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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5~6장
5. 특권계급의 윤리적 태도
한 국가 내부의 사회 경제적 계급들은 그 국가의 권위, 내적 결속력 등을 독점하고 있지 못하며 지금까지 그랬던 적도 없다. 개인들은 자신이 속한 계급에 대한 충성심에 입각해서 행동하기보다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며 서로 간의 비슷한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계급은 일반적으로 공동의 기능을 기초로 형성되지만 이 기능이 특권으로 전환되기 전까지는 그리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우리가 고찰해야 하는 중요한 사실은 사회적 특권의 불평등이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하며 바로 이 불평등은 계급 분열 및 계급 연대의 기초가 된다는 점이다.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권력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계급이 갖고 있다. 따라서 사회적 특권을 향유하는 것도 바로 이 자본가계급이다. 산업노동자들도 특혜를 누리게 될 숙련 노동자와 그렇지 못한 비숙련 노동자는 다른 이해관계를 가질 수 있다. 이들의 단결과 통일은 더 특권을 누리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즉 숙련 노동자)의 직접적인 이익을 희생시킴으로써 억지로 얻어낸 윤리적 차원의 성과에 지나지 않는다. 기술중심주의 문명의 힘은 계급의 구별을 산출해내는 경제적 생활양식의 무한히 다양한 기능과 이에 상응하는 정치적 사회적 특권과의 차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자본가와 노동자 사이 계층인 사무직 소상인 귀족)
특권적인 지배계급의 도덕적 태도는 전반적인 자기기만과 위선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이들은 자신의 특수 이익을 일반 이익 및 보편적 가치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동일시 한다. 특권계급이 비특권계급에 비해 더 위선적인 이유는 자신의 특권을 평등한 정의라는 합리적 이상에 의해 옹호하기 위해 특권이 전체의 선에 뭔가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기 때문이다. 특권계급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통용되고 있는 위선의 형태는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은 자신들의 특수한 역할에 대한 사회의 정당한 보답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이다. 그러면서도 이 계급은 억압받는 계급이 타고난 소질과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차단해놓고 뻔뻔스럽게도 이 계급의 결함과 무능을 언제나 습관처럼 비난하곤 한다. 19세기에 이루어진 보통교육의 실시를 위한 노력은 모든 나라의 특권계급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데 촉매제 역할을 했다.
보통교육과 참정권 확대를 위한 운동은 특권과 권력을 평등화하려 함에 있어 점증하는 합리주의와 도덕적 이상주의의 잠재력과 한계성을 동시에 그것도 아주 극명하게 보여준다. 지배계급은 교육을 통해 순종을 가르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보통교육의 실시를 인정한 것이다.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논거는 사실 지적 우월성보다는 그들의 특권적 혜택이 근면하고 성실한 생활에 대한 정당한 보수라는 도덕적 우월성이다. 19세기 정치 경제에서의 개인주의 및 청교도적인 프로테스탄트의 근면성을 끌어들였다.
그들이 공익에 이바지하는 특별한 지적 능력과 도덕적 우수성을 갖고 있다는 자기기만으로 인해 자신들이 큰 이익을 보고 있는 기존의 사회조직을 사회 일반 평화나 질서가 가장 잘 보장될 수 있는 조직인 양 선전하면서 자신들을 법과 질서의 수호자로 자처한다. 모든 사회는 그 본성상 질서를 원하고 분쟁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특권계급의 그 같은 방법은 불공정한 ‘현상’을 유지함에 있어 매우 강력한 수단이 된다. 특권층이 사용하는 힘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제력이거나 국가의 공공연한 경찰력이다. 이 경찰력은 겉으로는 국가의 일반적이고 공정한 목적들에 의해 성스럽게 포장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특권계급의 이익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주로 사용된다.
특권계급은 항상 진보적인 계급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그 권리들을 누리기에 적합치 않다는 이유로 무정부 상태가 초래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공포에 떨고 있다. (영국 지식인의 인도에 관한 글) 우리가 인도에 대한 통치를 중단하는 순간 인도에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혼란이 초래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인도에서의 유일한 희망은 우리 영국이 오랬동안 자애롭고도 강력한 통치를 계속해주는 것뿐이다. 존 스튜어트 밀 같은 사람도 “인도에 있는 영국 정부는 그 의도에 있어서 인류가 알고 있는 가장 순수한 것이며 그 실천에 있어서는 가장 자애롭다”고 말한 바 있다. 지배계급의 평화에 대한 호소는 워낙 끈질기고 폭력과 무질서를 본능적으로 혐오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에 마치 지배계급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평화주의적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국제 문제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가차없는 반평화주의적 행동(제국주의 등)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들의 평화에 대한 호소가 얼마난 위선적인가를 금방 알수 있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일반적인 국민 복지를 동일시하여 평상시에는 전혀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효과적으로 국내의 정치를 안정시킬 수 있기 때문에 지배계급은 전쟁을 선택하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역사를 살펴보면 수없이 많은 지배계급들이 절묘한 시기에 전쟁을 일으켜서 위기로부터 벗어나곤 했다.
특권계급의 집단적 이기주의는 종종 이타적이이고 자기희생적인 충성심도 포함하는 국가적 이기주의에 비해서 개인적 이기주의 성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계급적 편견의 비윤리성이 국민적 편견에 비해서 훨씬 용이하게 이성에 의해 해소될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제는 합리적 도덕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쉽게 달성되지 않는다. 이들은 대부분 부유층 출신이기 때문에 사회정의의 절박함에 대해 깊이 느끼지 못한다. 특권계급의 가식 중에서 일부는 의식적인 부정직에서 나온 것이지만 나머지 대부분은-그 계급이 사회에서의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기 위해서 흔히 호소하는 이성, 종교, 문화 등의 기준이 그 계급의 당파적인 경험과 세계관의 산물이므로-무의식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이나 지성은 궁극적으로 계급적 이기주의를 철폐할 수 없다. 흄은 이기주의가 인간 본성의 유일무이한 경향은 아니지만 지배적인 경향이기는 하다는 격률이 실제로는 진리가 아니지만 정치 현실에서는 참이라고 인정했다. 집단 행동은 언제나 다수의 의견에 의해 좌우되는데 대다수는 항상 이기주의적 동기에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6.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윤리적 태도
과거의 모든 사회는 사회체제에 의해 희생당하는 사람들의 심각한 저항에 부딪치지 않고 사회 불의를 지속적으로 영속시켰다. 그들은 자신들이 노력에 존엄성과 지속성을 부여해줄 사회철학이나 당면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는 정치적 전략이 없었다. 근대 노동계급의 도덕적 태도를 특징짓는 도덕적 냉소주의, 평등적 이상주의, 반항적 영웅주의, 반민족주의, 국제주의 및 가장 충성해야할 공동체로서 자신들의 계급을 찬양하는 행위 등은 모두 산업시대, 즉 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귀족계급에 대항하여 자본가계급이 벌였던 이 운동은 비록 노동자들을 주요한 혜택에서 배제하기는 했지만 최소한의 교육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독자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현실을 볼수 있는 능력과 시야를 넓혀주었다. 이는 주로 근대 자본주의와 산업주의가 가져다준 성과였다.
중세의 사회조직은 인격적이었던 반면 기술 중심적 문명의 발전은 소유와 권력의 집중화 현상을 초래했다. 이에 따라 소유자의 책임감이 소멸하고 개개인의 노동자는 대중사회 속에 매몰되었으며 주식 소유의 메커니즘과 대량생산기술의 발전으로 산업 관계에서의 인간적 요인들이 모호해졌다. 이런 식으로 인간관계가 기계화됨에 따라 인간 활동의 경제적 동기는 증폭되고 더욱 노골적으로 표면화되었다. 일정한 경제적 상태에 있는 개인들이 더욱 뚜렷한 자기의식을 깨닫고서 사회 정치 집단에 가담함으로써 그리고 자신들의 공통된 집단적 이해관계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됨으로써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간의 갈등과 적대감은 더욱 첨예하게 나타났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사회주의가 서구 문명하의 산업노동자의 정치적 신조가 되고 있다. 지금은 미국의 노동자는 예외인 듯이 생각되겠지만 이러한 사실도 미국 자본주의의 완전한 성숙은 불가피하게 마르크스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의 등장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확고한 예언을 정당화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정치적으로 각성된 의식을 가진 노동자들의 태도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아마도 도덕적 냉소주의와 평등주의적인 사회적 이상론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경제결정론) 물질생활에서의 생산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삶의 과정의 일반적 성격을 규정한다. 모든 문화적 도덕적 종교적 표현물들은 각기 다양한 계급들의 경제 활동을 크게 변화시키지 않고 합리화 해주는 ‘이데올로기’들이기 때문에 생산수단의 소유권을 장악하고 사회적 불의를 자행하고 있는 세력 즉 자본가계급은 이미 대항할 수 있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결코 타도하거나 소멸시킬수 없다. (트로츠키) 부르주아들이 모든 권력 장치(즉 국가)를 장악하고 있는 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은 무망한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자그마치 세배나 헛된 망상은 의회민주주의에 의해 권력을 잡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진정한 프롤레타리아는 민주주의 국가를 노동자의 억압과 탄압을 위한 부르주아의 계급적 도구로 간주한다. 이같이 철저한 냉소주의는 중산층에 널리 만연되어 있는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감상적인 과대평가와 뚜렷한 대립 관계에 선다. 실제로 현대 민주제도에서 소유 계급의 권력에 대한 편견없는 분석, 입법의 독점, 모호한 법조문의 편의에 따른 해석, 목적 달성을 위한 불법적 탈법적 행위의 공공연한 자행 등을 생각해 볼 때 공산주의자들의 그 같은 비판에 대해 반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냉소적인 평가는 곧바로 민족주의와 애국심에 대한 냉소적인 견해로 이어진다. 진정한 프롤레타리아에게서는 국가에 대한 애국적인 충성심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무산 노동자는 사회주의자이건 공산주의자이건 관계없이 일단은 갖가지 충성의 의무중에서 계급에 대한 충성을 최고의 의무로 생각한다.
산업 메커니즘은 그 특성상 본능에 따라 움직이고 이성과 양심의 기준을 무시하므로 산업 문명에 의해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을 결정론으로 기울게 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들은 그대로 둔 채 도덕적인 가식으로 자신의 잔인성을 은폐하는 문화는 은영중에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냉소주의로 경도케 한다. 이러한 가식적인 문화의 최대의 희생자이며 동시에 도덕적 구원자인 프롤레타리아가 더 큰 희생자가 될 것이냐 아니면 더욱 강력한 구세주가 될 것이냐는 역사만이 결정할 수 있다.
지금 러시아에서는 노동계급을 제외한 특권계급의 잔존 세력을 말살키 위해 잔인한 복수극이 진행되고 있다. 이른바 과거의 청산이라는 명분과 필요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행해지고 있는 이 숙청 작업은 그 잔인성으로 인해 양심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 가는데 방해가 되기까지 한다. 최근 스탈린은 새 질서에 적대적인 세력을 숙청하는 정책에 한계가 있음을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다. 결국 공동체는 사회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적을 파멸시키거나 폭력을 통해 강압적인 복종을 강요하기 보다는 적과 협력하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엄격한 평등주의를 신봉하는 이유가 불평등으로 인한 고통을 직접 당해서인지, 아니면 계급의 울타리 안에서 이념적으로 떠맡겨진 평등권을 가졌기 때문인지는 분명하게 답할수 없다. 아마도 이 두 가지 요소 모두가 평등주의의 이상을 성립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계급 없는 사회에 대한 확신을 통해서 자기 계급이 승리할 것이란 환상은 도덕적 존엄성을 획득한다. 이 확신으로 노동계급은 당파적이고 상대적인 지위에서 벗어나 자신의 계급투쟁에 보편적 가치를 부여한다. 보편성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적 요구와 주장에 담겨 있는 종교적 확신 요소는 사실 국가나 특권계급의 그것에 비해 그리 크지 않을뿐더러 훨씬 미미하다. 플로레타리아가 ‘의식적으로’ 부정직한 기만행위를 하는 일은 드물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는 남들과 함께 나누어 가지고 싶지 않은 이익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을 바라는 다른 세력들의 꿈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적인 꿈의 독특한 측면은 부르주아 권력의 타도가 곧 자신들에 의한 권력 장악의 선행조건이 된다는 점이다. 평등은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통해서, 사유재산이 확립되어 있는 곳에서는 사유재산권의 부정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정치적 권력이든 경제적 권력이든 상관없이 모두 위험할 정도의 권력 집중을 야기할 것이라는 사실과 경제력의 집중 현상은 이에 대해 항상 경계하는 태도를 취하는 강력한 정치권력, 즉 국가에 의해서만 방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처럼 경제력을 정치권력이 대체함으로써 얻어지는 주요한 성과는 특권이란 정치권력의 여러 가지 부산물 중 하나일 뿐 필연적인 부산물이 아니라는 사실과 정치권력은 경제력처럼 쉽게 상속에 의해 계승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된다는 것이다. 사회에 권력이 존재하는 한, 인류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윤리적 자제를 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권력이 한곳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을 경우 그러한 권력의 사용에 대해 내적인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강력한 윤리적 힘이 없게 된다.
오직 프롤레타리아만이 현대사회에서 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권력과 특권의 집중화 현상이 양심에 위배될뿐더러 사회의 현실적인 토대를 붕괴시킨다는 사실을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해 몸소 알고 있다. 프롤레타리아야말로 현대사회가 맞게 될 재난을 예언할 수 있는 유일한 계층이며 동시에 실제로 이러한 재난을 초래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계급은 잠재적으로 사회 구원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다.
모든 사회는 발전과 진보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도 더 큰 평등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불평등의 기초는 곧 사회 내에서의 권력의 불균등인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절대적 권위를 지닌 역사철학에 버금가는 절대적이고 타당한 사회변혁의 방법을 갖고 있다고 믿는 그들의 확신은 과학적 진리의 범주보다는 종교적 과신의 범주에 속한다. 그들의 확신은 엄밀한 분석을 필요로 하며 이러한 분석을 통하여 반드시 여타의 대안들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사회가 당면한 문제는 사회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을 손상하지 않고 또 제거된 불의의 자리에 새로운 불의를 교체시키는 위험을 겪지 않고 사회 내의 악을 제거할 공정한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어떻게 사회적 불의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