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
은회색 머리칼 단정히 빗어 넘긴 노인을
다리 절룩거리며 늙은 개가 뒤따른다
이우는 달빛 호위하며 황색 꼬리가 간다
느리지만
먼저 가는 걸음이
뒤에 오는 걸음을 기다려 주기도 하고
나란히, 앞뒤로, 서로의 몸짓 읽어가며
함께 간다
읽고 또 읽어
손때 묻은 책은 개의 귀를 닮아간다지
동행의 언어로 엮은 삶의 궤적 한 권
개의 귀는 쉬어가며 읽으려고
접어둔 책 모서리를 닮았구나
전봇대
한 아름 둘레 안에 갇힌 뒤론 수직만 생각했다
전력을 다해 서 있는 일
개들이 갈겨주는 의리의 오줌을 밑거름으로
도시의 아우성이 밀어닥치는 복판에서
후퇴하지 않는 전사로 사는 일
피 흘릴 줄 모르는 나는
갈증에 겨운 태양이 머리꼭지를 눌러도
어퍼컷으로 덤프트럭이 아래턱을 후려쳐도
싱싱한 자동차 매연을 휘감아 곧추 수직으로 들이박았다
들이박는 일만 생각했다
그 밤 느닷없는 포옹에 사로잡히기 전까지는
팽팽해진 밤공기에 전신줄이 곤두서는 고통 속
누군가 차가운 내 몸에 머리를 놓고 괜찮다, 괜찮다 기도문을 읊어 주었다
무너지고 성내고 곤죽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차례차례 내 발에 입 맞추었다
오렌지환타가 흘러 개미행렬이 지나던 자리가 성지순례의 길이 되었다
밤의 무늬가 선명하여 나는 절로 전신(傳神)이었다
화장지의 말
한산섬 달은 밝았을 거야
긴 허리끈 풀고 앉아 깊은 시름할 적에
문 틈에 불어오는 여린 바람에도 파르르 함께 떨던 나
맨몸에 감은 흰 옷 풀어 당신의 비밀 훔쳐주었지
말해 주고 싶었어
당신 혼자 그리 끙끙댈 일 아닐 거라고
세상 등지고 문 걸어 잠그는 일에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지도 않다는 걸
화장지가 풀어지고 응시의 봉합선이 뜯어지는 순간 당신은 잊겠지만 말이야
쓰고 구린 일상의 밀도 속에 나를 낭비하는 곳
공중화장실 변기 옆에 붙어 들락거리는 엉덩이에 맞장구 치며 사는데
인간들이 말하는 웬만한 맛 나도 맛보지 않았겠어?
소요에서 적막을 길어 올리고
울음에서 울음 이후를 분리해 내는
들어서는 일과 나아가는 일 사이의 일주문에
생과 죽음이 걸리기도 한다는 걸
검은 비닐봉지에 든 핏덩이의 수의가 되어준 적 있어
눈물 한 방울에도 찢어지는 내가 짧은 생을
담은 한 벌의 옷이 된 적 있어
남몰래 네가 아름다운 사람이기를 바랬어
적막이 머무는 자리 오래 돌아보았기를
하루에 수 백 번 문은 닫히지만 묵언의 한 칸은 영원하지 않아
정혜선(Hyesun Rakove)
경남 진주 출신
2014년 미국 동부의 워싱턴 문인회 《워싱턴 문학》신인문학상
2015년 한국 시 전문 계간지 《포엠포엠》신인문학상
2023년 제2회 <정지용해외문학상>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