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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쿄신문(聖敎新聞)」을 읽다보면 공유하고 싶은 내용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프리기사’가 아닌 기사(유료회원 전용)를 게재하는 것은 ‘저작권 문제’가 있어 곤란합니다. 고민 끝에, 이렇게나마 다이제스트(요약본)로, 내용의 마지막에 기사의 타이틀과 날짜를 표기하여 업로드를 간간이 하려 합니다. 많은 분이 함께 연찬을 통해 힘을 내실 수 있으면 무엇보다 기쁠 것 같습니다.
- MIDO(美道) 드림 -
넬슨 만델라 국제 데이
불굴의 정신으로 용기의 도전을
오늘 18일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인종격리정책(人種隔離政策)> 철폐(撤廢)에 힘쓴 인권투사(人權鬪士)이자 남아프리카공화국 전 대통령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1918~2013)의 탄생일이다.
27년 반에 이르는 옥중투쟁(獄中鬪爭). 그러나 “인간의 마음 오저(奧底: 속 깊은 곳)에는, 자비(慈悲)와 관용(寬容)이 있다.”라고 믿고, “위대(偉大)한 변혁(變革)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望)을, 한 번도 버리지 않았다.”〈『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한국: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 아가리에 카즈키(東江一紀) 번역, NHK출판〉 그의 인류에 대한 공헌(貢獻)을 기려, 유엔은 오늘을 ‘넬슨 만델라 국제 데이(Mandela Day, 만델라의 날)’라고 정했다.
1995년 7월, 이케다(池田) 선생님은, 남아공 대통령으로서 일본에 온 만델라 씨와 재회. 선생님은 그를 ‘정의(正義)의 암굴왕(巖窟王)’이라고 칭송했다.
소설 『신·인간혁명(新·人間革命)』에는 야마모토 신이치(山本伸一)가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무대가 된 지중해의 이프 섬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에는, 옥중(獄中)에서 서거(逝去)한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선생님, 선사(先師)의 선양(宣揚)을 맹세한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선생님의 싸움을 추상(追想: 추억에 잠김)하며 “암굴왕(巖窟王)이란, 용기(勇氣)의 사람, 불굴(不屈)의 사람, 신념(信念)의 사람이며, 인내(忍耐)의 사람이다. 광선유포(廣宣流布)는, 그러한 사람이 있어야 만이, 가능하다.”라고 씌어 있다. 〈제30권[상] ‘효종(曉鐘)’〉
“‘더 이상은 무리(無理)다. 한계(限界)다’라는 마음의 장벽(障壁)”을 부수는(타파하는) 것은 “목적(目的)을 성취(成就)할 때까지 끈기 강하게 집념(執念)을 갖고 계속 전진한다.”(상동)는 ‘암굴왕(巖窟王)의 정신(精神)’이라고 이케다 선생님은 말했다.
자서전(自敍傳)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여정)』에서 만델라 씨는 “용자(勇者)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 아니라, 두려움을 극복(克服)하는 인간”이라고 역설(力說)했다. 오늘 국제 데이(기념일)에 있어서 유엔은, 만델라 씨가 인권(人權)과 사회적(社會的) 정의(正義)에 헌신(獻身)한 67년간을 근거로 해 ‘67분간의 사회공헌활동(社會貢獻活動)’을 호소한다.
지금, 이 장소에서부터, 불굴(不屈)의 정신(精神)으로 용기(勇氣)의 한 걸음을 - 오늘을,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기회로 삼고 싶다.
「사설(社說)」
2024년 7월 18일
◇◆◇
1988년 7월 도쿄 소카학원의 제21회 영광제(榮光祭)
천년 앞을 향하여 인재의 ‘황금의 연쇄’를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최후의 사업’은 교육
아테네(Athens)가 가장 번영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인 ‘페리클레스의 시대’다.
스승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B.C.500~428)가 제자 페리클레스(Pericles, B.C.495~429)에게 귀에 쏙쏙 박히게(아로 새겨 넣듯) 가르친 것 가운데,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동요(動搖)해서는 안 된다, 주저(躊躇)해서는 안 된다.”라는 일점(一點)이 있었다. 페리클레스 소년이 배운 이 일점은, 인간(人間)의 근본(根本)을 형성(形成)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신의 인격의 확고(確固)한 ‘심(芯: 심지)’을 단련(鍛鍊)해 갔던 것이다.
후년이 되지만, 페리클레스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페리클레스는 공회장(公會場)에서 급한 사무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한 무뢰한 자(者)에게 하루 종일 욕을 먹었다. 하지만 그는 “나는 해야 할 일이 있다.”며 거들떠보지도 않고 묵묵히 일을 계속했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저녁에 귀로에 올랐지만, 그 남자는 변함없이 페리클레스를 따라오며, 계속 욕을 했다.
하지만 페리클레스는 상대도 하지 않고 유연(悠然)하게 걸어갔다. 그가 자기 집에 도착했을 때는 날도 저물고 어두워져 있었다. 그래서 심부름꾼에게 등불을 들려 그 남자가 무사히 귀가할 수 있도록 보냈다고 한다.
즉 페리클레스에게는, 남의 악구(惡口: 욕)밖에 할 수 없는 천(賤)한 인간은, 처음부터 안중(眼中)에 없었다. 그렇기에 일일이 반론(反論)도, 변명(辨明)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불쌍히 여길 뿐이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는 만일의 경우에는 사자(獅子)와 같은 웅변가(雄辯家)로서 민중(民衆)에게 자신의 신조(信條)를 당당(堂堂)하고 성실(誠實)하게 호소(呼訴)하고 행동(行動)했다.
이것은 우리 학원의 교훈(校訓) 제4항 “자신의 신조(信條)를 당당하게 말하고, 정의(正義)를 위해서는 용기(勇氣)를 갖고 실행(實行)한다”에도 통한다. 여하튼, 학원생 여러분은 지금은, 견실히 면학에 힘써, 이러한 의연(毅然)하고 뼈대가 굵은 인격의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성장해 주길 바란다.
왜 학원을 창립했는가
‘아카데메이아(Akadēmeíā)’ 창립 때, 플라톤(Plátōn, B.C.427~347)은 40세였다. 덧붙여서 내가 이 소카학원(創價學園)을 개교한 것도, 1968년(昭和43年), 정확히 같은 40세 때다. 그가 이 학원을 창립한 이유는 무엇인가.
실은 거기에는 스승 소크라테스(Sōkrátēs, B.C.470~399)에 대한 제자(弟子)로서의 깊은 맹세가 담겨 있었다.
플라톤은 스승을 부당하게 체포하고 죽인 당시의 지도자와 사회에 대해 엄청난 분노를 발했다.
플라톤은 결의했다. “소크라테스처럼 올바르고 착한 사람을 박해(迫害)하는 사회는 크게 왜곡(歪曲)되어 있다.” “이 잘못된 정치와 사회를 단연코 혁명(革命)하고 변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바른 의미(意味)에서의 ‘철학(哲學)’에 의해, 올바른 인간과 올바른 사회를 만드는 이외에 없다.”라고.
그리고 그는 그 맹세대로 아카데메이아를 창립해 많은 인재(人材)를 육성해 나갔다.
모두가 연이 깊은 초창의 사람
우리 소카학원(創價學園) 역시 ‘천년(千年)’을 하나의 단위로 삼아 인류(人類)의 아득한 미래(未來)를 바라보며 창립한 것이다. 이 정신은 소카대학교(創價大學校)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바로 연(緣)이 깊은 ‘초창(草創)의 사람’이다.
나에게 있어서도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다.
아무쪼록, 무한히 계속 될 후배(後輩)를 위해서, ‘학원 초창’이라는 긍지 드높게, 이 인생을 존귀한 ‘선구(先驅)의 사람’으로서 살아, 활약해 나아가길 바란다.
세계의 모든 분야에서, 학원생답게, 자신답게, 훌륭한 ‘길(道)’을 뚫고 열어, 인재(人材)의 ‘황금(黃金)의 연쇄(連鎖)’를 훌륭하게, 만들어 가길 바란다.
「연재 〈용기(勇氣)의 원천(源泉) 창립자가 말한 지침(指針)〉」
2024년 7월 18일
◇◆◇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체포된 7월 3일의 아침, 유바리탄로(夕張炭勞) 사건의 지휘를 잡고 있던 이케다(池田) 선생님은 홋카이도(北海道)에 있었다. 치토세(千歳)공항(당시)에서 비행기를 타고, 우선 하네다(羽田)공항으로 향했다. 하네다에는 은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다(戶田) 선생님은 이케다 선생님의 어깨에 손을 얹고, “걱정되는 것은 자네의 몸이다……. 절대 죽지 마라, 죽어서는 안 된다.”라고. 더욱이 애제자의 몸을 끌어당겨 말했다. “만약, 만약 자네가 죽게 된다면, 나도 당장 달려가 자네 위에 엎드려 같이 죽을 것이다.”
은사의 자애(慈愛)의 말을, 이케다 선생님은 술회했다.
“뜨거운 감동(感動)이 밀려왔다. 생사(生死)를 초월해 사제(師弟)는 불이(不二)다. 이 스승과 함께 있는 한, 절대(絶對) 패배(敗北)는 없다. 나는 타오르는 혼(魂)을 느끼며 다시 비행기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사카(大阪)로 가는 항공편으로 이동 도중, 분쿄지부(文京支部)의 여성이 “동지(同志)에게 전언(傳言)을”이라고 호소했다. 선생님은 즉석에서 응했다.
“일본에 새벽이 왔다! 그렇게, 우리 동지에게 전해주세요.”
하네다를 떠나려는 순간, 이케다 선생님은 달려온 벗에게 “걱정 없어요. 나에게는, 이것이 있으니까!”라며 도다 선생님으로부터 건네받은 소설 『인간혁명(人間革命)』을 들어 보였다.
은사가 묘오공(妙悟空[묘코우])이라는 펜네임(필명)으로 집필(執筆)한 소설이다. 발행일은 ‘7월 3일’이었다. 선생님은 비행기 안에서 읽으며 마음에 기(期)했다.
“도다 선생님께서는 사자(師子)이셨다. 그렇기에(따라서) 제자(弟子)인, 사자(師子)의 자식(子)인 나 또한 사자(師子)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마침내 진정한 사자(師子)인지, 아닌지 시험받는 때가 드디어 온 것이다!”
학회는 강하고, 아름다운 단체
이케다 선생님은 일기에 적었다.
“이 날 17일 오후 12시 10분, 출소했다. 오사카 동지 수백 명이 마중 나와 주었다. 기쁘다. 학회는 강하다. 학회는 올바르다. 학회야말로 아름다운 단체다.”
오후 6시, 오사카시(大阪市) 중앙공회당(中央公會堂)에서 ‘오사카대회(大阪大會)’가 열렸다. 장외에도 1만 명이 넘는 동지들이 넘쳐났다.
개회(開會) 후, 폭우(暴雨)가 땅을 내리쳤다. 장외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빗소리에 지워졌다. 그러나 그 자리를 떠나는 동지는 없었다.
이케다 선생님은 열렬히 사자후(師子吼)했다.
“최후에는 신심(信心)을 끝까지 관철(貫徹)한 사람이, 어본존(御本尊)을 끝까지 수지(受持)한 사람이, 또 올바른 불법(佛法)이 반드시 승리(勝利)한다는 신념(信念)으로 하지 않겠습니까!”
재판의 조목〈潮目: 난류(暖流)·한류(寒流)의 같은, 성질이 서로 다른 수괴(水塊)의 경계(境界), 정세(情勢)의 흐름〉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1961년 9월 22일, 제76회 공판이다. 이케다 선생님 스스로 주임검사(主任檢事)에게 증인신문(證人訊問)을 실시했다.
주임검사는 “기억이 안 난다” “기억에 없다”를 연발했다. 재판장 앞에서 추태(醜態)를 보이는 결과가 된 것이다.
제80회 공판에서는 선생님에 관한 4통의 검찰(檢察) 조서(調書)가 모두 각하(却下)로. 1%의 역전승을 향해 길이 크게 열린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2년 1월 25일, 제84회 공판에서 이케다 선생님에게 ‘무죄(無罪)’가 선고(宣告)되었다.
이날, 선생님은 동지에게 말했다.
“오히려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하나의 단계(段階)를 넘어섬과 동시에 다음 단계를 향해 스타트한다. 이것이 본인묘(本因妙)의 불법(佛法)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싸움을 끝내고, 맹세를 새롭게 해, 다음 광포(廣布)의 봉우리를 향해 출발한다. 이 ‘계속 싸우는 마음’이야말로, 이케다 선생님이 자신의 몸으로 보여준 학회정신(學會精神)의 진수(眞髓)다.
흑백으로 밖에 볼 수 없었던 세이쿄신문사(聖敎新聞社)가 소장(所藏)한 사진(寫眞)을 편집부(編輯部)의 책임 하에, AI(인공지능)를 활용해 컬러화한 것입니다. AI를 사용해 흑백을 컬러화한 사진에는 향후, 이 로고마크가 붙습니다.
「〈사자(師子)의 광채(光彩) - 대원(大願)을 완수〉 제8회 오사카대회(大阪大會)」
2024년 7월 10일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매일매일 의노고에 진심으로 깊이 깊이 감사드립니다 항상 노고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