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1jR9t_MyFAw
본문: 요 11:1-16
제목: 잠들었도다
찬송: 370장
1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요한복음에 나오는 7가지 표적 중 마지막 표적이다. 나사로를 살리신 이 표적은 예수께서 생명의 주인 되심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장차 경험하게 될 부활과 영생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마 9:23-26; 막 5:21-43; 눅 8:40-56)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다(눅 7:11-17).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감람산의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2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여기 나오는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와도(눅 8:2) 다른 인물이며 공생애 초기에 나오는 또 한 번의 도유 사건에서 등장하는 죄를 지은 한 여인과도(눅 7:37) 다른 인물이다.
3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병들었다고 알리기만 한다. 알리기만 하면 오셔서 치료하시든 아니면 말씀으로 치료하시든 주께서 치료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4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실 때 하신 말씀과 같은 의미의 말씀이다(눅 9:3). 이 사건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확실히 사람들에게 보여 주신 영광스러운 사건이다.
눅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5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계시던 곳은 베레아에 있는 베다니일 것이다. 이틀을 더 유하신 이유는 보다 큰 계획이 있기 때문이었다.
7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유대인들은 두 번이나 예수를 돌로 치고자 했고(요 8:59; 10:31) 예수를 체포하고자 했다(요 10:39).
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9절과 10절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아직 낮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직 붙잡히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의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참 빛이신(요 1:9; 8:12) 예수님과 함께 다니는 자는 실족하지 않을 것이지만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는 자는 실족한다는 의미이다.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0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예수님의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과 살리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여기서 잠들었다는 말은 죽음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에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셨다(마 9:24). 성경은 성도의 죽음 역시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살전 4:14).
마 9: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살전 4: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2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제자들은 잠들었다는 표현을 죽음이 아닌 수면 상태에 들어간 것으로 생각했다.
13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4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심을 믿게 하려 하셨다. 죽은지 나흘이 되어도, 이후 예수께서 죽은지 사흘만에도 부활하실 수 있다는 온전한 부활 신앙을 갖게 하려 하셨다.
16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는 죽은 자의 부활을 대망하는 신앙보다 위협에 처해 있는 스승에 대한 의리 또는 의협심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예루살렘 동쪽 약 3km 지점 감람산 기슭에 베다니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친구라 부르시는 나사로가 있는데 병에 걸려 죽기에 이르렀습니다. 나사로의 누이는 마리아와 마르다인에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입니다(요 12:3). 나사로가 병들어 죽기에 이르자 그의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와서 병을 고쳐달라고 하지도 않고 병들었다는 사실을 알리기만 한 것은 그렇게만 하면 주께서 오셔서 치료해주실 것이라, 만약 그러지 않더라도 말씀만으로도 고쳐주실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들으시고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신 것은 조금 있으면 낫게 되는 가벼운 병이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병은 죽음을 향해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중병에 걸린 것은 사실이지만 죽음을 향해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나사로가 이렇게 죽음에 이르는 중병에 걸린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실 때에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눅 9:3)고 하신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곧바로 가지도 않으시고 말씀만으로 고쳐주시거나 치유책을 알려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 계시던 그 곳 요단강 동편 베레아에 있는 베다니에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두 번이나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고(요 8:59; 10:31) 예수님을 체포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요 10:39). 그래서 제자들이 말하기를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했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합니까?’라며 걱정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이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예수님은 아직 낮이기 때문에 붙잡히지 않으실 것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할 것은 참 빛이신(요 1:9; 8:12) 예수님과 함께 다니는 자는 실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둡고 혼란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실족하지 않으려면 참 빛이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다시 말씀하시기를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고 했습니다. 잠들었다면 휴식을 취하는 상태일 것이고 곧 나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한 것은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었다.’고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에도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마 9:24). 성경은 성도의 죽음 역시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 말씀을 보시면 죽은 성도를 향해서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죽음을 자는 것으로 표현한 것은 깨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부활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 말씀을 보시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말씀하심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성도의 부활을 보증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복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서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고 성도의 죽음이 복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기 전에 그 곳에 있지 않은 것 곧 이제 죽은 이후에 가게 된 것을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제자들에게 믿음을 더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아가 이후 예수님이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을, 더 나아가 성도의 부활이 있음을 믿는 그 믿음을 더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사로가 죽었으니 그에게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유대로 가면 예수님은 붙잡혀 죽으실 것이라, 그리고 그의 제자들인 우리도 죽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승에 대한 의리와 의협심으로 가득차서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