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본 절은 사 40:3의 70인역의 인용으로서, 70인역과 본문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70인역의 '우리 하나님의'라는 말 대신 여기서는 '그의'라는 말이 사용된 점이다. 이는 마가의 의도적 변용일 수도 있고, 마가가 참조한 사본의 원문이 이미 그러한 변화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편 여기서 '그의'라는 말의 선행사는 '주'가 되는데, 이 칭호는 초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할 때 부르던 것이므로 본 구절은 분명 주 예수에 대한 기술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광야에 - 여기서 '광야란 문자적으로 반드시 건조하고 메마른 땅을 가리키지 않고,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 버려지고 황량한 처소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곳은 개간되어 사람들의 주거지역으로 활용되는 곳과는 정반대의 개념이다. 한편 마 3:1에서는 이것을 '유대 광야'라고 하고 있는데, 이곳은 서쪽으로 유대 산지와 동쪽으로 요단 저지대, 남쪽으로 사해, 북쪽으로 얍복강과 요단강이 합류되는 지점까지 펼쳐져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이 광야지역은 석회질의 토양 위에 자갈과 바위가 널려 있었고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기복이 심한 황폐하고 메마른 불모지대로서 여기저기 뱀들이 기어다니고 야수들이 출몰하곤 하였었다. 그런데 이곳 부근에는 쿰란 공동체의 거주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그렇다면 쿰란공동체의 영향력이 요한에게 어떤 양상으로 미쳤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금욕생활과 엄격한 자제력 등은 그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 사역이나 복음 전파 내용과 종말론적 사고 등에 관해 전반적인 , 영향력을 미쳤다고 보기에는 매우 부적절하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활동무대는 이곳 유대 광야 지역뿐 아니라 요단강 동편 지역에까지 확장되었던 사실이 마 3:5에서 분명히 밝혀진다
한편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 사자를 앞서 보내심으로 그들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받게 하셨다. 본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제 2의 출애굽 때에 다른 한 사자을 광야에 앞서 보내시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실 것이라는 놀라운 계시를 전파하고 예비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로 신령한 가나안 땅으로 인도받게 하신다.
눅 7:24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라고 질문하셨다. 광야는 외롭고 쓸쓸하고 무서운 곳이다. 실로 우리는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을지라도 참 진리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비로소 행복을 구가할 수 있을 것이다. 예비하라 - 이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 '예비'하는 그 행위의 긴급성을 강조해 주고 있다.
즉 듣는 즉시 지체하지 말고 곧바로 예비하라는 것이다. 첩경 - 이 말에 대한 헬라어 '유데이아스...타스 트리부스'는 오늘날의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말로서 고대 페르시아나 로마에서 왕들과 그의 측근들을 위해 건설해 놓은 특별한 도로망을 의미한다. 즉 주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의와 죄악으로 일그러지고 구부러진 심령들이 회개함으로 그들 속에 쉽게 들어오시도록 예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3:2, 3;눅 3:8). 기록된 것과 같이 - 헬라어 원문에는 본 문장이 2절 초두에 제시되어 2, 3절에 언급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포괄하고 있다. 문장 어순이 다른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무시하고 3절 하반부에 서술적 형태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먼저 '기록된'으로 번역된 헬라어 '게그라프타이'는 완료형 시제로서 어떤 행위가 과거에 완성되어 그 결과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본문은 '기록되어 현재도 효력이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신약 기자들은 성경의 변함없는 권위에 대한 자신들의 강한 신념을 내비치기 위해 구약을 이용할 경우 이러한 어법을 자주 사용한다. 한편 세례 요한이 광야에 나가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게 된 것은 요한 자신만의 어떤 깨달음이나
또는 신비한 능력이 반영된 행위가 아니라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던 그대로가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는 또한 앞으로 전개될 예수의 구속 사건 역시 우발적으로 일어날 것이 아니라 구약에 이미 예언되고 기록된 대로 전개되는 것임을 암중 의미하고 있으며, 이러한 표현은 특히 마태복음에 자주 등장한다
[막 1: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세례 요한이 이르러 - 마가는 거두절미하고 세례 요한의 등장과 행적만을 말하나, 요한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란 사실을 요 1:6에서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누가는 세례 요한의 어린 시절에 그에게 주어졌던 예언을 언급함으로써 앞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소명의 신적 기원을 말하고 있다.
한편 이미 1장에서부터 마가복음은 예수시대의 배경이나 그시대의 사실보다 시대 자체의 설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이 마가 복음의 특징이다. 이에 많은 주경학자들은 마가복음이 가장 단순 명료하게, 즉 주관적 가감없이 예수 사건을 전달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 - 이 말에 대한 보다 정확한 번역은 '죄 사함에 관련된'이라고 되어야 한다.
바로 그런 취지에서 흠정역에서는 이것을 '죄 사함을 위한'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는 '에이스'의 용법에 관한 것인데, 이는 대부분이 목적격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여기서는 전후 문맥상 마10:41;12:41 등에서와 같이 그러한 개념으로 사용되지 않고, 단지 '...에 관련된', '...때문에'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다음에 연이어 나오는 '세례'자체가 죄를 사해주는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통해 사죄를 받기 위한 하나의 공식적이고 의식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회개의 세례 - 이는 회개를 중심으로 하여 베풀어지는 세례를 뜻하는 것으로, 여기서 '회개'란 어원적으로 마음의 변화를 나타낸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보다 더 깊은 의미로 사용되어 생각과 의지와 인격의 변화, 곧 전인적이고 본질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 테일러는 '신중한 전환'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진실한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응답은 죄사함이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죄사함에 대한 예비적 단계로서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은 당시 극도로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일깨워 주고 그들의 몸의 외적 정결 의식으로 말미암아
그의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들의 영혼이 깨끗함을 받도록 그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요한의 물 세례와 예수의 성령 세례는 상호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죄를 자복하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죄의 긍휼을 얻을 단계로 진일보하게 되었다.
여기서 '세례'(밥티조)는 '물 속에 잠기다'는 의미로서 일종의 침례 예식을 뜻한다. 그런데 이 세례는 기독교에서 새롭게 창출해 낸 의식이라기 보다 이미 유대인들에 의해 개종자들을 받아들이는 의식으로 정착(定着)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는 유대인들에 의해 전통적, 의식적으로 내려왔던 그 세례와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즉 요한의 세례는 회개와 죄의 고백에 관한 기본 원리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바울이 나중에 롬 6:4에서 설명한 바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식은 일찍이 헬레니즘 이시스 숭배 등 여러 밀의 종교들 가운데서도 시행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특히 본문에서 요한은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들을 회개하고 죄를 자복함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일종의 이교도들로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요단강에서 베풀어진 요한의 세례는 유대 민족들에 대한 일종의 도전행위로 그들에게 비추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요한은 나중에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게 되지만
그가 외친 '회개의 세례'에 대한 음성은 오늘날까지 살아 역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세례는 단순히 의식적이고 형식적인데 국한되지 않아야 한다. 어떤 교의 의해 세례 의식에 참여하는 것만으로써 교인은 될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신자 될 수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 중심의 회개, 즉 세례 요한이 강조하였던 '회개의 세례'에 있다.
[막 1: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 마가는 여기서 세례 요한의 설교에 거족적이고 대대적인 호응이 있었음을 간단히 언급하고 있었지만 마태와 누가는 이들 무리들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즉 그들 중에는 형식과 의식을 중요시하는 오만한 바리새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되어버린 사두개인들이 있었다.
또한 그들 중에는 일반 민중들을 노략하고 약탈하는 군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고 착취하다가 경멸받고 증오받던 세리들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다 세례 요한의 신선하고 생명력있는 설교에 충격과 감동을 받았으며 즉각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본 구절에서 특별히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란 표현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이가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당시 유대 백성들에게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사실을 강하게 시사해 준다. 이와 같은 요한의 회개 운동은 예수 공생애 사역이전에 일어났던 유대인들의 종교 활동 중에서 가장 위대한 운동이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수백년 동안 진정한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을 위대한 선지자 혹은 그 이상으로, 그들이 대망해왔던 메시야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그가 전파했던 메시지의 내용이 메시야의 임박한 도래였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흥분의 도가니로 휩쓸렸을 것이 자명하다.
나아가(엑세포류에토) - 원문상 미완료 시제로서 백성들이 요한에게 '계속해서 나아갔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마가의 이같은 보고는 조금 과장된 것이 사실이라 하더로도 세례 요한의 선포가 전국민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나아가 상당한 기대와 동요를 초래한 것만은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