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 벌어진 곳을 메우고, 허물어진 곳을
일으켜서 그것을 옛날처럼 다시 세우리라. 그리하여 그들은 에돔의 남은 자들과
내 이름으로 불린 모든 민족들을 차지하리라." (11~12)
아모스서 전체는 크게 4부로 구성되어있다. 그 가운데 본문의 9장 11절 이하
15절까지는 마지막 제4부이다. 앞선 제1~3부의 내용들이 모두 심판과 관련된
진술이었던 것과 달리 이 부분에서는 선민의 구원과 회복을 예언하고 있다.
비록 다섯 절의 짧은 내용이지만,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것은 아모스서 전체에서
제시된 심판 경고가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돌이킴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동시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의해 선민의 역사가 비록 굴곡을 겪지만 마침내
영원한 구원과 승리의 역사가 될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서의 제4부는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11)
첫째 부분인 본절(11절)은 다윗 왕가의 왕권 복원이 약속된다. 여기서 사용된 '그날에'
라는 표현은 지금까지는 심판의 날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아모2,16; 5,18; 8,3.9).
그러나 본문에서는 구원이 이루어지는 날로 바뀌어 묘사되는 것이다. 즉 본문에서
'그날'은 다윗의 무너진 초막(장막)을 일으키는 날이라고 묘사된 것이다.
그런데 '초막'(장막)이란 표현에 대해서는 해석상 이견이 있다.
구약 성경에서 주로 '만남의 천막'으로 번역되는 '오헬'(ohel)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기간 동안에 하느님께서 거하실 장소로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만든 성막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초막'(장막)으로 번역된 '쑥카트'(sukkath)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기간 동안에 지내던 숙소인 텐트를 가리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에도 광야에서 '쑥카'(sukka)에 지내던
시절을 잊지 않기 위해서 일정 기간동안 초막(장막)에서 생활하는 절기를 지켰는데,
그 절기의 이름이 '초막절'(장막절) 즉 '하그 핫쑥코트'(hag hassukot)이다
(레위23,42.43).
즉 이 '쑥카'(sukka)라는 단어는 출애굽 당시의 하느님의 동행과 보호하심을 상기케
하는 표현이다.
물론 다윗의 무너진 초막을 일으킨다는 표현은 다윗의 왕권이 회복되고,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 부흥기였던 다윗 시대의 영광을 회복하게 된다는 예언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쑥카'(sukka)라는 표현은 그러한 회복이 하느님의 임재와
동행하심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암묵적으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혹자는 본문의 '쑥카트'의 모음이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고, 일반 명사가
아닌 고유 명사 '쑥코트'(sukkot) 즉 '수꼿'으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본문의 '쑥카트'는 다윗 임금이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통치하는 데에 중요한 군사 기지로 사용한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 된다.
아모스 당시에는 사실 아람 임금 하자엘의 공격으로 인해 침략을 당해 수꼿의 영토는
빼앗긴 상태였다 (2열왕10,32.33).
이같은 역사적 정황과 연결시켜 '쑥카트'를 '쑥코트'(수꼿)으로 보면, 심판의 날에
하느님께서 다윗의 무너진 초막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표현은 다윗 당시에 정복하였지만
지금은 다른 나라에 빼앗긴 수꼿을 다시 찾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의미로 이해한다면, 본문 이후 제시되는 '벌어진 곳을 메우고, 허물어진 곳은
일으켜저 그것을 옛날처럼 세우리라.'고 한 표현은 수꼿의 성읍을 회복한 뒤에 다시
정비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을 수꼿의 재정복에 대한 예언으로 보든, 다윗의 왕조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예언으로 보든, 모두 다윗 시대에 가나안 지역의 많은 곳을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나라도 다윗이 통치하는 당시 이스라엘을 함부로 넘보지 못함으로써
평화를 구가하였던 당시의 영광을 회복할 것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더 나아가 다윗 시대의 평화와 번영의 기초가 되었던 하느님을 바로 믿고 섬겼던
온전한 신앙의 회복이란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본문은 그날 즉 주님의 날이 되면, 하느님과의 온전한 관계에 근거한 다윗 시대의
영광과 번영을 완전히 회복할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한편, 사도행전에서는 이방인들을 교회에 받아 들이는 문제와 관련하여 예루살렘에서
사도 회의가 열렸을 때, 이 회의를 주도하는 인물 중 야고보가 본문의 내용을 인용하여
이방인들을 하느님의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정당함을 밝히는 내용이
제시된다.
"그 뒤에 나는 돌아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다시 지으리라. 그곳의 허물어진 것들을
다시 지어 그 초막을 바로 세우리라. 그리하여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모든 민족들도 주님을 찾게 되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하고 이 일들을
실행하니 예로부터 알려진 일들이다."(사도15,16~19; 아모9,11~12)
이런 점에서 볼 때, 다윗의 초막(장막)을 다시 세우고 온전하게 회복시킬 것이라는
본문의 내용은 궁극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민족들의 모든 백성들로 구성된,
온전한 하느님 나라의 회복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서의 다윗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벌어진 곳을 메우고, 허물어진 곳을 일으켜서 그것을 옛날처럼 다시 세우리라.'
본문은 다윗의 초막을 다시 세울 것이라는 상반절의 표현에 이어지는 내용으로서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초막을 보수할 것인지를 예언하는 내용이다.
본문의 '벌어진 곳'이라는 표현에서 여성 3인칭 복수형은 남부 유다와 북부 이스라엘을
모두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본서의 협의적 배경이 북부 이스라엘이기는 하지만, 아모스서 7장 15절, 8장 2절
등에 기록된 '내 백성 이스라엘'이란 표현에서 암시되는 것처럼 본서의 청중이나
독자는 북부 이스라엘 만이 아니라 남부 유다를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남부 유다와 북부 이스라엘이라는 두 개의 분단 국가로 나뉘어진
이스라엘이 하나로 통일될 것이란 의미를 내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구약의 예언서에 제시된 선민 회복 예언 중에는 다중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들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문을 비롯한 본 단락은 멸망한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의
정치적 회복을 의미할 수도 있고, 주 하느님 신앙의 회복에 의한 선민 위상의 복귀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메시야의 재림으로 인하여 성취되는 신약 선민의 교회의 설립과
성령의 역사에 근거한, 교회 구성원에 의한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종말의 때에 완전하게
이루어질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지향한다.
이처럼 예언서에 예언된 회복은 짧게는 외세에 의하여 멸망당한 선민 공동체의
재건으로부터 길게는 구세사의 정점에 있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의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에돔의 남은 자들과 내 이름으로 불린 모든 민족들을 차지하리라.'(12)
앞선 아모스서 9장 11절에서는 장차 하느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이 다윗 왕가의 왕권과
다윗 때의 영광을 회복할 것을 예언하였다.
이어지는 아모서 9장 12절에서는 모든 민족을 기업(상속)으로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다.
즉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회복될 때에는 아모스서 9장 11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는 다윗 임금시절의 영광을 모두 회복할 뿐 아니라
본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변의 모든 나라들을 그들의 통치 아래에 들어오게 할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 이스라엘이 에돔을 비롯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모든 민족들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영토를 다시 획득하며,
더 나아가 다른 나라까지도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로인해 하느님의 나라가 왕성하며 더욱 견고하게 세워지고 완성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과거 하느님을 알지 못하던 세상 만국의 백성들이 하느님을 인정하고 하느님께로
돌아갈 것이며, 즉 궁극적으로는 복음 전파를 통한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