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지명 유래
일제 때 엘리베이터가 있었던 조선극장(인사동 130번지)
반가워요 ・ 2026. 2. 23.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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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언, 일제강점기극장 15. 조선극장,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2019-11-26
https://www.kmdb.or.kr/history/contents/2928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26571
서울 다녀온 증거였던 우미관, 첫 한국영화 상영한 단성사, 중앙선데이, 2024. 2. 3.
신병주, 우미관, 단성사…지금은 사라진 추억의 극장을 만나다. 2023.11.01.
https://mediahub.seoul.go.kr/archives/2009449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엮음,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1~1922』
https://m.entertain.naver.com/home/article/081/0002976173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극장 [朝鮮劇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승희 저, 권상혁 역,『최승희, 나의 자서전 』2023, 청색종이, 94
[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필름 임대료 6,000만 원까지 치솟던 ‘조선영화관 전성시대’ 한국일보, 2019.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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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p6qnkx3x4ik
인사동 130-1번지
50m
© NAVER Corp.
인사동 코트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길 7 해봉빌딩
예약
인사동 130번지 주변
192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활동사진 검열과 극장에 대한 단속이 심해졌습니다. 조선극장이 개관할 무렵, 일제는 극장에서 영화 내용을 설명하는 '변사'들을 통제하기 위해 변사면허제를 실시했습니다. 조선극장 개관을 두 달 앞둔 1922년 9월경, 변사 응시자 40명 중에 4명이 탈락했습니다. 변사는 당시 인기 직종이었기 때문에 한 번 떨어지면 다음에 또 시험을 보는 사람이 많았다.
AI 활용
조선극장은 명월관 지배인 황원균이 설립했습니다. 1919년 11월 황원균은 중국 상해로 망명하려던 의친왕을 일제에 밀고하였습니다. 이 공로로 황원균은 극장 허가를 받습니다.
1922년 황원균은 인사동 130번지(과거 연흥사 자리)에 조선극장을 세웠습니다. 3층 벽돌 건물을 공사비 5만 원, 총비용 14만 원을 들여 지었는데, 건설 비용은 당시 쌀 한 가마니가 약 10원임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돈이었습니다. 3층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까지 있었고 옥상에는 고급 레스토랑까지 갖추었죠. 조선극장은 영화, 연극, 음악회가 모두 가능했습니다. 다른 극장은 따라올 수 없었죠.
황원균과 조선극장_1922년 매일신보
1922년 11월 6일 성대한 개관식이 열렸습니다. 서양영화 1편, 명창 이동백의 판소리, 5대 권번 기생의 가무, 윤백남 연출의 연극 「장발장」이 상연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극장을 열었던 황원균은 개관 3개월 만에 빌린 돈을 갚지 못해 운영권과 소유권을 일본 영화사에 넘깁니다.
1923년 7월 토월회는 조선극장 무대에 창립 공연을 올렸습니다. 이로써 조선극장은 민중극단, 민립극단 등 신극 운동의 메카로 자리 잡게 됩니다. ‘종합 예술 공간’으로 우뚝 선 것이죠.
토월회 공연_동아일보_1925
개관부터 운영진이 계속 바뀌는 가운데 1924년 <춘향전>, <비련의 곡>, 1925년 <흥부놀부> 등 자체 제작 영화를 상영했다. 조선극장의 지배인이기도 했던 김조성은 영화 <춘향전>, <놀부흥부> 등에 출연하며 변사이자 배우로 최고의 인기를 얻었습니다. 1926년 영화 <춘향전>에서 이도령으로 출연했던 김조성이 조선극장을 맡았지만 다시 그 자리를 차영호에게 내주었습니다.
조선극장 분규_매일신보_1924
1927년 조선극장의 운영권을 갓 인수한 차영호는 극장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나운규의 차기작 유치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1926년 단성사에서 개봉된 <아리랑>으로 전 조선에 돌풍을 일으킨 나운규는 당시 최고의 스타이자 감독이었습니다. 그해 2월 나운규의 <풍운아>가 조선극장에서 개봉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방랑하던 주인공 니콜라이 박(나운규 분)이 고향에 돌아와 겪는 비극을 다룬 작품입니다. <풍운아>는 <아리랑>의 성공에 이어 대흥행을 기록했으며, 조선극장을 안정 궤도에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나운규_매일신보_1927
이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여배우는 복혜숙이었다. 복혜숙은 이화여자고등학교에 다니다 16세에 일본에서 <충신장 忠臣藏>에 감동받았으며, 귀국한 후에는 신극좌에 입단했다. 1925년에 복혜숙은 조선 최초의 연기학교인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했다. 비슷한 시기에 토월회에 입단해 인기 배우 이월화 이후 최고의 스타가 됐다.
당시 인기 배우_매일신보_1925
조선극장이 낳은 최고 스타로는 성동호도 빠뜨릴 수 없다. 명문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성동호는 1922년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변사시험에 합격였다. 극장에서 변사로 활동했으며, 1930년대 중반까지 팬들을 몰고 다녔다.
한편, 조선극장은 다른 극장과 외국 영화 유치를 두고 심한 경쟁까지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세실 B. 드밀의 <왕 중 왕>(1927), 프랭크 보제이즈의 <거리의 천사>(1928) 유치를 두고 단성사와 치열한 경합 끝에 소송까지 벌어졌습니다.
1929년 조선극장은 다른 극장과 다른 시도를 합니다. 재즈밴드와 여성무용단을 조직해 영화 상영 전에 '레뷰' 공연을 연 것이죠. 그해 말 일본에서 돌아온 최승희는 조선극장에서 귀국공연을 합니다. 최승희 공연은 사이토 총독 등 정계 인사가 방문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최승희의 독무대로 조선극장은 단순히 영화관을 넘어 당대 최고의 문화 예술 중심지가 됩니다.
최승희 공연_조선일보_1919
1930년대 초 조선극장은 극장의 수입을 확대하기 위해 현대적인 마케팅을 도입합니다. 200여 명의 유료 회원을 모집하여 1년 정기관람권을 발급하고, 특별 시사회 초대 및 영화강좌까지 개설했습니다. 꽤 혁신적이죠! 이는 오늘날 예술영화관의 멤버십 제도의 효시로 평가받으며, 관객을 영화의 광팬으로 진화시킨 사건이었습니다.
조선극장 우대권_중외일보_1928
1931년 7월에는 조선극장은 조선흥행주식회사를 설립해 무성영화를 접고, 토키(발성영화)설비를 갖추어 유성영화를 도입합니다. 하지만 일제의 외국 영화 수입 방해로 경영의 압박이 심해졌습니다.
1932년 내부 갈등으로 건물주가 극장 사용을 중지시키자 조선흥행(주)은 유성영화 설비를 뜯어 단성사로 옮겨갔습니다. 1933년 경영난 타개를 위해 극단을 조직했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극 <등대> 공연을 문제 삼아 일제가 공연을 중지시킵니다. 이에 관객들이 항의하는 '조선극장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1934년 12월 제일극장 소유주 미나토 큐기치가 조선극장을 인수했습니다. 하지만 1935년 동양극장 개관으로 연극 무대가 옮겨가자 영화만을 상영하는 극장으로 전환됩니다.
1936년 6월 방화로 인해 건물 전체가 불에 탔습니다. 당시 불길이 워낙 거세 인사동 일대가 큰 혼란에 빠졌으며, 이 화재 사건은 당시 신문 1면을 장식할 정도로 큰 뉴스였습니다. 이 일로 끝내 조선극장은 복구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조선극장 화재_조선일보_1936
조선극장은 비록 친일 행적의 대가로 세워졌고 경영진이 자주 교체되는 풍파를 겪었으나, ‘서양영화의 전당’이자 ‘한국 신극 운동의 요람’으로서 단성사와 함께 한국 근대 문화를 이끌었던 핵심적인 공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