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양공 양성지는 팔도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 등 수 십 편의 역사지리지를 편찬하였다. 그리하여 전국의 명승지는 모두 다 둘러보았을 것이 분명하지만 말년의 생거지처인 김포를 제외하면 정자를 건립했다고 하는 곳은 단 한 곳이 있으니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이다. 광탄리에 세워진 봉황정은 세조의 명을 받아 팔도지지리를 편찬하는 과정에 인연한 연고지로서 망중한의 단심을 즐겼던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고 무예를 연마하던 택승정은 양성지가 처음으로 세워 활쏘기를 연습하였던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양성지의 초년 시절에 대한 행적은 알 수 없으나 생거지처는 한양이었고 말년과 사거지처는 김포이었기 때문에 광탄리와의 인연처는 상세하게는 알 수 없으나 셋째 아들 양찬이 무예가 출중하다고 동료들에게 자랑하고 다녔고 세조께서 양찬의 활 쏘는 모습을 보신 후 양찬을 겸사복으로 등용한 것을 보면 집현전 학자출신으로 대제학까지 지냈던 문관출신의 양성지에게도 아들을 위해 무예를 연마할 장소가 필요하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봉황정은 양성지의 6세손인 광탄리에 입향한 절도사공 양응함과 참의공 양응청 종형제가 새로 지었고 입향조 이후 후손들이 대대로 사용하였던 활터에는 사정이라는 정자가 건립되었고 후손 병마절도사 양주태가 택승정으로 현판을 걸었다.
2. 광탄의 입향조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에 입향한 남원양씨는 양성지의 6세손 부사공 양응심, 양응원, 절도사공 양응함 형제와 종형제 참의공 양응청이다. 양응심과 양응함이 고관을 지낼 때 양응원이 부모를 정성을 다해 모셔서 용문의 효자라고 이름을 날렸고 정려까지 세워졌지만 당파로 인한 시끄러운 현실을 피해서 양응원은 강원도 홍천으로 은거하셨다. 그리하여 양응심, 양응함, 양응청의 후손이 광탄리에 세거하였다. 한편 홍천의 양응원이 은거한 곳에 세워진 정자는 도리에 밝은 사람이 은거하였다고 하여 철은정이라고 하였고 후대에 철정리라는 고을명이 되기도 하였다.
입향조 양응심은 평생토록 마음이 깨끗하고 인품이 조촐하여 탐욕이 없으며 관리가 된 이후 20년 동안 조금이라도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재상 허목이 평가하였지만 당파를 쫒지 않아서 대북정권이 집권하던 광해군 시대와 서인이 집권하던 인조 시대에 모두 편협한 평가를 받았으며 광해군 시대에는 관직을 내려놓고 광탄으로 낙향하셨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관직을 내려놓고 있었지만 후금이 쳐들어 오자 강화도까지 따라가서 어가를 호종하였고 그 공로로 군기시 부정이 되시고 평안도의 병마우후를 지내시고 영변부사를 지내셨다. 글씨에 능하였다고 알려졌으며 특히 예서와 초서를 잘 썼다고 한다.
입향조 양응함은 영변부사 양응심의 동생이시다.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을 거쳐서 사헌부 감찰등의 내직을 거친 후 기장, 안협, 황주의 지방관을 지내신 후 도총부 경력을 지내시고 장기현감을 5년동안 지내시고 돌아오니 보직이 없는 상태에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정묘호란 때 형님이 어가를 호종한 것과 마찬가지로 남한산성에 뛰어들어가 어가를 호종하였고 화친을 논의하기 위해 왕명을 받들어 직진을 오갔다. 전후에는 소현세자의 익위사가 되어서 후금(청나라)의 심양에까지 호위한 배종신이 되셨고 전쟁을 수습하는 과정에는 훈련원의 당상관인 도정을 지내셨교 인동, 장흥, 경원 부사를 거치시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내시고 노후까지 북방 여러 고을의 부사를 지내셨고 북병사로 여러차례 천망되셨다.
입향조 양응청은 부사공 양응심과 절도사공 양응함의 종형제이시다. 남원양씨 족보에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내시고 이조참의에 증직되신 것으로 등재되어 있으나 그 행적은 종형제 양응원과 일치한다. 양응원의 행적은 미수 허목의 문집에 등재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승정원 일기에 등재된 양응청은 호군(장군)을 지내셨다. 그 자손들은 서로 양자를 오고 가며 대를 이었는데 양응심은 남원양씨 병부공후 문양공후 곡산공의 장손인데 양응심의 장자손은 양응청의 혈손이며, 병인양요의 명장 양헌수 장군은 양응청의 자손이지만 양응함의 혈손이시다.
3. 광탄 남원양씨의 가풍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에 세거한 남원양씨는 문양공 양성지의 증손인 곡산군수 양응정의 후손이며 입향조 양응함의 아들인 수군 절도사 양칙의 청백리 선정과정을 살펴보면 광탄 남원양씨의 가풍을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양칙은 무과에 급제하고 여러 고을의 지방관을 지내시고 수군절도사를 지냈으며 아버지는 병마절도사까지 지내신 분이신데 관복조차 구입할 여력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외가 친척인 판서 조형께서 두벌의 관복을 보내주셨는데 종신토록 입고 바꾸지 않아서 죽었을 때는 이것으로 염습하였다. 또한 부인은 남편이 외직의 지방관 임기를 다하였을 때 돌아오는 길에 노자로 사용하라고 쌀을 내어 주어도 남편의 뜻을 어길까 두렵다고 물리치셨다. 그리고 이러한 청렴함은 재물을 아끼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고 이러한 바탕이 있었기 때문에 검소하게 처신하고 검약하게 벼슬살이를 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양칙의 청렴한 절개는 위로 계승하고 아래로 물려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삼대의 가풍이 모두 똑 같았다고 하며 양칙의 아버지 양응함과 양칙의 아들 3대까지 모두가 똑 같은 청렴한 분들이셨다고 양칙의 청백리를 선정하는 과정에 명백하게 밝혀졌다. 입향조 양응심은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관직에 없었지만 강화도까지 달려가서 어가를 호종하였고 입향조 양응함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보직을 받지 않을 때지만 남한산성에 달려가서 어가를 호종하였다. 또한 입향조 양응원은 용문의 효자라고 소문이 났고 정려가 내려졌으니 모든 혈족이 충과 효와 청렴함이 그 바탕이 되었고 그 자체가 가풍이 되었다.
4. 무장의 대가
봉황정에서 글을 읽고 택승정에서 무예를 연마하던 남원양씨의 후예들은 무과에 급제한 자손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절충장군 이상의 고관에 오른 후손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무관의 최고직인 절도사에 오른 후손도 십여명이 넘는다. 고관을 지냈다는 것은 명성을 들어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과연 자랑이 될 수 있는가는 가치 판단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 백성을 사랑하는 청렴함이 있었다면 그 명성은 자랑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 명성이 국가의 대계를 위해 사용하였다면 그 자랑은 영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 직후에 광탄에 입향한 남원양씨와 그 후예들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전쟁터로 달려갔으며 백성을 사랑했던 청렴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끝이 났을 때는 무관의 최고직에 올라서 병사에 관한 사무를 수습하고 정비하였으며 전략과 전술의 보완에 대한 대책강구를 평시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내신 양완이 악기도설을 편찬하였는데 그 의미는 오늘날까지도 귀감이 되는 것이니 반드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양완은 자신이 직접 고안한 전차를 중심으로 전차, 보병, 기병을 합동 운용하여 적을 격퇴하는 전술을 개발하여 악기도설을 편찬하였는데 기병이 강한 청나라를 상대로 한 전쟁에 대비하여 다양한 전차를 제조하고 실험을 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악기도설을 편찬한 것이다. 청나라에게 대패하였던 병자호란이 어떠한 전쟁이었던 것인가를 있는 그대로 살펴보고, 조선의 문제가 무엇이었던가를 있는 그대로 평가하고, 그에 대한 바른 대책을 강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병자호란은 용인의 쌍령지역에서 300명의 청나라 기병에게 4만명의 조선 조총부대가 격파되고 전멸되었기 때문에 원초적 방어 불능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청나라와 전쟁을 한다면 전술적으로 어떠한 방안을 강구하여야 하는지를 연구하고 대책을 마련한 전술서이었던 것이다.
5. 무관의 길 구국의 길
구한말 외세가 침략해 올 때 무관으로 신미양요와 강화도 조약, 병인양요 등의 전쟁터에 있었던 무관의 삶은 그 자체가 구국의 길이었으며 광탄의 남원양씨 씨족사는 구한말 조선의 역사로 기록되었다. 전라좌도 수군절도를 거쳐서 경기중군을 역임하고 있던 양주태는 미군함대가 신미양요를 일으키자 수전에 뛰어나고 지모가 있는 그에게 병선을 이끌고 진무중군에 합류하여 임기응변 하도록 하였으며 신미양요가 끝난 직후에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876년 일본이 군함을 앞세워 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하고자 왔을 때, 어영중군으로서 행주항을 수비하였다. 양주태의 아들 양성환은 군부협판(국방차관)을 지냈고 손자 양재훈은 대한제국 무관학교의 교관을 지냈는데 이후에 독립군을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에서 중요한 역활을 맡으셨다.
조선말기 위정척사론을 대표한 의병장들은 양평 출신의 화서 이항로의 문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이항로의 호를 따서 화서학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양평에서 출생한 양헌수 장군 또한 이항로의 문인으로 학문을 익혔고 최익현 등과 교류하였다. 실제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에 세거한 남원양씨 후예들은 대부분 화서학파의 문인들이었다. 양헌수 장군은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을 거쳐서 희천군수, 갑산부사, 제주목사를 역임하였고 1866년 병인년에 동부승지로 소환되었는데 그 해에 프랑스군이 7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를 함락하였다. 이 때 양헌수 장군은 강화도로 잠입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다수의 병력을 매복하기 적합한 지역을 찾던 중 정족산성이라는 고성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정족산성은 지세가 험준하여 동쪽과 남쪽 두 길만이 통행이 가능한 천연의 요새였던 것이다. 양헌수 장군은 500여명 규모의 정예부대를 편성하고 강화해협을 도하하여 정족산성으로 진입을 완료하였고 프랑스군의 예상 접근로인 동문과 남문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프랑스 제독은 160명을 이끌고 정족산성을 공격하였는데 양헌수 부대는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 6명을 사살하고 수십명의 부상자를 내는 전과를 올렸으며 프랑스군의 병기를 다 수 노획하였다. 조선군은 화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형상의 이점과 양헌수 장군의 효과적인 작전 지휘로 사기가 고양되어 프랑스군을 패퇴시켰다. 이 공으로 정족산성에 양헌수 승전비를 세웠고 흥성대원군의 신임을 받으며 한성부 우윤에 임명되었고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거쳐서 형조판서와 공조판서에 올랐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해산 되고 191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무장의 대가를 이룬 광탄의 남원양씨들은 씨족사의 길 그 자체가 구국의 길이었고 대한민국의 역사이었다. 대한제국의 육군참장과 보군부 참모국장을 지내시고 현병사령관과 시위혼성여단장(수도방위사령관)을 지내시고 군부협판(국방차관)을 지내신 양성환은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혈족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광명의숙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였다.(여운형과 양건석이 광명의숙 출신이다.) 광탄문중의 무장들은 구국의 선봉에 서고자 했으며 양성환의 딸은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섰고 신여성운동의 활로를 여셨다. 그러나 결국 국권은 피탈되었고 그리고 광탄의 남원양씨 후예들은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화서학파로 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이 확인 된 梁씨는 梁健錫 梁東黙 梁斗煥 梁明奎 梁本錫 梁相曄 梁性煥 梁承萬 梁在黙 梁在殷 梁在海 梁在憲 梁柱石 梁昌黙 梁擇善 梁憲洙 梁會龍 梁會一등이다. 양성환과 그의 아들 양재훈은 광명의숙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였으나 국내에서 독립운동과 후학양성의 한계를 느끼고 재산을 정리하여 만주지역의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를 건설하는데 지원하였고 양재훈은 대한제국의 무관학교 교관을 지내셨고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의 군무청장을 지내시고 신흥무관학교의 교장을 지내시고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일제가 만주국을 세우고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기지가 와해된 이후는 국내로 입국하여 상해임시정부의 국내비밀연락책을 하셨다.
6. 대한민국 국군의 모태
단언하건데 대한민국 국군의 모태는 일본의 육국사관학교와 만주국 군관에서 찾아서는 결코 안된다. 대한민국 국군의 모태는 반드시 광복군에서 찾아야 한다. 독립군에서 찾아야 한다. 광복군은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며 구한말 항일의병들과 대한제국의 무관들이 독립군이 되고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하여 광복군이 결성된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군의 근원은 이러한 역사 선상에서 찾아야 한다. 광탄의 남원양씨는 대한민국 국군이 근원으로 갖추어야할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광탄 남원양씨의 무관 정신은 택승정에서 갈고 닦은 것이니 택승정은 대한민국 국군의 모태와 같다.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고 하는데 택승정에서 무관의 정신을 이어받은 광탄의 남원양씨들은 3대(양재묵-양건석-양승만)가 독립운동을 한 가족도 있었다. 양재묵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낸 양선수의 증손인데 양선수는 부임한 고을마다 백성들이 공덕비를 세웠고 그것이 관례가 아니었던 것은 암행어사의 장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러한 가풍을 이어받은 양재묵은 무과에 급제하고 황태자의 호위무사이었는데 국권이 피탈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부인과 함께 만주 땅에 묻혔다. 아들 양건석과 함께 가산을 정리하여 독립운동에 기부하였으며 기부한 돈은 독립군을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를 유지하고 독립군의 군량미로 사용하였다. 양건석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이 되었으며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총상을 입었고 이후에도 항일전선에서 종군하다가 상처가 악화되어서 젊은 나이에 요절하시었다. 양건석의 아들 양승만은 부친과 함께 흑룡강성으로 이주하였고 민족학교의 교사로서 청소년들에게 독립정신을 주입시키며 민족교육에 힘썻고 반일반만 단체인 길림민중자위군에 소속되어 한국독립군의 상사로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황태자의 호위무사가 국권이 피탈된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3대가 항일운동을 한 것은 대단히 드라마틱하다. 양건석은 1919년 기미만세운동이 전개되자 혈족인 양재은과 함께 동지를 규합하여 태극기를 제작하고 용문면 사무소 앞에서 시위운동에 참가하라고 독려하였고 마침내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양건석은 민첩하게 피신하여 화를 면했으나 양재은은 옥고를 치르게 되었고 수시로 가택수색을 당하여 만주로 망명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만주로 망명하여서는 백당 양재훈이 살고 있는 길림성의 김규식 농장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종조부 양성환과 백당 양재훈이 광명의숙을 열었을 때 양건석은 광명의숙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옥고를 치른 양재은은 1920년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로 하고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의 인장을 만들어 소지하고 군자금 1만원 모금을 목표로 활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혀서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1937년 타계하셨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고 독립운동 유공자 공적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