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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선교의 시작과 하나님의 인도하심
사도행전 16:6~10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한 이방 지역 선교단이 이차 선교여행을 떠나서 그 동안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투르키예 등 동양 지방에서만 활동하였는데, 이제 성령의 강권적인 인도하심을 받아 그리스와 튀르키예를 가로지르는 에게해 바다를 건너서 본격적으로 유럽에 복음을 전하는 획기적인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유명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이 일을 두고서,
“바울은 유럽 문명을 싣고 에게해를 건넜다.”
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유럽 문명의 두 기둥을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도교 문화로 보는 서양의 주류 역사학에서 볼 때에 이 말은 확실한 근거를 가진 말입니다. 그럴 정도로 오늘 본문 말씀에서 다루고 있는 사도 바울 선교단이 이차 선교 여행 초반부를 지나서 바다를 건너서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와 남부 아가야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여 교회들을 세운 이 일은 훗날 엄청난 영적 의미와 정치, 사회, 역사, 문화적 의미를 담은 큰 사건이 된 것은 분명합니다.
정작 사도 바울 자신은 이러한 그의 사역이 그렇게 큰 결정적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튀르키예나 그리스 남북 지역인 마케도냐와 아가야 지방 모두 로마 제국의 일부였으니까요. 그리고 그리스와 튀르키예 서부 해안 지대는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많은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 자신은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자 이렇게 서쪽 유럽의 관문인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역을 통과하여 교회를 세우고 계속하여 복음의 서진을 통하여 유럽 복음화의 막을 열어놓은 까닭에 훗날 유럽이 복음의 교두보가 되어서 이 유럽 대륙의 교회들로부터 복음을 다른 대륙으로 계속 퍼뜨리게 되었습니다. 유럽을 기반으로 하여 아프리카 대륙, 남미 대륙, 북미 대륙, 아시아 및 인도 지역, 오세아니아 남방 열도 등지에 유럽에서 파송된 선교사님들이 전도에 힘썼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복음을 가지고 에게해를 건너 유럽의 첫 관문인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남부 아가야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고자 배를 탄 오늘 본문 말씀의 사건은 기독교 역사적으로나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서 크나큰 전환점이 되는 대 사건인 것은 분명합니다. 비록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는 그러한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겠지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긴 안목과 큰 안목으로 보고 이 일을 결정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가진 이 사건에서 성령께서 주인공이 되어 나타나셔서 사도 바울의 전도단의 행방을 인도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사도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친히 주도적으로 자기의 뜻을 보여주시고 인도하심으로써 그들이 마침내 유럽 선교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 두드러지게 나오는 영적 주제인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먼저 누가 하나님의 인도하심, 우리 구주의 인도하심, 우리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사람은 당연히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창조주시며 그만이 오직 참 신이시며 그가 살아계시어 지금도 세상을 다스리심을 믿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기의 주님으로 영접함으로써 그의 몸과 마음에 성령이 거주하는 사람입니다. 로마서 8:14 말씀에 이르기를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 하신 말씀대로, 그는 자기 안에 성령을 모시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령을 모신 자들은 삶의 목적과 이유가 육신에 속한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잘 되는 것은 부차적인 일입니다. 삶을 살아가는 목적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신 가정을 잘 세워가고 사명지로 주신 교회를 잘 받들어 세우고 세상 가운데 보내주신 바 직장과 사업장에서 주님이 주신 재능과 은사를 따라 자기의 직무를 따라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복음의 일꾼이 되어 가족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며 이웃과 친구와 직장과 학교에서 전도하여 영혼을 건져내고 주님께 인도해들이는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모든 일을 행할 때에 인간의 힘과 자신의 재능과 자신의 지혜로만 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힘입어 행하는 것이 당연한 자세인 줄로 압니다. 그리하여 항상 하나님의 성령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께 도와주심을 청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깨달을 때에 성령께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아들 딸들만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세상 사람들 역시 하나님께서 만사를 다스리시는 통치 아래 있기 때문에 그의 뜻대로 다스림을 받긴 하지만, 하나님의 친밀한 인도하심을 알지도 못하고 친밀한 인도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역을 위한 영적 동역자가 되지 못합니다. 잠언 16:4 말씀에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물건을 보면 한두번 쓰임받고 곧장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들도 많지 않았습니까? 어렸을 때에 보면 푸세식 변소의 똥들을 치우는 막대기도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거미줄이 얼기설기 쳐진 헛간의 타버린 재들을 모아두는 헛간 한구석에 세워놓았다가 한번씩 푸세식 변소를 정리할 때 쓰이는 것도 있었습니다. 오직 그것은 그 용도로만 사용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사용 아래 있어 선한 일에 쓰임받는 자도 있고 악한 일에 쓰임받는 자도 있습니다. 천한 일에 쓰임받는 자도 있고 귀한 일에 쓰임받는 자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쓰임받는 자도 있고 하나님께 쓰임받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도 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쓰임받지만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처럼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을 위하여 사용되지 않습니다. 오직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만이 이렇게 하나님의 자상하고 주밀한 인도하심의 은혜를 입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드러날까요?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어떤 사람들에게 계시될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처럼 부르심받은 신앙과 삶에 충성스럽게 헌신하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 등 이방 선교단에게 하나님의 영께서 갈 길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부여해주신 이방 선교 사명을 받들어 순종하여 행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관심도 없고 세상적인 일과 육신적인 일에만 골몰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뜻을 이루고자 힘쓸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하신 길을 주밀하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고 힘쓰고 우리에게 주신 사명 곧 가정과 교회와 세상에서의 맡겨진 직임들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살려고 애를 쓴다면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그 인도하심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한번뿐인 인생의 여정에서 하나님께 선하고 귀하게 사용받도록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며 그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간절히 간구하면서 최선을 다하여 믿음으로 살고자 힘씁시다. 그리할진대 반드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주님의 뜻 안에서 선한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삶을 인도하실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영께서 두 가지 상반된 뜻을 보여주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는 억제와 강권하심, 제지와 허용하심 이 두 가지 방식으로 인도하십니다. 애초에 사도 바울은 아시아 지방에 들어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여기 본문 말씀 6절의 아시아란 튀르키예 서남부의 소아시아 지방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 교회에 가서 성도들을 격려하고 다독이고 가르친 후에 이제 소아시아 지역 곧 서남부 방향으로 내려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6절 말씀처럼 그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는 사도 바울 일행을 성령께서 가로막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반대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비두니아 지방으로 올라가려고 하였습니다. 비두니아는 지금의 튀르키예 북부에 있는 흑해 연안 지방입니다. 그런데 다시금 예수의 영 성령께서 또 다시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일행은 아직 한 가지 남아 있는 방향 곧 서쪽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어서 무시아에서 서쪽으로 계속 가서 마침내 지중해 바다의 에게해 바닷가에 있는 드로아 항구에 걸어서 도착을 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사도 바울이 저녁에 잘 때이거나 저녁 나절에 동료들과 함께 기도회를 할 때인데, 사도 바울에게 환상이 보였습니다. 그 환상 중에 한 사람이 나타나 사사 바울에게 청하기를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보면, 이제 제지하고 가로막기만 하시던 성령께서 여기서는 바다 건너편 서쪽 마게도냐 지방으로 건너와서 마게도냐 사람들을 도우라는 요청을 해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가로막고 제지하기도 하면서 또 다른 방향으로 허용하시고 강권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가 삶 속에서 행하고자 하는 것을 가로막기도 하시고 제지하심으로써 우리 갈 길을 인도하시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 지역으로 가게 하신 것을 막으신 이유가 무엇일까 분명치는 않습니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추론해보면, 그것은 아직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의 복음 전도 사역은 사도 바울이 이차 전도 여행 곧 바다 건너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지역을 전도하고 온 후에 삼차 전도 여행을 출발하여 도착한 주된 사역지가 소아시아의 수도였던 에베소 도시였습니다. 그 에베소에서 삼년 동안 있으면서 그 복음이 소아시아 모든 지방에 퍼졌다고 사도행전 19장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소아시아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성령께서 막으신 이유는 아직 때가 안 찼기 때문이요 이번에는 저 바다 건너편 지역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을 전도할 때였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비두니아 지역에 가지 못하도록 억제하신 이유도 생각해보면 그 지역 전도는 사도 베드로에게 주었던 전도 영역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1,2 말씀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베드로가 튀르키예의 동부와 중부 지역인 갑바도기아와 갈라디아뿐 아니라 흑해 연안 북부 지역인 비두니와 본도 지역에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고 이렇게 멀리 로마에 있으면서 안부 편지와 양육 편지를 써 보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 베드로가 본도와 비두니아에 가서 이방 전도 사역을 한 것으로 충분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그 지역의 전도 밭을 사도 베드로에게 맡겼기 때문에 비두니아로 가려는 사도 바울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모든 것이 다 우리 구주와 성령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인도해가심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런 예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사람의 계획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달랐음을 종종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 선교의 문을 열었던 영국의 탐험가이자 선교사였던 리빙스턴은 본래 인도에 선교할 마음을 품었으나 하나님의 영께서 그를 아프리카로 인도했습니다. 본래 윌리암 캐리는 태평양 남방 열도인 오세아니아에 선교할 계획이었는데 하나님은 그를 인도의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미국의 아도니람 저드슨은 인도에 가서 선교하려고 출발하여 일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어마 지금의 미얀마로 인도하여 미얀마에서 많은 영혼을 건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본래 인도에 가서 의료 선교를 하려고 일년동안 의학을 준비하였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조선에 갈 사람이 없구나”하는 탄식을 들려주심으로써 마음을 바꾸어 당시 아무도 가지 않는 복음의 불모지 조선 땅으로 선교지를 바꾸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방향을 바꾸어 한편으로는 길을 막고 억제하시고, 한편으로는 길을 열어서 강권하여 가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고 그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주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막기도 하시고 제지도 하시면서 동시에 우리의 길을 열어주시고 강권하여 이끌어가시면서 우리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시는 그의 뜻을 펼쳐나가실 것입니다.
물론 주님의 백성된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그 분명한 뜻을 알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성령님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막으셨다고 하였고, 또 그들이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셨다고 말씀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성령 곧 예수의 영께서 어떻게 그들에게 그의 뜻을 보여주셨는가는 분명히 말씀해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생각하건데,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의 징표로써 하셨을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폭동이 비두니아에서 발생하거나 혹은 사도 바울의 안질이 악화되어서 흑해 지역의 비두니아로 가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의사 누가가 곁에서 조언하여 그 여행을 막았다거나 하는 등 환경의 증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환경의 열어주심과 닫아거는 증거를 통하여 인도하시는 방식입니다. 또한 혹은 주의 뜻이 주의 백성들이 함께 기도하는 중에 기도하는 이들의 마음에 불안감이 들거나 무엇인지 마음이 허락되지 않는 부담감이 그들을 눌렀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예언의 은사를 통하여 주의 뜻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바 당시 사도 바울의 일행 중에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5:32 말씀에 나온 대로 예루살렘 공의회의 편지를 전해두러 시리아 안디옥 교회에 왔던 실라는 선지자였습니다. 실라가 사도 바울과 함께 그 여행에 동참하였으므로 어디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실지에 대하여 전체 전도단이 갈팡질팡할 때에 함께 기도하면서, 실라가 받은 예언의 은사를 통하여 그들 앞에서 소아시아나 비두니아 지역 전도 계획을 주님께서 원치 아니하신다고 말씀해주었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환상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주는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드로아에서 사도 바울이 드로아 항구에 머물 때 밤에 그에게 환상이 나타나서 알려주듯이 환상을 통하여 주의 뜻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혹은 성령께서 주의 백성의 마음 속에 조용히 알려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혹은 명백히 주님의 말씀이 들려지기도 합니다. 혹은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에 특정한 말씀이 선명하게 부딪혀 와서 그 고민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확신을 줄 수도 있습니다. 혹은 꿈을 통하여 주의 뜻을 알려주시기도 합니다. 혹은 마음의 강력한 소원이 일어나는데, 그 소원이 기도할 때마다 일어나 꺼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그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표시들을 접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언제나 잘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의 육신의 욕심이 너무 강력해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오해할 수 있는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왔는데, 그것이 성령의 말씀이 아니라 내 안의 자아의 소리일 수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거짓 선지자가 있고 건전한 예언자라고 인정받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특정한 경우에는 잘못 인도함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 선지자 시대에 당시 선지자들이 유다 백성들 가운데 일어났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내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거짓 영을 받아서 예언하였고 자기 마음의 생각을 따라 예언하였노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준으로서 우리가 반드시 점검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비추어서 살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롯이 서로 헤어질 때에 아브라함이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고 선택의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그 때 롯은 단지 땅의 비옥함과 생활의 편리함만을 보고서 죄악 도성인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요단 동편 땅을 거할 곳으로 삼고 이주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생활을 편리하고 부유했지만 그곳에서 그는 날마다 죄악 된 생활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고 온갖 악이 창궐한 모습을 경험했습니다. 그 아내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물들어갔고 그 딸들도 타락한 문화에 물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그 도시들이 불탈 때에 모든 재산도 불타고 그 아내도 소금 기둥이 되어 죽고 그 두 딸도 품행을 단정히 하지 못한 후손을 낳는 불행을 이어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기록 속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의 삶과 경건의 교훈들을 통하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환경의 문이 순조롭게 활짝 열린다고 해서 그 길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무조건 달려가면 안됩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기 전에는 섣불리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서두르지 말고 앞서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려지기 전까지는 차분히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을 처음부터 분명히 밝히 보여주지 않으시고 시간이 흐른 후에 그의 주권적인 때에 그의 뜻을 계시하시곤 하십니다.
이차 선교 여행의 주된 사역지가 바다 건너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지방 곧 빌립보 도시와 데살로니가 도시와 고린도 도시가 될 것을 성령께서 이미 알고 계셨지만 그것을 바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튀르키예 서쪽 바닷가 드로아 항구에 도착했을 때에서야 비로소 이렇게 사도 바울 일행에게 알려준 것을 생각합시다.
그러므로 조급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그의 정한 때, 적절한 때에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이 아직 계시되지 않았는데, 자기 생각대로, 서둘러서 이것 저것 마음대로 행하면 안됩니다. 자기 경험, 자기 지혜, 사람의 조언, 환경의 열린 것만 보고 무작정 달려가면 큰 낭패를 당하고 세월과 힘을 낭비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이 온전히 드러나기 전까지 계속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일은 결코 마음이 흥분된 상태에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은 깨어 있는 마음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환상을 보았지만 그 환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가 분명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은 그 환상을 본 사도 바울이 매우 정신이 또렷한 중에 환상을 보았다는 점입니다. 비몽사몽하는 중에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와 드러낸 뜻은 마음에 새겨져서 지워지지 않는 뚜렷한 기억으로 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이 몹시 흥분되고 무엇인가 열광된 상태에서 마음에 조급하고 초조한 가운데 있다면 그 때의 마음의 소원이나 어떤 계시가 주님의 뜻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검증할 수 있는 한 가지 좋은 점검 방법을 오늘 본문 말씀이 보여줍니다. 그것이 10절에 나옵니다.
함께 10절을 읽겠습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이 말씀을 통하여 정리해보면 사도 바울은 밤에 마게도니아인이 건너와 자기들을 도와달라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꿈 속에서 본 환상이거나 혼자 기도할 때 본 환상이거나 함께 기도할 때 환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환상을 보고 바울은 독단적으로 마게도니아로 건너가겠다고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가 밤에 본 그 환상 내용을 함께하는 선교팀 전체와 함께 나눈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이든지 그들은 다 모여서 사도 바울이 전한 환상 내용을 들으면서 함께 의견을 나눈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고 하였는데, ‘인정한다’는 헬라어 단어 ‘쉼비바조’라는 단어는 ‘함께 간다’, ‘함께 결합하다’, ‘함께 상의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몸이 힘줄과 혈관과 근육과 관절이 함께 결합하여 몸 전체를 이룬 것처럼, 이렇게 함께 깊이 결합하여 한 의견을 모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환상의 말을 듣고 그 전도단 전체 구성원이 의기투합하여 다 같이 한 목소리로 그 환상은 확실히 우리들을 바다 건너편 마게도냐로 건저와서 복음을 전해달라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구동성으로 한 마음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환상을 보고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 전도단 모두와 함께 상의를 하고 함께 의견을 모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보고 알게 된 것이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자신이 확신한다 해도 그 결정으로 인하여 함께 영향을 주고 받는 이들과 함께 그것을 공유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집의 이사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알려면 그 일에 대하여 그 남편과 자녀에게도 함께 공유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검증하는 것이 좋습니다. 직장 이전 문제라든지, 자녀들의 학교 진학 문제라든지, 자녀들의 결혼 문제라든지, 많은 결정 사항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할 때에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질 때에 그것이 대하여 함께 상의하고 함께 검증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가 확실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주님의 뜻을 잘 분별한다면 그 뜻을 확실하게 안 후에 우리가 드러난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여 행함으로써 우리는 주님이 인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인도함을 받을 때에 우리는 주님께서 작정하신 일을 순조롭게 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해주시고 고난과 역경을 만날 때에도 인내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시고 결국 주님의 작정하신 바를 이루고 성령께서 마음껏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과 그 선교단이 이차전도여행 때에 도중에 하나님의 이방 선교 방향에 대한 결정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고 그 뜻에 순종하여 행한 일은 크나큰 열매로서 지금까지 그 복스러운 선한 영향력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결정함으로 살아갈 때에 우리 삶과 우리의 자녀들의 미래와 주님의 나라와 교회의 미래에도 선한 영향력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 설교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순신 장군이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장수는 그 움직임을 태산같이 하여라”고 부하장병들에게 이르곤 했습니다. 자기의 움직임으로 부하 장병들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고 나라의 안위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조정에서 적들을 공격하라고 빗발같이 요청해도 움직이길 조심하고 적의 동태를 살피고 웅크리고 조심히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이순신은 항명죄로 서울로 끌려가서 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그를 늘 시기 질투하던 원균 장군은 이순신 장군 대신에 수군절도사가 되자 훈련 한번 안 하고 기생하고만 놀다가 조정에서 왜 적과 싸우지 않느냐고 말을 들으니까 살펴보지도 않고 온 수군을 이끌고 큰 바다로 나갔다가 대패하고 본인도 죽고 조선의 모든 배가 다 바다에 빠지고 오직 12척만 남게 되어 나라가 망할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가볍게 움직인 결과가 이렇게 큰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과 우리 가정과 교회와 민족의 미래를 위하여 가볍게 움직이지 말고 무겁고 신중하게 태산같이 무겁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직분자들에 대한 자격 요건 중에 첫 번째로 요구되는 덕목이 ‘신중하라, 정중하라’(디모데전서 2:2, 3:8, 디도서 2:5)고 사도 바울은 여러 차례 가르치곤 했습니다.
우리 모두 한 번뿐인 인생의 순례 길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손에 붙잡혀서 아름답고 복스럽게 쓰임받으며 복을 끼치며 살아갈까 생각하면서 신중하게 움직여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오늘 사도 바울과 선교단이 보여준 그 행동을 기억하면서, 늘 깨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잘 살피고 신중하게 기다리면서 드러난 증거들을 충분히 분별하여 주의 뜻을 밝히 알고 그 길로 행하는 자가 됩시다. 그리하여 참으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주님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고 주님의 계획이 온전히 성취되고 하나님의 충만한 복과 아름다운 은혜가 우리를 통하여 충만히 흘러나가는 귀한 삶의 주인공들이 다 되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