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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가장 살기 적합하고 아름다운 날씨를 가진 달이 언제일까 생각해봅니다. 계절의 여왕이라 칭하는 5월도 좋습니다. 그런데 시월은 어떤가요? 역시 괜찮은 것 같습니다. 화사한 봄을 보는 것과 우아한 가을을 보는 기분이랄까? 뭐 그런 거 비슷하다 싶습니다. 연휴를 지내고 나니 한 주가 후딱 지나가는 듯합니다. 또 연휴네요. 그리 길지는 않지만 월요일을 휴일로 지낸다는 것은 다른 요일보다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입니다. 월요병을 겪지 않아도 되기에 그런 모양입니다. 아무튼 시월은 이래저래 멋진 달입니다.
어느덧 창문을 다 닫고 잠자리에 듭니다. 해가 서산을 넘어가기 시작하면 공기도 어느새 서늘해집니다. 산행을 나가며 이제는 가벼운 점퍼를 걸칩니다. 이렇게 되었나 싶지요. 9월과 시월의 차이를 느낍니다. 하기야 단풍을 만들려면 이제 좀 차가워져야 합니다. 살갗에 닿는 기온 차를 느끼며 또 한편 세월과 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는 차가운 것이 그리 반갑지 않답니다. 그렇다고 겨울보다 여름이 나을 것도 없지만 생각해보면 그래도 덜덜 떠느니 후다닥 벗고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ㅋㅋ
시작과 동시에 한 주를 보내버린 느낌입니다. 아무튼 건강하게 행복하게 그러나 머리는 시원하게 시월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이 때 언제나 생각해보는 것이지만 시집이라도 한 권 읽으며 말이지요. 멋진 시월을 만들기 바랍니다. ㅎㅎ 2023년 시월 첫 주말 김종우 목사 드림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 (잠언 25 : 28)
<플로라 앤 썬>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 후 이들 가족이 화합하여 재결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제삼자의 바람이고 본인들의 마음은 전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노래 한 번 결성하여 불렀다고 그 긴 시간의 상처가 쉽게 아물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다행스럽게 재결합이 되었다 해도 그 이후의 삶이 과연 순탄하게 진행되지도 자신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습니다. 그 가족이 하기 나름이지요. 그런데 이미 큰 고통을 경험하였으니 깨질 가능성은 언제라도 있습니다. 사람 마음이 긍정보다는 부정 쪽으로 쉽게 기울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이겨나가느냐 숙제입니다.
철없는 어린 엄마와 철없이 반항만 하는 어린 아들, ‘플로라’와 ‘맥스’의 이야기입니다. 17세에 낳은 아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낳아 기르는 일만 해도 대단하기는 합니다. 어쩌면 새 생명을 위한 선택이라기보다는 새 생명을 얻으면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으리라는 기대가 앞섰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너무 안이한 생각이었습니다. 처음 경험한 일이니 도무지 짐작하기 어려웠는지도 모릅니다. 주변에 조언해줄 만한 인생 선배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만한 사람을 찾으려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플로라도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아무튼 어린 나이에 아들을 키웠다는 것만도 대단한 일입니다. 칭찬 받을 만합니다.
생각해보면 그런 환경, 그런 엄마 밑에서 길러졌으니 맥스가 제대로 성장했을까 싶기도 합니다. 티격태격 엄마를 힘들게 해도 아주 막 가지는 않습니다. 귀가 시간을 지켜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엄마를 ‘창녀’라고 부르면서도 엄마가 그래도 필요합니다. 때로 아빠를 만나고 도움도 받기는 하지만 엄마처럼 함께 지내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뒤치다꺼리는 엄마가 봐줍니다. 이래저래 말썽을 피워 경찰도 잘 알고 있습니다. 더 이상 봐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어쩔 수 없이 소년원까지 입소해야 했습니다. 엄마의 간절함이 통해서 그 기간이 반으로 줄기도 합니다. 아무리 막말을 퍼부으며 다투어도 엄마와 아들의 관계는 지울 수 없습니다.
어느 날 플로라가 길을 가다 쓰레기차에 버려진 기타가 눈에 띄었습니다. 아들이 음악에 미쳐있는 것을 알기에 아들 생각을 해서 그 기타를 가져갑니다. 비록 생일을 잊고 하루 지났지만 생일 선물로 괜찮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맥스는 훔쳐왔느냐고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하기야 맥스는 기타보다는 전자키보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컴퓨터를 통해서 다루며 작곡까지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컴퓨터를 훔치려다 잡혀서 소년원 신세까지 진 것입니다. 나중에 엄마는 그 사실을 알기에 자기 돈 다 털어 컴퓨터를 사줍니다. 물론 함께 작업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맥스가 거들떠보지도 않은 기타를 플로라가 자신이 배워보려 합니다.
기타를 치며 노래했던 전력을 가지고 있는 남편 ‘제프’가 기가 차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플로라는 인터넷 강좌를 찾아 개인교수를 받으며 독학합니다. 다행히 소질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만한 간절함과 노력, 정성이 통했는지 발전합니다. 아들이 작곡에도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더구나 음악이 매개가 되어 다투기만 하던 두 모자가 대화를 합니다. 공통의 주제가 생기니 말이 통하는 겁니다. 자연히 관계도 좋아집니다. 함께 음악을 듣고 아들의 작품을 엄마가 쳐보기도 합니다. 그늘졌던 아들의 표정도 살아납니다. 음악이 그러하고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삶이 변하고 사람의 몸에도 변화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한결 밝아집니다.
인터넷 강의로 가르쳐주는 개인교수하고도 삶을 이야기합니다. 가까워지면 사적인 대화도 생기게 되지요. 지나간 시간 속에 당했던 아픔이나 아쉬움 억울함 분노 등을 나누게 됩니다. 자연히 가까워집니다. 여태 잊고 있던, 아니면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새롭게 피어오릅니다. 사실 본능이기도 합니다. 그만한 분위기가 형성되면 언제든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고 고달프고 때로는 분노로 가득해서 애틋한 감정을 일으킬 기회를 만들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의 향기를 잃을 수도 있지요. 본인도 주변 사람들도 힘들게 됩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가능하면 따뜻한 감정을 나누며 사는 것이 몸에도 맘에도 유익합니다.
사실 두 사람의 만남은 어렵습니다. 그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합니다.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끝과 미국, 그럼에도 인터넷으로 교류할 수 있는 세상이니 좋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지요. 아무튼 플로라는 이제 조그만 경연대회에도 참여하고픈 옥심이 생깁니다. 아들이 작곡한 노래를 아들과 더불어 전 남편과 개인교수까지 합세하여 사람들이 모인 카페에서 여는 경연대회에 참여합니다. 참으로 멋진 음악이고 노래입니다. 바로 플로라의 삶을 그대로 표현하는 내용입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소망과 의지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여태 좀 지루했던 이야기지만 감동으로 끝납니다. 영화 ‘플로라 앤 썬’(Flora and Son)을 보았습니다.
예언이 이루어질 때
자신의 앞날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보통은 잘 살게 될지 어렵게 될지 관심을 가집니다. 물론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관심을 가지는 만큼 알려고 하는 사람도 요즘은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합니다. 저의 부모님 세대에서는 점집을 꽤나 다녔습니다.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깨어난 것이기도 합니다. 미신보다는 보다 가능한 예측을 하기 좋아합니다. 이러저러한 많은 통계와 여러 사람들의 연구 결과들을 가지고 개인적인 삶도 예측해보는 것입니다. 보다 과학적이라고 믿지만 그래도 미래에 대해서 확실하게 답변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짐작하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 알아내기가 어렵습니다. 미래를 누가 예측하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 사람의 영역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노력하고 힘쓰며 희망할 뿐입니다.
우리네 신앙인은 개인적인 삶에 대하여 미래를 점쳐보지는 않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마 6 :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세상 살기가 쉽지 않음을 하나님도 잘 아십니다. 아담 이후로 그렇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창 3 : 18 - 19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담의 범죄 이후 세상은 마귀가 지배하고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먹고살기 힘들게 된 것입니다. 알 수 없는 내일을 위하여 쌓아두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고 싸움까지 불사합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하실 일을 기록하여 주셨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예언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예언서는 읽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읽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읽기는 하는데 이해하기가 어렵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읽지 않고 방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 주셨습니까? 당연히 읽고 지키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알아야 지키지 않겠습니까? 읽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지킬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난처합니다. 읽기는 읽어야 하는데 읽어도 알 수가 없고 알 수가 없으니 지킬 수도 없습니다. 역사 이야기나 교훈의 말씀은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읽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마다 흘러나오는 말씀이 대부분 그 이야기입니다. 긴 설명이 없어도 알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그것을 좀 더 배웠다고, 성경을 좀 더 연구했다고 하여 목사님들이 여러 가지 미사여귀를 붙여서 듣기 좋게 꾸미는 것이지요. 은혜 받았다고 감정을 담아서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으니 말입니다.
문제는 예언입니다. 전하려 하는 사람 즉 목자도 설교자도 모르니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설교에서 제외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모른다고 읽지도 말고 전하지도 말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려나 생각해야 합니다. 함께 읽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봉해 놓으셨으니 하나님이 여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사 29 : 11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그 봉한 책(예언)은 오실 이가 오실 때까지는 열리지 않습니다. 그 때까지는 알 수가 없다는 뜻이지요. 알 수 없다고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에 담고 기다려야 합니다. 언제라도 오셔서 풀어주실 때 과연 이것이 그것이구나, 깨달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와도 모르고 풀어주어도 모르게 됩니다.
한 예를 보겠습니다. 말 4 :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이 성경을 읽은 이스라엘 백성은 분명 마지막 때를 예언하신 말씀이라고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수백 년 동안 유대인들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메시야가 오시기 전 먼저 엘리야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말 3 :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두 사자가 올 것이라 말씀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언약의 사자’ 곧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길을 예비하는 사자가 먼저 올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 사자는 앞서 본, 말 4 : 5절의 엘리야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 당시 목자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마 17 : 9 - 10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당시 백성의 목자인 서기관들이 성경을 알고 있었기에 메시야가 오기 전 먼저 엘리야가 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예수님 오시기 약 850년 전에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그 엘리야가 오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지요. 앞에서 보았듯이 말 4 : 5절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유대인들과 그 목자들은 어떤 엘리야를 기다렸을까요? 왕하 2 : 11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엘리야는 제자 엘리사를 뒤에 두고 불수레와 불말을 이끌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면 다시 올 때도 그렇게 올까요?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어떻게 오리라 생각하고 기다렸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이 엘리야를 본 적이 있습니까? 거의 천년 전의 사람입니다. 당연히 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온다한들 어떻게 알아볼까요? 또한 엘리야가 8백 년 전의 육체를 입고 오겠습니까? 이래저래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영계에 육체를 가진 자가 있을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럴 리도 없을 것입니다. 승천한 사람들이 성경에 나옵니다. 에녹,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 모두 육체를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영으로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엘리야가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설명해주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오는가? 마 17 : 11 -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사람들은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미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제자들은 깨달았습니다. 온다고 한 엘리야는 바로 세례 요한이라는 것이지요. 어떻게 세례 요한이 엘리야가 될 수 있습니까? 처음 세례 요한이 잉태될 때 천사를 통하여 말해준 사실이 그것을 설명해줍니다. 눅 1 : 13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7절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쉽게 말하면 세례 요한에게 엘리야의 영이 함께 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은 알고 유대인들은 몰랐고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들어서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당신이 스스로 말하고 일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신 것이지요.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7 :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2 : 49 - 50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오죽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라고 말씀합니다. 요 10 :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부부가 하나 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가 되는 것입니까? 말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설명해주십니다. 요 8 :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29절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겁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영이 육체인 예수님에게 와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마 3 :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그래서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십니다.
정리해봅니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이름으로 온 하나님의 사자 곧 길 예비 사자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언약의 사자’입니다. 세례 요한은 선지 엘리야의 이름으로 왔으니 그 사명을 다해야 했습니다. 곧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왕상 18 :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의 사명은 백성을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 사명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고사하고 자기 제자들까지도 여전히 예수님께로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마 11 : 2 - 3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 요한의 제자들이 왜 여태 예수님에게 가지 않고 요한에게 붙어 있어야 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셔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이라 하는 유대인들은 그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요 5 :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왜 그랬을까요? 자기네가 바라고 기다리던 메시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자들조차도 기다리던 메시야는 자기네까지도 높은 자리에 앉혀주실 수 있는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막 10 :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제자들이 자리싸움 하는 것을 보고 주의를 주십니다. 42절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아무튼 영광 중에 임하실 메시야를 꿈꾼 것입니다. 온 유대인들이 사실은 그렇게 기대하며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이방인의 압제에서 벗어나 민족적인 해방이 이루어지고 보다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민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메시야는 대단한 권력과 권세를 가지고 등장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실제로 오신 메시야는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막 10 :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이 제대로 제자들에게 전달되었을까요? 제자들은 과연 바르게 이해하였을까요? 자기네가 바라고 기대하던 메시야와 지금 십자가형을 당할 메시야가 일치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후에 못 미더워하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며 나눈 대화 속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눅 24 :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지가 사흘째요” 다시 말해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해줄 선지자로 기대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힘없이 죄수로 잡혀서 형벌을 받고 끝난 것이지요. 그 실망의 탄식이 스며든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 곧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바랐던 메시야는 옛날 다윗의 왕국으로 회복시켜줄 수 있는 그런 대단한 인물이어야 했습니다. 말 그대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써 오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메시야라 하는 사람은 너무나 초라하지 않습니까? 믿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이런 자를 메시야로 보내실 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조차 무시하고 경멸하고 멸시하는 경거망동입니다. 그들의 말로 표현하면 참람되다는 것입니다. 마 26 : 63 - 65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대 이런 초라한 메시야를 보내실 수 있다는 말인가? 이건 우리 하나님까지 무시하는 참람한 말이로다, 하는 것입니다.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런 자는 마땅히 제거해야 한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당연히 십자가형을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얼마나 무식하게 행동한 것입니까? 성경을 안다고 하면서도 성경대로 믿으려 하지 않은 것이지요. 그 메시야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고 어디서 어떻게 사역을 하는지 제대로 깨달았다면 이런 악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행 13 :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외워도 알지 못한다면 암송한다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당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성경의 예언과 실제로 오신 언약의 사자와 일치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구약의 예언 속에 ‘예수’라는 사람이 메시야로 온다는 예언은 없습니다. 오고 나서 보니까 그 분이 예수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 예수라는 사람이 과연 성경의 예언과 일치되는지 하나하나 살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목자들 곧 서기관, 바리새인들 또는 제사장들이나 장로들 어느 누구도 이런 작업을 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하물며 백성들은 생각도 못할 일이겠지요. 하지만 물론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보고 믿고자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메시야라고 확신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바로 이 작업을 제자들에게 해주십니다. 구약의 하나님 말씀 곧 예언이 어떻게 예수에게 이루어졌는지 그것을 풀어주는 작업을 하신 것입니다. 즉 말씀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눅 24 : 25 - 27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왜 풀어주셨습니까? 이 사실을 깨닫고 알아야 약속하신 메시야가 오셨다는 것을 만방에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당시에는 이 예수를 믿고 영접함으로 구원과 영생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었습니다. 행 16 : 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그 때는 이것이 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증거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도무지 믿어주지를 않았으니 말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예수를 메시야로 믿고 전하는 일은 자기네가 믿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를 전하는 자들은 사생결단하고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이 초림 때의 사건은 곧 재림 때의 있을 일을 짐작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과 신약 속의 예언 곧 하나님의 약속은 다시 봉해져 있습니다. 언제 알 수 있겠습니까? 이루어질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요 14 : 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예언 자체를 믿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냥 말로만 있으니까요. 그러려니 생각만 하면 됩니다. 그 뜻을 아직 깨닫지 못해도 주신 말씀대로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문제는 그 예언이 성취될 때 그 이루어진 실상을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신약 곧 새 약속을 지키는 일이니까요. 메시야가 온다는 예언(구약)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메시야가 예수로 등장했을 때 그 실상인 예수를 메시야로 믿기는 어렵다는 말입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예언의 말씀과 대조하는 일이지요. 과연 말씀(예언)대로 이루어지는 사실이 존재하는지 비교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 뜻을 알아야 대조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봉해졌던 말씀이 열려야 합니다. 과연 열어서 전해주십니다. 계 5장에 봉한 책이 나오고 6장과 8장에서 예수님이 그 인을 떼십니다. 뗀 책을 사도 요한에게 전해주십니다. 사도 요한이 만방에 전할 사명을 갖게 되지요. 그런데 2천 년 전의 그 사도 요한이 다시 오는 겁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엘리야가 영으로 세례 요한에게 왔듯이 그 사도 요한이 누군가에게 오는 것이지요. 예언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사도 요한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 영이 함께 하는 목자를 만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자신의 사자로 삼고 봉한 책(신약 예언의 말씀)의 인을 떼고 이루어진 실상들을 다 보여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역할을 하는 그 사자가 자기 보고들은 것들을 교회들에게 전해줍니다. 그 때는 열린 말씀을 통하여 구원과 영생의 길이 열립니다. 계 22 :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아멘! 바로 이 새로 나타나는 요한을 만나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입니다.
이제 한 가지 확실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셨을 때 메시야답게 보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 예수님의 사자로 올 이 ‘요한’이 예수님의 사자 답게 보이겠습니까? 천만에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무시하였듯이 오늘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사자를 무시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눅 18 :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그 때 세상에는 믿음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초림 때처럼 따라가지 않으려면 정신 차리고 신앙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른 것은 그 모습을 보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고백하였습니다. 요 6 :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그렇습니다. 그 하는 말씀을 들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말과 달랐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목자들이 설교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라 짐작합니다. 들어보고 맞춰보아야 합니다. 먼저는 예언의 말씀의 참 뜻을 알도록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맞춰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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