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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요20:19-23)-2024.3.31
예수님은 성경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성경이 증언하고 역사가 증명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부활의 증인들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영접한 자는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존재감이 없고 연약한 여인들이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이름없는 다른 여자들이었던 것입니다(눅24:10). 문제는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의식하고 무덤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부어드리기 위해서 찾아간 것입니다. 어쩌면 여인들만 가질 수 있는 감성적인 느낌을 가지고 찾아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부활의 믿음으로 찾아간 것이 아니라 사랑의 감정으로 찾아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한 증인들이 된 것이지요.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 찾느냐고 책망했습니다(눅24:5). 그러면서 예수님은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다고 알려줍니다.
그제야 여인들은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이들에게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사도들의 반응은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를 않았습니다. 자다가 봉창 뚫는 소리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동안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듣고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크게 의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대충대충 받아들였던 것이지요. 그들은 말씀보다 열등한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하루 종일 흥분을 감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인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들은 제자들은 잠잠했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부활 이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숙의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19절). 왜 그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했을까요? 아마도 자기들의 신변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던 것이지요.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처형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신변에 좋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물론 요한복음의 저자가 굳이 문들을 닫았다는 표현을 기록한 것은 또 다른 목적을 두고 그랬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무런 제약이 없이 그들을 찾아오셨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십자가 사건이전의 예수님의 몸과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었거든요. 제자들이 그들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그들의 방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육신적인 특징을 가졌으나 시공간을 초월한 영화롭고 신령한 몸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던 것이지요.
마치 엠마오 도상에서 제자들과 동행하신 예수님이 갑자기 사라지고 보이지 않으셨던 것을 기억해보십시오(눅24:31). 이는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한 우리도 장차 이런 신령한 부활체의 모습으로 변화될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고린도전서15장 부활장에서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42-44).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고전15:49).
아무튼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말로 다할 수 없지만 가장 큰 선물은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성령을 각 사람에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여러 가지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근시안적으로는 부활하신 이후에 주어지는 선물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부활을 통해, 승천을 통과한 후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게 될 선물들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고난을 주신 것은 부활을 주시기 위함이요, 부활을 주신 것은 승천을 주시기 위함이여, 승천을 주신 것은 성령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성령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확실히 믿고 알아가기 위함입니다. 이른바 임마누엘 하나님을 성취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 보여주신 것입니다. 세상 어떤 사람도 죽음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부정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1장4절을 보면,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16:16).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을 통해 또 다른 부활의 은혜를 상고해보십시다.
(1) 평강이 있을지어다(19,21절)
평강은 위로부터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최고 선물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주로 샬롬으로 인사합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이른바 실존에 대한 두려움인 것이지요. 때문에 세상은 온통 두려움의 장터와 같습니다.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두려움의 상자에 들어가서 삽니다. 사람마다 물질에 대한 두려움, 건강에 대한 두려움, 행복에 대한 두려움, 혹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내세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두려움이 내안에 진을 치는 순간 평강은 사라지고 맙니다.
참된 평강은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자만 누릴 수 있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참된 평강을 맛볼 수 없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하나님이 있는 자는 평강을 누릴 수 있으나, 하나님이 없는 자는 평강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모신 자라 할지라도 믿음의 그릇이 어느 정도인지의 여부에 따라 평강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해를 당하시고 떠나심으로 인하여 극도의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자기들의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극심했을 터이지요.
그동안 주님과 함께하는 동안에는 나름대로 안정감을 누리고 살았을 것입니다. 주님만 있으면 그냥 든든했거든요. 그러나 주님이 떠나심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앞날이 불투명하고 현실이 암담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모인 곳에서 문들을 굳게 걸어 잠근 것입니다. 문들을 닫았다는 표현은 안에서 빗장을 걸어 단단히 채웠다는 말입니다. 당시 제자들의 믿음의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성경에도 그런 증거는 있습니다. 풍랑이는 배위에서 예수님이 주무시자 제자들은 호들갑을 떱니다. 마태복음8장23절 이하를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한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배에서 주무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자기들이 죽게 되었다고 호들갑을 떱니다. 이것이 당시 제자들 믿음의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예수만 믿은 것입니다. 자기들 곁에 계신 주님만 믿은 것입니다. 자기들 시야에 안 보이는 예수, 혹은 자기들과 함께 계시는 예수를 보지 못한 것이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요한복음6장16절 이하를 보면,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건너갑니다. 문제는 그 배에 예수님이 안타셨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불고 큰 파도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저 멀리 바다위에서 예수님이 걸어오십니다. 그것을 본 제자들이 두려워합니다. 유령으로 본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제자들의 영적 수준입니다. 그저 예수님이 자기들의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안정감을 잃어버리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후 제자들은 자기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극도의 두려움을 느낀 것이지요.
자기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보지도 못하고 믿지를 못한 것입니다. 어린아이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지요. 어린아이들은 엄마가 자기 눈에 보여야 안정감을 누립니다. 눈에 안보이면 불안해서 징징거립니다. 당시 제자들이 그랬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 안에 계신 것을 알 수 없었던 것이지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믿음을 갖지 못했던 것이지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도 여전히 그들은 어린아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13장1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말입니다. 이제는 율법의 옷을 벗고 복음으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옛 언약의 옷을 벗어버리고 새 언약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새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다시 오신 것입니다. 이제 성령을 통하여 친히 가르쳐주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강림은 십자가 사건을 완성하신 후에 주어지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움에 갇혀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물론 평강이 십자가 사건 전에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 사건 전에도 제자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평강을 약속하셨습니다. 대표적으로 요한복음 14장27절을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입니다.
평강은 하나님나라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로마서14장17절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평강은 성령 안에서 주어집니다.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평강이 참된 평강이라는 말입니다. 십자가 사건 전에 주신다고 약속하신 평강은 언약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다는 평강은 약속이 아니라 성취입니다. 그래서 본문19절이나 21절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평강은 십자가 사건전에 약속하신 평강보다 훨씬 더 진보된 평강이요, 성취된 평강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약속된 평강만 믿지 말고 성취된 평강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0절)
평강을 약속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또 하나의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너희들을 내가 세상으로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보내신다는 것은 파송을 의미합니다. 사실 교회는 두 가지 기능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합니다. 모이는 기능과 흩어지는 기능입니다. 모이는 기능은 세상으로부터 오게 하는 기능이요, 흩어지는 기능은 세상으로 보내는 기능입니다. 이 모든 기능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무엇보다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짐은 우리의 믿음을 증진시키는 것이요,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증진과 강화는 권능이 되는 것이지요. 권능이 입혀지면 증인이 됩니다. 이것을 위하여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얼마든지 제자들에게 더 좋은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다. 더 좋은 위로의 말씀을 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을 약속하신 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로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말일 수 있습니다. 그나마도 주님이 눈에 안보이셔서 두려운데 자기들을 어디로 보내신다는 말입니까? 혹은 자기들로 하여금 어디로 가라는 말입니까?
보내심은 제자들의 믿음을 강화시켜주고 확장시켜주는 말씀인 것이지요. 그동안 제자들은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예수님만 집착하며 살았습니다. 아무것도 자기들 스스로는 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한 사람들이었는지 모릅니다. 이른바 밥을 못 먹고 젖만 먹는 수준이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이었던 것이지요. 이제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밥을 먹을 수 있는 수준으로 향상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부활의 도를 당당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가장 큰 목적입니다. 모든 족속으로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지요.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 사건이후에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1장8절의 말씀처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잊지 말고 성취하라는 말입니다. 사실 믿음은 떠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삶의 가장자리에서 안주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눈이 머무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도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품속에 있는 독생자를 우리 가운데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보내신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으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신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지상사역이 다 이루어진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다만 남아 있는 모든 일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으로 보내심같이 예수님은 믿는 자를 세상으로 보내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의 은혜를 우리만 받고 사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부활을 모르는 영혼들을 위하여 우리가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른바 파송의 주체가 주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왜냐면 부활하신 주님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육체로 거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성령과 함께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성령의 권능으로 우리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사명은 파송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입으신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전에는 제자 삼는 일에 집중하셨지만, 부활하신 이후에는 제자들로 하여금 제자 삼는 일에 집중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제자들을 보내는 파송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 삼는 일은 제자들이 감당할 몫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라는 명칭이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라는 명칭으로 변경이 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부활을 전후로 달라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자는 헬라어로 ‘마데테스’입니다. ‘마데테스’는 배우고 뒤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스승이신 예수님께로부터 배움을 받은 자들이었던 것이지요. 이제는 그들이 배운 것은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가 된 것입니다. 사도는 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입니다. ‘아포스톨로스’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이제는 가르침을 받은 모든 것들을 증거하는 곳으로 보내심을 받은 사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3) 성령을 받으라(22절)
다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려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권능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로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19절을 다시 보십시다. 제자들이 모인 곳에서 문들을 닫고 두려움에 떨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십니까? 그곳에 모인 제자들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18절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것입니다.
부활의 소식을 듣기전이라면 몰라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에 잡혀 있었다는 것이 제자들로서는 이해가 안됩니다. 주님의 부활을 듣고 기쁨으로 흥분해야 하지 않을까요? 최소한 두려움과 염려는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두려움에 잡혀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솔직히 우리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쳐다보면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이 가득하지 않는가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이 내 영혼을 잠식한 적은 없었나요? 지금도 여전히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지금 우리들의 믿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염려와 두려움은 절대 다른 방법으로는 물리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물리칠 수 있는 것이지요. 성령을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평강이 주어지는 것도 성령이 임하셔야 하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도 성령의 권능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육체를 입으신 예수님과 함께 할 수는 없지만, 성령 안에서 내주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안에 성령이 임하시면 믿음의 확신이 생기고, 권능이 임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살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알게 하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오, 그 일을 감당케 하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당연히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못할 뿐 아니라, 능력도 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숨을 내쉰 것은 창세기2장7절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생령이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에스겔서37장5절에 마른 뼈들을 향하여 생기로 들어가서 살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살리는 영입니다. 부활이 주는 은혜는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죽음으로만 끝이 났다면 인간은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다시 살아나시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으로 소생케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수 있고,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십자가 사건 이전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6:7-13). 그러나 그때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은 장차 오실 성령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후에는 성령이 친히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성령이 오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부활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말로 할 수 없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시는 은혜 가운데 가장 큰 은혜는 평강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소유했을지라도 평강이 없으면 꽝입니다.
그리고 평강을 받은 자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명입니다. 그 사명 가운데 가장 큰 사명은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전한 복음의 메시지는 부활의 도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믿는 자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전하기 위해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다만 이 모든 것을 감당하려면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성령이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사역들이기 때문입니다. 평강도 성령이 주시는 선물이요, 파송도 성령이 주시는 권능이며,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실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부활을 믿지 못하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믿음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종교입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에게 나아가 부활의 도를 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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