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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새들이 돌을 깬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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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돌을 깬다]
오원량 시집 / 가슴에 내리는詩 062 / 책펴냄열린시(2017.08.10)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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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돌을 깬다
오원량
한 여름 그 숲속에서는
새들이 새벽부터
자갈돌을 깨기 시작한다
새들은
산 너머 새해가 붉게 타오를 쯤
더 열심히 자갈돌을 깬다
새들의 자갈돌 깨는 소리는
해가 하늘을 더듬어 오르기 시작하자
더 크게 들린다
새들은
숲을 향해 해가 반짝 떠오르자
드디어 자갈돌 깨는 일을 마친다
새들이 깬 자갈돌을 매미가 종일
어디론가 끌고 가고 있다
간간이 자갈돌 떨어지는 소리도 들린다
풍장을 꿈꿔 보다
오원량
산으로 둘러싸인 호숫가에
밧줄에 묶인 채 꿈쩍도 않고 있는 낡은 나무 배 한 척
그 배 위에 내가 타 본다
뜻하지 않은 객으로 인해 놀란 듯
잠시 흔들리다
또 다시 잔잔해진 배
나 또한 밧줄에 묶인 채 떠 있는
세상에 나 홀로
물에 떠 있는 나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내가 고여 있다
풍경과 시간과 내가 정지된 꼭지점에
석양빛이 유난히 붉다
뚜껑 없는 관 위에 누워
풀ㅈ풍장을 꿈꿔본다
바람에 자유로이 훨훨 날고 싶은
영혼 하나 참 행복하겠다
백과 흑의 교대 시간이 다가오자
고요가 물 위에 자박자박 걸어오고 있다.
몸 밖으로 나온 돌
오원량
사람의 몸엔 75프로가 물이라더니
몸 속 깊은 어느 곳 계곡 하나 간직하고 있는지
그 계곡 물살 참 새기도 한지
매끄럽게 잘 닳고 닳아 다듬어진 돌덩어리들
몸 밖으로 불쑥 튀어 나왔네
첩첩이 쌓인 돌 굴러 무너질까
아찔도 해라
돌이란 전부 인고의 과정을 거쳐야 저렇게 매끄럽게 다듬어진다고
돌에도 생명선이 있다고 힘줄 굵게 박힌
돌덩어리들 모여 큼직한 바위로 돌변한
우뚝 솟은 산 사이로 거센 여울이 솟고, 괴상한 바위, 첩첩 봉우이 기이하고 뛰어난 경치 사방 절벽 깎아지른 듯 솟아 공중을 이고 병풍을 친 듯 휘장을 드리운 모양이라니… 마치 무너져서 덮칠 듯 아찔한 암석으로 둘러싸인 깊은 절벽…
아놀드슈왈제네거 등판
샛강
오원량
어느 푸른 강에서 갈라져 나왔는지
별 몇 개 은자돈 삼아
긴 여정을 마다 않고
바닷 속 오색나비들의 유영을 그리며
대양의 꿈을 향해 가는,
가끔씩 내리는 단비에 까무라치게 웃음도 짓지만
도연명의 시도 낭낭하게 읊을 줄 아는 위인
묵상기도도 곧잘 드린다고
하늘을 품고 아득히 깊어지기도 하던,
더러는 산고개 넘나들던 붉은 짐승과 시름도 곧잘 하며
푸른 근육질로 거드름을 피우기도 하던
허나 밤이면 제 살집 하나 뜯어 은근하게 달여
그리운 님 창가에 슬쩍 갔다놓고는
지난 시간들을 다시 끄집어내며
밤새 나즉나즉 노래도 곧잘 부르기도 하던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히
만 평 안개꽃도 잘 키우고 있기에
잠시 오십 중반 고개 돌고 왔더니
생뚱해라
듬성듬성 덥수룩한 수염에 상어 이빨 같은 치부를 드러내놓고
목마르게 헐떡이고 있는
아지랑이 영토
오원량
1.
차디찬 무덤 주위를
따뜻한 손으로 어루만지는 이 있어
오랜 잠에서 깨어난
맑은 영혼의 무리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듯 부둥켜 안고
어화 둥둥 한판 흥을 돋우며 허공을 사루는,
영혼과 영혼의 춤사위
2.
참으로 고운 아이를 보았네
하얀 두 손 둥글게 모아 쥐고
정성껏 한 줌 꽃씨를 뿌리는 아이
예쁜 꽃 이름 떠올리듯
가만가만 발꿈치 들고 들여다 보며
초조하게 꽃잎 돋아나길 기다리는 아이
그 꽃 피어나기도 전에 기뻐 날아갈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
3.
농아 소녀들이 한데 모여
수화로 저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연어를 부려놓는다
아 어 오 우…
모음과 모음이 서로 부딪는
시끄러운 듯 조용한
참형의 길
오원량
겨울 파리 한 마리
여름 내내 이집 저집 다니며 잘도 도둑질하더니
끈질기게도 살아남았다
헌데 영 맥없는 저 목골이며 날개짓
어디 한반 맞았나
아님 생의 끝자락에 선 걸까
그래도 죽음이 두려운 듯 눈치 빠르게
요리조리 피신해 다니는 저 깊은 눈동자
밤에 눈이 멀어
머나먼 깊 높은 담장을 넘어
복면을 한 도둑처럼 뛰어들어
남의 밥상을 재 밥 모양 덥쳐가며
눈치도 없이 빌어먹던 무뢰한,
이제 제집 찾아들 혈거穴居 하나 마련하지 못한
살아 있음은 참형의 길
어머니, 너무 가혹하게 죽이지 마세요
곧 스스로 제 날개 던질 테니까요
개미의 적
오원량
산에서 화분에 줄 거름을 퍼 온다는 게
개미집을 파온 것 같다
베란다가 온통 개미나라다
개미 대열을 보고 있으면 소름이 쫙 끼친다
살충제를 뿌리고 발바닥으로 짓밟아도
개미는 떼를 지어 더 몰려다닌다
개매, 저들도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듯
새까만 몸체에 잘룩한 허리
조그만 미물이 하나의 거대한 무리를 이루어
부지런히 어디로 오가는 걸까
어딘가 깊숙이 동굴을 파고
달콤한 젖줄을 빨며 호화생활을 하고 있을
한 마리 여왕개미를 찾기 위해
개미의 일거수일투족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면서도 문득
혹 나의 방을 침범하지는 않을까 생각하며
미행한 어느 날
크악~ 복면을 쓰고 내 방바닥을 조심스레 들락거리며
분주히 어딘가 계속 침투할 계획을 꾸미는 저 개미들
나도 어느 새 개미들의 적임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발은 발이 아니다
오원량
안제나 나에게 붙어 졸졸 따라 다니는 발
내가 외출하기를 기다리는 듯 늘 내 곁에서 대기하고 있는
두 마리 강아지, 비록 고삐는 매였어도
외출은 즐겁다
내 몸뚱아리 하루 종일 바쁜 날
어두운 동굴 속에 짓눌린 채 따라다녀도
반항하는 일 없다
포복 자세로 엎디어 복종할 따름이다
복종을 타고난 밤, 오히려 고개 쳐들고 세상에 나오는 게 부끄럽단다
땅에 군림해 피가 터지도록 걸어야 제 임무를 다한 듯 스스로 제 살 굳혀
여물어 가는 발,
내 하루 녹초 되어 이불 속에 누우면
비로소 봄날 양지밭에 한가로이 누워있는
어여쁜 강아지
서로 핥아주고, 입 맞추고, 장난치고, 가려운 곳 긁어주고
그러다 납작하게 누워
따뜻한 볕 속 같은 구들 속으로 녹아든다
발은 어두워서야 하늘을 보는
지극히 순종스런 동물
살풀이
오원량
쪽머리에 비녀를 꽂은
백색 치마저고리에 긴 옷고름을 휘날리는
바람의 여인
그녀가 말씀을 영접하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버선발로 걸어 나온다
어깨를 감아 손에 쥔 하얀 긴 천 끝자락에서
바람의 불씨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바람을 두 손으로 고이 들어
보이지 않는 당신을 향해
바람을 자유로이 휘날리며 당신을 부른다
당신에게 정중하게 바람을 제물로 바친다
당신이 흡족한 걸까
여인의 손을 끌며 함께 춤을 춘다
골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무악巫樂의 반주
바람의 여인과 당신이 한 몸이 되어
허리에 어깨에 바람을 둘둘 휘감으며 휘휘 저으며
손끝에서 휘모리로 더 솟아나는
하얀 바람의 몸짓
공간
오원량
나, 무뚝뚝한 남자 하나 데리고 살지
나, 태어나자마자 인연처럼 첫눈 마주친 남자
하여 여지껏 나만 바라보고 사는 어쩜 측은한 남자
나, 일어나기도 전에 내 머리맡을 맴도는
영화 ‘보디가드’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케빈코스트너 눈빛 같은
하지만 나, 아무리 바빠도 뒷짐 지고 어슬렁거리며 지켜만 보는
어는 날 나, 그 무뚝뚝한 남자
바라만 봐도 울컥 화가 치밀었지
싹- 바꿔버릴까? 생각하며
혼자 거식증 걸린 여자처럼
꾹꾹 밥을 씹어 먹었지
커피도 한 잔 마셨지
그 무뚝뚝한 남자 눈을 피해
멀리 창밖을 바라보며, 우아하게 음악을 들으며 락을 추며 노래를 부르며
아악~, 아악~, 소리를 지르며 그러다
저 무뚝뚝한 남자, 정말 꼴보기 싫다고
문을 박차고 밖을 나와 버렸지
정말 속이 시원했어
나, 콧노래를 부르며
시원한 바람 허파 속으로 쑥쑥 집어넣으며
푸른 세상을 바람처럼 돌고 돌며 쏴 돌아다녔지
내가 나를 잊어버릴 때까지
어디쯤 왔을까
오후의 빌딩이 나를 성가시게 따라 다니며 내 어깨를 짓눌렀어
무거웠어 내가 자꾸 휘청거리기 시작했어
갑자기 그 무뚝뚝한 남자 어깨가 그리웠어
태양이 지나간 발자국을 따라
더듬더듬 걸어왔지
현관엔 태양이 남기고 간 엽서 한 장 뿐
어스름녘에 들어간 나의 집
불을 켜는 순간
어둠에서 벌떡 일어나는 그, 여태 나만 기다린 듯 창백한,
한편 든든한 저 시선
어쩜 내 무덤 속까지 따라와
드디어는 내 육신과 함계 썩어 허물어져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저 무딘 눈동자
3월의 들판
오원량
바람의 몸짓 같은 아지랑이 미친 듯 혼자서 햇살을 핥아먹고 있다
엄마, 나 보배고파, 엄마, 난 갈증 나 물 마시고 싶어, 엄마 난, 온 몸이 근질근질해, 저 넓은 들판을 신나게 달리고 싶어. 엄마 나도 갑갑해 죽겠어 나가고 싶어, 엄마 난 연분홍 원피스 입고 싶어, 아니 노오란 원피스 입고 싶어, 아, 궁금해 지금쯤 모두들 뭘 하고 있을까. 얘들아 저 위에서 무슨 발자국 소리 들리는 것 같지 않니?
쉿!
빈 들판 한가운데서 뭔가 술렁거리는 소리에
개구리 한 마미 놀라 귀를 쫑긋하고 섰다
불면에 들다
오원량
1.
빛과 어둠이 범벅된 무대
음악과 춤으로 밤을 뒤흔든다
검은 머리 힘껏 부풀린
도나 섬머의 야생마적 몸짓
하얀 이빨이 유난히 돋보이는 마이클 젝슨의
우스꽝스런 문워크 춤사위
호소력 있는 허스키풍의 스모키
디스코의 장본인 비지스의 날릴 듯
허공을 찔러대는 쾌속음, 그 몸짓
뉴키즈, 그룹 시카고브라이언 애덕스, 토미 페어지
폴라 압둘 MC 해머가 뒤엉켜
공중을 빙빙 돌고
밖은 여전히 불꽃놀이
아침,
빙글빙글 도는 무대 한가운데
내가 주춤거리며 서 있다
2.
저기 한 점 고독한 독도나 갈까
아니 더 큰 섬 제주도나 갈까
하늘과 바다가 하나 된 별천지 망망대해
돛섬 하나 뒤뚱뒤뚱 표류하고 있다
한밤
오원량
시계 초 소리, 시간이 똑똑 떨어진다
덜 잠긴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작은 것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똑똑 떨어지는구나
똑똑 떨어지는 물을 대야에 받쳐두면 밤새 한 대야가 되듯
똑똑 떨어지는 시간도 받쳐두면 흘러가지 않고
고여 있을까?
한밤중 똑똑 떨어지는 시간을 가슴에 받쳐두고 잠을 청한다
뿌리 내리지 못한 나무
오원량
나무의 영역은 누구도 말릴 수 없을진데
나무의 내력을 무시한 채
마음껏 뻗어 나갈 수 있는 뿌리 가두고
얼기설기 철사줄로 마구 감아 둔 분재
나무에게도 죄란 잇는지, 그럼 무슨 죄를 지었는지
어느 평지풍파 당한 가문에서 뽑아 왔을까
까칠한 등걸에 가지 갈갈이 묶여도 거부할 수 없는 몸짓 그 비참한 형상
극형을 당할 죄수에게 반 평 독방 주듯 작은 화분에 담아
고총의 시간을 최대한 늘여 서서히 죽임을 당하게 하듯
성장발육을 억제하고
하여 깊은 땅 속 길을 기억에서 잃어버린 나무는
그래도 살고 싶다
뿌리가 뿌리로 뻗지 못하고 등걸을 받치고
말없이 주인에게 복종하고 있다
한 오백년 쯤 된 나무의 고통이 내 몸에 뿌리 내리고 있다
나무의 속성
오원량
나무는 항상 그 자리에 서 있는 줄 알앗어
구부정한 나무, 휘어진 나무, 사선으로선 마나무들
그런데 그게 아니네
가만히 서 있는 게 아니었어
어디론가 바삐 가고 있는 모습이었어
난마와 나무 사이 이긋난 위치가
서로 두 발을 맞춰 급히 어디론가 큰걸음치는 것 같았어
어떤 나무는 손사레 치면서 제자리걸음치고 잇는 것 같았어
땅 속 뿌리를 박고 뗄 수 없어 온 몸 비틀고 있는 것 같았어
바람이 부는 게 아니었어
나무의 몸부림인 것 같았어
몇 십 년 몇 백 년 그렇게 살다보니 나무는 스스로
제 살에 생채기를 내어 온 몸 갈라터진 것이었어
나무를 어루만지며지자 까칠한 상처의 딱지가 툭 떨어지네
모래 시계에 빠지다
오원량
붉은 사막에서 한 줌 갈취해 온 모래 속으로
소금꽃을 피우러 들어간다
한 방울의 물도 허락되지 않는 짜여진 극본 속
누군가 뒤집는 세상 속에 들어가
뒤집히는 생활의 반복을 체험해 본다
삶이란 어차피 빈 공간 채우기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구멍은 늘 있다고
모래가 소리 없이 허물어져 내리면
또 빠져나간 빈 공간을 위해 누군가 뒤집겠지
다람쥐 쳇바퀴 돌듯 도는 익숙한 길을 보고 있겠지
그러나 내 눈과 발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고
엎드려서 또 다시 그 길을 가는 거야
무기의 반론 1
- 장미 플라워
오원량
장미는 그리스 코린트마을에 사는 미모의 아가씨 로오단테였다지
태양산아폴로가 구혼자를 피해 신전에 숨는 것을 보고 노해 태양빛을 쏘아
장미나무로 변하게 했다고
절개가 굳은 로오단테는 자기 몸을 못 만지게 가시를 생기게 했다나
향기에 매료되어
꽃봉오리 하나 꺾어
님께 바치고 싶다하면 여지없이 가시로 찔렀다고
잔잎에 날카로운 톱니 하나 믿고
겁 없이 담장 너머 세상 넘 보더니
6월이 채 가기도 전
사랑의 메아리는 노을 속으로 잠기고
누군가의 손에 잡혀 은밀히
지하카페로 팔려왔다
술집의 밤은 눅눅하다
어느 누구의 시선도 받고 싶어하지 않는
갸륵한 소아마비 한 사내
단골처럼 한 귀퉁이 느긋하게 자리잡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속 깊이 묻어 둔 가시보다 아프게 다가오는
애절한 노래에 취해 있으면
황폐한 가슴 어렴풋이 눈이 뜨이고
떠나온 궁전동 소식이 그리워 온몸이 말랐지
언제부턴가 장미는
가련한 그가 좋아졌다고
망각은 아름다워
오원량
쉬엄쉬엄 잊혀가는 것 또한 행복한지
팔순 넘은 울엄마
훈장 같은 나이도 몰라
추억 담긴 세월도 버렸어
사랑하는 사람도 잊고
가진 보석도 잊었어
세끼 밥 먹는 일도 잊고
봄 여름 가울 겨울도 잊고 또 잊었어
모든 근심 걱정 잊고
치장하는 일 또한 잊었어
고운 주름에 순한 아기 같은 웃음
누가 싫은 소리 해도 미워할 줄 모르는
잊혀져 가는 것 또한 무엇인가 내려놓은 듯
이제는 넓은 영역도 필요 없어 다 내려 놓고
주위만 왔다갔다 하는
죽음마저도 달관한 듯한
고개 숙인 꽃
깊어지는 산
오원량
산이 잠시 흔들렸다
순간 산 뼈대 부스러진 듯 돌돌이 일제히 굴러 내리고
살점 같은 흙이 맥없이 흘러 내린다
톱날에 베어져 밑둥 잘려 쓰러진 거대한 나무
곁에, 산도 잠시 함께 쓰러졌다
겨우 골을 내고 일어난 산
반사적으로 하늘에 비상경보를 내린다
산은 산빛을 잃고 빨리 어두워졌다
그 밤, 산은 생피 덜 마른 나무를 온몸으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익사한 시체마냥 몇몇 장정에 의해 질질 끌려 세상 밖으로 나온
밑둥 잘린 나무
이젠 전기톱에 의해 토막토막 난다
지문도 지워진다
톱질 소시 산의 심장부도 썰려 나가는가
제재소 뒷산이 종일 귀매미 같은 울음소리로 가득하다
웃통을 벗은 구리빛 사내, 번쩍 도끼를 들어 나무를 찍는다
나무 패는 소리가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산에 가서 박힌다
핏덩이 하나 꿀꺽 삼키며 초월적 울음소리 잠시
그 뿐,
산은 그렇게 또 말없이 깊어만 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공존
오원량
향나무 후박나무 나도밤나무 섬잣나무 솔송나무 섬피나무 섬고로쇠나무 섬말나라섬노루귀 섬바디 조릿대 헐떡이풀 명이 마가목 빨간여우꼬리꽃 금새우난 큰영연초 주름제비난 윤판나물아재비 노루발풀…
오순도순 한 울타리에 모여 사는울릉도 성인봉 식구들
연중 산허리를 감도는 해무 속에서
파도 같은 안개 그 신비 속을 가면
툭 하면 찾아 오는
겨울 한철 솜이불 같은 눈보라 속에서처럼
더러는 햇빛이 간절히 그리울 때가 있다
키 큰 나무들 모두 비스듬히 기울여 서서
제 키를 낮춰 발밑에 있는 키 작은 식구들에게도 빛인 햇빛을 받게 해 주는
성인봉의 키 큰 착한 나무들
키 큰 나무들 틈 사이 앉은뱅이 나무 한 그루로 나는 생환했다
찬란한 연주
오원량
깊은 산 속에 오케스트라를 연다기에
그 황홀한 연주를 보기 위해
하루 전에 외서 야영을 했다
쭉 뻗은 아름드리 푸른 나무들 틈 속 무대
샤들이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현을 다듬고
목청을 가다듬는 현란한 소리에
눈을 뜨고 텐트 밖으로 나갈려는 찰나
공중에서 찬란한 폭죽이 터지는 광경과 함께
광활한 무대가 동시에 펼쳐지고 있었다
무대는 호사스러웠고 거룩했다
금 지휘봉을 든 키가 8척이나 되는 지휘자들이
거대한 무대를 이끌어 가고 있었고
최상의 현악 오케스트라답게
한 곡 한 곳 연주가 끝날 때마다
기립 박수가 산 너머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연주는 앵콜을 외치는 소리에 금화金貨를 뿌리고
숲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는 동전들을
애기나리 두리미꽃 할미밀방 숲바람꽃 엘레지가 한 아름씩 주워
휘청거리며 종종걸음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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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오랜 시간 묵혀 둔 시들
철 지난 옷만 같다,
새 옷은 아니지만 어쩌랴.
그래도
내 체취 담긴 옷인데
숨결 불어 넣어 다듬어 다시 내 놓는다.
오랜만에 옷장을 정리한 듯
속이 후련하다.
2017. 7월
부산에서 오 원 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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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량 詩集 [※새들이 돌을 깬다※]
[ 발문 ] -
굴레를 벗고 날고 싶은 새
강영환 시인
시는 시인의 자유로운 영혼이 가닿은 유토피아다. 그래서 시인은 늘 자유로운 영혼을 꿈꾼다. 시인의 자유로운 영혼은 상상력에 의해 날개를 단다. 상상력이 가질 수 있는 무한의 힘을 느껴야 하는 것이 시인의 창작태도일 것이다. 시인의 유토피아에서는 이루지 못할 것도 없고 기피해야 할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시인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거칠 것이 없어야 한다. 시인은 그래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고 고정관념으로부터 탈피하고 싶은 것이다. 시 속에는 시인의 영혼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
내가 오원량 시인을 만나게 된 계기는 산이다. 1990년 대 부산시인협회 사무국장으로 있을 때 조직한 산악회로 <시오름>이 있었다. 이후 <풀나무들>이라는 산악회로 이름을 바꾸어 오랫동안 산행대장을 맡고 있을 때 오 시인부부가 함께 산행에 참가하여 알게 되었다.
오원량 시인은 밀양에서 태어나 89년「나는 내가 아니다」외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동양문학≫을 통해 등단하였고, 2014년 첫 시집『사마리아의 여인』을 상재한 이후 이번이 두 번째 시집이 된다. 시기적으로 볼 때 종교적 의미를 담은 첫 시집이 근래에 쓴 작품들을 모았다면 이번 시집은 등단 이후 묵혔던 작품들이라고 한다.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의 순서가 바뀌었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첫시집이 된『사마리아의 여인』은 성지 순례 후 발표한 작품으로 종교적인 색채를 지닌 작품들을 모았다하지만 그렇게 편향된 종교적 색채를 띄기보다는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충실한 사유를 지녔다고 봄이 옳다.
나는 요즘 들어 시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현재 독자들을 현혹시키고 있는 이해 불가능한 난해한 시어들로 조립된 시들이 시의 세계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의 끝은 시도 의사소통의 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시인이 느낀 사물이나 풍경의 의미와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숱한 의미들을 시인이 자신의 감수성으로 파악하여 독자들에게 언어로 전달하는 예술형식이 시다. 그래서 시도 소통구조를 지니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을 부정하는 시인은 자신의 시를 작품이라고 세상에 내어 놓을 이유가 없다. 그냥 혼자서 그 시를 안고 쓰러져야 마땅하다. 해석이 어려운 난삽한 시를 들고 나서서 독자들이 우매하다고 질책하는 시인들은 시의 가장 기본적인 전달을 부인하기 때문에 이 사회에 존재이유가 있을 지 의심스럽다. 그래서 나는 시를 감상할 때는 시인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게 전달되어 오는가를 유심히 살핀다. 좋은 시는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시여야 한다. 시인의 세계관이나 인생관 나아가 존재를 바라보는 철학관이 내재되어 독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로 일탈해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어야 읽어볼 가치가 있는 시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미 전달이 쉽게 이뤄져야 하는 것이 선행조건이 된다. 전달되지 않는 의미를 가지고 감동 받으라고 한다면 지나친 아집과 욕심이 아니던가.
의미가 수월하게 읽히는 시가 오원량 시인의 작품들이다. 시인이 시집에서 보여주고 있는 대부분 작품들은 벗어나고 싶은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한 서정시들이다. 그녀의 현실 인식은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을 옥죄어 오면서 끊임없이 몰아 부치는 일상이 굴레라는 것이다. 오 시인은 그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가야금을 하기도 했고, 산야초를 가지고 효소를 담근다거나 시 외적인 방법으로 탈출구를 모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일들은 결국 일상 속에서 펼쳐지는 또 다른 일상일 뿐이었다. 그러다 만난 산이 그녀에게는 경이로움의 대상이었고 산과 친숙해질 무렵 출산과 육아라는 현실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너무나 심하게 다가 온 출산의 고통에서 벗어나 점차 상실돼가는 자아를 찾고 싶은 강렬한 의식이 싹 트게 되어 다시 산을 찾게 되었고 그렇게 찾아 들어간 산에서 위안과 함께 마음이 힐링되는 자신을 느끼게 되어 틈만 나면 자연에 몸을 의탁한다고 하였다. 그런 그녀의 삶의 방식이 이번 시집에 잘 드러나 있다. 오시인은 어떻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의 삶을 지배하는 의식은 무엇인가? 그에게는 많은 현실인식의 시들이 있다. 우선 한 편의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산으로 둘러싸인 호숫가에
밧줄에 묶인 채 꿈쩍도 않고 있는 낡은 배 한 척
그 배 위에 내가 타 본다
뜻하지 않은 객으로 인해 놀란 듯
잠시 흔들리다
또 다시 잔잔해진 배
나 또한 밧줄에 묶인 채 떠 있는
세상에 나 홀로
물에 떠 있는 나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내가 고여 있다
시간이 잠시 고여 있다
풍경과 시간과 내가 정지된 꼭지점에
석양이 유난히 붉다
뚜껑 없는 관 위에 누워
풍장을 꿈꿔 본다
바람에 자유로이 훨훨 날고 싶은
영혼 하나 참 행복하겠다
백과 흑의 교대 시간이 다가오자
고요가 물 위를 자박자박 걸어오고 있다
- 「풍장을 꿈꿔보다」전문
밧줄에 묶인 배를 타고 있다. 그것도 산으로 둘러싸인 호수 위에 떠 있는 배다. 스스로 선택한 현실이다. 시적화자의 현재 상태를 잘 드러내 보여 준다. 묶여있는 배이기에 어디로 떠날 수가 없다. 살펴보니 배만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배에 타고 있는 자신도 묶여 있다. 흔들리는 배에 나 홀로 묶여 있는 존재인 것이다. 내가 세상에 고여 있고 내가 가진 시간도 고여 있다. 배경과 내가 묶여 있는 그 지점에 석양 노을이 붉다. 저물녘이 된 것이다. 그 배는 곧 뚜껑이 없는 관과도 같아 보인다. 거기에 누워 풍장이 되는 꿈을 꾼다. 바람이 되어 자유로이 날아가는 내가 행복해 보인다. 삶과 죽음의 교대 시간이 가까워지자 비로소 내가 고요해 진다. 삶에 대한 긍정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죽음도 풍장으로 가야겠다는 꿈을 유지한다. 내가 벗어날 수 있고 고요함을 얻을 수 있는 건 바람처럼 해방되는 풍장의 시간이다.
오 시인에게 현실은 매어있는 공간, 그것도 바닥이 흔들리는 공간이다. 그 공간에 또한 벗어날 수 없이 묶여 있다. 죽음에 이르러 풍장으로 바람이 되어 떠나지 않으면 벗어날 수 없는 공간이다. 그녀의 작품은 현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에 의미를 둔다.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풍경과 시간이 나를 둘러싸고 있고 나는 그것들 속에서 벗어날 수 없이 받아 들여야 하는 숙명적인 나약한 인간상임을 자각한다.
어두운 동굴 속에 짓눌린 채 따라다녀도
반항하는 일 없다
포복자세로 엎디어 복종할 따름이다
복종을 타고 난 발, 오히려 고개 치켜들고 세상에 나오는 게 부끄럽단다
-「발은 발이 아니다」부분
나를 가두고 있는 현실은 몰려다니는 자동차들과 목욕탕에서 만나는 살찐 여인들과 탐욕스런 파리떼와 떼를 지어 나를 압박하는 개미떼들이 몰려 있는 공간이다. 시인이 만나는 현실을 멈춰 서 있거나 나와는 인식이 맞지 않는 뒤틀린 풍경들로 채워져 있다. 시적 화자는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은 혐오스러운 것이어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으로 점철되어 있다.
무료한「쥐들의 밤」에는 쥐들이 내는 소리를 귀담아 듣고 있다. 그리고 쥐들의 일상을 상상한다. 쥐들이 내는 소리로 점령당한 나의 일상이 편안할 이유가 만무하고, 또한「폐가」를 아내가 도망 가버리고 혼자 남은 늙은 사내로 표현한다. 늦은 저물녘 잡초를 부여잡고 소리치며 폐가에 모여든 들고양이를 아내처럼 품고 자는 폐가를 통해 현대사회의 씁쓸한 남편상을 이끌어내고 있다든가,「참형의 길」에서는 겨울 파리가 창궐하여 남의 식탁을 마구 점령해 버린다든가,「개미의 적」에서는 산에서 퍼 온 흙에 묻어 온 개미떼가 집안을 침범하여 또 다른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든가,「북극곰」에서는 동네 목욕탕을 점령한 살이 찐 사람들을 희화화 하고 있다든가 「바퀴 사랑」에서는 자동차 문화가 점령해 버린 도시의 모습을 음산하고 그로데스크하게 그려내기도 한다. 현실세태를 그려낸 작품으로는 맞벌이 부부의 아이 훈육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을 빗대어 그린「아빠, 가」와 먹지 않아도 자꾸만 배가 불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맹꽁이 사랑」과 백로 떼가 날아가지 못하고 지상에 묶여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직시한다. 백로가 날아가야 다음 순번으로 자신이 날아 갈 터인데 백로가 날아가지 못하고 묶여 있기에 자신도 어쩌지 못하고 이 지상을 떠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한다. 떠나든가 벗어나든가 하는 현실인식은 떠날 것을 강요한다. 그래서「공간」에서는 무뚝뚝한 남자와 같이 사는 것이 싫어서 탈출을 시도해 보지만 처음에는 속이 시원해서 콧노래 부르며 바람처럼 쏘다니며 나를 잊어버릴까도 했는데 도시의 빌딩들이 나의 어깨를 짓누르며 성가시게 했고 결국 해거름녘에는 그 무뚝뚝한 사내가 그리워져서 다시 집으로 들어갔을 때 창백한 얼굴로 종일 나를 기다렸을 무딘 눈동자를 발견해 내고서는 결국 벗어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 들이며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임을 깨달아낼 뿐이다. 결국 돌아가는 곳은 집뿐임을 스스로 느끼고 만다. 떠나도 떠날 수 없게 현실에 묶여있는 숙명적인 고리를 발견해내고는 절망하고 마는 나약한 현실인을 그려낸다.
엄마, 나 배고파. 엄마, 난 갈증 나 물마시고 싶어. 엄마 난, 몸이 근질근질해. 저 넓은 들판을 신나게 달리고 싶어. 엄마 나도 갑갑해 죽겠어 나가고 싶어. 엄마 난 연분홍 원피스 입고 싶어. 아니 노오란 원피스 입고 싶어. 아, 궁금해 지금쯤 모두들 뭘 하고 있을까. 얘들아 저 위에서 무슨 발자국 소리 들리는 것 같지 않니?
-「3월의 들판」2연
「3월의 들판」은 봄이 오는 들판에서 시적 화자가 듣는 봄이 오는 소리들이다. 흙속에서 새로 돋아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새싹들이 내는 소리들. 그것들은 갑갑한 지하에서 탈춣파여 맘껏 활개를 펴고 신나게 들판을 달리고 싶은 생명들이 부르짖는 절규이다. 그 절규는 시인의 내면이 듣는 소리다. 시인의 내면에 그런 의미가 가득해 있기에 그 절규들이 들려 올 수 있고 또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저기 한 점 고독한 독도나 갈까/아니 더 큰 섬 제주도나 갈까/하늘과 바다가 하나 된 별천지 망망대해/돛선 하나 뒤뚱뒤뚱 표류하고 있다(「불면에 빠지다」2연)
‘~꽃 지기 전/담장 너머 먼 곳으로 뛰어봐/찰박찰박 춘향이처럼’(「능소화 유화」끝부분)
불면의 밤에 하늘과 바다를 표류하며 어디로인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달려가는 돛선이나 담장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바깥세상으로 나서고 싶은 능소화처럼 담 너머를 기웃거리는 오 시인의 현실인식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내가 갇혀 있는 현실 공간은 나를 옥죄는 답답함이고 아픔으로 느끼는 것이 그녀의 현실인식이다. 오 시인이 생기를 되찾는 순간은 해방된 공간 속이거나 아니면 그가 자연 속에 들어 자연과 조우하는 시간일 것이다.
오후 한낮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빙판 하늘아래
내가 미끄러져 넘어 있다
-「미루나무 겨울」끝 부분
맑은 하늘 아래 겨울 얼음장 위에 미끄러진 내가 넘어져 있다. 그럴 때 만나는 산은 치유약이며 해방이며 참선으로 읽혀진다.「용소골」에서 깊은 병 중인 두 사람이 용소골로 접어든다. 병은 바로 산에 깊이 빠진 병이다. 산은 참선 중이고 작은 폭포가 만든 둥근 계곡은 약탕기이며 천혜의 절경이 끓어 넘치고 있다. 그것을 보고 감탄사를 내뱉는 순간 몸에 쌓였던 독이 빠져 나가고 몸은 씻은 듯이 가뿐해진다. 지독히도 깊이 앓는 산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약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 약들은 계곡을 오르며 만나는 둥근 소마다 검붉은 탕약이 달여지고 그것을 맛보며 가는 동안 낮아지는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고 그 동아줄 타고 독기가 빠져 가벼워진 몸으로 가뿐하게 산을 넘을 듯도 하다고 토로한다.
정신을 차린 건 시린 강물에 빠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아닌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라고 외마디 부인한 순간
강에 빠진 나를 덜렁 집어올린
한 조각 결빙, 제 한 몸 녹여 속삭이듯 흐르는
오랜만에 몸 안에서 졸졸 물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정수리를 향해 겨누던 붉은 총구가
서서히 사라진다
-「겨울산」후반부
현실에 붙들린 내가 아닌 진정한 나를 찾는 순간이다. 물에 빠진 나를 건져 올린 몸을 녹여 내 안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나를 겨냥하고 있던 붉은 총구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진정한 나를 찾았기에 해방을 맞이한 것이다. 자연 속에 들어서고야 진정한 자아를 찾는 일이 발생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자연이야말로 그가 도피해 가고 싶은 낙원일 것이다. 물에 빠진 나를 건져 올려 내 몸에 물이 흐르게 해주는 겨울산이다. 그녀의 산은 치유와 해방의 산이다.
사람은 세월을 보내지만
산은 세월을 품어 한없이 깊어진다
사람은 한을 품지만
산은 없는 한도 늘 풀어낸 듯 풋풋하다
나, 산에 올라보니 잠시 세월을 품은 듯
마음 한없이 깊어진다
품었던 한도 오르면서 절로 풀어졌는가
오르면서 천 근 짐을 진 듯 무겁던 몸이
정상에 서니 한 마리 새처럼 가볍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내 삶이
산 정상 한가운데서
푸른 한 그루 나무로 서있다
산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작고 작은 티끌
그 티끌마저도
눈부시게 아름답게 보이는
내 생의 높이
-「산 정상」전문
이 작품은 사람과 산의 대비를 통하여 산이 아름다운 이유와 내가 산을 찾아 가는 이유를 함께 밝혀낸다. 자연에는 부끄러움이 없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생각대로 한다. 흘러가는 세월까지도 품어서 더 깊어지는 산을 오르면 간직했던 한도 풀어져 몸은 한없이 가벼워진다. 그러기에 산 정상에 올라 내려다 본 세상은 눈부시게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에 직접 올라 본 시인이 느끼는 산의 아름다움이다. ‘그 티끌마저도/눈부시게 아름답게 보이는/내 생의 높이’라고 산 정상에 올라서서 바라보는 자신의 생의 높이, 그것을 자각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산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오시인의 산은 마음 깊은 곳에 뭉쳐 두었던 한도 풀어낼 수 있게 하고 자신을 새처럼 가볍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 푸른 나무로 서 있을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산이야말로 시인에게는 해방의 공간이 되고 있다.
오시인이 산에 들어서 건져 올린 멋진 작품 하나를 소개하면서 두서없는 글을 맺고자 한다. 이 시집의 표제작이다. 이런 작품이 생산 가능한 것도 산에 들어서 긴장도 풀어지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질 수 있기에 그럴 것이라고 감히 추측해 본다
한 여름 그 숲 속에서는
새들이
새벽부터
자갈돌을 깨기 시작한다
새들은
산 너머 해가 붉게 타오를 쯤
더 열심히 자갈돌을 깬다
새들의 자갈돌 깨는 소리는
해가 하늘을 더듬어 오르기 시작하자
더 크게 들린다
새들은
숲을 향해 해가 반짝 떠오르자
드디어 자갈돌 깨는 일을 마친다
새들이 깬 자갈돌을 매미가 종일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가고 있다
간간이 자갈돌 떨어지는 소리도 들린다
-「새들이 돌을 깬다」전문
소리내 읽으면 눈 앞에 풍경이 절로 그려지는 시다. 왠지 기분이 상쾌해 지는 작품이다. 숲속에서 들려오는 뭇 새소리를 시인은 새가 자갈돌을 깨면서 내는 소리로 읽는다. 새로운 발상이다. 돌은 견고하게 굳어있는 자신의 생각의 틀일 수 있다. 그리고 나를 둘러 싼 견고한 현실일 수도 있다. 그걸 새들이 깨면서 새로운 아침이 온다. 해가 중천에 이를 때에야 새들은 자갈돌 깨는 걸 멈춘다. 깨진 자갈돌은 매미가 종일 울음소리로 어디론가 끌고 간다. 새소리와 매미소리를 현상화해 낸 아름다운 작품이다.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돋보인다. 이런 작품이 오 시인이 추구해야 할 방법론이라 본다. 대상이나 현상을 달리 보거나 아니면 자연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이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지금껏 자연에 대하여는 많은 시인들이 서로 형상화해 냈다. 그러나 고만고만 엇비슷한 생각들로 ‘낯설게 하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오시인의 발상은 새롭고 엉뚱하다. 이런 엉뚱하고 참신한 발상으로 ‘낯설게 하기’에 성공한 작품은 많이 보지 못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을 때 새롭고 자신만의 개성을 지닌 발상들이 춤추며 걸어 나오는 것 같다. 독자들은 이런 낯선 감각이나 굴레를 벗고 날개를 단 이런 작품에 힘찬 박수를 보내 줄 것이다. 소리를 형상화한 멋진 풍경화를 감상하면서 오원량 시인이 스스로 깨친 자유로운 영혼이 맘껏 날아다닐 수 있어서 시의 유토피아에 가닿을 수 있기를 희망하며 앞으로의 작품들에 기대감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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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오원랑 시인의 대부분 작품들은 벗어나고 싶은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한 서정시들이다. 그녀의 현실 인식은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을 옥죄어 오면서 끊임없이 몰아 부치는 일상이 굴레라는 것이다. 오 시인은 그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가야금을 하기도 했고, 산야초를 가지고 효소를 담근다거나 시 외적인 방법으로 탈출구를 모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일들은 결국 일상 속에서 펼쳐지는 또 다른 일상일 뿐이었다. 그러다 만난 산이 그녀에게는 경이로움의 대상이었고 산과 친숙해질 무렵 출산과 육아라는 현실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너무나 심하게 다가 온 출산의 고통에서 벗어나 점차 상실돼가는 자아를 찾고 싶은 강렬한 의식이 싹 트게 되어 다시 산을 찾게 되었고 그렇게 찾아 들어간 산에서 위안과 함께 마음이 힐링되는 자신을 느끼게 되어 틈만 나면 자연에 몸을 의탁한다고 하였다. 그런 그녀의 삶의 방식이 이번 시집에 잘 드러나 있다. 오시인은 어떻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의 삶을 지배하는 의식은 무엇인가? 그에게는 많은 현실인식의 시들이 있다.
오 시인에게 현실은 매어있는 공간, 그것도 바닥이 흔들리는 공간이다. 그 공간에 또한 벗어날 수 없이 묶여 있다. 죽음에 이르러 풍장으로 바람이 되어 떠나지 않으면 벗어날 수 없는 공간이다. 그녀의 작품은 현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에 의미를 둔다.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풍경과 시간이 나를 둘러싸고 있고 나는 그것들 속에서 벗어날 수 없이 받아 들여야 하는 숙명적인 나약한 인간상임을 자각한다. 그리고 떠난다.
- 강영환 시인의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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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원량 시인∥
∙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하였으며,
∙ 부산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고전문학)을 수료하였다
∙ 1989년《동양문학》으로 등단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 <갈매시>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 부산가톨릭문협 회원, 부산시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김해시립가야금」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 시집으로 『사마리아의 여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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