형제’로 삼아 그들을 사랑하고 봉사하고 나누는데 몸과 마음을 바쳤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격동이 몰아쳤던 지난 40년간 그는 우리 사회가 중심을 잡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70~1980년대 민주주의와 인권이 억압받던 군사정권 시절에는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대변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우리 사회에 반미친북(反美親北) 경향이 강해지는 점을 우려하고 북한의 인권 개선과 체제 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지난해 6월, 86회 생일을 맞아 "빨리 사라져야 하는데 아직도 사라지지 못하고 하느님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며 차분하게 마지막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입원 후에는 문병 온 사람들과 매일 병실에서 미사를 올리며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89년 세계성체대회 때 장기기증을 약속했으며, 선종 직후인 이날 오후 7시20분 강남성모병원에서 안구 적출 수술을 마쳤다. 김 추기경이 남긴 눈은 두 사람에게 시술됐다. 김 추기경의 유해는 이날 밤 명동성당으로 옮겨져 본당에 마련된 유리관 안에 안치됐다.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지며 장지는 용인 천주교 서울대교구 성직자 묘역이다./조선
[2010년] 모태범, 동계 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사상 첫 금메달
← [2010밴쿠버]모태범, 빙속사상 첫 금메달
기대주 모태범(21.한국체대)이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동계올림픽에서 사상 첫 금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뤘다. 모태범은 16일(한국시간) 캐나다 리치먼드 올림픽 오벌에서 벌어진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1, 2차 시기 합계 69초82를 기록, 일본의 나가시마 게이치로(69초98)를 0.16초 차로 제치고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동메달은 가토 조지(일본.70초01)에게 돌아갔다. 이로써 모태범은 한국이 처음 참가했던 1948년 생모리츠 동계올림픽 이후 무려 62년 만에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에서 처음으로 금메달을 처음 목에 건 주인공이 됐다. 또한 일본 식민지였던 1936년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처음 올림픽 무대를 밟았던 김정연 이후 무려 74년 만에 수확한 값진 금메달이다. 더구나 모태범은 자신의 생일날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역사를 새롭게 써 내린 동시에 생애 첫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최고의 영광을 맛봤다. 말 그대로 기적과 같은 ’깜짝’ 금메달이었다. 1,000m와 1,500m가 주력 종목인 모태범은 2009-2010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시리즈 500m 세계랭킹에서 14위에 머무르며 ’메달 후보’에도 조차 들지 못했다. 그러나 밴쿠버 입성 직전 캘거리에서 치른 최종 전지훈련 때부터 페이스를 잔뜩 끌어올린 모태범은 실전에서 이강석과 이규혁에 맞춰진 포커스를 한순간에 되돌렸다. 모태범은 1차 시기에서 총 20조 가운데 13조에서 월드컵 랭킹 9위의 강호 얀 스미켄스(네덜란드)와 함께 경기를 펼쳤다. 출발신호와 함께 달려나간 모태범은 네덜란드 관중의 일방적 응원을 극복하면서 초반 100m를 9초63에 주파했고, 나머지 구간에서 역주를 펼쳐 34초92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모태범의 기록은 앞서 경주를 펼친 23명 가운데 가장 빠른 기록이었다. 순간 관중석에선 ’낯선 선수’의 ’깜짝’ 기록에 큰 환호를 보냈다. 모태범은 18조에서 경기를 치른 핀란드의 미카 포탈라(34초86)에 선두를 내줬지만 여전히 메달 가능성을 품은 채 2차 시기를 준비했다. 정빙기 고장으로 경기가 1시간 30분 가량 지연되는 악조건 속에 2차 시기에 나선 모태범은 19조에서 개최국 캐나다의 간판이자 세계기록(34초03) 보유자인 제레미 워더스푼과 같은 조에서 힘든 경기를 펼쳐야 했다. 워더스푼을 연호하는 캐나다 홈팬들의 함성 속에 아웃 코스에서 스타트 자세를 잡은 모태범은 출발 총성과 함께 반사적으로 튀어나갔고, 초반 100m에서 9초61을 찍으면서 워더스푼(9초69)을 제쳤다. 마지막 100m를 남기고 워더스푼과 거리를 벌린 모태범은 34초90로 결승선을 통과, 1, 2차 시기 합계 69초82로 중간 순위 1위로 올라섰다. 동메달을 확보한 순간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1개조. 1차 시기 1위였던 미카와 가토가 맞붙었고, 이들이 나란히 1, 2차 시기 합계 70초04와 70초01에 머물면서 극적으로 모태범이 금메달의 주인공으로 확정됐다. 모태범은 “그동안 언론에서 무관심했던 게 오히려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된 것 같다”라며 “사실 오늘이 내 생일이다. 내가 나한테 생애 최고의 생일 선물을 한 것 같아 너무 기분이 좋다”라고 소감을 밝혔다./조선
[2009년] 고(故) 안익태 선생 부인 롤리타 안(安) 별세
← 애국가를 작곡한 고(故) 안익태 선생의 부인 롤리타 안.
'애국가'를 작곡한 고(故) 안익태(安益泰·1906~1965) 선생의 부인 마리아 롤리타 안(본명:마리아 돌로레스 탈라베라) 여사가 16일 오전(현지시각) 스페인 마요르카 섬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유족은 아나 세실리아, 엘레나, 레오노르 등 3녀.
스페인 출신인 고인은 1946년 마요르카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부임한 안 선생과 결혼했고, 1965년 선생이 59세를 일기로 작고한 뒤에도 한국 국적을 갖고 있었다.
2005년에는 한국을 방문해 "한국은 남편이 물려준 조국"이라면서 '애국가'의 저작권을 한국 정부에 무상으로 기증했고, 2006년엔 안 선생이 사용하던 피아노·지휘봉 등 150점의 유품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고인은 2002년 한·일 월드컵 8강전인 한국·스페인전을 앞두고 "나는 한국사람이고 한국팀 승리를 바라는 게 당연하다"고 말해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었다./조선
외교통상부는 (7월)16일 탈라베라 여사의 유해를 국립현충원 내 안익태 선생 묘에 합장하기 위해 유족들이 오는 19일 방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딸라베라 여사의 유해는 현충원 내 안 선생의 묘에 합장되며 합장식은 21일 오전 10시30분 거행될 예정이다./조선 2009. 7.16
[2007년]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전비서관 김유찬씨 기자회견
←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비서관 출신인 김유찬씨가 16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국회의원 시절 비서관을 지낸 김유찬(46)씨는 16일 기자회견을 갖고 “이 전 시장이 1996년 총선 후 2년에 걸친 재판 과정에서 나에게 위증의 대가로 총 1억2500만원을 줬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 전 시장 당선 후 선거비용을 6억원 초과 지출했다고 폭로한 후, 이 전 시장에게서 1만8000달러를 받고 가족과 함께 해외로 도피했던 인물이다. 이 전 시장은 그와 함께 ‘범인 도피’ 공모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위증의 대가로 1억여원이 오갔다는 주장은 처음 제기된 것이다.
김씨는 이날 여의도 전경련회관에 있는 자신의 회사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년간 공판 때마다 허위진술을 주기적으로 교사 받았다. ‘이 질문은 이렇게, 저 질문은 저렇게 답변하라’는 식이었다”며 “공판이 열릴 때마다 2~3일 전 K보좌관, J보좌관을 만나 돈을 받았다. 한 번에 200만원, 150만원, 기분 내키면 300만원도 줬다”고 말했다. 그는 돈을 받은 이유에 대해 “2년간 취직이 안 돼 호구지책이 없었다”고 했다.
김씨는 ‘물증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 쪽에서 지능적으로 현금으로만 거래해서 전혀 물증이 없다”고 말했다. 이 전 시장측은 김씨의 이 부분에 관한 주장에 대해 “김씨가 폭로하고 결정적인 증언을 해서 유죄 판결이 난 사건이다. 그가 위증을 했다면 유죄가 됐겠느냐”고 했다.
김씨는 이날 이명박 전 시장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했다고 했다. 그는 “제가 98년 지방선거에서 영등포구청장에 출마했을 당시, 지난 일(폭로)을 사과하려는 목적에서 이 전 시장의 서초동 사무실을 방문했다”고 밝힌 뒤 “사과하러 방문한 자리에서조차 이 전 시장은 참을 수 없는 모욕적 표현을 했다”고 했다. 그는 “이 전 시장과 회의실에 마주앉게 됐는데, 잡아먹을 듯한 얼굴로 ‘왜 왔어 이 ××야. 너를 목에다가 돌을 달아 인천 앞바다에 죽이자는 얘기까지 나오는 것을 내가 말렸다’라는 표현으로 나에게 적의를 표시했다”면서 “그 당시 분명한 협박으로 느꼈다”고 했다. 그는 “살해 협박으로 느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했다.
대법원 1부는 2008년 9월 11일 공직선거법 위반, 무고죄,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김씨에 대해 징역 1년2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김씨는 1996년 선거법 위반사건과 관련해 자신에게 법정에서 위증을 하도록 시키고 그 대가로 1억2000만원을 제공했다는 허위사실을 공표한 혐의를 받고 있다.
[1981년] 요한바오로2세(Joannes Paulus II), 아시아순방 등정
← 요한바오로2세
교황 요한 바오로2세(Joannes Paulus II, 1920~2005 본명은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폴란드어: Karol Józef Wojtyła))가 1981년 2월 16일 즉위후 9번째의 해외여행인 극동방문길에 올랐다. 교황은 아시아순방에 나서기 전날인 15일 성베드로광장에 모인 5만명의 군중들에게 행한 일요미사 강론을 통해 자신의 이번 아시아방문 목적은 "세계평화의 대의를 진착시키고 가톨릭 신도들의 신앙심을 돈독하게 하는데 있다"고 말했다.
12일간 총 3만3천km를 여행한 이번 극동방문에서는 파키스탄 카라치에 첫 기착해 필리핀, 괌을 거쳐 일본 등 아시아 등지를 방문했다. 이번 극동여행은 요한 바오로2세와 아시아의 첫 접촉이 됐다. 일본을 마지막으로 방문을 끝낸 교황은 알레스카 앵커러지에 기착, 27일 귀국길에 올랐다. /조선
[1960년] 시인 기형도(奇亨度) 출생
1960년 2월 16일 ~ 1989년 3월 7일
옹진군 연평도에서 공무원인 부친의 막내로 태어났다. 1979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여 문학동아리 '연세문학회'에 입회한 것을 계기로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1985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고,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가 당선되었다.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기자로 일하며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1989년 시집 출간을 준비하던 중 종로의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뇌졸중으로 알려져 있다. 만 스물 아홉의 나이. 요절이었다. 같은 해 5월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발간되었으며, 유고시집의 제목은 평론가 김현이 정했다. 현재 경기도 안성에 묻혀 있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그의 작품 세계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일컬었다. '그의 시가 그로테스크한 것은, 타인들과의 소통이 불가능해져, 갇힌 개별자의 비극적 모습이 마치 무덤 속의 시체처럼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는 데에 있다. 시인은 그의 모든 꿈이 망가져 있음을 깨닫는다.' (《입 속의 검은 잎》의 해설에서 발췌) 그의 시는 낯설고 우울하다. 어두운 이미지, 고독과 죽음에 직접 연결된 이미지들이 흔하게 쓰인다. 하지만 먼 곳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현실의 세계를 평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자주 이야기한다.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風病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 매셨다.' ('위험한 家系 · 1969'에서)
'열무 삼십 단을 이고/시장에 간 우리 엄마/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아주 먼 옛날/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 생각')
'엄마 생각'에서 '~찬밥처럼 방에 담겨'와 같은 표현은 신선하게 느껴지면서도 무척이나 현실적이다. 어린 시절 혼자서 집을 지키며 엄마를 기다려 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그 정서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한편 우리는 조용한 서정성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시는 어둡고 우울하지만 결코 폭력적이지 않다. 처연하게 느껴지거나, 심지어 담담하기까지 한다.
《입 속의 검은 잎》이후 1990년에는 소설, 편지, 단상 등이 수록된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이, 1999년에는 《입 속의 검은 잎》이후 발견된 미발표 시 16편과 그 주변 사람들의 글을 담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가 출간되었다. 1999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전집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1964년] 빌리 브란트(Brandt, Willy), 서독 사회민주당 당수에 취임
브란트(1913~1992)는 16세 때에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하여 사회주의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33년 나치스 정권이 성립하자 노르웨이로 망명하여 W.브란트(본명 Herbert Ernst Karl Frahm)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후 나치스가 노르웨이를 점령함에 따라 다시 스웨덴으로 이주, 그곳에서 신문기자가 되어 반(反)나치스 운동가로서 활약하였다. 전후에는 노르웨이 국적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을 취재하기 위하여 귀국, 이어 주(駐)베를린 노르웨이 외교대표부에서 근무하였다.
1948년 독일 국적을 회복하고, 1949년 사회민주당 소속의 서베를린 시의회의원으로서 정계에 진출하여, 1957년 서베를린 시장에 취임하였다. 1964년 사회민주당 당수가 되었으며, 1966년 기독교민주동맹(CDU)과의 연립내각에서 외무장관, 1969년 총선거 후 자유민주당(FDP)과의 연립내각 성립에 성공하여 수상이 되었다. 이후 독소조약 체결 등 소련·폴란드·동독을 중심으로 ‘동방외교’를 추진, 동서의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197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동독을 국가로 인정, 양국의 안정에 기여하였으나, 1974년 동독 스파이사건으로 사임하였다. /naver
[1959년] 카스트로(Castro, Fidel) 쿠바 대통령에 취임
카스트로는 1945년 아바나대학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대학 재학 때부터 정치활동을 하였으며, 1947년 도미니카공화국에 독재자 트루히요를 타도하기 위하여 침공한 일도 있다. 1948년 콜롬비아의 보고타에서 발생한 도시폭동사건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53년 7월 동지 156명과 함께 쿠바의 산티아고데쿠바에 있는 몬카다군 병영를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55년 특사로 풀려나 아바나로 돌아오자마자 멕시코로 망명, F.바티스타 타도계획을 세웠다. 1956년 86명의 동지들과 함께 원정에 나서 오리엔테주(州) 시에라마에스트라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전개, 1959년 2월 바티스타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독재정권을 세워 총리가 되었다. 총리에 취임한 후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자본을 접수하는 등 사회개혁을 진행하였으며, 그 해 9월 제1차 아바나선언을 발표하여 라틴아메리카 해방을 제창하였다. /naver
[1958년] KNA여객기 ‘창랑호’ 피랍
← 납북된 ‘창랑호’의 모습.
1958년 2월 16일 오전 11시 30분 부산수영비행장을 이륙한 대한민항공사(KNA) DC3형 경여객기가 여의도 공항에 도착할 무렵 승객을 가장한 납치범들에 의해 납북됐다. 여자 2명을 포함 총 6명인 납치범들은 KNA기를 평양 순안비행장에 강제 착륙시켰다,
납치범들은 비행기가 경기도 평택 상공에 이르렀을 때 탑승객 중 군인 2명의 머리를 망치로 내리쳐 실신시킨 다음 칼빈총과 엽총을 기내 앞뒤에서 발사하면서 조종사를 협박, 기수를 평양으로 돌리게 했다. 북한은 승무원 4명과 승객 28명, 납치범 6명 등 모두 38명 중 탑승자 26명만을 3월 6일 판문점을 거쳐 송환했고 기체는 억류했다. 그리고 나머지 6명은 북한으로 귀순했다고 주장했다.
피랍기의 조종사는 미국인 윌리스 P홉스, 부조종사는 미공군의 맥클레렌 중령이었다. 피랍후 송환된 탑승자 가운데에는 국회의원 유봉순과 공군정훈감 김기완 공군대령도 포함돼 있었다. /조선
[1957년] 인도 수카르노대통령 교도민주주의 제창
수카르노(Sukarno, 1901. 6. 6.~1970. 6. 21.)는 1928년 국민당을 결성하여 민중주의(民衆主義)를 주창하다가, 1929~1933년 투옥 후에 플로레스섬의 엔데, 수마트라섬의 펜쿠렌에서 유배생활을 보냈다. 1942년 일본군에 의하여 석방되어 일본군에 협력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네덜란드로부터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 1950년 인도네시아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55년 제1회 아시아아프리카회의(반둥회의)를 주최, 비동맹중립외교의 주역으로 각광을 받았는데, 내정면에서는 다당난립 때문에 단명내각의 연속이었다. 1957년 그는 내부혼란의 원인이 서구형 의회정치에 있다고 하여 대통령중심제를 채택, 촌락민주주의의 전통에 입각한 이른바 교도(敎導)민주주의(일반 대중에 대한 엘리트의 교도적 역할을 강조한, 인도네시아에 적합한 민주주의)를 제창하였다. 그 후 국내에서 절대권력을 장악하고, 네덜란드에 대항해서 서(西)이리안해방투쟁을 전개, 1963년 목적을 달성하고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1965년 9월 30일에 발생한 쿠데타에서 공산당을 감쌌다고 하여, 1966년 3월 장군 수하르토가 지휘하는 반공 육군에 실권을 넘겨주고, 이듬해 종신 대통령의 지위를 박탈당했으며, 정치활동이 금지된 가운데 보고르 교외의 바트트리스의 자택에 살다가 정계복귀도 못한 채 죽었다. /naver
[1950년] 이승만, 맥아더 초청으로 도일
한국 대통령 이승만이 주일 연합군사령관 맥아더로부터 미국의 대일정책에 대한 힌트를 얻은 것은 1948년 가을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지 두 달 남짓 되는 10월 19일, 이승만은 맥아더의 초청을 받아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때 맥아더는 이승만에게, 일본을 아시아의 반공 보루로서 중점 육성할 계획이라고 귀띔한다. 일본에게 아시아의 반공 보루 역할을 맡긴다니, 이승만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미국의 발상이었다. 뒷날 이승만은 한국 자유중국 필리핀 남베트남을 잇는 반공밸트를 구상하게 되거니와, 아무튼 그때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일본은 반공 보루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항변한다. 일본이 아시아의 반공 보루가 되려면 우선 한국으로부터 그 자격을 인정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원래 한국의 영토였던 대마도를 한국에게 돌려주고, 일제강점 35년동안 착취한 한국의 재산을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승만이 또다시 맥아더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한 것은 1950년 2월 16일이었다. 이승만과 맥아더의 우정은 소문난 것이었지만, 오랜 망명생활 중에 세계를 떠돌면서도 일본 땅에 발을 딛은 것은 고종황제의 밀사로 미국대통령을 만나러 가던 1904년, 그를 실은 미국 선박 오하이오호가 고오베항에 정박했을 때의 잠깐, 그 한번 뿐이었는데, 대통령이 되자마자 연거푸 두 번이나 가게 된 것이었고, 그렇게 두 번씩이나 맥아더가 이승만을 일본으로 초청한 것은, 하루빨리 아시아를 일본에게 맡기고 물러서자는 미국의 정책을 주지시키기 위해서였다.
[1945년] 시인 윤동주 일본서 옥사
← 윤동주 시인.
교회 장로이면서 소학교 교사인 아버지 영석(永錫)과 어머니 김룡(金龍) 사이의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해 1931년 졸업했으며, 중국의 관립소학교를 거쳐 이듬해 가족이 모두 용정(龍井)으로 이사하자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이때 송몽규·문익환도 이 학교에 입학했다. 1935년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편입하고 교내 문예부에서 펴내는 잡지에 시 〈공상〉을 발표했다. 〈공상〉은 그의 작품 가운데 처음으로 활자화된 것이다. 1936년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당하자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 4학년에 편입했으며, 옌지[延吉]에서 발행하던 〈가톨릭 소년〉에 윤동주(尹童柱)라는 필명으로 동시를 발표했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뒤 2년 후배인 정병욱(鄭炳昱)과 남다른 친교를 맺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자작시를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판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필시집 3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1부씩 주고 자신이 1부를 가졌다. 이 중 정병욱에게 건넨 한 부가 끝까지 남아 유고시집에 포함됐다. 그 뒤 1955년 중판을 내면서 수록작은 93편으로 늘었고 1976년에는 모두 116편이 시집으로 묶였다.
1942년 도쿄[東京]에 있는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1학기를 마치고 교토[京都]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편입했다. 그러나 1943년 7월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송몽규와 함께 검거되어 각각 2, 3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송몽규는 3월 10일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했다. 유해는 용정의 동산교회 묘지에 묻혀 있고, 1968년에 모교인 연세대학교 교정에 시비가 세워졌다. 1985년 월간문학사에서 윤동주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1942년] 북한 김정일 출생
러시아 브야츠크 출생. 김일성(金日成)과 김정숙(金貞淑) 사이에서 태어나 8·15 후 평양(平壤)에 정착 성장하였다. 1964년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자마자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권력의 핵심으로 들어간 그는, 이후 선전선동부 과장·부부장을 거쳐 부장으로 고속승진을 계속했고, 1960년대 후반부터 김일성의 후계자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1973년 당 중앙위조직 및 선전선동담당 비서로 선출되고, 이어 1974년 권력의 핵심인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면서 사실상 김일성의 후계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당중앙>이라는 호칭으로 불렸고, 1980년 6차당대회를 계기로 정치국 상무위원,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이라는 지위까지 확보함으로써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불리며 명실상부한 실권자로 부상하였다. 그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령의 지위를 차례로 이양받기 시작하여 1991년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1993년에는 군사주권의 최고지도 기관인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각각 취임함으로써 당·정·군을 장악하여 후계자가 되기 위한 지도체계를 구축하였다. 그런 가운데 1994년 7월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권력을 계승하여 1997년 10월 당 총비서가 되었다. 1998년 9월 북한이 헌법을 개정해,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으로 하고 주석제를 폐지함에 따라 김정일은 최고통치권자인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되었다.
2003년 1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성명을 발표하여 핵무기 생산 및 수출을 통한 핵확산 우려를 낳았다. 미국이 북한이 핵개발 프로그램을 원천적으로 포기하면 경제적 원조를 해주겠다는 데 대해 북미간 적대관계의 종식과 외교관계 수립, 경제제재 해제를 포함하는 일괄타결을 주장하였다. 북미불가침조약을 요구하여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포기를 기도하고, 주한미군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연쇄적 파급효과를 노리고 있다. 미국이 다자간 협의를 주장, 북핵문제는 한국·일본·중국·러시아 등 주변국 나아가 세계 전체의 문제로 어느 한 나라의 일탈에 대해 다국적 제재를 가해 핵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에 한반도 핵문제는 미국과의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고집하며, 군사우위 강화로 체제유지에 힘쓰고 남북관계는 정경분리원칙을 지키고 있다. /yahoo
[1937년] 나일론 최초 개발
← Wallace Hume Carothers
1937년 2월 16일 미국의 캐러더스 연구팀이 나일론 개발에 성공했다. 뒤퐁사의 유기화학연구소 소장이었던 월리스 H. 캐러더스는 중합체의 화학반응에 의해 형성되는 물질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나일론을 개발했다. 공기·물·석탄·석유 등을 화학적으로 합성해서 제조한 나일론은 모·면·견과 같은 천연섬유나 합성고무인 네오프렌보다 뛰어난 성질을 지닌 인조섬유이다. 캐러더스 연구팀의 나일론 개발을 계기로 화학합성물질 개발은 더욱 촉진되었다. 나일론을 용융 또는 용해한 원액상태에서 방사구를 통해 뽑아내거나 성형하면 섬유·필라멘트·강모 등이 되며, 이것으로 내화성·내마모성이 강한 실이나 밧줄 같은 여러 형태의 제품들을 만든다./브리태니커
[1927년] 경성방송국 호출부호 JODK로 방송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설립 이듬해인 1927년 (1월 20일 시험방송을 개시하고) 2월 16일 오랜 기간의 시험방송을 거쳐 마침내 본 방송이 개시되었고, 6월에는 최초로 무선 중계방송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방송 사업의 발전을 위해 전력이 증강되었고 한국어와 일본어가 별도의 채널을 통해 이중방송 됨에 따라 정동연주소가 증설되고, 연희방송소가 착공되었다. 1935년에는 방송망의 규모가 팽창함에 따라 경성방송국의 명칭이 경성중앙방송국으로 바뀌었고, 2년 후에는 주파수 변경과 아울러 제2방송이 출력을 증강함으로써 간이수신기로도 전국청취가 가능하게 되었다. 수신기도 고급화되어 스피커가 달린 수신기가 생산됨으로써 라디오 방송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1921년] 양근환, 동경서 친일파 민원식 척살
양근환(梁槿煥, 1894년 5월 9일 ~ 1950년 9월)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양태환(梁泰煥), 또는 양삼성(梁三成)이라는 이름도 사용했다.
황해도 연백군 출신이다. 천도교 신자가 되어 1919년 3·1 운동에 참가했으며, 그해 9월에 도일하여 일본 도쿄의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였다.
3·1 운동으로 조선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독립운동 조직이 속속 결성되면서 일본은 유화책으로 대응했다. 여기에 동조한 것이 민원식이 중심이 된 국민협회의 참정권 청원 운동이었다. 민원식은 각계각층을 방문하며 참정권 청원 운동을 홍보하고 일본 당국에 제출할 서명을 얻었으며, 이 과정에서 조선과 일본이 한 나라가 된 상태에서도 조선인은 차츰 일본인과 비슷한 권리를 얻게 되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이러한 국민협회의 주장이 조선인들의 단합된 독립 요구를 무산시키기 위한 기만책이라고 생각한 일각에서는 그를 대표적인 친일파 인물로 지목했다. 양근환은 참정권 청원서를 들고 도쿄로 건너온 민원식을 직접 처단하기로 결심한 뒤, 2월 16일에 제국 호텔로 찾아가 그를 면담했다. 서명 운동을 위해 여러 사람을 만나고 있던 민원식은 의심 없이 양근환을 만나주었고, 양근환은 품 속에 숨겨둔 칼로 민원식을 살해했다.
양근환은 현장에서는 피신했으나 2월 24일 나가사키 항구에서 상하이로 가려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재판 끝에 1922년 무기징역형이 확정되어 약 11년 동안의 옥살이를 마치고 1933년에 출소했다.
1945년에 일제가 패망하자 한국으로 돌아와 미군정 지역에서 우익 운동에 가담했다. 1950년 한국 전쟁 중에 경기도 파주시에서 후퇴하는 조선인민군에게 살해되었다.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위키백과
[1918년]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
1918년 2월 16일 리투아니아가 독립을 선언했다. 13세기 중엽에 민다우가스가 리투아니아의 여러 부족을 통일시켰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대공작 신분으로 통일 리투아니아를 통치했으며 이들 가운데 게디미나스가 14∼16세기에 동유럽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국으로 확장시켰다. 리투아니아를 지배하던 대공작은 1386년 폴란드도 지배하게 되어 이 두 국가는 400년 동안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뒤 리투아니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가에서 실제적으로 종속적 위치에 있다가 폴란드의 제3차 분할(1795) 때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864∼1905년에 있었던 집요한 러시아화 운동에 굴복하기도 했으나 20세기초에 들어와 리투아니아 민족주의 정신이 싹트기 시작했으며, 독일이 지배하던 1918년 스스로 독립을 선포하게 되었다./브리태니커
[1884년] 기록영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미국의 탐험가·영화제작자 플라어티 Robert (Joseph) Flaherty 출생
← <북극의 나누크>의 한 장면
1884년 2월 16일 태어남 / 1951년 7월 23일 죽음 "그는 직업적 영화감독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진 탐험가이자 기술자이다." - 루이스 D. 프뢰릭
플라어티는 기록영화를 개척한 미국의 영화감독이다. 어려서 캐나다로 이주해 험준한 지역을 탐험하고 광대한 지역을 촬영하며 성장했다. 에스키모와 16개월 동안 생활하면서 그들의 생활을 카메라에 담은 첫 기록영화 <북극의 나누크 Nanook of the North>(1922)는 기록영화의 모범이 되었으며, 이후 1930년대의 기록영화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밖에 문명에서 격리된 자연과 인간을 담아낸 작품으로 남태평양 원주민을 촬영한 <터부 Tabu>(1931), 어부들의 힘든 생활을 그린 <아란의 사나이 Man of Aran>(1934)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그 밖에
2007년 국내 탈북자 1만명 돌파
2007년 대학생 17만명에 학비 무이자 대출
2001년 이창호 9단 응창기배 바둑대회 제패
1998년 대만 중화항공공사(CAL) 소속 에어버스 A300 여객기 676편 착륙도중 사고. 203명 사망
1996년 헌법재판소, 12.12 및 5.18특별법 합헌 판결
1995년 영문학자 조용만 교수 별세
1992년 미국의 팝그룹 ‘뉴키즈 온 더 블록’ 공연사고로 여고생 사망
1976년 통일주체국민회의, 제2기 유정회의원을 대통령 추천제로 확정
1974년 독립운동가 거평 채원개 사망
1971년 이공계 대학원 한국과학원(KAIS) 설립
1971년 경기중학 마지막 졸업식 거행하고 폐교
1968년 박정희대통령, 지방순시중 유성서 연내에 향군 100만을 무장, 자동소총 100만점을 구입한다고 언명
1968년 소련, 대륙붕자원 주권 선언
1965년 F-5전투기 처음으로 한국에 배치
1959년 재일교포 북송반대전국위 결성
1956년 영국 하원에서 사형폐지법안 가결
1954년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 내한
1944년 아르헨티나 쿠데타, 페론대령 집권
1919년 재미 대한인국민회 대표 이승만등 윌슨에게 한국의 위임통치청원서 전달
1907년 프랑스 시인 카르두치 사망
1906년 영국 노동당 결성
1831년 러시아 소설가 레스코프 출생
1822년 영국 인류학자 골턴 출생
1620년 독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