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조선 고종 33) 안동에 관립소학교 설립
1907 대한제국 군대 해산 조칙 발표
1925 전국에 홍수
사망 행방불명 647명, 부상 264명, 가옥유실 파괴 10만 3,391호
1946 전국 학생총연맹 결성
좌익학생단체에 대항키 위한 목적, 위원장에 이철승
1959 조봉암 사형 집행
* 조봉암(1898-1959)
강화 출신. 강화에서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뒤 군청에서 일하다가
상경하여 3.1운동에 참가하고 1년간 복역하였다.
일본 중앙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며 비밀 결사인 흑도회에 참여하고
사회주의 이념에 의한 독립쟁취를 목표로 항일운동 전개.
24년 조선청년동맹 중앙간부, 25년 조선 공산당 중앙간부로 활약하다가
공산청년회 대표로 모스크바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동방노동자공산대학에서 2년간 수학.
1930년 일본경찰에 잡혀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한 뒤
인천에서 지하 활동하다가 45년 1월 다시 검거.
해방으로 출감하여 인천지구 민전 의장으로 활동 재개했으나
46년 박헌영에게 공개서한 발표한 뒤 단독선거에 참여.
제헌 국회의원, 초대농림장관, 제2대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하고
2,3대 대통령에 출마하여 이승만을 위협하기도 했다.
56년 진보당을 결성하여 혁신정치와 평화통일론을 제기하다
강력한 라이벌의 부상을 꺼려한 정부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형됨
1969 강원 화천에 폭우로 산사태 발생 81명 압사
1972 남자배구팀, 북한에 승리로 뮌헨 올림픽 출전권 획득
1980 문공부, 주간지 월간지 등 172개 정기간행물 등록 취소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뿌리깊은 나무, 월간 중앙 등이 폐간됐다.
1981 국가안전기획부, 전남 진도에서 몰래 활동하던 고정간첩 7명 검거
1991 체신부 과기처 상공부, 99년까지 국산 대형컴퓨터 공동개발키로 확정
1992 신행주대교 붕괴
오후 6시 50분, 서울 강서구 개화동과 고양시 행주외동을 잇는
폭 14.5m, 길이 1460m의 신행주대교 공사현장에서
교각 10개와 상판 800여m, 주탑 1개가 무너져 200억원 피해 발생
1995 박용길 장로, 판문점 통해 귀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1995 고려대 교수 131명 '검찰 수사와 결정에 대한 우리의 견해' 발표
이를 시작으로 전국 각 대학에서 시국선언 잇따름
1995.12.31 현재 1백개 대학 6,678명 서명 참가
1588 스페인의 무적함대, 영국함대와 교전
1826 미국의 교육자 클라크(1826-1886) 태어남
Boys, be ambitious!
1877 발명왕 에디슨, 축음기 발명
1886 교향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헝가리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 세상 떠남
체르니에게 배웠으며, 쇼팽과 파가니니에게 영향을 받았다.
바이올린의 파가니니와 함께 19세기를 대표하는 명연주자로 꼽힌다.
대표작; <헝가리 광시곡>, <파우스트 교향곡>, <순례의 해>
1932 독일 총선거에서 나치당 승리
1957 말레이지아 독립
1963 싱가포르 독립
1989 미국 유엔평화유지군 사령관 윌리엄 히긴스 피살
1993 보두행 벨기에 국왕, 스페인에서 휴가중 심장마비로 세상 떠남
생 텍쥐페리 실종
1944. 7. 31
생 텍쥐페리 |
1944년 7월 31일 프랑스의 작가 생 텍쥐페리가 비행 도중 실종되었다. 그는 12세부터 비행기를 탔으며, 조종사가 된 후 에르프랑스의 항공사 직원으로 근무했다. 1928년 우편항공기를 조종한 경험을 토대로 쓴 <남방 우편 Courrier-Sud>을 출판하고, 1931년에는 <야간 비행 Vol de nuit>을 발표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동시에 전쟁에 참여하면서도 틈틈이 집필을 계속했다. 그러나 1943년 <어린 왕자 Le Petit Prince>를 발표하고는 1944년 7월 그르노블-안시 지구 출격을 마지막으로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많은 의문은 그를 영원한 어린 왕자로 남게 했다. |
조봉암 사형 집행
1959. 7. 31
1959년 7월 31일 진보당사건으로 체포된 조봉암이 사형되었다. 그는 상하이[上海]에서 조선독립운동자동맹을 조직하는 등 독립정신을 고양시키는 데 앞장섰다. 해방 직후에는 반좌익 성향의 정치노선을 견지하며, 제헌국회 의원과 초대 농림부장관, 제2대 민의원 부의장을 지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근소한 표차로 낙선하고,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이렇게 조봉암이 이승만과 자유당을 위협할 만한 존재가 되자, 이승만 정권은 진보당사건을 조작했다. 1958년 조봉암이 창당한 혁신정당 진보당의 간부들이 북한의 간첩들과 접선하고 북한의 통일방안을 주장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된 것이다. 이 진보당사건으로 조봉암은 간첩, 국가보안법 위반, 무기불법소지 등의 죄목으로 체포되어 1959년 사형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