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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권. 삼위일체의 교리
제1장. 만드는 것과 낳는 것
일반 독자들은 신학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은 맞지 않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을 의미하며,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가능한 한 가장 명확하고 정확한 개념들을 얻고 싶어 한다. 신학은 지도와 같다. 첫째, 지도는 실제로 하나님과 교제한 수많은 사람의 경험을 기초로 작성한 것이다(대서양을 경험한 수많은 사람을 기초로 만들어짐). 둘째,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고자 하면 반드시 지도를 사용해야 한다. 신학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상들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되신 것이 아니라 나신 분이시다. 창조한다는 것은 만든다는 의미다. 창조자와 창조된 물질은 다르다. 새가 새 둥지를 만들지만 다르다. 조각가가 조각품을 만들지만 다르다. ‘낳는다’는 것은 같은 종류에 속한다는 뜻이다. 사람을 낳으면 사람이듯이 하나님이 낳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제2장. 삼위이신 하나님
성부 하나님이 낳으신 분은 성부와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루이스는 삼위 하나님에 대해서 차원의 개념을 가지고 설명한다. 1차원은 직선이다. 2차원은 도형, 즉 사각형이다. 3차원은 입방체(정육면체. 여섯 개의 사각형)이다. 그런데 1차원과 2차원, 3차원 모두 직선이라는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입방체를 이룬다고 직선을 버리지 않는다. 인간적인 차원은 단순하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속성을 가지셨지만, 하나님 고유의 속성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 차원에서 세 인격(삼위)이면서 하나인 존재로 계신다. 우리가 기독교를 만들고 있다면 그것을 보다 더 쉽게 만들 수 있을 것이나 기독교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는 일의 주도권은 하나님 편에 있다.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지 아니하시면 무슨 일을 해도 우리는 그를 만날 수 없다.
제3장. 유한과 무한(시간과 시간 너머)
많은 사람이 하나님은 동일한 순간에 언제 그 많은 기도를 들으실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진다. 루이스는 소설 속의 메리를 가지고 설명한다. “메리는 책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는 문장을 쓴다. 문장으로서는 순서가 있으나, 두 일 사이에는 시간 간격이 없다.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하나님은 시간 속에 사시는 분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여 계신다. 하나님의 생명은 언제나 현재다. 우리의 시간은 직선이지만 하나님은 직선이 그려져 있는 종이다. 직선은 여러 지점을 차례로 지나가야 하나 하나님은 직선 모두를 보신다.
「하나님은 우주의 시간 흐름에 쫓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실 여유가 무한히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뭉뚱그려 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가 만든 유일한 존재인 양, 그 각각의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여러분 하나하나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간인 양, 그 각각의 사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홍성사 번역)
제4장. 선한 감화(좋은 전염)
삼위 중 제1위격을 성부라고 부르고, 제2위격을 성자라고 부르면 아버지가 아들보다 먼저 존재하였다는 느낌을 주나 그 일에는 선후(先後)가 없다.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은 “사랑의 관계”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기독교인의 진술을 좋아한다. 사랑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품는 감정이다. 만일 하나님이 삼위 아니라 하나의 위격이라면 세상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살아 있고 역동적인 사랑의 행동이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진행되어 왔으며 다른 모든 것을 창조해 왔다고 믿고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정적인 사물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약동하는 행동이요, 생명이다.
제3위는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은 항상 우리를 통해서 움직인다. 성령님은 우리 안 또는 뒤에 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 사랑은 사람을 통하여 역사한다. 특히 기독교 공동체를 통하여 역사한다. 이 사랑의 영은 영원 전부터 성부와 성자 사이에 있어 온 사랑이다. 그럼, 모든 것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일까? 이 삼위 하나님의 생명이 보여주는 춤, 드라마, 또는 양식(pattern) 전체는 우리 각자의 생명 속에 재현되어야 한다. 우리 각 사람은 그 양식 속에 들어가야 하고 그 춤에 참여해야 한다. 그 외에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없다. 따뜻해지려면 불 가까이 가야 하고 몸을 적시려면 물속에 들어가야 한다. 기쁨과 능력과 평화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그것을 가진 존재에게 가까이 가야 하며, 더 나아가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인간은 어떻게 삼위의 생명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해야 한다.
제5장. 고집 센 장난감 병정들
루이스는 각 인간이 그 안에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생명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이용하여 온 우주를 착취하려고 한다. 자기 멋대로 행하도록 내버려두기를 원하며, 자기보다 더 강하거나 선하거나 고귀한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기를 원한다. 루이스는 장난감을 가지고 설명한다. 우리가 장남감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양철로 만든 장난감을 사람으로 만들려면 양철을 벗기고 사람의 살로 바꾸어야 한다. 그런데 장난감 병정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고 양철이 망가지는 것만 생각한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이 우리의 상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셨는가? 성자가 사람이 되셔서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다. 살과 피를 가지고 사람이 되게 하셨다. 우리는 처음으로 진정한 인간을 보았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과 연합하여 다시 살아나게 하셨다. 우리가 자기의 능력에 의해 영적 생명 안으로 가서 올라가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그가 인간에게로 오신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 다가간다면 그분에게서 새 생명을 받을 수 있다.
제6장. 두 가지 요점(부연 설명)
첫째 질문은, 하나님께서 장난감 병정이 아닌 아들들을 원하셨다면 처음부터 아들들을 낳으시지 왜 장난감 병정을 만들어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에 의하여 생명을 주시느냐? 하는 것이다. 루이스는 태초에 인류가 하나님에게서 돌아섰기(하나님께 등을 돌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 기계적으로 행하는 세상은 결코 사랑할 수 없고, 무한한 행복을 알지 못하기에 자유의지를 주셨다.
둘째 질문은, 온 인류가 하나의 집합체라는 것은 개인의 차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닌가? 루이스는 코와 폐가 전혀 다르나 한 몸의 일부이고 그 몸의 생명을 공동으로 소유하기에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인간 각 개인은 하나의 몸 안에 있는 기관들이다.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당신과 꼭 같이 만들기를 원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당신과 그들은 서로 다른 기관들로서 각기 다른 일을 하기로 되어 있다.” 기독교인은 전체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되고 개인주의자가 되어도 안 된다.
제7장. 그리스도인 체하기(가장)
『미녀와 야수』에서 소녀가 인간에게 하듯이 야수에게 입을 맞추었더니 놀랍게도 야수는 사람으로 변하였다. 어떤 사람이 멋지게 보이기 위해 몇십 년 동안 가면을 쓰고 살았는데, 나중에 가면을 벗고 보니 그 사람의 얼굴이 가면에 맞추어 변형되어 실제로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다. 변장으로 시작한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루이스는 ‘실천’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라 아버지”라고 하는데, 그것은 자신을 아들의 자리에 둔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처럼 분장했다는 뜻이다. ‘가장’(그리스도인 체하기)을 했다는 의미를 아는 순간 원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자기중심적인 두려움과 희망, 탐욕, 질투, 자만심 등 멸망할 것들의 덩어리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처럼 옷 입으라고 하였다. 우리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인 체 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무엇인 체 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좋지 않은 의미로 실제의 일 대신에 거짓된 것이 자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실제의 일로 이어지는 것이다. 자신이 실제 모습보다 더 다정하고 멋진 체하면 얼마 후 진짜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는 그리스도처럼 옷 입고 있습니다.”라고 인식하는 순간, 그 가식이 실제가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우리 곁에 계시며 이미 우리의 가식을 현실로 변화시키기 시작하신다.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 곁에 계시고 그분은 우리를 자기 자신과 똑같이 변화시키기 시작하신다. 그분은 양철로 만든 장난감 병정을 살아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계신다. 자신에게서 그것을 싫어하는 부분은 아직도 양철로 존재하는 부분이다.(* 종교적 생활, 자연, 우리 육체, 책, 반기독교적인 것처럼 보이는 경험들 등 사용)
우리는 자신에게서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 죄악 된 행동들 외에 자신의 죄악성을 주목한다. 「지하실에 쥐가 있다면, 갑자기 그곳에 들어가야만 그것을 보게 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갑작스러움이 쥐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쥐가 숨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갑작스러운 도전이 나를 고약한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내가 얼마나 고약한 성질의 사람인지를 보여줄 뿐이다. 쥐는 항상 지하실에 살고 있지만 당신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그 안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당신이 불을 켜기 전에 숨어버린다. 분노와 복수라는 쥐들은 분명히 내 영혼의 지하실에 살고 있다. 그 지하실은 나의 의식적인 의지가 닿지 않는 곳이다.」 영혼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행해질 수 있다. 둘째, 실제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마치 작은 그리스도이듯이 바라보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작은 그리스도로 변화시키려고 우리 곁에 서 계신다.
제8장. 기독교는 어려운 것인가? 쉬운 것인가?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 하나님의 아들로 분장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해야 하는 많은 일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기독교의 모든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일반적으로 가지는 “도덕, 예의 바른 행동” 등과 다르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과 관련된 권리 주장이다. 기독교의 삶의 방식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다. 본성적인 자아를 모두 뽑아버리고 새로운 자아를 심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어렵고도 쉬운 일인데, 우리의 자아를 완전히 그리스도께 넘기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바와 같이 엉겅퀴가 무화과를 맺지 못한다. 만일 내 심령이 잔디 씨앗만 지난 들판이라면 나는 밀을 생산하지 못한다. 내가 밀을 생산하기를 원한다면, 변화는 표면이 아닌 땅속에서 일어나야 한다. 즉 나는 땅을 갈고 다시 씨를 뿌려야 한다.」
제9장.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대가 계산하기)
루이스는 어렸을 때 치통을 앓았던 경험을 말한다. 치과 의사에게 가면 치통의 원인까지 근본적으로 치료한다. 주님은 치과 의사라고 할 수 있다. 일상생활을 망치는 죄를 치료받으려고 주님께 가면 주님께서는 그것만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고쳐주신다(죄의 근원까지 치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온전함이고 거기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내 아버지께서 나를(예수님) 기뻐하시는 것 같이 너로 인하여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시게 되기까지 결코 쉬지 않을 것이며, 너로 쉬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루이스는 조지 맥도날드의 어린아이와 장성한 아들 얘기를 인용한다.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걸음마 할 때 아버지는 기뻐한다. 그러나 장성한 아들이 당당하고 장부답게 걷지 못한다면 만족하는 아버지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나 만족시키기는 어렵다.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은 온전함을 요구하시지만, 당신이 현재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함에 있어서 전혀 낙심할 필요가 없으며, 실패해도 낙심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이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일으켜주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노력으로는 온전함의 근처에도 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반면에,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인도하시려는 목표는 절대적인 온전함이며, 당신 자신을 제외하고는 우주에 있는 그 어느 것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 목표로 데려가시는 것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당신의 운명이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제10장. 새 사람(호감 주는 사람? 새 사람?)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행하신다.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변화는 이 세상에서는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각 신자들이 죽기 전에 그 변화가 얼마나 진행되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와 관련해서 사람들로부터 종종 제기되는 문제가 있다.
“만일 기독교가 참된 것이라면, 모든 기독교인이 모든 비기독교인보다 현저하게 고귀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호감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독교로 회심했는데도 불구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대개의 경우 그 회심은 그 사람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기독교 진영에 속한 사람들은 언제나 비기독교 진영에 속한 사람들보다 호감을 주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기독교가 참이라면 사람들은 신자가 되기 전보다 신자가 된 후에 더 호감을 줄 것이고, 신자가 된 사람은 과거보다 호감을 줄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치약을 선전하는 광고가 사실이라고 해보자.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치아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때보다 좋아질 것이며, 그것을 사용하기 시작한 사람의 치아는 계속 개선될 것이다. 그러나 그 치약을 사용하는 내가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건강하고 젊은 흑인보다 훌륭한 치아를 갖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 자체는 그 광고가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돈을 많이 소유하는 것의 위험 중 하나는 돈이 주는 행복에 만족하여 하나님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의 선물들도 이와 유사한 위험이 있다. 자신이 스스로 건강한 신경과 지성과 건강과 인기와 훌륭한 양육을 소유하고 있다면 자신의 성품에 지극히 만족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모두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하며 자신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노력한 결과라고 믿고, 더 높은 수준의 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어느 날 그 본성적인 선이 그들을 실망시키고 자기만족이 산산조각이 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원하기에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자신에 대해서 비참함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가 없으면 안 된다.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면 그들은 실망하게 된다.
단순한 개선이 구속이 아니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아들로 변화시키기 위해 인간이 되셨다. 하나님은 단순히 과거와 동일한 종류이지만 보다 선한 사람으로 만들려 하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사람을 만들려 하신다. 그것은 말에게 보다 높이 뛰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라기보다 말을 날개가 달린 짐승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말에게 날개를 달아주면, 그 말은 전에는 넘지 못했던 담장 위로 날을 수 있으며, 따라서 전에는 이기지 못했던 자연적인 말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날개가 자라기 시작할 동안에는 말은 날지 못할 것이다.
제11장. 새 사람
새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람의 성품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변화되는(Transformation) 것이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변화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되어지는 변화, 즉 하나님의 피조물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변화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새로운 사람들의 기원, 중심, 생명이시다. 새사람이 되는 것은 자아를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을 벗어나서 그리스도에게도 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뜻이 우리의 뜻이 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그리스도처럼 생각해야 한다. 루이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금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소금 특유의 맛은 짠맛이다. 그것을 음식에 넣어 사용하면 모든 맛이 죽고 짠맛만 남는가? 아니다. 소금의 효과는 그 정반대다. 오히려 소금은 양배추나 계란이나 쇠고기의 맛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맛을 두드러지게 해준다. 그것들은 소금을 넣지 않으면 제맛을 내지 못한다. 우리가 자아라는 것을 제거하고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기면 그리스도를 지극히 풍성하신 분이시기에 서로 다른 수십억의 “작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어도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자아가 되려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자기가 그리스도께 저항하고 자력으로 살고자 하면 할수록 더 본능적인 욕망들의 지배를 받을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설 때, 나 자신을 그리스도께 드릴 때,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인격을 소유하기 시작한다. 세상의 모든 폭군과 정복자들은 참으로 서로 닮았으나, 성도들은 서로 지극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자아를 진정으로 포기하는 일이 있어야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인격을 주실 것이다.
이 원리는 어디에나 적용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자신을 포기하십시오. 그러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버리십시오.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이십시오. 매일의 야망과 이루고 싶은 바람들의 죽음을, 그리고 언젠가 찾아올 몸의 죽음을 받아들이십시오. 온몸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발견할 것입니다. 아무 것도 남겨두지 마십시오. 주지 않은 것은 진정한 여러분의 것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죽지 않은 것은 죽음을 떨치고 일어서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찾으면 결국 미움과 외로움과 절망과 분노와 파멸과 쇠퇴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찾으면 그를 만날 것이며,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