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사천성 여행기 제 8부
-성도에서 구채구까지-
*사천성 여행기 1-7부는 배낭여행 동호회 회원과 함께 한 7월 3일부터 7월 15일까지 여행기이고, 사천성 여행기 8부 이후는 저와 아내 두 사람이 따로 남아, 7월 25일까지 여행한 것을 글로 적은 것입니다. 이 글이 앞으로 몇 부까지 이어갈지 모르지만, 시간 나는대로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
그 동안 함께 돌아다닌 동호회 회원과 작별하고, 다시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본래 나와 아내가 10일을 더 중국에서 머무르려고 했던 것은 성도의 북쪽에 있는 구채구와 황룡, 그리고 남쪽에 있는 아미산과 낙산 대불을 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볼 것이 많은 중국에서 사천성으로 두 번 다시 온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며, 여행 비용의 대부분이 항공 요금인 것을 계산하면, 기왕에 간 김에 유명하다는 것은 보고 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떡 본 김에 제사까지 지내버리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내와 둘이 덩그러니 남은 상황에서, 안내자도 없이 돌아다닌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정말로 목적한 대로 1)구채구와 아미산을 봐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2)구채구나 아미산 중 한 군데만 보아야 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3)매일 호텔 방에서 쉬다가 저녁에 나가서 사천 요리나 실컷 먹고 돌아가야할 것인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한참을 상의하고 이야기하다가, 중도에 힘들면 그만두더라도 애초에 마음 먹은 대로, 우선 구채구부터 가보고 그 뒤의 일은 구채구에 다녀 온 뒤에 상황을 보아 행동하기로 했다.
<구채구 가는 두 길>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호텔 종업원에게 나의 계획을 말하고 구채구 가는 방법을 물었다. 버스와 비행기로 가는 방법이 있었는데, 비행기는 너무 비싸서 버스로 가야한다고 했다. 본래 지진이 나지 않았다면, 위의 지도의 (A)코스를 택할 경우, 6-7시간이면 구채구에 갈 수 있지만, 문천 대지진으로 그 일대 통행이 불가능하니, (B) 코스를 택해서 가야 한다고 종업원이 말했다. (B)코스로 갈 경우, 구채구까지 시간은 무려 12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미엔양까지는 고속도로여서 원활하게 갈 수 있지만, 그 다음부터는 거북이 걸음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12시간 동안 산 길을 버스로 간다? 갈 수는 있지만 너무 힘든 코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라면 몰라도 버스를, 더구나 울퉁불퉁한 산길을 12시간을 간다?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우리는 그리 바쁜 것도 아니고 시간도 많으니, 중간에서 하룻밤 자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호텔 종업원은 중간에 있는 핑우(平武:평무)에서 자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7월 15일 성도의 하루 일정 코스>
7월 15일의 일정은 자연스럽게 결정되었다. 우선 호텔에서 소각사(昭觉寺)근처에 있는 "소각사 버스 터미널"에 가서 내일 아침 핑우행 버스표를 사고, 기왕에 거기까지 갔으니 소각사 절을 구경하고, 바로 옆에 있는 동물원에서 판다곰을 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길로 한참을 걸어 나와 소각사 버스 터미널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출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버스는 사람들로 붐볐다. 버스 안에 다음 내릴 곳을 안내하는 전광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내가 탄 버스에는 안내 전광판은 없었다. 하지만 다음 내릴 곳은 어디라는 안내 방송이 나와 소각사 버스 터미널을 쉽게 찾았다. 다음날(7월 16일) 아침 9시에 출발하는 핑우행 버스표를 27,200원(일인 당 13,600=80위안)원 주고 두 장 구입했다.
<소각사>
버스 터미널에서 소각사까지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소각사 앞에 길 양쪽으로 50-100는 장애인이 늘어서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팔이나 손이 없는 사람에서부터, 다리가 옆구리에 붙은 사람, 다리가 꼬여서 등에 붙은 사람, 상처가 곪아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사람, 어린이에서 노인까지 돈을 달라고 애걸하는 모습을 보니 여기가 바로 지옥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약간의 프로 사진사 정신으로 이들 사진을 찍으려 하였으나, 차마 사진기를 들이밀 수가 없었다. 굳이 이들을 외면하고 옆으로 슬슬 피해서 곧장 소각사로 들어갔다. 소각사의 입장료는 340원(2위엔), 중국에서 입장료가 이렇게 싼 곳은 처음 본다.
<소각사의 초롱불>
절의 규모는 대단히 컸으며 사방에서 향을 태우는 냄새와 연기가, 끈적거리는 무더위를 동반하여 내 주위를 감싸고 돌았다. 이글거리는 태양과 이를 무시하며 소원을 빌고 있는 신자들의 염원이, 지옥에서 생명을 갈구하는 처절한 장면으로 내 뇌에 각인되었다. 한 쪽에서는 그늘에 앉아, 남녀 노인들이 악보를 보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또 한 편에서는 음식을 펴 놓고 먹거나, 차를 마시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더 이상 숨쉬기도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바로 옆에 있는 동물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동물원에서는 각종 조류나 원숭이 등이 우선 눈에 띄었지만,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판다곰이었다. 동물원은 크고 복잡했다. 대나무 숲을 이리저리 지나고 몇 번 길을 물은 뒤에, 판다곰을 만날 수 있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관중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판다곰은 저 멀리서 잠만 자고 있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발에 있는 수북한 털 사이를 비집고 나온 날카로운 발톱이 내 눈을 사로잡는다. 아무리 귀여워 보여도 판다는 인형이 아니라 곰이다. 어떤 면에서 펭귄과 비슷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사람들이 한쪽으로 몰려갔다. 그곳에도 판다곰이 있었는데 황갈색 판다였다. 기둥에 써 있는 안내문을 보니 판다곰은 두 종류가 있다고 했다. 우리가 자주 보는 검고 흰 것과, 황갈색 판다 곰인 것 같았다. 얼핏보니 대형 판다곰과 소형 판다곰이라고 써 있는 듯 했다. 황갈색 판다곰 5 마리가 열심히 움직이며 풀밭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거나, 한 놈이 다른 놈을 쫓아 다녔다.
동물원에 구경 온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날이 너무 더워서 인지 어디 한 군데도 앉아 있을 곳이 없었다. 성도의 무더위는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구경이고 나발이고 이것 저것 모두 그만두고, 나무 아래에서 헉헉 거리는 사람의 숫자가 늘기 시작했다. 무덥고 답답함으로 인해 더 이상 숨쉬는 것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동물원에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택시를 타고 바로 호텔로 왔다.
7월 16일 아침 9시, "핑우"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8시반 쯤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대합실에서 9시가 되기를 기다리는데, 내 앞에 바로 일본인이 있었다. 일본 남자는 꽤 늙었고 그 옆에 있는 중국 여자는 꽤 젊었다. 겉보기에 정식부부가 아닌 그런 사이로 보였다. 남자는 일본어로 뭐라고 설명했지만 여자는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둘 사이는 어색하기만 했다. 착각이겠지만, 아마 돈 때문에 아리따운 중국 여인이 대머리인 저 일본인을 따라다니는 것으로 보였다. 삿보로에서 왔다는 그는, 나의 형편없는 일본어를 "스고이"라고 말하면서 엄청나게 칭찬해 주었다. 조금 알고 있었던 일본어도, 이제는 거의 다 잊어 버렸는데, 이런 나를 칭찬해 주니 너무 쑥스러웠다.
버스는 9시 정각에 출발하여 안개가 뿌옇게 낀 하늘을 뚫고 달렸다. 청두에서 미엔양까지는 4차선 고속도로였기에 한국의 고속도로와 같은 속도로 달렸다. 그러나 미엔양에서 차가 빠져 나오더니 꾸불꾸불한 길을 시속 30-40키로로 달렸다. 중간에 차가 막히기도 하고, 길 위에 말이 서 있기도 하고, 사람들이 건너가기도 하면서 통행을 방해했다.
점심 때쯤 어떤 도시에 도착해서 약 10분간 정차했다. 갑자기 장사꾼들이 들이닥치더니, 도시락과 빵과 묵을 팔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빵이 무슨 "웬수"라도 되는 양, 고무신 물고 늘어지는 강아지처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어떤 사람은 도시락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더니, 또 호떡인지 빵인지를 찰거머리처럼 달려들어 먹어댔다. 나는 묵을 샀다. 우리도 찰거머리처럼 뜯어 먹어보려 하였으나, 묵은 무슨 마른 국수 부러지듯 뚝뚝 끊어져서 나중에는 그냥 입을 도시락에 대고 개가 밥 먹듯 핥아 먹어야 했다. 한 마디로 10분 동안의 식사 시간은, 무슨 야전 병원인양 온갖 군상의 인간들로 가득찼다고 할만큼 시끌벅적했다.
핑우에 도착한 것은 출발한지 6시간이 지난 오후 3시였다. 최백호의 노래처럼 "내 마음 갈길을 몰라" 서성이고 있는데, 웬 목발 짚은 사람이 끈덕지게 따라 붙으며 무슨 말을 해댔다. 나는 "팅부동"이라고 말하여 그를 끈덕지게 피하려고 하였으나, 그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무작정 터미널에서 밖으로 나왔다. 좀 쉬면서 저렴하면서도 괜찮은 숙소를 알아보려고 했던 나의 계획은, 목발 짚은 50대로 보이는 남자에 의해 산산 조각 나버렸다.
<내가 묵은 호텔에서 바라본 밖 풍경>
조금 걸어가니 호텔이 나타났다. 광장이 훤히 보이는 호텔인데 1박에 30,600원(180위엔) 달라고 했다. 깎아 달라고 했으나 안 깎아 주었다. 날도 더워서 더 돌아다니기도 싫어 그냥 그곳에서 하룻밤 보내기로 했다. 일박에 30,600원은 이번 여행 중 가장 비싸게 묵은 경우에 속한다. 보통은 1일 2만원 - 2만 4000원 정도의 빈관에 숙박을 했고, 최저는 1만원에 잔 적도 있다.
한참을 쉰 후 해가 뉘엇뉘엇 지기 시작할 때 시내 구경을 나갔다. 아이들이 골목 계단 가장자리에서 썰매를 타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땀을 팥죽같이 흘리며 술레잡기를 하고 있었고, 재수 없는 어떤 아이는 엉덩이 바지가 벗긴 채, 엄마에게 매를 맞고 있었다.
시장에서는 한국의 시장과 마찬가지로 수박과 복숭아 포도 참외가 깔려 있었다. 팔아 달라고 애걸하는 젊은 처녀를 무시하고 못 본 체 걸어가는 것은 여간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쪄스 타오마?(이것 복숭아입니까?)"복숭아 한 바구니 사면서 중국어 연습 좀 하고, 다시 길을 걷는다. 길가에는 각종 곡식을 볶아서 파는 사람도 있고, 알 수 없는 버섯과 쇠똥 같이 시커먼 농산물을 파는 사람도 있다.
시원한 강이 나타났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이 해질녁의 시원함을 즐기려 강가로, 강가로 몰려들었다. 마치 영화가 끝난 후 관람객이 쏟아져 나오듯, 어디서인지 길거리를 반이나 채웠다. 강아지는 강아지대로 멋을 내고 있었고, 낚시질하는 할아버지 옆에서 손녀 딸은 빨리 고기를 잡아내라고 다그친다.
무슨 이유로 다리를 그다지도 웅장하고 위엄있게 만들었을까? 다리를 지나면서 비를 맞지 말라고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다리 양쪽에 기와 지붕을 했고, 중간중간에 파고다 모양의 망루를 쌓았다. 그 아래에는 등불을 달아서 밤에는 보행인에게 도움을 주도록 만들어 놓았다. 이 도시에서 가장 볼 만한 것이 바로 이 다리가 아닌지 모르겠다.
밤이 되자 골목골목은 붉은 등불을 밝히고 사람들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그 등불 아래에는 장사꾼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조금 돌아가면 다시 광장이다. 이 광장에서는 춤추는 사람들이 나를 유혹하고, 밤하늘을 뒤집을 만큼 방대한 차(茶)의 향기가 나를 유혹한다.
눈 깜짝 할 사이에 광장은 축제장으로 변한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아무나 잡고 걸으면, 그것이 바로 춤이요, 아무나 잡고 앉으면 거기가 바로 찻집이다. 몸을 흔들어 난 땀을 식히고 싶으면, 눈을 들어 흐르는 은하수를 바라보며 걸어라. 거대한 인파의 강물 속에 나는 유유히 흘러가는 조각배다. 그러나 외로운 조각배가 아니라 광활한 우주의 중심에 서 있는 한 줄기 별빛, 달빛을 받는 조각배다. 세월이 가는지 마는지 나에게 묻지 마라. 나는 오늘 이 작은 도시의 객이자 주인이다. 내일 일을 나에게 묻지 마라. 내일은 내일이고 오늘은 오늘이다. 구채구를 가든 말든 나는 모른다. 그저 지금 저 음악 소리, 사람들의 춤,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과, 사람들의 대화 소리에 나는 빠져 있을 뿐이다. 나는 술 먹지 않고도 술 취했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몸이 흔들린다. 걷지 않아도 몸이 움직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그저 광활한 대지의 한 점일 뿐이다.
7월 17일 아침 일찍, 다시는 보지 못할 핑우를 떠나기 아쉬워, 어제 걸어가 본 길을 다시 걷는다. 시장에는 아침부터 장사꾼으로 붐빈다. 강가는 어제 저녁 바람을 즐기는 사람들은 다 어디 가고, 이제는 농산물 판매 장터로 변했다. 한국에서 자주 보는 수박이나 옥수수, 돔부(덩굴로 된 팥), 마늘쫑, 오이 등도 있지만, 내가 여태까지 보지 못한 식물도 즐비하다. 호박보다도 더 큰 초록색 과일이 있어 무엇이냐고 물으니 동과(东瓜: 동과)라고 한다.
<시장 상인들>
<오른쪽 큰 과일이 바로 동과이다.>
광장으로 돌아오니 어젯밤의 축체의 분위기는 어디 가고 모두들 운동이 한창이다. 느린 음악에 맞추어 몸을 단련하는 사람들, 디스코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사람들, 그리고 칼을 들고 칼춤을 추는 사람들이 보인다. 한 곳에서는 노인들이 맨손 체조를 하고 있고, 좀 떨어진 곳에서는 할 일 없는 아이들이 땅 바닥에 낙서를 하고 있다.
광장 바로 뒤 편에 보은사라는 절이 있다. 중국에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명나라 건축물이다. 1440년에 창건되었다는 이 절은 그야말로 고찰 중의 고찰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파란 지붕이다. 무슨 색을 칠했는지, 아니면 자연현상인지 모르지만, 어떻게 하면 저런 빛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대비전(大悲殿)의 천수관음(千手观音)은 녹나무로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정교하고 살아 움직이는 듯 하다. 대웅전과 만불각에는 400㎡의 면적에 달하는 명(明)대의 벽화가 있어 그 아름다움과 웅장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9시에 택시를 타고 구채구로 가는 버스 정류장에 갔다. 말이 버스 정류장이지 실제로는 길가다. 이미 구채구로 갈 사람 두 명이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예쁘장한 아주머니와 아들이었고, 한 사람은 미국인이었다. 사실 몇 시에 올지도 모르는 버스를 한 없이 기다리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어제 버스 터미널에서 내를 귀찮게 따라다닌 목발 짚은 사람이 오늘은 여기 와서 미국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미국인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래도 미국인이 책만 보자 이번에는 미국인의 가방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미국인이 화를 내자 그도 덩달아 화를 냈다. 방귀 뀐 놈이 화낸다는 말은 이런 때 하는지도 모른다. 하는 수 없이 미국인은 그에게 1700원(10위엔)을 주었고, 그 돈을 받아들고 그는 다리를 절면서 다른 먹이를 찾아 나섰다.
얘기를 해보니 그 미국인은 이미 중국어를 배운지 10년이 되었고, 중국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쓰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의 발음은 중국인과 거의 같았으며, 그가 펼쳐 든 노트북 컴퓨터에는 한자가 빽빽하게 펼쳐져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외국인으로는 가장 중국어에 해박한 사람이었다. 다음 차에서 빈자리가 하나라면 자기가 타고 가야겠다고 웃으면서 말한 그는, 거기에서 약 2시간 기다리는 동안 중국 책을 읽고 노트북을 이용해 자료를 찾고 있었다. 이 사람에게 기가 질려 나의 중국어 실력을 속으로 한탄하고 있는데, 마침 버스가 왔다. 그때가 11시 30분, 즉 내가 여기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후 2시간 반이 지난 시각이다. 자리는 겨우 두 자리만 있어서 중국 여자와 미국인이 타고 갔다.
<미국인 그리고 같이 타고 간 중국인 아줌마. 그 옆에 그녀의 아들이 지쳐서 자고 있다.>
그때 마침 조금 떨어진 곳에서 교통 사고가 났다. 아무 데서나 유턴을 하고, 교통 질서를 지키지 않는 중국인이 흔히 겪는 일인지도 모른다. 차를 피해 방향을 틀던 오토바이가 아스팔트 위에 넘어졌다. 머리가 땅에 닿지 않은 두 사람은 금방 일어났으나, 머리가 땅에 닿은 여자는 한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10분 후에 다리를 질질 끌고 머리를 만지면서 여자는 길 옆으로 옮겨 갔고, 두 사람은 오토바이를 타고 어디로 가 버렸다.
우리가 버스를 탄 것은 12시 45분. 그러니까 3시간 45분 기다렸다가 버스를 탄 셈이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12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루에 가는 것이 나을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세상 앞일을 어떻게 알랴? 더구나 처음 가는 중국 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그저 입 다물고 기다리는 이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 버스에는 마침 딱 두 자리가 비어 있어서 아내와 나는 따로따로 앉게 되었다. 나는 맨 뒤에 앉게 되었는데, 나와 함께 맨 뒤에 앉은 네 명은 후베이성에서 온 일 가족이었다. 얼마나 먼 길을 버스로 왔던지 차멀미가 보통이 아닌 듯 했다. 여자 한 사람은 얼굴이 마치 귀신이 해골바가지 쓰고 인상 쓰는 것과 같았다. 눈이 십리는 들어가고 게슴츠레했으며, 정신이 없어서 그저 좁은 공간에서 보리자루처럼 쓰러져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듯 했다. 이를 돌보는 남편이 눈물겹도록 딱했는데, 구채구 보는 것도 좋지만 사람 잡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타고 간 버스: 강유와 구채구를 왕복한다고 써 있다.>
버스는 중간에서 한 번 쉬었다. 버스에 내리니 한 꼬마가 도롱뇽을 팔고 있었다. 아이 앞에 놓여있는 조그만 깡통 속에 도룡뇽 몇 마리가 들어 있었다. 그들 중 한 마리를 한 승객이 샀다. 한 마리를 팔고 돈을 받아든 아이의 표정이 얼마나 밝아 보이는지, 나도 덩달아 기뻤다. 그 동물을 산 사람은 도룡뇽을 수돗가로 가져가더니 깨끗이 씻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입을 벌리고는 도룡농을 입에 넣었다. 입을 잘 다물지 못했는지 도룡뇽이 입에서 튀어나와 땅에서 발버둥쳤다. 그러자 그는 다시 씻어서 입을 꼭 다물고 삼켜 버렸다. 그리고는 먼산을 보고 "으하하"하고 천하를 얻은 조조처럼 불룩 나온 배를 툭툭 쳤다. 남자들은 박수를 치고, 여자들은 신 포도를 먹은 것처럼 이구동성으로 "에, 왝" 소리를 질렀다. 바로 그때, 도롱뇽을 판 꼬마가 울기 시작했다. 아마도 자기가 잡아온 도롱뇽이 애완동물에서 식용동물로 변하는 것에 대한 애처로움에서 울음이 나왔을 것이다. 도롱뇽을 먹은 사람은 남이야 뭐라 하건 불룩나온 배를 살살 배를 만지면서 만면의 미소를 짓고 차에 올라탔다.
<구채구 가는 중 곽가라는 말에 호기심이나서 찍은 사진>
구채구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 몇 명의 젊은이가 내 짐을 들고 자기 자동차로 가면서, 자기 차를 타고 가라고 야단이다. 나는 같이 버스를 타고온 사람이 친구인데 그들과 함께 가니, 그들과 협상해 보라고 젊은이들에게 말했다.
구채구시에서 구채구 풍경구까지는 약 30키로나 되었다. 나의 계획은 본래 여기 구채구시에서 자고 다음날 구채구 풍경구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버스에서 알게 된 후베이성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과 풍경구까지 함께 가기로 했던 것이다. 30분간의 흥정이 있은 후 후베이에서 온 사람과 나는 그 젊은이들을 그들의 차를 타고 풍경구에 도착했다. 차비는 일인당 5100원(30위엔)이다.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20분이었다. 핑우에서 8시간 20분 걸린 셈이다.
<구채구 풍경구 입구. 이곳에서 2박했다.>
도대체 구채구가 얼마나 좋기에 성도에서 이틀이나 꼬박 걸려서 와야만 하는가? 도대체 구채구가 얼마나 유명하기에 사람들은 노상 "구채구, 구채구" 하는가? 한편으로는 거기까지 온 것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한심하기도 했다. 기왕에 이렇게 온 것, 저녁이나 멋지게 때려 먹어보자고 호텔문을 박차고 나오는데, 저 멀리 흰 달이 나를 보고 한 마디 했다. "야 이놈아 화내면 너만 손해여. 알아서 겨!"
(2011년 8월 13일) |
||||||
|
|
첫댓글 우리 사는 것과 별반 다를게 없고 중국 곳곳이 비슷한 생활모습인데도 보고 있으면 떠나고 싶어져요. 왜 그럴까요?^^
혼자도 아니신데 외로움이 느껴지는 여행기네요..ㅎ..
우리가 보는 중국인들의 모습은...
아마도 몇십년전에 일본인 들과 미국인 들이 보던 한국인의 그런 모습과
닮았었던 그런 모습들이 아닐까요?
머리속에 먹물이 물들고 뱃가죽에 비계가 끼면
힘들고 어려웠던 그시절에 생존을 위하여 악전고투 하던 그런시절은 까맣게 잊고 사는건 아닐까요...
올려주시는 신기하고 유익한 여행기에 흠뻑 빠져듭니다...계속 기대하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