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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생각 2
6명 국무총리 직접 모신 명 공무원
조봉래 박사 고위직 부이사관 승진 기념 특별인터뷰
- 관가 소식통에게 물어 봤습니다, 조봉래 부이사관은 어떤 사람이냐고? 했더니, 열배 이론 창시자라고 하더군요.
“하하하. 그게 뭐냐 하면, 누구한테 하나를 받으면 열배를 갚아야 한다는 이론인데, 그런 정신으로 살자 그런 운동 펼치자 이거죠, 이 운동 동참자 많습니다. 이 운동으로 인연을 맺은 사람 수가 1만명이 넘습니다”
나는 이해찬, 한명숙, 한덕수, 한승수,
정운찬, 김태호, 김황식 총리한테서
이런 인품, 매력포인트 배웠다
절차탁마(切磋琢磨)!
서상상고의 슈퍼파워
# 지금은 대진고속도로가 뻥 뚫려 서울∼함양 간 오가는 소요시간이 한결 단축됐지만, 1992년, 서울서 함양에 가려면 대개 남원을 경유해야 했다.
함양군 서상면 옥산리 사는 제산 박재현 도인. 필자는 어떤 인연에 의해 그를 알게 되어 주말마다 남원을 경유, 함양 서상을 찾았다.
당시, 제산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장안의 매스컴들은 그를 가리켜 한국 역술계의 태두, 혹은 삼성 이병철, 포철 박태준, 한보 정태수 회장의 역술 자문역이라고 보도했다. 이런 유명세로 인해 정재계 거물들이 제산을 만나려 했지만 그는 이들을 반기지 않았다. 그러나 유독 (이런저런 사연에 의해) 필자는 제산과 핫라인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필자가 서울서 “선생님 이번 주말 함양 서상에 내려가도 괜찮습니까?” 물으면 특별한 일이 없으면 환한 웃음을 주며 “내려 오이라"
서상에서 박 도인 누옥으로 걸어가던 1992년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그 누옥으로 가려면 논을 지나야 했다. 우후홍교(雨後虹橋).
무더운 여름날 한차례 소나기가 쏴하고 쏟아졌다. 이어 영롱한 무지개가 누옥이 있는 서상 창공에 뜬 걸 보고, 아하, 서상면은, 참으로 서기 어린 곳이구나…그런 감동을 받았었다.
당시 나는 제산 어른한테서 자미두수, 추명학 개론 등을 배웠다.
수업이 끝나면 선생과 곡차를 나눴다. 그때 실례를 무릅쓰고, “선생님 이런 깡촌에서 역술천하를 쟁취했으니 여한이 없겠습니다” 하니 도인 왈, “이놈아, 그기 하루아침에 이루어졌느냐! 땅 속에서 파낸 보석을 뜨거운 불 속에 집어넣어 갈고 닦아야 (切磋琢磨) 화려한 광채가 발하능거라, 그래야 세상에 그 값어치를 드러낼 수 있능거라, 이놈아, 부단히 공부해라, 부단히…”
필자는 그때 박 도인이 내게 준, 네 글자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말을 늘 가슴 속에 간직하고 살려고 노력했다.
세월이 흘러 1년전, 서상면 출신 기업가 최성권 회장과의 인터뷰 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제산 이야기가 나왔다. “그 양반 내 벗이야, 대단했지, 이렇게 험준한 깡촌에서 역술이라는 중원을 완전 장악했뿌서이. 그 친구가 그냥 역술가인가, 학문이 깊고 넓어, 많은 이들이 흠모했지. 제산이 서상에 존재함으로써 후학들도 어떤 심리적 영향을 받았을 거야, 우리도 제산 어른처럼 절차탁마하면 나라에 쓰임새 있는 재원이 될 수 있다! 그런 마음자세를 가졌을 거야, 그래서 말이지. 시골 깡촌 서상상고 출신들이 지금 경향각지에서 날개를 활짝 펴 비상하고 있다 아이가!”
쌀 2000kg(시가 500만원 상당)
함양 독거노인에게 전달
# 지난 해, 12월 30일 정부 각부 인사가 있었다. 함양군 서상면 출신 국무총리실 조봉래 재경향우가 부이사관으로 승진, 함양을 빛냈다.
부이사관이란 넓은 의미로는 3급 공무원을 말한다. 사무계 3급 국가공무원인 부이사관·교정부 이사관·검찰부 이사관·출입국 부이사관과 사무계 3급 지방공무원인 지방 부이사관을 말하고, 좁은 의미로는 행정 직렬의 3급 국가 공무원인 부이사관만을 말한다.
기능은 이사관의 기능과 같다. 예를 들면, 중앙행정기관의 각 국장은 이사관 또는 부이사관으로 보하도록 하고 있으므로 부이사관도 이사관과 같이 국장이 될 수 있다. 중앙행정기관의 국장 외에도 도 단위 행정기관의 장, 특별시·광역시의 구청장, 중앙행정기관 직속기관 등의 장, 소규모시의 시장을 부이사관으로 보하고 있다. 3급공무원인 부이사관은 2급공무원인 이사관과 함께 사실상 직업공무원의 최고상위직급이라고 할 수 있다.
조봉래 부이사관은 서상초(43회), 서상중(18회), 서상상고(1회)를 졸업했다. 1978년 3월 국가공무원 행정직 9급 공채시험에 합격함으로써 공직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후 제산 도인의 그랬듯 절차탁마, 성실한 공직자 생활을 하여 마침내 오늘의 영광을 안게 된 것이다.
지난 1월 6일, 조봉래 부이사관이 함양을 찾았다. 이 날 그는, 부이사관 승진축하기념으로 받은 사랑의 쌀을 6일 함양군 최완식 군수에게 전달했다. 함양군청에서 사랑의 쌀 전달식이 끝난 후 조봉래 부이사관은 최완식 군수와 환담을 나눴다. 조 부이사관은 최 군수에게 사랑의 쌀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전했다. “지난해 12월 제가 국무총리실 교육정책과장(서기관)에서 부이사관으로 승진하자, 많은 지인들이 축하한다며 화환을 보내려 해요,
저는 부득이 축하해주려면 1회용 화환보다 ‘사랑의 쌀’을 기증해 줄 것을 부탁했지요. 그래서 모아진 쌀이 2000kg(시가 500만원 상당)가 됐습니다. 이 쌀을 함양 관내 독거노인 등 어려운 소외 계층에 전달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이에 최완식 군수가 화답했다. “조봉래 부이사관의 이러한 작은 나눔 실천이 우리 주변의 어려운 분들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부탁컨대 앞으로도 고향 함양을 위해 많은 도움과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시골 출신에 9급 공무원으로 출발 마침내 정부 고위공무원으로 등극한 조봉래 부이사관 그는 누구인가? 그의 인생관과 직장에서의 행로를 탐험해 보자.
고향발전 앞당기는
멘토로 큰 기대
# 지난해 연말 필자는 함양 고위 공무원들의 모임인 함공회 송년회 식장에서 조봉래 부이사관를 처음 만났다. 외양이 귀공자 풍이었다. 그는 필자에게 세련된 매너로 다가왔다.
“저는 주간함양 애독자입니다. 매주 주간함양을 통해 지리산여행기를 즐겨 읽습니다. 제 고향 풍물과 농부님들을 아름답게 묘사해 줘 감사합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소주라도 한잔하면서 내 고향 함양비전이랄까, 그런 걸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1월6일 조봉래 부이사관은 사랑의 쌀 전달식을 마친 후 필자에게 전화를 했다. “함양에 왔는데, 저녁때 식사라도 같이 하시죠”
마침, 주간함양에서도 사랑의 쌀과 관련된 뉴스를 신문에 담아야 했으므로 취재도 할 겸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장소는 상림공원 앞 대장금 한정식집. 그 곳에 가니 조길래 함양 교육장, 이상인 두레마을 대표, 그리고 서상상고 동문들 모습이 보였다. 조길래 교육장께서 모두 승진축하말씀을 했다.
“정말, 조봉래 학형, 우리 함양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고교졸업 후 9급 공무원으로 시작 마침내 고위직에 오른, 조봉래 부이사관의 이번 승진 대단합니다, 조 부이사관의 승진을 지켜본 후학들은 힘이 불끈 쏟을 겁니다. 이건 돈으로 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조 부이사관의 청춘 시절을 기억합니다. 그는 항상 성실했고 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또 남을 배려하며 살았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조봉래 부이사관 1살 때 부친께서 타계했습니다. 그래서 조 부이사관은 홀로 세업을 고생으로 닦아 자수성가한 기린아지요. 본성은 강한 내성과 부드러운 외성을 함께 갖추어 강유(强柔)를 겸비한 인물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고위공직자로서 큰 획을 그어, 함양의 명예를 만방에 전파해주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잠시 후 최완식 군수가 저녁식사 자리에 참석했다. 최 군수는 “아무쪼록 중앙부처에서 승승장구 승진해 고향을 빛내주는 한편 함양 발전 프로듀서로 맹활약해 주길” 당부했다. 이 장면을 지켜본 필자는 추임새를 넣었다. “고향 군수와 중앙부처 실력자의 멋진 랑데뷰입니다. 두 분의 핑퐁게임을 유심히 지켜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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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봉래 부이사관은 2001년 7월 연합뉴스, 문화일보, 경향신문, 경남신문 등 조봉래 부이사관 보도가 크게 났었다. “하하, 국내 최초로 행정감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는 게 화제가 되어”
조봉래 부이사관은 예술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부산문화예술진흥회(도용복 이사장)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사라토미 후원하고 있다. 예술의 전당 김장실 이사장 등과도 오래 전부터 친밀한 관계 유지하고 있다. 상림공원에서 고향의 벗과 정담을 나누는 조박사(맨 우측 인물) |
다음날, 필자는 상림공원 벤치에서 조봉래 부이사관과 단독으로 만나 본격적인 인터뷰를 가졌다.
-실로 금의환향입니다. 함양엔 자주 옵니까?
“자주 오죠, 부모님 제사 때, 각종 봉사활동 차… 고향은 나훈아 노래처럼 아늑한 어머니의 품 아닙니까? 서울생활 하다보면 사람 사는 맛, 정이 없고 좀 삭막하잖아요, 마음이 삭막하다 싶을 때면, 고향에 내려와 어릴 적 친구들과 옛일을 이야기하면 엔돌핀이 샘솟습니다”
-태어난 곳과 가족관계는.
“함양군 서상면 대남리 오산마을. 부친존함은 창옥(호) 조창제 선생, 모친 박경순 여사입니다. 제 아내는 이외숙, 거창 신원면 청수리 출신이고 슬하에 현웅(27·루트미디어 대표), 아현(25·대학 3년)을 뒀습니다”
-장형, 중형께서도 공무원이셨죠.
“상래 큰형님은 서상면에서 공무원 퇴직하셨고 석래 중형은 전 국군기무사 이사관을 거쳐 현재 충효안보연합 사무총장으로 재직중입니다. 중형께서는 고향사랑이 투철해 재경 서상면 향우회장, 서상초교 총동문회장을 역임하시기도 했어요”
-조봉래 부이사관의 이력을 훑어보니 불굴의 정신으로 한 계단 한 계단 승진 그 자체더군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졸업 후 곧바로 직장전선에 뛰어들었고 서상상고를 수석입학 수석졸업했더군요. 졸업 후 육군 3사에 합격했지만 늑막염으로 입학포기하고 1978년, 행정직 9급을 패스, 그 해 경남 함양교육청, 서상중고 행정실 근무하다 군에 갔더군요.
“육군에 입대, 육균 통신(암호)학교에서 전체 1등으로 졸업하는 통에 공수특수전 사령부에 차출되었습니다”
-오호! 그때 불굴의 정신을? 체득했겠군요.
“예, 인내, 명예란 무엇인가, 그리고 결단력을 배웠습니다. 또 모든 사람에게 항상 모범적인 자기의 위상(威象)을 잃지 않으려는 정신력을 익혔습니다”
1982년 제대 후 그는 서울특별시 교육청(교육감 비서실, 총무과, 공보관실, 감사실)에 근무하게 된다. 이때 주경야독 당시 야간인 국제대학에 다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된다.
1만여 각계인사
인적네트워크 구축
-언론 보도 사이트를 검색했더니 2001년7월 연합뉴스, 문화일보, 경향신문, 경남신문 등에서 조봉래 부이사관 보도가 크게 났더군요.
“하하, 국내 최초로 행정감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고 해서”
1990년 6월부터 2001년 교육부장관 비서실, 감사관실, 대학정책실 등을 거쳐 노무현 정부 때 이해찬 국무총리실 비서실에 스카웃 된다.
“당시 이기우 비서실장께서 저를 불렀습니다. 이 분을 가리켜 그때 각종 언론에서 100년에 한 명 배출될까말까 하는 명 공무원이라고 칭송했죠? 그 분 밑에서 국정전반 운영에 대한 노하우를 폭넓게 배우고 익혔습니다”
-조봉래 부이사관은 총 7명의 영의정을 보필한 명 공무원이라고 하더군요.
“과찬의 말입니다. 저는 이해찬, 한명숙, 한덕수, 한승수, 정운찬, 김태호, 김황식 총리를 모셨습니다”
-그분들한테서 무엇을 배웠나요?
“(이해찬 제36대 국무총리) 외면상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아주 서민적이신 분인데, 국정 기획력과 업무추진력이 탁월하시어 국정의 큰 그림을 잘 그리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정책의 큰 그림과 기획력”을 배웠습니다.
(한명숙 제37대 국무총리)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서민적 품성을 지니시고, 언제나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국정을 지휘하신 분으로, “섬세함과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한덕수 제38대 국무총리) 국정조정능력에 달인이시며 업무추진력이 탁월하시고, 예술을 전공하신 사모님과 함께 예술에도 조회가 깊으시어 측근 비서들과 함께 오페라 관람을 종종 다니어 이때, 저도 오페라와 미술 등 예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승수 제39대 국무총리) 이 분은 명실공히 우리나라 외교사에 크게 기록되는 유엔총회 의장을 역임하신 세계적인 인물이며, 폭넓은 외교 인맥과 경제분야 인맥이 대단하신 분이죠, 이때 저는 국무총리실 인사팀장과 총무과장으로 총리실 살림살이와 국무총리 공관 살림 실무책임을 맡아 특별히 지근에서 모시면서, “외교 인맥을 포함한 국내외 폭넓은 인맥 관리” 능력을 배웠답니다.
(정운찬 제40대 국무총리님) 성품이 너무도 온화한 인자하신 은사님 같으면서도 국정을 차분히 챙기시지요. 국무총리실 직원 가족들을 총리공관으로 초청하여 따뜻한 설렁탕을 대접하는 등 아주 서민풍의 국무총리님이었습니다. 정총리 시절 저는 국무총리실 조직, 인사, 복무관리를 총괄하는 인사과장을 맡았습니다
(김태호 제41대 국무총리 내정자) 이 분은 190㎝ 가까운 큰 키와 같이 대범하시고 스케일이 크신 분이죠, 이 분을 통해 “큰 스케일” 을 배웠습니다.
(김황식 제41대 국무총리) 김총리님은 청렴, 도덕, 성실, 정의의 공정사회 대표 인물로서, 경제, 외교, 국방, 교육, 복지, 일자리창출, 서민대책, 국회, 국가안전, 농림수산 분야 등 국정 어느 한 분야도 빠짐없이 전체 분야를 조용히 꼼꼼히 챙기십니다“
-관가 소식통에게 물어 봤습니다, 조봉래 부이사관은 어떤 사람이냐고? 했더니, 열배 이론 창시자라고 하더군요.
“하하하. 그게 뭐냐 하면, 누구한테 하나를 받으면 열배를 갚아야 한다는 이론인데, 그런 정신으로 살자 그런 운동 펼치자 이거죠, 이 운동 동참자 많습니다. 이 운동으로 인연을 맺은 사람 수가 1만명이 넘습니다”
(조 박사는 전국 교장 자격연수에 단골인기강사로 활약하고 있다. 우리나라 초중고 교장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나돈다. 조봉래 박사 강의를 안 듣고는 교장이 될 수 없다! 한편 그는 2003년 경남도민일보에서 선정한 자랑스런 경남인에 선정되어 주목을 받았다)
-조 박사 파일을 보니 조 박사께서는 상당한 인적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더군요, 조봉래 부이사관 정도면 고향 함양 멘토가 되어야 합니다. 고향발전 훈수 좀 주시죠.
“고향 함양은 모두가 잘 살고, 행복한 농촌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군민들이 우선 잘 살기 위한 발전적 의지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세계 경제와 국내의 경제 동향, 농산품 전망 등 전략적 산업의 흐름을 타야 하죠. 또 함양군청과 면사무소 모든 공무원들은 농촌 희망 산업 전략을 구상하여 군민들을 계도하고, 정부의 전략적 농산업 육성 정책을 빨리 읽고 대응(정부정책자금 얻어 냄) 해야 해요. 이를 위해선 출향인 등 20만 함양인들을 적극 활용해야합니다. 또 국내외 영향력 있는 출향인 활용, 정부와 학계 등 명예군민 위촉 활용하고 학교의 우수 인재양성과 우수 인재를 외부로 유출시키지 않고 유치하는 시스템을 개선해야 합니다. 인구감소 대책의 하나로 전국에서 가장 좋은 학교를 만들어(예: 서상초) 전국에서 찾아오는 학생 유치를 통해 인구증가, 경제산업 발전을 이루어야 합니다”
-고향 새내기 후배들에게 당부코자 하는 말은?
“아무리 어려운 여건(못 배우고, 못 가진) 이라도 멈추거나 포기하지 마시고 희망을 가지세요. 반드시 길은 있습니다. 길을 개척해야 하며, 또 찾아야 합니다. 누가 찾아 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두었다하더라도 자만해서는 안 되며, 늘 더 큰 새로운 도전을 하세요. 늘 정의와 배려하는 마음으로 주위를 돌아보시면서 인생을 살아가세요. 인생은 마라톤과 같아, 살아가다 보면 오르막, 내리막도 있잖아요. 일희일비하지 말고 묵묵히 대로를 가시기 바랍니다. 어떤 난관도 있고, 방해와 시기도 있으나, 그냥 달리세요. 머뭇거릴 시간 없습니다”
-참, 쉽게 말하면서도 감동적인 말입니다.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보아도 함양은 향후 큰 발전을 도모할 것 같습니다. 조봉래 부이사관 같은 인걸들이 선두에 서서 리드를 할 때 그 발전이 앞당겨 지리라 믿습니다.
“저 역시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시로 우리 만나 함양 발전을 주제로 담화를 나누길 기대합니다”
구본갑|본지칼럼니스트
주간함양신문(news-h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