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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1월6일 주님 공현 후 화요일
[수도회] 기능인인가? 함께 존재하는 사람인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1요한 4,7-10
† 복음 마태 5,34-44
★ 요한 1서는 ‘하느님은 누구인가?’에 대하여 ‘무엇이 하느님인가?’로
대답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사랑이 있는 이는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며,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분을 알 수 없다. 하느님의
사랑 가운데 가장 숭고한 것은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의 구세주로 보내신
것이다(제1독서).
★ 사랑의 화신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신다.
가난하고 굶주린 이에게는 빵이 사랑임을 드러내실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디서나 넘치고 남는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의 생각에는 누구나 세상 문제를 바라보는 가치관이라는 것이 있다.
그 관점에서 문제를 해석하고 해결 방법도 강구하게 된다. 이를테면, 차량
사고가 났다면 어떤 이는 ‘이게 얼마짜리인데…….’라는 생각을 하고, 또
다른 이는 ‘다친 데 없으니 다행이다. 차는 고치면 되지.’라고 생각한다.
며느릿감이나 사윗감을 대할 때도 집안 배경이나 출신, 무슨 자격증을
가졌고 돈을 얼마나 잘 벌 수 있는지를 중시하는 이도 있고, 가정 교육이
제대로 되고 예의염치는 있는지,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마음 씀씀이는
괜찮은지 등의 품성을 먼저 보는 사람도 있다.
물질적 가치를 우선하는 의식을 ‘자기중심적 세계관’이라 하고, 사람을
우선하는 의식을 ‘관계론적 세계관’ 또는 ‘공동체 영성’이라고 한다. 공동체
영성을 지닌 사람은 자연의 질서를 존중하는 태도와 더불어 이웃과
조화롭게 지내는 관계의 능력이 좋다. 그러한 사람은 인정을 베풀 줄 알고
함께 해결하려는 지혜를 낸다. 끼니때가 되어 밥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
앞의 다음 두 방식을 보자.
제자들: “여기는 외딴곳인데, 저들을 돌려보내서 스스로 해결하게 합시다!”
예수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빵이 몇 개나 있느냐?”
제자들은 각자 해결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한다면 처리는 간단하지만 돈 없는 사람은 굶게 될 것이니 함께
해결하자.’고 하셨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밥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이웃의 처지를 생각할 때 모른 체할 수 없는 문제다. 오늘 복음의 ‘빵의
기적’은,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공동체 영성의 방식이 어떻게 하늘의
축복을 이끌어 내는지를 깨우쳐 준다. 공동체는 존재 일체라 하늘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하느님의 내리사랑, 우리의 치사랑 -사랑은 아름다워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1월6일 주님 공현 후 화요일(뉴튼수도원 57일째),
1요한4,7-10 마르6,34-44
제1독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7-10
복음
<빵을 많게 하신 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로 나타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4-44
하느님의 내리사랑, 우리의 치사랑 -사랑은 아름다워라-
10년 전 일이지만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2004년 로마에서의 3개월
코스의 '수도자 양성 프로그램(Monastic Formator's Program)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전 세계에서 30명 이상의 베네딕도회, 시토회,
트라피스트회 남녀 수도자들이 참석했었고, 그중 수도사제는
10명이었습니다.
"신부님, 영어 미사 하실 수 있겠습니까?“
제 발음을 심히 불안해 한, 프로그램의 책임자 영국 베네딕도회 신부님의
우려 가득한 물음 이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겠습니다.“
하여 제 차례 때마다 10회에 걸쳐 맹렬히 준비하여 영어미사와 더불어
A4용지 한 장에 조각하듯 수없이 다듬어 정성껏 마련한 짧은 영어 강론을
했습니다.
몇 수도자들의 극찬을 잊지 못합니다.
"Good idea(좋은 아이디어다)!"
"Good message(좋은 메시지를 준다)!"
"Simple!(단순하다)!“
"practical(실제적이다)!
"Colorful(풍요롭다)!“
한 마디로 '아름답다'라는 평이었고, 이후 'Spiritual priest(영적사제)'란
말도 들었습니다. 아마 최선을 다해 준비한, 하느님의 사랑을 담은
강론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진리의 아름다움은 누구나 공감함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아름다움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주셨습니다.“(1요한4,9ㄴ).
요한 사도의 고백이 참 은혜롭고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의 내리사랑을 속속들이 깨달은 사랑의 사도 요한입니다.
짧은 1독서 안에 '사랑'이란 단어가 무려 10회 나옵니다.
하느님 사랑의 수원지에서 흘러내린 우리의 사랑임을 연상케 합니다.
이 사랑의 근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내 힘이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입니다.
그분 없이는 우리도 없습니다. 그분 사랑을 통하여 살고 있음을 깨달을 때
자연발생적 응답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치사랑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자체가, 사랑한다는 자체가 바로 하느님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분의 사랑 덩어리이자 하느님 사랑의
현존입니다.
내리사랑은 있고 치사랑은 없다 하는데,
이렇게 우리가 그분의 내릿사랑을 통하여 살고 있음을 깨달아 알 때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 치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최고의 징표이자 현존이 바로 예수님이자 성인성녀들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께 이르는 길은 이런 하느님의 내리사랑을 통해서입니다.
하느님의 내리사랑을 깨달을수록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이요 이웃에 대한 한없는 연민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예수님이요 모든 성인성녀들입니다.
며칠 전의 신선한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눈 내린 수도원의 풍광도 참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수도원 묘지를 방문했을 때, 하늘 향한 묘비명마다 흰눈으로 곱게 덮여
누가 누구인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흰눈이 묘비명의 이름과 생몰연대를 덮어 가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걱정할 것 없다. 세상은 몰라줘도 나는 너를 안다.‘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같았습니다. 마치 묘비명을 덮고 있는 흰 눈이
하느님의 은총을, 겸손한 사랑을 상징하는 듯 참 신비로워 보였습니다.
드러날 때 보다 이렇게 가리워져 있음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세상엔
가리워져 있어도 하느님만은 아시는 사랑의 성인들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에 가리워지는 겸손도 새삼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내릿사랑을 깊이 깨달았기에 평생을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삶에 행복해 했던 마리너스 수사님이었습니다.
수사님은 자신의 변신에 대하여 질문을 받을 때면 트라피스트회의 라파엘
시몬 신부님의 글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간결한 말로
응답하기를 좋아했다 합니다(공지영의 수도원 기행2.80-81쪽).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로맨스다.‘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모험이다.‘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성취이다.‘
모든 맺힌 실타래 같은 의문들을 완전히 풀어주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내릿사랑을 깨달아 갈수록 걱정, 근심, 두려움, 불안도 점차
사라지고 '사랑의 빛'속에 삽니다. 도대체 하느님만으로 부요하고 행복하니
저절로 선호하는 숨겨진 삶입니다. 역설적으로 숨겨질수록 드러나는
삶입니다.
요즘 읽는 전임 교황님이신 베네딕도 16세의 저서
(Holy men and women of the middle ages and beyond)를 통해서도
그분의 놀라운 하느님 사랑을 깨닫습니다.
재임중 매주 수요일 마다 중세기의 성인들 35분에 대해 강의한 내용인데
그 사랑과 지혜, 학식의 깊이가 그대로 교황님의 깊이를 반영하는 듯
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강의 중 한 대목을 인용합니다.
-프랑스의 한 작가는 '세상에서 유일한 하나의 슬픔이 있으니, 그것은
성인이 되지 못했다는 것, 즉 하느님께 가까이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라고 썼다. 성 프란치스코의 증거를 보건데 바로 이것이 참 행복의
비밀임을 이해하게 된다;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성인이 되는 것!
(to become saints, close to God!)-
우리 인생에서 유일한 단 하나의 목적은 성인이 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내릿사랑을 깨달아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수록 성인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되었습니다.'라는 성 요한의 고백이 오늘
복음에서 그대로 실증되고 있습니다. 굶주린 백성들이 예수님의 사랑의
기적을 통해서 모두 배불리 먹고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하느님의 내릿사랑과 예수님의 치사랑이 하나로 만나는 순간 발생한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바로 우리가 봉헌하는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표징입니다.
오늘 복음과 똑같은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 말씀과
성체의 사랑으로 우리를 살려 주시고 성덕을 더해 주시어 우리 모두
아름다운 성인이 되게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능인인가? 함께 존재하는 사람인가?/
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2015 나해 1월6일 주님 공현 후 화요일 마르 6,34-44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
기능인인가? 함께 존재하는 사람인가?
오늘 같은 능력지상주의, 자격증 시대, 끝없는 경쟁 시대에 사랑이나
평화를 말하고 희생과 나눔을 실천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하거나 선택사항으로 바뀌어버린 것은 아닐까? 오늘 제1독서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께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로 이에 대한 답을 주신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6,34). ‘가엾은 마음이 드신 것’은
단순히 불쌍히 여긴 것 그 이상으로 ‘마음이 동하여 한 마음이 되어
아파하셨다’는 뜻이다. 라틴어로는 ‘콤파시오’
(compassio’, con + passio)가 잘 말해주듯 ‘더불어 느낀다’, ‘한
마음으로 아픔을 느낀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바로 군중들의 마음
깊이 들어가 그들과 한마음이 되셨다. 예수님께서는 허기진 군중들의
영혼의 갈증을 보셨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물질적인 것, 현실적인 것을
먼저 찾는 우리와는 달리 그들의 메마른 영혼에 하느님의 말씀을
채워주신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군중들을 돌려보내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시라”(6,35)고 말한다. 이렇게 제자들은 군중과
‘함께 하는 사랑’이 아니라 ‘눈앞에 벌어진 사람의 갈증’을 사무적으로
처리하려 했고, 각자의 책임으로 떠넘기려 했다. 그들은 기능 위주의 해결,
성과(成果) 위주의 해결 방식을 선택하려 한 것이다. 이를 간파하신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6,37) 하신다. 그렇다!
사랑은 나를 건네주는 것이지, ‘저기에 있는’ ‘어떤 좋은 것’을 입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목말라 하는 이들 앞에서 ‘먼저 사랑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일’로 만들어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함께’ 철저히 남을 위하여 ‘움직이는’ 삶이 바로 신앙인의 삶이 아니겠는가?
제자들은 계속해서 물질주의적인 시각으로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6,37) 하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지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오라 분부하셨다. 여기서 빵은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허리춤의
광주리에 넣고 다니다가 먹는 값싸고 거친 보리빵이고, 물고기는 거기에
반찬처럼 곁들여 먹던 말린 염어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초라한
음식을 보고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리심으로써 ‘하느님과의 만남’이
중요함을 깨우쳐주신 다음, 육신에 필요한 음식을 나눠주신다. 이처럼
예수님의 시선과 제자들의 시선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의 삶을 성찰해 보자. 나는 하느님과의 만남보다는 일을 우선시하고
있지는 않는가? 성과위주, 능력위주, 속도위주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하느님으로 인해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느님과는 무관한 일처리,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의 눈길에서
벗어나 ‘그들의 일’로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태도, 육적이고 외적이며
물질적인 시각에서 문제 해결을 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지는 않는가?
혹시 그렇다면 나는 ‘현대가 만든 죽음의 함정’에 스스로를 내모는
것이리라!
이제 예수님처럼 ‘함께 하는 존재’, ‘철저히 남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살아보자. 가난하고 비천한 이들 안에서 먼저 그들의 영혼의 갈증을 읽고,
일처리보다는 먼저 하느님과의 만남을 중요시하자. 이것이 신앙인의 존재
이유가 아니겠는가. 이런 태도가 값싸고 거친 가난한 이들의 보리빵을
풍요로운 하느님의 선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이 시간 하느님 앞에
나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고 있는지 겸손되이 자신을 살펴보도록 하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먼저이셨습니다.
2015년 나해 1월6일 주님 공현 후 화요일
제1독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7-10
복음
<빵을 많게 하신 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로 나타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4-44
어렸을 때에는 누구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저 역시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초콜릿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돈 많이 벌어 초콜릿을 맘껏
먹겠다는 다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이 초콜릿을 통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렇게
초콜릿을 원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돈이 있어도 굳이 초콜릿을 구입하지도
않고, 제 주위에 초콜릿이 있어도 손이 가지 않습니다.
학창시절, 가지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친구들이
자랑하는 유명 메이커의 신발이나 옷도 가지고 싶고, 이성 친구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이 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사제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제가 되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고, 드디어 1999년 1월 28일 제 행복의
조건이라 생각했던 사제가 되었습니다. 사제로 살고 있는 지금 누구보다도
행복하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사제가 되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금 제 마음의 변화 때문이었음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세상의 기준을
따르는 것이 아닌 주님의 기준인 사랑의 마음을 따르다보니 그 누구보다도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통해 오히려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제 능력 밖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일들이 부족하고 나약하기만 했던 저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모두 해
주셨습니다.
오늘 인천교구는 매우 경사스러운 날입니다. 새롭게 7명의 사제와 12명의
부제가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들을 통해서도 주님께서는 커다란
일을 이루시겠지요. 그런데 그 일들은 주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바로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서품 받는 이들을 위해 우리가
더욱 더 기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먼저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빵의 기적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배경이 외딴 곳이었습니다. 배불리 먹을 빵을
사오기가 힘든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과 그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먹을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많은
양이었을까요? 예수님 혼자 드신다면 이 정도면 괜찮겠다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이 먹기에도 분명히 터무니없이 부족한
양이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전혀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시면서, 우리를 위해서는 이렇게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행복의 기준을 새롭게 세울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이 채워져야 행복할 것이라는 쓸데없는 기대를 버리고, 대신
주님과 함께 하는 마음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항상 우리를 위해 최고의 것을 주시는 주님으로부터
멋진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변화가 클수록 기회도 많다. 기회를 발견하는 것이 지혜라면,
기회를 잡는 것은 용기다(호설암).
지금 나의 선택은?
어느 마을에 아름다운 고성이 있었습니다. 그 성 한가운데는 연못이
있는데 개구리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에 불이 났습니다.
개구리들이 긴급회의를 열었습니다. 의견은 두 가지로 나뉘었지요. 하나는
빨리 이 성을 빠져나가자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가장 안전한 곳은 물속이니
가만히 엎드려 있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그룹은 물 밖으로
도망쳤으며 다른 그룹은 물속에 숨었습니다.
어떤 선택이 올바른 선택이었을까요? 물속이 정말로 안전한 곳이었을까요?
마을 사람들이 불을 끄기 위해 연못의 물을 퍼서 불속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때 물속에 있던 개구리들도 불속에 던져져 죽고 말았지요.
분명히 불과 물은 상극이니 물속에 안전할 것 같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선택도 이럴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생각보다는 순간적으로 모면하면 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을까요? 중요한 것은 내 행동에 따라올 결과를
늘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만 있다면 과감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을 따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주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시는 주님을 따르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금 나의 선택을 생각해봐야 할 때입니다. 정말로 좋은 결과를 가져올
선택을 하십니까?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느님의 유전자, 사랑
2015년 나해 1월6일 주님 공현 후 화요일
제1독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7-10
복음
<빵을 많게 하신 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로 나타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4-44
하느님의 유전자, 사랑
자녀가 부모를 닮지 않을 수 있을까요? 거부하고 싶어도 남들이 보면
반드시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닮았을 것입니다. 분명 유전자를
부모에게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우리들은
하늘 아버지와 하늘 어머니와 어떤 면이 닮았을까요?
박보영 목사님이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도 목사님이었는데 그때 재미있는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박보영 목사의 아버지가 예배를 드리는데 뒤에서
한 여인이 미니스커트에 빨간 립스틱에 긴 속눈썹을 붙인 한 여자가 껌을
쩍쩍 씹고 있었습니다. 당시엔 치마가 무릎 위에만 올라와도 경찰들에
의해 제재를 받던 때였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그 여자는 몸을 파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의 은혜를 받았는지 집회 중
앞으로 나와 뒤집어져서 실신을 할 정도로 울더랍니다. 자신이 삶을
회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빚을 워낙 많이 졌기 때문에 그
다음날이면 계속 몸을 팔러 나가야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매우 자주
반복되었습니다.
그 교회의 한 장로와 그의 아들이 그 여자가 매우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장로는 자신이 가진 땅을 팔아서 그 여자의 빚을 갚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박보영 목사의 아버지의 주례로 그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창녀가 자신을 구해 준 한 사람의 집에 시집을 왔습니다. 그 집에서 땅을
팔아서 여자의 빚을 갚아주면서까지 그 여자를 며느리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계속 이전의 모습을 하고 다녀야 할까요? 이전에 하던 행동을 계속
해야 할까요?
만약 이전의 삶을 계속 살아나간다면 그 집안에서도 계속 그 여인을
며느리로 인정하며 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 장로의 집에서 이 여인을
며느리로 맞아들였다면 그래서 그 집안의 딸로 인정했다면 그 자리에
합당한 삶을 살아줄 것을 기대했을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주어야만 그 집의 며느리로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그 창녀보다 더 깨끗한 사람이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죄를 지으면 간음하는 것과 같다고 성경에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해주시기 위해 하느님은 땅을 파신 것이 아니라 당신 외아드님을
제물로 바쳐 그 피로 우리를 닦아주셔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창녀 짓을 하는 것보다도 훨씬 하느님께 큰 아픔을 드렸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의 죽음의 값으로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가 당연히 변화되어야만 합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부모의
유전자를 받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성모님을 어머니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그분들로부터 태어나서 그분들과 당연히 닮아야 하는 것이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일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본성이 사랑이신 분이라 사랑에게서 난 자녀 또한 그 본성인
사랑을 지녀야 합니다. 그 안에 미움과 시기, 질투 등이 있다면 아직도
이전의 죄 속에 살면서 겉만 자녀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이 없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것입니다.
독일 본 대학의 마르틴 로이터(Martin Reuter) 박사는 COMT 유전자의
특정 변이형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 비해 자선을 베풀 가능성이 2배나
높다고 밝혔습니다. 대학생 100명으로부터 구강면봉으로 구강점막세포를
채취, DNA를 분석해 COMT 유전자의 두 변이형 중 COMT-Val 그룹이
COMT-Met 그룹에 비해 기부하는 돈이 2배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사랑도 분명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DNA를 통해
이타적인 마음까지 유전된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기면서
아무 유전자도 안 주실 수 없으십니다. 그분은 사랑 자체이신 ‘성령님’을
주십니다. 그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맺히게 하는 열매가 바로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의 자녀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주님 공현 후 화요일
2015년 나해 1월6일 주님 공현 후 화요일
제1독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7-10
복음
<빵을 많게 하신 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로 나타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4-44
‘가족끼리 왜이래!’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정과
사랑이 넘치는 가족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두부를 만들어 파시는
아버지는 늘 자녀들이 걱정입니다. 노처녀인 딸이 시집가면 좋겠고,
자존심이 강한 둘째 아들은 그 자존심 때문에 상처 받을까 걱정을
하십니다. 자기 앞가림을 잘 못하는 막내아들은 어서 좋은 일자리를
찾기를 바라십니다. 아버지의 자녀사랑에 비하면 자녀들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크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하셨어도 자녀들은
병원엘 찾아오지도 않았습니다. 다들 바쁜 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라면 열일을 제쳐두고 병원엘 먼저 가셨을 것입니다. 가족끼리는
서로 참아 줄 수 있고, 가족끼리는 서로 용서 할 수 있고, 가족끼리는 서로
나눌 수 있어야 하고, 가족끼리는 부족함에도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가족으로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가족으로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하얗게 해 주십니다.
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하얗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가족으로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집을 나갔던 둘째아들을 기다려
주십니다. 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여 주십니다.
처벌하고, 판단하고, 비판하기 전에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가장 가까운 별에 가려고 해도 우리는 갈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이 우주에 우리는 외로운 존재입니다. 외롭게 떠있는 푸른 별이
지구입니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지구는 작은 먼지와 같습니다.
먼지와 같은 지구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가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제 벗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을 열어주셨고 우리들 모두가 따뜻한 마음으로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 사이에 세워진 벽을 허물고 싶어 하셨습니다. ‘혈연,
지연, 피부색, 학연, 계층, 이념’의 벽을 허물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우리는 모두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산울림’이란 말이 있습니다.
산에서 소리를 내면 그 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을 봅니다. ‘사랑해’라고 하면
‘사랑해’라는 말이 들립니다. ‘바보야’라고 하면 물론 ‘바보야’라는 말이
들립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상대방에게 해 주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주님께 드렸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나누어 주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복음에서 보았듯이 사람들은 모두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독서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신앙인은
오늘의 성서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주어야 하는
것, 사랑 받기보다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봉급 받는 날 아빠가 하늘을 보고
2015년 나해 1월6일 주님 공현 후 화요일
제1독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7-10
복음
<빵을 많게 하신 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로 나타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4-44
봉급 받는 날 아빠가 하늘을 보고
빵5개와 물고기2마리(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장정만도 5천명이 먹었다지요.
예수님의 기도 힘이 그랬다면 우리의 기도 힘은 5명 정도는 먹겠지요.
제자들이 남은 걸 모으니 12광주리 듯 우리도 남는 게 반 봉투는 되겠지요.
봉급 받는 날 아빠가 하늘을 보고 감사의 기도를 이렇게 올리면 좋겠어요.
‘가족이 나눠먹으며 살게 하시고 남은 건 이웃과 나누며 살게 하소서. 아멘’
모두가 자기 수입을 나눔 정신으로 하늘 뜻 따라 쓴다면 그게 천국이겠지요.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마르코 6,42~43)”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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