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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6일
말씀 : 눅24:13-17
제목 : 지성소에서의 기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설교가 믿음의 뿌리를 십자가에 두느냐, 아니면 세상에 두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열매가 다르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데요, 우리는 어디에 믿음의 뿌리를 두고 있는지 계속해서 점검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뿌리를 십자가 보혈에 두면 이 믿음이 천국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살지만 천국을 준비하는 삶, 천국을 목적으로 하는 삶이 이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다 이런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언제 믿음이 확인되고 점검되느냐 하면 어려움을 당할 때 믿음을 점검하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보혈에 믿음의 뿌리를 내렸느냐, 아니면 세상에 뿌리를 내렸느냐 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믿음이 슬픔과 고통과 고난 가운데 역사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왜 눈이 가리워져서 주님을 볼 수 없는지, 왜 함께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눅24: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줄만 알고 희망을 잃고 슬픔과 낙심 가운데 내려가는 길에 주님이 함께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슬픔 가운데 눈이 가려져 있었지만 주님은 여전히 함께 하시고 계셨습니다. 보십시오. 왜 제자들이 평소에 함께하셨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죽었다라고만 생각했지, 살아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교훈적으로 형식적으로만 받아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가리워져’이 말씀은 헬라어로 ‘크라테오’라는 말로 ‘고정되고 변동이 없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의식과 시각이 변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평소 부활의 약속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뜻도 됩니다.
우리가 평소에 ‘가리워져’있는 부분, 의식과 시각이 현실에 매몰되어 있는 부분이 없습니까? 가리워지는 부분 중에 이런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상처가 많으면 사람들에게 상처에 관한 설교를 많이 합니다. 갈등이 많으면 갈등 이야기를 많이 하죠. 여러분들도 여러 가지 관심도가 다릅니다. 혹시 병 고침의 은혜를 받았으면 병 고침만 이야기하고 병 고침의 체험을 한 성도를 최고의 신앙인으로 인정합니다. 전도 많이 한 사람은 전도자가 가장 큰 일을 하고 있다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이런 자기의 것이 다양하게 역사하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만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를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인해 우리가 영적인 사람으로 세워지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식이나 의식에만 치중하는 사람들이 영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국 자기 것을 최고로 여기고 또한 이것을 자랑으로 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두고 ‘미련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에게 꾸짖으십니다. ‘미련하고 더디 믿는 자여’제자들은 선지자의 말씀도 들었고 예수님의 가르침도 받았는데 왜 불신앙이 드러났습니까? 자기 생각이 고정되어 변화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을 했지, 예수님의 약속된 부활의 말씀은 믿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이들의 믿음은 현실에 뿌리를 둔, 즉 세상적 시각에 고정되어 그 마음이 전혀 변화되지 못했다는 것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지 못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현실에 뿌리를 두고 믿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미련한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영적인 감각이 전혀 없는 즉, 세계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교리적인, 지식적 말씀이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믿음이 되느냐 하면 말씀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에서 나타나는 모든 고정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지요. 세상 사람들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중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동정녀 탄생, 물 위를 걸어가심,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이런 것으로 인해 말씀을 거부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아이와 아버지가 길을 걸어가는데 큰 개가 짖어대는 것입니다. 아이는 ‘아빠 무서워요’ 그러면서 지나가기를 거부합니다. 그때 아빠가 하는 말이 ‘애야 지금 저 개는 목줄이 묶여 있지 않니, 그러니 걱정마라’그랬다는 것 아닙니까? 그 아이는 큰 개가 짖는 것만 보이지 목줄이 되어 묶여 있는 것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주님을 보지 못한 상황과 흡사한 내용입니다. 믿음의 문제는 그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십자가 보혈에 뿌리는 두느냐 아니면 세상에 뿌리는 두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릅니다. 십자가 보혈에 뿌리는 두면 현실 너머를 볼 수 있지만 세상에 뿌리는 두면 세상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문제는 현실만 보이면 우리들이 봐야 할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약속이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의도와 뜻과 계획이 보이지 않고 문자만 보이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몰라서 많은 부분에서 귀하고 복된 것을 놓친다면 참 안타까울 수 없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주님과 동행하면서 그것을 모르고 내려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주님이 함께함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하는 부분이 우리의 부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들이 참 많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계속해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요,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동행하는 삶을 보장받고 있다는 것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천사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으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준비가 철저히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같이 죄가 많고 궁핍한 자들이지만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처럼 나가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만이 자녀입니다. 자녀만이 친밀하게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며 그분의 임재 가운데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사귐의 삶은 천사도 흉내내지 못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저번 시간에 하나님의 십자가 보혈로 임재 가운데 들어가 사귐을 위해 기도의 통로를 사용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의 그 영광을 지성소로 설명할 때 실감할 수 있어서 지성소를 통해 하나님의 만남의 장소가 얼마나 복된지를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죄가 없어야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죄인이 아니라 죄를 덮어주셔서 죄 없다는 선포를 하시고 죄 없다는 인정을 하셨다는 증거가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과 사귐을 왜 지성소로 묘사를 하느냐 하면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기도하는 자들을 둘러싸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성소에 들어가면 일단 세상과 단절되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영광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집중합니다. 왜냐하면 지성소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영광이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자, 즉 하나님을 갈망하며 구하고 찾는 자를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십니다.
기도는 교제의 통로, 교통의 통로인데요,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시행하기 전에 절차를 따라하는 의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식사를 하기 전에, 또는 병원에 가기 전에, 어떤 이들은 문제가 크게 발생했을 때 등으로 어떤 절차에 따른 의식행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믿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굉장한 믿음이 동원되고, 확신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시는 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기도했고 그 기도의 결과가 하나님이 들으시고 결정하시기 때문에 어떻게 결정되든지 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시고 절대 손해 보지 않게 하시며 우리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십자가 보혈에 뿌리를 두고 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알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함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문제점이 무엇이냐 하면 ‘미련함’으로 눈이 가리워져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지성소에 들어오지 않고 그 문 앞에서 어슬렁거렸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는 교회에 와서 기도할 때 임재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애를 써야 합니다. 그것은 철저히 회개하며 통회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자기를 십자가에 죽이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왜 이것이 중요하냐 하면 하나님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지성소에 대해 말씀을 드리면서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는데 속죄 제사를 철저히 드리지 않고 들어가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래서 끈으로 묶어서 들어갑니다. 혹시 죽으면 끄집어내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한 철저한 통회가 있어야 하며 철저히 십자가 보혈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성소에 들어와서 그분을 만나면 하나님의 강한 임재 가운데 그분과 사귐의 시간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 부분이 영적인 해석으로 인식해야 되는 부분이고, 체험적 신앙으로 이해해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마는 우리가 이런 느낌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느낌 말입니다. 우리가 거울을 보잖아요, 같은 이치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선명하게 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거울을 보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느낌을 가지셔야 합니다. 내 곁에 계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느낌 말입니다.
그리고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에 중요한 의미는 훗날에 천국에서 누릴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 땅에서 누린다는 뜻입니다. 천국의 영광된 곳,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의 나라, 감당할 길이 없는 강력한 임재의 나라를 우리가 이 땅에서 맛을 보는데, 그 중에 지성소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나라의 임재가 이 땅에 도래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나라를 맛보는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만남의 공간은 천국의 공간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영광된 장소입니다.
이 지성소에서 하나님나라를 보는 것입니다. 이 지성소에서 천국에서 교제가 그대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셔야 합니다.
지성소에서 기도는 그런 관점에서 찬란하게 멋있게 기도할 필요 없습니다. 더듬거려도, 끊겨서 기도가 중단되어도, 어떻게 기도해야 될지를 몰라도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할 때는 모든 것이 완벽해질 것입니다.
지성소에 대한 부분은 다른 각도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론에 대한 설교 중에 언약에 대한 부분을 설교하면서 언약궤에 대해 강조를 많이 했습니다. 말씀을 근거로 해서 이 부분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을 했습니다. 옛 언약은 돌 판에 새겨진 언약이라고 했는데 돌 판이 바로 십계명의 돌 판입니다. 이것이 언약궤 안에 들어 있지요. 그런데 새 언약은 마음 판에 새겨진 말씀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철필로 새겨진 말씀, 즉 내 안에 생명의 말씀이 들어있으면 우리는 새 언약의 약속받는 언약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언약궤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부름을 받았다는 말인데요, 이 언약궤가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지성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있는 곳이 지성소가 되어야 하는데, 성령의 임재가 우리 속에 머물러 있음으로 인해 우리가 가는 곳마다 지성소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성령의 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전6:19-20 ‘너희 몸을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성령의 전입니다. 그러니까 언약궤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요. 늘 지성소에 머물러 있는 삶을 요구받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렇게 언약궤로서 지성소에 머물러 있는 특권과 영광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다. 20절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대신 구원을 얻게 된, 그 피 값으로 우리를 산 것이 되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그러면 이런 언약궤로 지성소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할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임재의 삶, 하나님과 늘 교통과 교제의 삶, 하나님의 사귐의 삶입니다. 이런 사귐의 삶은 기도로 말미암아 유지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형식적이 아니라 의식이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누려야 할 의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얻기 위해서라기보다 하나님을 갈망하고 구하고 찾는 행위임을 그래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약궤의 역할만 제대로 하면, 즉 그리스도의 말씀이 마음에 철필로 새겨지면 다른 표현으로 믿음의 뿌리가 그리스도의 보혈에 두면 지성소로 만들어 나가는 특권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더구나 이런 것을 알면 우리는 반드시 이 특권을 누리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기도가 우리에게 이런 영광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은혜와 영광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롬8:26말씀으로 적용해 봅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 인식입니까? 여기서 기도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기도가 신을 설득해서 얻어내는 행위로 이용하는 부분은 다른 종교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인데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기독교에서도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이제 금방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의 정성은 다른 종교, 예를 들어 불교 같은 경우는 정성과 노력과 기도의 행위가 굉장합니다, 108배 같은 경우는 옆에서 보고만 있어도 힘들다는 것을 알 정도 아닙니까?
그런데 이들에게 있어서 기도의 특징은 전부 초점이 자기들에게 가 있습니다, 자기의 모든 문제 해결과 축복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기독교에서 기도의 특징은 그분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 끝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이렇게 마무리하는데, 이런 것이 기도 끝났다는 신호로 들립니까?, 아니며 주문 외우듯이 하는 것으로 인식하십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진짜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요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기도하면 응답된다가 아니라 내 이름으로 구하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개입하시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왜 개입하십니까? 우리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연합되어 있고 하나로 유기체적인 연합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말미암아 주님이 개입하셔서 응답되도록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만들겠다는 것은 그렇게 하고 말겠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존재를 언약궤와 지성소를 통해 알아야 됩니다.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청중 모두가 아멘 합니까? 그 기도는 예수님이 함께 이루는 기도이기 때문에 우리도 이 기도에 동참한다는 뜻으로 ‘아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응답 여부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계획이 기도에 포함되어 있으니, 그 응답 유무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서는 변함이 없다는 믿음이 기도 안에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연합되어 있고, 연약궤로 우리가 성령의 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후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응답 안 된 것을 도리어 기뻐했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계획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기쁨과 영광은 하나님과 교제와 교통 가운데 사귐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귐을 위해 기도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늘 기도자로서 누리는 특권을 누리며 신앙생활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