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025. 묵상글 (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 순종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등 )
----------------------------------------------------
<09:20 추가>
221025.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 모두 하느님의 나라를 삽시다
-꿈과 실현-
가장 아름다운 분은 누구일까요?
밤마다 하느님의 나라를 꿈꾸고, 잠깨면 하느님의 나라를 사셨던 예수님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처럼 밤마다 하느님의 나라를 꿈꾸고, 잠깨면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하느님의 나라를 꿈꾸고, 하느님의 나라를 산다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삶일까요?
저도 밤마다 참 많이 꾼 꿈이 하나 있습니다. 그날의 매일 강론입니다. 꿈속에 다 썼던 강론인데 꿈 깨고 나면 다시 써야 하는 강론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꿈의 실현이요, 꿈의 현실화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꿈꾸고 살았던 예수님이야 말로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과 함께 하나 되어 살 때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에 아름답고 품위 있는 매력적 삶입니다. 바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얼마 전, 김대중 대통령을 도와 남북의 화해와 평화에 큰 기여를 한 피스 메이커의 상징적 인물인 임동원 자서전을 감동 깊게 읽던 중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대한 일화가 있어 소개합니다.
-‘나는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교황청 대사가 마련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접견식에 참석했던 일을 잊을 수 없다. 우리 내외는 그분을 3년 전 나이지리아 라고스에서 처음 만난 후 두 번째 만남이어서 더욱 반가웠다. 그는 인자한 모습으로 악수를 청하며 한국말로 “안녕하십니까? 한국민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빕니다.”라며 축원해 주셨다. 교황님은 사진 촬영에도 응해 주셨다.’-
시의적절 하게 잊지 않고 한국말을 구사하는, 얼마나 다정하고 멋진 성 요한 바오로 2세인지요! 이래서 성인이요 하느님 나라의 꿈이 실현된 모습입니다.
꿈이, 희망이, 비전이 있어야 삽니다.
교육의 우선 순위가 꿈을 심어주는 것이요, 꿈꾸는 꿈나무가 되어 살게 하는 것입니다. 꿈이, 희망이, 비전이 없으면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만이, 살아있는 사람만이 꿈꿉니다. 꿈이, 희망이, 비전이 있어야 존엄한 인간 품위를 지닐 수 있습니다. 뿌리 없이 표류하거나 방황하지 않습니다. 쉽사리 유혹에 빠지지 않고, 타락하지도, 부패하지도 않습니다. 꿈 중의 꿈이 하느님 나라의 꿈입니다. 예수님의 꿈이자 참으로 믿는 우리 모두의 참 꿈이 하느님 나라의 꿈입니다.
죽어서 가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요, 언젠가 살아야 할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에서 살아야 할 하느님 나라의 꿈입니다. 살아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못 삽니다. 제 행복기도 중 일부가 생각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
하느님의 나라이옵니다.”
파스카 예수님과 함께 할 때 바로 거기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의 평생 꿈이자 희망이었던 하느님의 나라의 정체가 환히 드러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살아야 할 하느님 나라의 꿈이요,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하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들입니다. 예수님께는 겨자씨가, 누룩이 하느님 나라의 표징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되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두 비유가 재미있습니다. 루가 복음 사가를 통해 예수님의 남녀평등의 시각이 잘 드러납니다. 겨자씨에서는 남자가, 누룩은 여자가 주인공이 되니 참 공평합니다. 제1독서 에페소서는 바오로의 당대의 가치관에 따라 남녀에 대한 가부장적 차등적 사고를 감지합니다만 예수님께는 전무합니다.
이렇게 남녀평등의 사회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1독서 에페소서 서두와 마지막 구절은 남녀평등의 하느님 나라의 실상에 대한 묘사로 손색이 없습니다. 두 말마디대로 실천한다면 참 이상적 하느님 나라의 부부공동체가 될 수 있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여러분은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사랑의 순종, 사랑의 존경,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다정한 부부 사이의 모습입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내적성장을 상징하고, 누룩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내적변화의 성숙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섣불리 경솔히 개입하거나 간섭하지 말고 성령에 따라 가만히 바라보고 지켜보며 적절한 때 잘 협조해 드리는 일뿐입니다. 육신은 노쇠해도 영혼은 겨자씨처럼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고, 누룩처럼 끊임없이 변화하여 성숙할 수 있음을 봅니다.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말씀의 겨자씨요 말씀의 누룩입니다.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의 은총이 내적성장과 내적성숙의 삶을 살게 합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살아 있는 성령이요, 살아있는 믿음, 살아 있는 희망, 살아 있는 사랑입니다. 성령의 겨자씨 성령의 누룩이, 믿음의 겨자씨 믿음의 누룩이, 희망의 겨자씨 희망의 누룩이, 사랑의 겨자씨 사랑의 누룩이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의 내적성장과 성숙의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게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기쁨도 행복도 감사도 평화도 살아있는 하느님 나라의 겨자씨가, 누룩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우리 하나하나는 물론 우리 공동체 역시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로 성장 중인 겨자씨와 같고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누룩의 효소와 같습니다. 성령의 누룩이, 말씀의 누룩이 부패인생이나 부패공동체가 아닌 향기로운 발효인생, 발효공동체로 만들어 줍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겨자씨가 되고 누룩이 되어,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의 꿈을 현실화 해줍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이야 말로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의 꿈이 실현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살도록 합시다. 아멘.
----------------------------------------------------
221025.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순종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부부 관계를 사랑과 순종의 관계로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 가운데
여자는 미사 때 머리를 가려야 한다는 것과 함께
매우 봉건주의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는 데 비해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하니 말입니다.
서로 순종하라고 하거나
오늘 독서의 첫 구절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하면 문제없을 텐데.
사실 요즘 세상에 누가 누구에게 순종합니까?
그럼에도 저는 오늘 바오로 사도를 변호하려고 합니다.
남편과 아내 관계가 많이 기울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랑하는 것과 순종하는 것이 실은 같은 것이라고.
그렇습니다.
사랑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참 사랑이라면, 순종하기 마련이고,
순종이 복종이 아니라 참 순종이라면 순종은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사랑꾼들은 사랑 때문에 순종하지 억지로 순종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자식이 원하는 것을 엄마가 해 주는 것은 사랑 때문이고,
연애 시절 한 여자가 원하는 것을 한 남자가 하는 것은 강요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니 사랑하면서 순종하지 않는 사랑은 없습니다.
----------------------------------------------------
221025.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19)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한 쌍의 비유를 전해줍니다. 곧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19)
‘겨자씨’는 유다문학에서 ‘작은 것’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그것은 ‘정원’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아무 데나가 아니라 ‘정원’에, 그것도 “자기 정원”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라는 말에서, “깃들다”(κατασκηνω)는 단어의 뜻은 “밑에 거주하다” 곧 “장막에 들어가다”,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곧 새들이 단순히 가지 위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날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안전하고 영속적인 거처를 마련하고 지속해서 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교회’라는 혹은 ‘가정’이라는 생명의 말씀나무에 한 둥지를 틀고 사는 새 떼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미 한 그루의 생명나무입니다. 당신께서 뿌려진 생명의 씨앗이 자라나 사랑으로 피어난 나무입니다.
한편, ‘겨자씨의 비유’가 하늘나라의 외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누룩의 비유’는 내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들어가 자기의 능력을 전체에 돌려줍니다. 그러나 먼저 반죽되어야 하고, 섞여야 됩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묻혀 보이지 않지만, 결코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밀가루 속으로 들어가 섞일 뿐입니다. 그리고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을 밀가루 “속에” 집어넣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이 누룩을 우리 ‘속에’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적은 양의 누룩이 자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갈라진 우리의 내부를 통합할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룩이 되어 세상 속으로, 형제들 속으로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하여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하늘나라의 복음은 세상을 해방하는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말입니다.
또한 “집어넣다”(εγκρυπτω)는 동사는 “숨기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밀가루 서 말 속에 숨긴 누룩이 온통 부풀어 오르듯이, 하늘나라도 현재 숨겨져 있는데 미래에 엄청나게 확장되리라는 전망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겨자씨가 이미 ‘우리’라는 밭에 뿌려졌고, 누룩이 이미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라는 밀가루 안에 넣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맘껏 자라나고, 맘껏 부풀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안에 넣은 누룩이 제 속을 파고들게 하소서!
섞여들지 못한 까닭에 부풀어 오르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제 안에 뿌려진 씨를 묻어두고만 있지 않게 하소서!
죽지 못한 까닭에 싹을 피우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19)
주님!
사랑하는 이는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에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낮아지는 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이신 까닭입니다.
주님! 사랑하는 까닭에 형제들 앞에서 낮아지고 작아지게 하소서!
사랑이, 제가 형제들 앞에 낮아지고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
----------------------------------------------------
221025.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소리 없는 변화
“하느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하셨을까? 겨자씨는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입니다. 오늘 그 씨를 보여드립니다. 얼마나 작은지 보십시오. 그런데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새가 깃들만큼 우거집니다. 누룩 역시 밀가루 반죽 속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입니다. 누룩도 밀가루 양에 비해 아주 보잘 것 없을 만큼 적은 양이지만 밀가루 반죽에 들어가서 밀가루 전체의 성질을 변화시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한 사람이 내 삶의 자리와 머무는 곳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겨자씨와 누룩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내가 바로 서면 지금은 미약하지만 분명 큰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한 사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큰 나무 역할을 하게 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그늘의 고마움을 느끼게 될런지요.
콩나물을 키울 때 콩나물에 물을 부으면 물이 다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콩나물은 크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성장과 변화는 드러나지 않게 이루어집니다. 실망과 좌절 안에서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역경과 시련도 믿음의 사람에게는 은총의 기회요, 희망입니다. 따라서 순간순간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왔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입니다. 왜냐하면, 완성을 향한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시작과 완성 사이의 긴장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을 스쳐 가는 순간순간의 생각, 꿈같이 왔다갔다 하는 우리의 상상, 마음속 깊이 숨은 티끌 같은 비밀 하나까지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신 눈앞에 숨겨져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그러므로 내 생활의 동작 하나하나가 천상으로 치닫는 하나의 몸짓이고 자세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행실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로마2,6). 이 말씀은 믿는 이들에게는 두려움보다는 기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성장을, 그리고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자연스러운 변화를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주님의 가르침이 마음 안에 새겨져서 자연스러운 삶의 변화를 통해 증거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17,21) 고 하셨습니다.
결국, 지금 내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내 안에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지 따지지 마십시오. 자동차 운전을 하든지, 부엌일을 하든지, 짐을 나르든지 상관없이 마치 사제가 성체를 모시고 가듯이 하십시오. 매 순간마다 이렇게 ‘천국을 위하여 일하십시오”(알베리오네). 내 몫을 충실히 하는 가운데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기를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유다교 랍비와 신부님이 만났습니다.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어제 밤 꿈에 유다교의 천국을 보았는데 너무 지저분해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없고 유다인들만 우글거리고 있더군요.” 그러자 랍비가 말했습니다. “그래요? 나도 간밤 꿈에 천주교인들의 천국을 보았지요. 밝고 화사하고 꽃이 만발한 너무도 아름다운 곳이더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사람이 눈에 띄지 않더라구요.”
----------------------------------------------------
221025.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년 만에 친구를 만나면서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 없이 헤어졌습니다. 친구는 아이들의 교육 때문에, 새로운 기회를 얻고자 멀리 타국으로 이민 갔습니다. 믿었던 사람과는 헤어져야 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어서 지금은 안정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자식들이 잘 자라주는 것이 고맙다고 합니다. 힘든 시간들인데 남편을 믿고 따라준 아내가 감사하다고 합니다. 다시 만남을 기대하면서 고려시대 문인 정지상의 ‘송인’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언덕 위의 풀은 다시 파랗게 변하는데, 친구는 멀리 남포로 떠나니 슬픈 마음이 이네, 대동강물이 마르면 친구 다시 올는지, 나의 눈물이 강물을 더하네.”1989년 결혼해서 33년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지내는 친구와 그 아내가 늘 건강하기를 기원합니다.
언제나 서로 의지하면서 기쁘게 지내는 친구와 아내에게 나훈아의 ‘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 보고 또 보고 또 쳐다봐도/ 싫지 않는 내 사랑아/ 비 내리는 여름날에/ 내 가슴은 우산이 되고/ 눈 내리는 겨울날엔/ 내 가슴은 불이 되리라/ 온 세상을 다 준대도/ 바꿀 수 없는 내 여인아/ 잠시라도 떨어져서는/ 못 살 것 같은 내 사랑아/ 행여 당신 외로울 때/ 내가 당신 친구가 되고/ 행여 당신 우울할 때/ 내가 당신 웃음 주리라” 참 아름다운 가사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전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교회가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같은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가끔씩 앨범을 보곤 합니다. 30년 전의 모습, 20년 전의 모습, 10년 전의 모습, 지금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나는 예전의 나의 모습’에서 얼마나 발전했을까? 순수하고, 깨끗했던 모습은 많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외모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30년 전의 저와 지금의 저는 별개의 사람이 아니라, 시간을 거치면서 계속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했으면 가능성은 현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하고,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소홀했으면 가능성은 가능성으로 남아 있거나, 사라졌을 것입니다. 욥기 8장 7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보잘것없겠지만 나중에는 훌륭하게 될 것일세.” 작은 씨앗은 커다랗게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을 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가 자신은 물론 남을 도울 수 있을 만큼 자라는 것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도 이와 비슷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시작은 겨자씨와 같지만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새들이 와서 머물 정도가 된다고 하십니다. 누룩과 같아서 부풀어 오르면 맛있는 빵이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안에 감추어졌던 놀라운 가능성을 보았고, 제자들에게 믿음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비록 시작은 12명이었지만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수많은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조건을 보시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을 배반했음에도, 다시 악의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들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비록 현실은 작고 초라할지라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큰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
221025.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인터넷을 보다 보면 그의 충격적인 사진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네살 짜리 아이처럼 혀를 쭉 내밀고 찍은 사진입니다.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몇몇은 사진을 조작한 것이 아니냐고 묻기도 합니다. 점잖고 존경받는 그리고 위대한 지성을 가진 아인슈타인이 그런 자세를 취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이 사진을 받았을 때 전혀 놀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기 싫다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량으로 복사해서 메모 카드까지 만들었습니다. 이 모습 역시 자기 모습임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철없다고 비난했지만, 공개적인 사과와 앞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이겠다는 기자회견도 없었습니다. 자기의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습 역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도 인정하지 못하면서 남을 인정할 수 있을까요? 다양한 자기 모습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다양성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성을 서로 인정하는 가운데 우리 삶은 더 풍요로워지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자주 말했었다고 합니다. 즉, 거대한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현재의 이스라엘에 하느님께서 나타나셔서 능력을 휘둘러 하느님 나라를 유다 땅에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라고 평가받고 있던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과 전혀 달랐습니다. 도저히 메시아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로마에 반대해서 모두 들고일어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회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뽑은 제자 역시 마음에 들지 않지요. 하나같이 무식하고 어딘가 문제를 가지고 있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하느님 나라는 가난하고 울고 쫓기는 사람의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시작은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결말은 놀랍도록 위대하리라는 것이지요.
자기 자신의 완고한 마음을 가져서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다양한 활동을 인정하면서,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 수 있지만, 그 다양한 활동이 겨자씨와 누룩처럼 놀랍도록 위대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용서하는 것이다(엘리잘 벤 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