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겨울아씨의 치마 속에서 아직 늦가을의 향기가 느껴지는 때.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고 거리에는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따라 나부낀다.
내가 있는 병원 앞에는 은행나무가 많아, 길을 걸으면 가을바람과 함께 떨어지는 은행잎들이
겨울아씨가 파란 도화지에 노란 물감을 흩뿌리는 듯하다.
이럴 때는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지나간 추억들, 생을 논하고 철학을 얘기했던 친구들,
술 한 잔 기울이며 밤새워 얘기 나누던 선배와 후배들.
추억의 돌담을 더듬다보면 그 담 한 모퉁이에 또렷이 새겨진 후배가 있다.
※ ※ ※
K는 내 대학후배이자 동아리 후배였다.
키가 크고 잘 생기기도 했지만 사교성이 좋아 선후배들에게 모두 인기 있었다.
운동을 좋아해서 나와 같은 농구동아리에 있었지만 산악부에 들어가 산을 타는 것도 즐겼다.
운동을 한 후 샤워장에서 장난을 하며, 학교 뒤편에서 김치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며,
취기가 오르면 함께 목청 높여 노래하면서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누구에게나 즐거운 시절은 바람처럼 빨리 지난다. 그렇게 우리의 학창시절도 지나갔다.
시간은 흘러 나는 외과전공의가 되었다.
누구나 그렇듯 잠이 모자랄 정도로 바쁜 외과전공의의 생활은
과거 동아리활동이나 후배와의 관계는 잠시 접어둔 채 4년을 보내게 된다.
그렇듯 망각의 어둠 속에 잠시 묻어둔 K의 모습을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당시에 나는 이식수술파트에 있었다.
이식수술은 장기 기능이 완전히 떨어져 다른 치료가 불가능할 때 행해지는 치료다.
또한 정상 장기를 이식하는 수술이기에 장기를 주는 사람이나 받을 환자 모두에게
위험이 따르는 수술이기도 하다.
신장은 사람마다 2개가 있으므로 가족들에게나 타인에게 이식을 받는 것이 가능하지만
간이나 심장의 경우는 하나밖에 없는 장기이므로 장기를 이식하는 순간 장기를 주는 사람은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다.
지금은 생체간이식수술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간이식이나 심장이식수술 모두가
뇌사환자에게서만 장기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장기를 기증할 사람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또한 장기 기증의사가 있다하더라도 이식할 장기가 건강해야 하며,
뇌사상태에서 시간을 끈다면 이식할 장기의 상태가 나빠질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을 아끼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항시 대기상태로 있어야 했고,
간을 이식해 줄 환자(뇌사상태의 환자)가 있다면 즉시 수술준비에 들어가야 했다.
어느 날 사고로 추락한 뇌출혈 환자의 보호자가
환자의 간을 이식할 의향이 있다는 전화를 받고, 신경외과 중환자실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날따라 유난히 중환자실의 심전도 기계소리가 신경 거슬리게 울리고 있었고
한쪽구석에는 한 젊은 환자가 인공호흡기를 단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대학 외과의사라는 특성상 혼수상태 환자는 자주 볼 수 있지만
이식을 할 환자의 모습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뇌사는 비록 뇌가 소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고
인공호흡기에 생명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죽음의 상태는 아니다.
하지만 이식수술이 결정되고 수술이 시작되면 환자는 완전한 죽음을 맞게 된다.
삶에서 죽음으로 들어가는 중간단계의 모습. 이러한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다는 사실은
항상 미묘한 감정과 죽음에 대한 의문을 나에게 던지곤 한다.
사실 이런 경우는 항상 안타까운 마음으로 환자를 보게 되는데
그 환자를 보는 순간 약간의 충격을 느낄 정도로 놀랐다.
K!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후배였다.
항상 웃음 짓던 입가를 인공호흡기가 가리고 있었고,
정겨운 목소리 대신 심전도 기계음이 내 귀를 울렸다.
암벽등반을 하다가 추락한 것이다. 뇌출혈로 수술을 하게 됐고
수술 전부터 뇌손상과 출혈이 심하여 수술 후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K의 아버님은 의사였는데 자식 중에서 유일하게 가업을 이을 수 있게 의대에 들어간 아이가
K였다. 슬픔이 크셨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왜 아들의 장기를 이식할 결심을 하셨을까?
아마 아버님으로서는, 어차피 떠날 목숨이라면
의학도답게 조금 더 가치 있는 죽음을 맞게 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아버님은 장기기증 의향을 밝히셨고 우리 팀에 연락이 온 것이다.
※ ※ ※
이식은 장기를 제공하는 환자가 죽음을 맞게 된다는 점에서 뇌사의 판정이 엄격하다.
일정시간 동안 뇌파의 움직임이 없어야하는 외에도 수십 가지의 조건을 만족해야만 하며
담당전문의 외에 전문의 두 명이 모두 뇌사 판정에 동의해야한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에 필요한 시간의 흐름은 이식할 장기가 손상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검사가 진행될 동안 환자의 장기에 손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상태를 적절하게 유지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예기치 않게 판정이 지연될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정확한 판정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판정을 내리는 것도 중요하다.
판정이 지연되면 이식할 장기의 손상가능성이 커지고,
손상이 일어나면 이식수술을 못하게 되어
아픔을 감수한 보호자의 결정은 덧없이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일로 이식수술을 못하게 되었을 때 이식수술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환자의 실망감도
말로 못할 만큼 커진다.
신경외과 중환자실은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조용했다.
간호사들이 환자를 돌보는 모습도 스크린의 영화처럼 조용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니 평소와는 똑같은 모습이 내게만 그렇게 비춰졌는지도 모르겠다.
K의 어머님은 떠나보낼 아들의 모습을 보기 힘드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버님만이 담담하게 이식수술을 담당하실 과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수술동의서. 단지 검은 잉크에 물들여진 한 장의 종이에 불과한 것이지만
사인을 하시는 아버님의 손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 ※ ※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 이식할 장기도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가 나빠지므로
시간을 아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수술준비는 환자보호자의 승낙과 함께 바로 시작된다.
K의 뇌사판정이 시작되고 동시에 수술준비도 시작되었다.
수술부와 마취과, 그리고 외과가 하나가 되어 바쁘게 움직였다.
기본적인 혈액검사와 이식할 장기 상태를 파악하고, 여러 반사반응과 뇌파검사가 시행되었다.
이식수술을 받기 위한 환자도 병원에 도착했고 수술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간이식을 받을 환자가 먼저 병원에 도착하고 뒤이어 신장이식을 받을 두 명의 환자도 도착했다.
각자의 담당주치의들은 수술준비를 시작했고,
중환자실에서도 수술 후 간호하게 될 이식환자를 위해 바쁘게 준비하고 있었다.
수술을 위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이다.
K가 뇌사상태라는 사실은 그 시간까지 당연시되었다.
다만 완전한 판정을 위해 정규적인 검사가 시행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때 잠시, 아주 짧게 뇌파의 반응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반응이 없었다.
판정을 위한 각 과의 과장님들이 다시 모였다.
뇌사상태판정 유보, 수술취소.
갈등이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지만 이럴 때 미묘한 감정의 변화가 인다.
이것으로 이식을 못하고 그냥 후배가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을 앞둔 아들 앞에서 조그마한 가치나마 살리고 싶은 아버님의 뜻도 힘없이 꺾이는 것이다.
두 번 죽이는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식을 받으면 살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차 있던 환자는 더욱 큰 실망감에 휩싸인다.
이런 경우 겨우 견디고 있는 병마와의 싸움에서 힘을 잃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면 차라리 이식결정을 하지 말았더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아주 짧디 짧은 뇌파의 움직임…. 이런 경우라면 뇌사라고 인정해도 되지 않을까?
당시 사실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의미 없는 삶을 사느니보다 차라리 가치 있는 죽음이 낫지 않을까?
K가 지금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을까? 과연 내가 저기에 누워 있다면,
그리고 내 의지대로 결정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결국 그 날 수술은 취소되었다.
K는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고 다시 시간은 흘렀다.
이식파트에서의 내 시간은 끝나고 다른 파트에서의 바쁜 시간이 시작됐다.
그렇게 다시 K의 기억은 잊혀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K가 눈을 떴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달음에 달려간 중환자실에서 본 그의 눈은 분명 나를 보고 있었다.
비록 말을 할 수 없었고,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K는 분명 눈을 뜨고 있었다.
K의 주치의였던 동료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정말 살아 날 줄은 몰랐어.”
생명의 신비로운 힘은 어디까지일까?
생각지도 못했던 환자가 갑자기 심정지가 와서 숨을 거둔 경우도 있었다.
소생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환자가 마침내 완쾌되어 웃음을 짓는 모습도 보았다.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보듯 삶과 죽음의 시간을 안다는 것은
아직 우리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지혜의 공간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K의 경우는 이식수술을 바로 앞두고 수술이 취소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눈을 떴다.
예측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말의 가능성이 그에게 일어난 것이다.
그 때 그냥 이식수술을 했더라면….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지만 살아날 수 있는 생명의 끈은 완전히 끊어져 버렸을 것이고
그 사실은 어느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하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다른 또 하나의 생명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어차피 사그라질 생의 촛불이라면 다른 생명을 구하기 위해
남은 심지를 잘라 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곧 꺼질 듯한 생의 촛불이라도 완전히 사그라질지 다시 피어날지를 판단하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시간은 흘러 K가 퇴원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바쁜 전공의 생활에 빠져 그에 대한 일도 다시 기억 저편에 잠겨들었다.
전문의가 되고 추억어린 군의관 생활.
군 생활이 끝나고 나는 대구 근교 중소병원에 취직해 외과과장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출근 첫날,
“똑똑”노크소리와 함께 “형, 오랜만이네요”하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K였다.
“1년 전에 의사시험에 합격했어요.
하지만 인턴생활을 하기에는 조금 겁도 나고 해서 아버님 병원에서 실습하고 있어요.
형! 많이 가르쳐 주세요”
조금 살이 붙은 그의 모습은 건강해 보였다.
신임과장을 환영하기 위한 회식 날.
K와 가까운 분에게 이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오랜 병원생활이 끝나고 퇴원은 하였지만 당시 K는 걸음도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다.
매일 산에 올라가 걷기 연습부터 시작한 모양이었다. 걷다가 넘어지고, 다시 걷다가 넘어지고….
신은 인간이 이길 만한 고난을 주신다고 했던가?
K는, 조금씩 걸음을 딛게 되고 어느 정도 걸어 다닐 수 있을 즈음 다시 의대에 복학했다.
첫댓글 좋을글 적어주신 파트라슈님의 선배님도 훌륭하시고 파트라슈님도 정말 대단하신 분이네요 읽는동안 인간애를 느낄수 있었습니다...살아나셔서 정말 기쁘네요^^*
두분 모두 행복하소서!
그래.. 그랬었지.. 옛 기억이 난다.. 고무공 만지고 라이터 만지던 너의 중환자실 시절이.. 에이씨~~쪽팔리게 눈물이 핑도네~ 주중에 연락할께.. 한잔 하자.. 친구가..
감동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