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도 꽃은 핍니다
눅21:29-33
가을은 청자 빛 하늘 아래 오색영롱한 단풍이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타오르는듯한 붉은색의 홍엽, 온통 황금색의 물결을 이루는 황엽, 검은빛을 띈 주황색의 갈엽 등 산천에 널려있는 풍요로움이 마음 가득 담겨 자식의 성장을 감사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되게 합니다. 가을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차를 타고 간다는 것이 왠지 서글픈 거리입니다. 하지만 겨울을 재촉하는 바람도 함께 불어옵니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가을바람입니다. 매몰차게 몰아치는 가을바람이 이미 익은 낙엽들을 털고 있습니다. 더 오랫동안 단풍의 아름다움과 가을의 풍요로움을 만끽하고 싶은데 가을바람은 가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고 그것이 거역할 수 없는 세상의 순리인 것 같습니다.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생물은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 환영하지 않는 차가운 바람이 몰아칠 것이고 거리에 떨어져 뒹구는 낙엽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옛날 로마의 도시 폼페이는 화산 폭발로 망해버린 도시입니다. 1748년 이태리 남부에서 땅 속에 묻힌 도시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이 때 수많은 놀라운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 중 하나는 큰 기둥에 쇠사슬로 발목이 묶여 용암에 묻힌 네 죄수의 시신이었습니다. 열쇠가 그들의 뻗혀진 손끝에서부터 겨우 손가락 한 개의 거리에 놓여 있는 상태에서 매몰된 것입니다. 그들은 간수가 던져준 열쇠를 잡으려고 미친 듯 비명을 지르다가 밀려오는 용암에 매몰되었을 것입니다. 찬 가을바람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는지 모릅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봄이 되면 꽃이 피고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는 것이 계절의 법칙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가을에도 꽃은 핍니다. 농촌에 가면 길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빨강, 분홍, 흰, 노란빛을 띤 키다리 코스모스가 솔솔 부는 바람을 따라 한들한들 나부낍니다. 가을 교정이나 정원 화분에는 계절의 여왕 꽃이라 하는 탐스러운 국화꽃이 가꾸는 이의 정성과 함께 예술처럼 피어 있습니다. 가을 동산에 오르면 봄철의 진달래처럼 어느 곳에나 볼 수 있는 향기 그윽하고 독특한 들국화가 있습니다. 해변 양지 바른 곳에서 탐스럽게 피어나는 해국도 있고, 꽃향기 진한 갯국화, 화려한 빛깔로 개량된 리베라도 있습니다. 가을답지 않는 여름의 정열을 느끼게 하는 맨드라미도 있습니다. 꽃이 마치 닭이나 칠면조 볏 모양을 닮은 것 같습니다. 끈끈한 생명력을 가지고 늦가을 서리에도 계속 피어나는 달리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꽃 모양은 국화를 닮은듯하지만 빨강과 흰색이 뒤섞여 알록달록한 자태로 크게 피어오르는 달리아는 가을 화단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가을 산엔 이처럼 단풍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꽃이 있습니다. 우리 민요에 나오는 도라지는 심심산천이 아닐 지라도 낮은 야산 어느 곳에서나 흰빛, 연보랏빛 꽃을 피워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 한 곳에 향수를 만들어 줍니다.
가을 언덕에는 무엇보다 억새꽃이 만발합니다. 가을 억새가 우거진 언덕에 서면 일렁이는 억새밭이 마치 바람에 흰 파도를 일으키는 듯합니다. 싸리비, 싸리문을 만들던 엷은 홍자색의 싸리꽃, 꽃향기가 좋은 샐비어 등은 가을의 추억을 더욱 감미롭게 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일상의 가을꽃들입니다. 가을이라고 열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을은 시작하기에 늦은 때가 아닙니다. 열매를 위한 시작인 꽃도 있습니다. 가을에 피어 가을에 열매를 맺는 꽃도 있습니다. 가을에도 수많은 꽃들이 피어납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한 나그네가 광야 길을 걷다가 갑자기 맹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맹수를 피하여 도망치던 그 나그네는 살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한 웅덩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급히 밑으로 내려 놓인 덩굴을 잡고 웅덩이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런데 한 참 내려가고 있는데 밑을 보니 큰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겁이 났습니다. 위를 쳐다보니 맹수가 자기를 집어삼킬 듯 노리고 있고 밑엔 큰 뱀이 있어 아슬아슬한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한 참 시간이 지났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위를 바라보니 자신이 붙들고 있는 덩굴을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갉아 먹고 있었습니다. 이제 덩굴이 끊어지면 뱀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웅덩이 벽을 보니 꿀벌이 꿀을 실어 놓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위기에 처한 것도 잊은 채 꿀을 혀로 핥아 먹었습니다. 흰 쥐와 검은 쥐는 계속해서 덩굴을 갉아 먹고 있었으나 이 나그네는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단 꿀만 빨아먹고 있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참회록에서 이런 우화를 말하면서 "인생은 어리석은 것, 나도 어리석었지 이 세상 향락에 취하고, 이 세상 욕심에 취하고, 죽음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생각없이 나는 지금까지 살아왔노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가을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찬바람 일렁이는 겨울이 우리 앞에 다가올 것입니다. 어느 순간 문득 깊은 잠을 자는 인생의 겨울도 다가 올 것입니다. 이 가을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혹 달콤한 꿀과 아름다운 단풍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요? 차가운 가을바람은 곧이어 겨울 삭풍을 몰고 올 것입니다. 인생의 겨울은 반드시 오고야 맙니다. 성경은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라고 말씀하며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경종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할퀴고 발기고 해도 가을만은 제자리에 두어 두십시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아도 되오니 가을만은 제때에 두어 두십시오"하고 이은상 시인은 읊었습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가을은 좋은 계절입니다. 무엇보다 기도하기 좋은 계절이고 기도해야만 하는 계절입니다. 머지않아 겨울이 오기 때문이고 풍요로움과 아름다움, 감사가 있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를 몸으로 말하며 타오르는 단풍 속에서 겸허해야 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가을은 낭만에 파묻혀 영혼의 호흡을 잃어버리는 계절도, 떨어지는 낙엽의 무게를 계수하며 돈지갑을 생각하는 계절도 아닙니다.
가을은 인생의 겨울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계절입니다. 바램보다는 감사의 기도가, 부르짖음보다는 묵상하는 기도가, 현재보다는 미래의 기도를 드려야할 계절입니다. 한 평생 주님과 함께 인생을 진솔하게 살았던 김현승 시인은 이렇게 가을 기도를 드렸습니다.“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차가운 바람에 가을은 더욱 깊어갑니다. 이 가을 산자락의 단풍의 풍요만큼이나 풍요로운 우리의 가을 기도로 못다 핀 우리 인생꽃도 억새꽃처럼 흐드러지게 아름답고 환하게 피어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