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마 14: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마 14: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마 14: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마 14: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오늘은 이타적인 사랑에 대해 말해보고 싶습니다. 이타적인 사랑이란 굉장히 어려운 과업처럼 느껴지는 단어입니다. 왠지 내가 엄청 희생해야 할 것같고 자기를 버려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타적인 사랑”이란 단어 조합 자체가 원래는 말이 안 되는 조합이죠. 사랑이 이타적이지, 이기적인 사랑도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슬프게도 이타적인 사랑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부부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부모 자식 관계에서도 이타적인 사랑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노년에 자식들에게 섭섭해 하는 이유도 자식에게 바라는 것이 만족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까? 그러니 부모의 사랑도 온전히 이타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싸웁니다. 모든 싸움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해서 하는 것이라고 일찍이 야고보가 말을 했지요(약 4:1). 이기적인 마음 둘이 만나니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이타적인 사랑이란 인간의 사랑 가운데서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이 받아야 할 무조건적인 사랑을 먼저 받아 본 사람만이 나눠줄 수 있는 것이며 그때 하는 것이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복을 받고나서 받은 그 복으로 복의 근원이 되길 원하시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아 누린 뒤에 넘치는 그 사랑으로 상대를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타적인 사랑을 하라고 할 때, '그럼 나는? 나는 누가 사랑해 주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기적인 마음을 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일종의 자기방어죠. 그런데 문제는 우리 마음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분은 우리가 이타적일 때 행복하도록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최근 두뇌 과학에서도 밝혀진 사실!) 이기적인 마음을 품고 있으면 계속해서 괴로울 수밖에 없고 이타적인 마음을 품어야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휘발유 차는 휘발유를 넣어야 돌아가게 만들어졌는데 LPG를 넣으면 고장 나듯이 우리는 이타적인 사랑을 하도록 만들어졌는데 이기적인 마음을 품으면 고장 날 수밖에 없는 노릇이죠. 지금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과거에 (또는 현재) 괴로웠을 때, 그때 나는 이타적이었는지, 아니면 이기적이었는지. 반대로 행복했을 때, 나는 이타적이었는지, 아니면 이기적이었는지.
한번 테스트를 해 볼만 한 것이 있습니다. 하루는 '누가 날 좀 안 섬겨주나?' 하면서 하루를 보내보고, 다음 날은 '오늘 나는 누구를 섬겨 줄까?' 하면서 나에게 축복 받을 자를 찾아보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남에게 대우를 받으려고 하면 할수록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아 기분이 나빠지고, 다른 사람을 섬기려고 하면 할수록 내 마음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이타적 사랑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가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 3세부터 18세까지 15년간을 친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며 살았던 조이스 마이어. 마침내 자신의 삶에 불행이 끝나고 행복이 시작된 것은 ‘오늘 누가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인가’에서 ‘오늘 나는 누구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인가’로 마음의 태도를 바꿨기 때문이랍니다. 큰 비밀이 숨겨져 있는 얘기지요. 대부분 성숙하다는 그리스도인들도 나에게 유익이 되는 교회, 나에게 유익이 되는 공동체, 나에게 유익이 되는 영적 리더, 나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을 찾지 내가 섬기고 유익을 끼칠 대상을 찾는 사람은 매우 드물며, 그래서 귀합니다.
내가 받을 사랑만 구하다가 갑자기 이타적인 사랑을 하게 되진 않습니다. 먼저 태도를 바꿔야 하는데 저의 경우, '내 선택으로 태도를 바꿀 수도 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된 것 만으로도 놀라웠고 또 그렇게 태도만 바꿔도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사라진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대로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사실, '누구한테 받을까?' 이건 거지근성 아닙니까? (이해, 공감, 포함) '누구한테 줄까?' 이것이 부요한 자의 근성이고 우리는 부요한 자이기에 당연히 그러한 태도가 어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