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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안병욱(安秉煜 )교수 님의 인생론(人生論)에는 사람은 세 가지 선택
첫째, 나는 누구와 살 것인가? (배우자의 선택)
둘째, 나는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직업의 선택)
셋째,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관, 가치관의 선택)에 의해 산다 하였습니다.
오늘은 그중 나는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高麗生命, 東海生命, 東亞生命, 錦湖生命, KDB생명...
한국의 생명보험 회사 리스트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제가 근무했던 회사들의 변천 사입니다.
康德燦, 孔亨植, 金遺復, 承相彧, 朴文相, 崔俊圭, 金在赫, 宋正範, 金炯斗, 朴性行, 禹在九, 河五壽,
禹潤根, 高相謙, 安撤奐,, 李鐘勳
한국의 성 씨 열전이 아닙니다. 제가 회사에서 모셨던 사장님 리스트입니다.
한 회사에서 입사하여 그만 두기 까지 3번(적색)의 사명(社名)이 바뀌고 사주는 5번 바뀌었으며
사장님은 16분을 모셨습니다.
이것만 보셔도 제가 순탄한 직장 생활을 하지는 안 했음을 이해 하리라 봅니다.
제가 1968년 2월 12일 입사하여 1991년 5월 31일 물러날 때까지 겪었던 사실입니다.
1964년 대학을 졸업하고 자원 입대하여 군 복무를 마치고 직장을 구할 때 저의 나이는 29세였네요
9살에 초등학교에 입학(1946년)하고 가난으로 인해 중학교 입학, 대학교 입학 때 각각 1년씩 늦게
들어가 1967년 1월 만기 제대를 마치니 나이가 29세였지요. 그 당시 직장에서는 28세 미만 자만 입사
지원이 가능했고 11월이면 거의 신입 사원 채용이 마친 때였기에 1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신혼에 첫 아기까지 있었으며 5년의 가정교사를 하며 대학을 나와 군복무로 인해 4년이
넘는 공백을 넘어 직장을 구했기에 참으로 조급하였습니다.
하루는 직장을 알아보려 상경하는 기차에서 신문에서 난 보험 회사 신입 사원 모집 공고를 보고 공고가
난대로 회사를 찾아갔더니 화신 백화점 뒤에 5층 짜리 건물에 자리하고 있는 고려생명보험이었습니다.
워낙 다급한 저였기에 고르고 말고 가 없었고 무조건 하루 속히 취직이 목적이었지요. 대학을 졸업하며
보험 회사 이름도 모르던 제가 그렇게 보험 회사를 택하고 말았습니다. 1968년 2월 12일의 일입니다.
처음 배치된 부서가 요금과로 보험료를 받아 정리하는 부서였고 부서 중 제일 큰 부서였습니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6개월 쯤 지나니 대리가 하는 직무를 맡기더군요. 나이도 있고 출신 학교도 그렇고
입사 시 수석 합격 등이 고려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입사하자 마자 동기 10명이 노조를 형성해 노조 위원장을 맡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 회사 형편이
말이 아니어 해체하고 대신 사우회장을 3선까지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2년 정도 지나자 회사 주인이
바뀌더군요. 입사 시 사장님은 자수 성가 하여 회사를 차렸고, 부인이 부사장으로 계시면서 가족 회사
같이 운영하였지요. 사장님은 명절이면 전 직원을 집에 초대도 하고 극장에도 같이 가시는 인자한 사장
님이셨습니다. 그런데 회사가 기운 것은 보험료 구성에 단체 보험이 90%이고 개인 보험이 10%이었습
니다. 다른 회사와는 정반대 현상이었지요. 단체 보험이 주를 이루니 거짓 퇴직으로 꾸며 퇴직금을 받아
가고 또 신계약 하는 것처럼 해서 수당을 받아가니 점점 수지는 마이너스로 변해 갔고 비상 경영을 한다
고 새로 온 경영자들은 올바른 경영보다는 자기 몫 챙기기에 바빴지요.
결국 회사는 주인이 바뀌었는데 회사에 있던 외제 차 하나를 퇴직하는 부사장이었던 자가 그 차를 가져
가려 하는 것을 보고 참으로 슬픈 마음이 일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로 주인이 되신 분이 박 사장님이셨는데 회사도 서울시청 뒤에 있는 남강 빌딩으로 옮겼습니다.
주인이 바뀌었지만 회사는 금방 회생 할 기미가 보이지 않더군요. 박 사장님이 어떻게 해서 새 주인이
되셨는지는 모르지만 전문 경영인이 아니었습니다. 그 작은 회사를 살려야 할 구상을 하셔야 하는데
비서실을 만들더니 가방 들고 따라다니는 비서에 수행 비서라고 하여 또 두었지요. 비서실 장으로 과장을
두고 여 비서까지 두는 어처구니없는 일만 앞섰습니다. 점차 제 마음이 흔들렸지만 그렇다고 모든 여건이
제가 다른 회사를 구해 나가기는 형편이 허락하지 안 했습니다.
비가 쏟아지는 어느 여름, 창밖을 보니 서울 시청 건물에 층 사이 굴곡이 있는 틈새에 이름 모를 풀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아니 저런 환경에서 저렇게 살아서 자라다니 마치 제 신세를 보는 것 같아 가슴에
뜨거운 눈물이 흐르더군요. 그러나 박 사장님은 저를 아주 사랑하셨습니다. 하루는 저를 부르더니
“최 대리, 내가 너를 과장으로 승진 시키려 한다.” 하시더군요. 얼마나 반가운 일입니까? 당장 감사하다
해야 했을까요? 그러지 못했습니다.
“사장님!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만 너무 앞서 가면 제가 처신하기 무엇 하니 황 대리, 윤 대리랑 같이
시켜주십시오” 하였지요. 소위 3 총사 라는 동료들이었습니다.
“어 그래, 나는 너만 시키려 했는데 네 말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내일 임원 회의에서 다뤄볼게”
하고 넘어 갔습니다. 그것이 두고 두고 한이 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다음 날 부르시더니 “너만 시키기로 했다. 그래서 네 의견도 고려해서 우선 너를 ‘과장 사무 취급’으로
발령하기로 했다. 직무는 과장 업무를 하는 거다.” 하시며 그 후 과장으로 호칭 되었습니다.
그것이 커다란 잘못이었습니다. 그렇게 앞서가던 제가 ㈜서통이 세 번째 주인이 되면서 회사 명이 동해
생명으로 바뀌면서 엄청난 회오리가 불기 시작했습니다. 임원 진, 담당 부장이 바뀌면서 대대적인 인사
물갈이가 시작되더라고요. 대연 각 빌딩으로 회사도 이사도 가고요. 그러더니 제가 영업부 대리로 있었
는데 제 자리에 점령군(?) 부장이 자기 사람 데려오느라고 저를 영업소 총무로 발령을 내고 말더군요.
박 사장님이 과장으로 승진 시키려 하실 때 그대로 받아드렸으면 좋았을 걸 주인이 바뀌니 이 꼴이 되는
거였습니다. 더구나 소장으로 온 사람은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적은 사람이 왔으니 그 수모를
참는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 했는가 상상이 되실 겁니다.
그러나 새로 제 자리에 온 사람이 저와 일 처리가 비교가 되겠습니까? 오면서 승진한 것으로 만족하고
3개월 만에 다시 저를 원래 자리로 발령을 내더군요. 직장 생활을 해 보신 분이라면 그런 비애를 이해
하시고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이 바뀐 후로 모든 급여가 많이 상승한 효과는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경제적 삶은 첫 직장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삶이 크게 향상되면서 지금까지
참으로 바보같이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제가 과장으로 승진하는데
4년이 걸렸습니다.
시켜주려 할 때 할 것을 이런 운명이 되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 후 새로 영업 담당 임원으로 하 오수 이사가 왔는데 올 때 모든 경영 계획을 제가 다 작성하여 주고
사장께 브리핑하여 채용 되었습니다. 그때 점령군 중 K 부장이 있었는데 대구 영업 국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런데 당시 영업 국장에게 교통비 지급이 변경 됐을 때인데 총무부에서 통보를 해주지 않아
그 사실을 모르고 3개월이나 지급되었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자 K 영업 국장이 하 이사 님을 초빙하고
다녀오더니 저를 서울에서 가장 어려운 영업 소장으로 발령을 내더라고요. 그 국장에게 나쁜 말을 했다는
핑계로 점령군으로 부장까지 초고속 승진한 K부장과 나의 도움으로 이사까지 된 하 이사의 합작이지요.
매월 영업 부진한 소장들을 집합해서 회의를 하고 식사를 하는 자리였는데 제가 말 석에 앉아 있는데
하 이사가 큰 소리로 말하더군요.
“최 소장. 내가 너를 배신하지 안 했다”고. 이 말의 의미를 아시겠지요.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 했던가요.
결국 7개월을 하고 도저히 더는 못 하겠다 했더니 광주로 발령을 내더군요. 그렇게 광주로 가서 근무하
다가 새로 오신 박 사장님이 제 일 능력을 듣고 저를 다시 불러 올리셨고 사장님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모든 것을 임원을 앞서 저와 상의하시는 정도까지 갔으니까요. 회장님과 사장님이 식사하시는
중에 저를 회장님께 소개하시며 칭찬까지 하시니 회장님도 잘 부탁하신다는 인사도 받기 까지 하였지요.
하지만 점령군과 뿌리의 싸움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게 또 무엇입니까? 권력의 흐름에 따라 군부가 삼 권을 쥐고 있을 때 공영 토건이 안동 권 **
때문에 네 번째로 회사 주인이 되었지요. 공영 토건이 주인이 되면서 사장님으로 한국은행 출신이신
우 사장님이 오셨습니다. 공영 토건(주) 회장님과 고향 동문이셨기 때문에 서울대 출신에 장차 한국
은행 총재까지 바라보시던 분이 차출 되어 오셨습니다. 그때 제가 기획 부장으로 있을 때였는데 3 년
여 만에 회사는 일취월장 성장하여 다른 회사에서 눈을 돌리기도 하였습니다. 그간 참고 견뎌온 보람이
보이는 것 같아 하루하루 삶이 즐거웠고 전 사원들이 희망에 불타기도 했습니다. 사장 한 분이 바뀌니
기업이 그처럼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느끼던 때입니다.
그런데 이게 또 무슨 운명의 장난입니까? 권 아무개 씨의 운명이 바뀌니 회사의 운명도 바뀌면서 새
주인으로 동아 건설이 됐고 회사 명도 동아 생명으로 바뀌었습니다.
제가 기획 부장으로 있을 때인데 하루는 동아 건설 서 부장이라는 사람이 오더니 저에게 여러 정보를
요구하더라고요. 벌써 몇 번째입니까?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요. 이미 회사에서는 동아가 새 주인이 된다는
소문이 무성했지 만 회사 터주대감 임을 자처하며 죽도록 일했던 제가, 또한 회사가 좋은 사장님 밑에서
그처럼 일취월장 하던 회사가 또 주인이 바뀐다니 제가 응할 수가 없었지요. 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괘씸죄(?)로 전남 광주로 발령을 내버리더군요. 기획 부장 7년이면 임원이 되어야 당연한데 이처럼
좌천이라니 이것이 제 운명인가 싶었습니다.
한없는 절망감을 안고 갔습니다. 그렇다고 뿌리로 자처하며 살아 온 제가 포기하기는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광주 근무였지요. 그러다 보니 모두가 아는 직원들이라. 호소했습니다. "아다시피 내가 이렇게
좌천 되어 온 것은 너무 억울하다. 어떻게 하던지 내 기어이 1등을 하고 갈 테니 도와 달라" 하였지요.
모두가 한 마음으로 저를 도왔습니다. 1년 후 전국 영업 성적 1위를 하였고 영업 부장으로 올라왔습니다.
철저히 복수하였지요. 그 후 영업 본부장으로 전국을 순회하는 직무를 맡았습니다. 월요일에 집을 떠나
금요일에나 귀가하고 강원도 거진에서 제주도 서귀포까지 순회하며 영업을 독려하는 일이었지요.
5년의 세월이었습니다. 그 후 임원으로 승진하였고 그것이 저의 마지막 근무였습니다. 참으로 한 많은
직장생활이었습니다.
동아 생명이 되면서 저의 운명도 마지막을 재촉하였습니다. 완전히 저하고 저와 반대 그룹으로 말입니다.
제가 이사로 있을 때 인사 위원회가 있었습니다. 파랑새 영업소에 K 여 소장이 금융 상품을 판매하면서
5억 원이 넘는 횡령을 한데 대한 인사위원회였는데 1시간 반 가량 토의해도 빙빙 도는 이야기만 하고
있기에 제가 한마디 했지요.
“사장님! 결론을 내리세요. 횡령이다, 아니다”고요. 그러자 사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정회를 선포하고
다시는 위원회 소집이 없었습니다. K 영업 소장이 정치(?)를 잘 하던 분이었지요. 항상 선물 보따리를 들고
다니며 풀어놓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동아를 떠난 후 그 여(女)소장은 형무소에 갔다 하더군요.
또 한 가지 말도 되지 않는 일도 있었습니다. 최 아무개 소장이 엄청난 횡령을 하고 미국으로 도주했는데
S 부장을 한 달 간이나 미국에 출장을 보내 데려오라는 일이었습니다. 인터폴도 범죄자 잡아오기 힘든데
일개 부장이 가서 데려오라니 이게 가당하기나 한 일입니까? 그게 그들의 수준이었습니다.
또 제가 총무 이사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임원에게 지급되는 기밀 비라는 것이 있지요.
영수증으로 정산하여야 하는데 어느 임원이 말도 안 되는 영수증으로 정산하기에 담당 부장에게
'사장님을 제외하고 임원 님들의 기밀 비 사용을 잘 점검하라' 했지요. 그랬더니 부장이 사장에게 ‘ 이사
님이 임원 님들의 기밀 비 사용을 점검 한다“ 고 이른 것입니다. 무엇이 구렸던 지 2개월 만에 교육 담당
임원으로 보직을 바꾸더군요.
저는 회사의 뿌리라고 자부하며 점령 군들과 무한한 투쟁을 하면서 그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굴곡을 보내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저의 직장생활이었습니다.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못하는 저의 성격이었지요. 그것을
직장에서는 HR(Human Relation) 인간관계 미흡이라고 이용하며 들이대지요.
동아생명을 퇴임한 후 1991년 부산생명으로 옮겨 1994년까지 서울 영업본부장으로 근무하다가 퇴임하였고
거기에서 모신 사장님이 2분이셨고요.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1.사람은 기회가 있을 때 기회를 놓치면 다시 잡을 수 없습니다. 제가 처음 고려 생명에 입사하여 6개월
쯤 지났을 때 K라는 대학 선배 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지금 포항 제철에서 회계 담당자를 추천해 달라는데
거기로 가라” 하셨습니다. 겨우 직장을 구해 신혼 가정을 시작한 저로서는 포항까지 가서 신설 회사에
옮긴다는 것은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역시 그 선배 님이 대전 생명 사장으로 가시면서 같이 가자며 전무는 보장 하겠다 하셨는데
또 승낙을 하지 못한 것은 아내와의 결별을 앞둔 때여서 그랬습니다.
첫 번째 추천을 들었으면 포항 제철 창업 멤버가 되었을 것이며, 두 번째 요구를 받아드렸다면 전무는
하고 직장을 마쳤을 것인데 두 번 다 놓쳤으니 그 한을 도 뇌이면 무엇 하겠습니까?
그 후 그 선배 님 찾아뵙고 사정을 말씀 드리고 용서를 빌고 싶었는데 선배 님은 고인이 되셨습니다.
선배 님. 고마운 은혜 감사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2.순자(筍子) 신도편(臣道篇)에 종명이이군위지순(從命而利 君謂之順)이란 말이 있습니다다.
신하의 성격을 태신(態臣), 찬신(簒臣), 공신(功臣), 성신(聖臣) 넷으로 분류 설명하였는데
"명령을 따르되 임금에 이롭게 함이 순종이고,명령을 따르며 불리하게 하는 것을 아첨이다." 했습니다.
나는 어떤 신하=참모 여야 하나 생각하며 직장 생활을 했다 자부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