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51
6월9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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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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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3DF0CNEBxw (장인우 사도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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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힘겹지만, 다시 한번 원수 사랑이라는 그 힘겨운 과제를 새롭게 시작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생활 중에 가끔 겪는 일입니다. 환대와 친절이 아니라 냉대와 불친절로 인한 모욕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요즘 호칭부터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객님’ 아니면 ‘선생님’ 하면 될 것을 가지고 ‘아버님’ ‘어르신’ ‘할아버지’ "이쪽으로 오세요."라고 하니, 마음속으로부터 불길이 솟아오릅니다. ‘지가 나를 언제 봤다고 아버님이야?’ ‘내가 아직 이렇게 팔팔한데 어르신이라니’, 하는 마음에 분노가 치밀어오르기도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서비스 빵점에 맛도 별로인 음식점에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쯧쯧쯧쯧, 음식 맛이라고는...보아하니 곧 문 닫겠군.’ 힘든 존재로 인한 괴로움도 만만치 않습니다.
나를 지속적으로 힘들게 하는 존재를 향해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마음까지 먹습니다. ‘저 사람이 팍 꼬꾸라졌으면’ 더 나아가서 이런 악담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귀신은 뭐하나 저 사람 빨리 안 데려가고.’
그런데 이런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간곡히 타이르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제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그간 얼마나 많이 누군가를 향해 성을 냈는지 모릅니다. 그간 셀 수도 없이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향해 바보 멍청이라고 외쳤는데, 불붙는 지옥이라니 이거 어떡하면 좋습니까?
새 포도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관행이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집어놓으셨습니다. 그간의 유다 관습에 따르면 살인자는 사형에 처해져야 했습니다. 짐승의 목숨을 해친 사람은 살아있는 짐승으로 되갚아야 했습니다. 동족의 팔을 부러트린 사람은 자신의 팔도 부러트리게 해야 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이 자연스럽게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사랑의 율법을 선포하십니다. 죽음에는 죽음, 행위에 상응하는 보상과 처벌의 균형은 더이상 예수님 앞에 유지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안하신 사랑의 율법에 따르면 마음속에 있는 생각 자체가 이미 처벌과 심판의 대상입니다.
남을 혐오하고 경시하며 배척하는 마음, 그것은 이미 살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살인자인 것입니다.
미움과 분노, 대립과 불목이 있는 공동체는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데 합당치 않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드리는 전례는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힘겹지만, 다시 한번 원수 사랑이라는 그 힘겨운 과제를 새롭게 시작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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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Ks_sg0wKG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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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멈추는 때 : 나쁜 놈이 아니라 아픈 놈으로 보일 때>
대한 신경정신의학회 조사 결과 한국 성인의 50%가 분노 조절 장애를 겪고 있고 이 중 10%는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결과를 내어놓았습니다. 왜 우리나라는 분노 조절을 잘 못 하는 나라가 되었을까요? 대부분은 부모 때문입니다.
‘응답하라 1988’ 중에 언니랑 생일이 3일 차이라 매번 언니 생일날 생일파티 하는 덕선이 화를 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언니가 불은 케이크 초를 덕선이 나이만큼 빼고 다시 초를 붙이려 합니다. 케이크값을 아끼려는 부모의 마음이고 부모는 아이가 이 정도는 이해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덕선이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만 무시한다고 분노합니다.
이때 부모의 반응은 정말 미안한 마음입니다. 분노에 분노로 맞대응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다면 아이는 더는 부모에게 마음을 터놓지 않을 것입니다. 분노를 삭이다가 누군가에게 터뜨릴 것입니다.
사흘이 지난 뒤 덕선의 아버지는 케이크를 사서 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짜잔, 우리 딸 언제 이래 커버렸을까? 허허. 아빠가 미안하다. 잘 몰라서 그래. 이 아빠가 태어날 때부터 아빠가 아니잖아. 아빠도 아빠가 처음인디. 그니까 우리 딸이 쪼까 봐죠, 응?”
이때 덕선의 표정은 다시는 부모에게 화를 내지 않겠다는 표정입니다. 그리고 정말 화를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부모가 화를 내니까 자녀가 보고 배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먼저 화가 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울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화를 안 내려는 사람은 바리사이에 속하고 화가 안 나게 하려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에 속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20,22)
아예 형제들에게 원망을 품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 상태에서 제물을 드리고 성체를 영해 봐야 소용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20,23-24)
하지만 살다 보면 어떻게 화가 날 일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화가 나는 원인이 ‘나의 이익’ 때문임을 안다면 화가 덜 날 것입니다. 화를 내는 이유가 정말 상대를 사랑해서일까요, 아니면 손해를 보려 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화를 내지 말라는 이유는 화 자체가 이기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기적이면 상대도 그런 사람으로 보여 화가 나는 것입니다. 시선을 바꿔야 합니다.
김미경 강사의 아들은 어머니가 잘나가는 것에 비해 매우 소심하고 소침해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중학생 때 학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학교 출석 일수가 부족하여 빨리 자퇴하지 않으면 퇴학 처리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며 어머니는 울며 겨자 먹기로 아이를 자퇴시켰습니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 3개월 남겨놓고 음악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학원에 보내주었더니 예고에 가겠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피아노 전공이어서 잘 압니다. 다른 아이들은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쳐도 예고에 들어가기 힘든데 어떻게 지금 건반을 처음 두드리는 자신이 예고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더 말이 안 되는 것은 아이가 악보를 전혀 보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3개월 동안 한 곡의 악보를 외워서 결국엔 예고에 합격하고 맙니다. 하지만 1년을 버티더니 고등학교도 계속 버틸 수 없었습니다. 워낙 기반이 안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자퇴하고 폐인 생활을 합니다.
아들은 친구들과 놀다가 새벽 4시에 들어와 몰래 컵라면을 방에서 먹곤 하였습니다. 그런 생활을 무려 5년이나 했다고 합니다. 그걸 보는 아버지는 화가 끓어오릅니다. 하지만 엄마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새벽 4시까지 기다렸다가 아들에게 따듯한 밥을 해 주었습니다. 남편이 화를 버럭 내었습니다. 이때 김미경 강사는 남편 방으로 따라 들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 눈에는 얘가 나쁜 애로 보이겠지만, 내 눈에는 아픈 애야. 한 번만 또 버럭 하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이렇게 어머니가 자신을 믿어주자 아이가 들어오는 시간이 빨라졌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자존감을 되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일본 여행을 떠나보겠다고 합니다. 자기 손으로 자기 먹을 것은 벌어보겠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어머니는 기꺼이 엄마는 기쁜 마음에 돈을 대줍니다. 아이는 일본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언어 시험도 치릅니다. 손톱이 빠질 정도로 박스 나르는 일 하다가 이젠 햄버거 가게에 취직합니다.
그곳에서 어떤 누나를 알게 되었고 그를 성당으로 이끌었습니다. 그 누나는 한국과는 다른 일본의 입시제도에 관해 설명해줍니다. 어떤 교수의 마음에 들면 그 학교에 입학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보를 보지 못하는데도 피아노 교수를 하는 일본 교수를 만납니다.
그 교수는 악보를 볼 줄 모르는 이유 중 하나는 청각이 발달하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줍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가져오면 대학에 입학시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국에 급히 들어와 검정고시를 보고 간신히 통과합니다. 어머니는 아이 반 친구였던 이들을 초대하여 집에서 졸업식을 해 줍니다. 상장도 열다섯 개나 준비합니다. 아이는 상장 다섯 개를 받을 때부터 울기 시작합니다.
일본으로 건너가 음대에 들어간 아들은 하루에 6시간씩 피아노를 연습합니다. 그리고 대학교 4학년 정도나 되어야 인정받는 수준까지 올라갑니다. 기쁨에 차서 엄마에게 돌아옵니다. 일본 여자 친구와 함께.
그녀는 ‘어쩌다 어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아들의 편지를 읽어줍니다. “엄마,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엄마 생각 정말 많이 했어. 근데 나는 엄마 생각하면 제일 속 썩였던 중학교 때가 생각난다. 엄마 그날 생각나? 내가 중학교 때 우리 집 부엌에 있던 식비 5만 원 없어진 날 말이야. 누가 가져갔냐고 이모도 고모도 다 내가 가져갔다고 말했어. 나 그때 정말 화가 났어. 모두가 나를 무시하는 거 같았거든. 왜 나를 무시하냐고 길길이 날뛰면서.
엄마 나 그날 내 정신이 아니었나 봐. 책상에 있는 책 다 집어던졌고, 그래도 분이 안 풀렸어. 그때 엄마가 강의 갔다가 돌아오셨는데, 엄마가 내가 던지는 책을 온몸에 맞으면서 걸어오더라. 엄마, 그때 많이 다쳤지. 진짜 미안해. 그때 엄마가 나 안고 말했어.
‘엄마는 너 믿어, 우리 아들 안 가져간 거 알아. 누가 너한테 가져갔다고 그래?’ 엄마만 내가 돈을 안 가져갔다고 믿어줬어. 진짜 고마워 엄마. 근데 엄마 있지, 그 돈 내가 가져간 거 맞아. 진짜 어이없지 엄마. 근데 엄마, 엄마만 그거 알아줬잖아.
내가 돈을 가져간 것보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게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 집에 엄마 한 사람뿐이었어. 엄마만 나 믿었거든.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 말 아무도 안 듣고 엄마 말만 듣고 큰 거야. 그래서 내가 항상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었던 거야. 엄마 땜에. 엄마는 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고 사랑하는 내 인생의 파트너이자,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는 나를 살려준, 나를 인정해 준 내 인생의 첫 번째 은인이야. 엄마 사랑해!”
김미경 씨는 아이를 바라볼 때 나쁜 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아픈 놈으로 보았습니다. 중학교 때 이미 “엄마,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어! 나 진짜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거든. 근데 나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것을 마음으로 듣고 있었습니다.
김미경 강사도 아들이 중학교 자퇴했을 때 처음에 한 이 말이 가장 후회가 된다고 합니다. “나 어떻게!” 그리고 빨리 후회하고 상대를 나쁜 놈이 아니라 아픈 놈으로 보려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나쁜 놈이 아니라 아픈 놈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의사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의사라는 믿음을 가지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이제 ‘나 어떻게’에서 ‘너 어떻게’로 건너갑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사랑을 내 안에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참조)
의사가 아픈 사람을 보고 화를 내는 일은 없습니다. 만약 화를 낸다고 한다면 그건 상대가 더 나빠져서 자기 명예에 손해를 끼칠까 봐 그런 것입니다. 사랑하면 상대가 ‘아픈 놈’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화가 안 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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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살인하지 말라>
예수님의 말씀은 살인뿐 아니라 이웃에게 분노하는 것까지 금하신다. 즉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적대시하거나 분노를 품어서도 안 된다고 하신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분노는 살인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해하는 것은 분노에서 생긴다. 이유 없이 성내는 사람은 누구든지 생각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22절) 하셨다.
자기 형제에게 “바보”, “멍청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혀를 잘 길들여야 한다. 사람의 혀를 아무도 길들일 수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길들여 주실 하느님께로 피신해야 한다. 말이나 소, 낙타, 코끼리, 사자를 길들이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이처럼 인간이 길들려면 하느님이 필요하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모든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분노를 버리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형제들 사이의 사랑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알려준다. 그러기에 예물을 바치려 할 때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그와 화해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의 예물을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는 그가 아벨을 사랑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미워했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할 때”(23절) 라는 말은 주님께서 마땅히 당신이 받으셔야 할 영광은 제쳐 놓으시고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이것은 형제와 화해와 사랑이 가장 좋은 예물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너를 고소한 자와 타협하여라.”(25절) 우리를 고소하는 자는 육체의 욕망과 악덕에 맞서시는 성령이시다. 바오로 사도는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갈라 5,17) 그러므로 우리의 현세의 삶이라는 여행에서 그분과 함께 늘 살아가고 모든 일에서 그분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분과의 영원한 친교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언제나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웃과의 불목은 그 이웃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 때문에 그를 창조하신 하느님과도 불목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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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ㄴ)
이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살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위선자가 되지 마라.”, “하느님께서 보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에게만 보이려고 하는 위선자가 되지 마라.”,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척하는 위선자가 되지 마라.”> 여기서 ‘의로움’이라는 말은, ‘올바르고 진실한 신앙생활’을 뜻하는 말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은 ‘의로움’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위선자들은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았다고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위선자는, 껍데기는 고급 승용차인데 속에 엔진이 없는, 거짓 자동차 같은 사람입니다. 겉모습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속과 겉을 모두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1-22)
위선자들은 속으로 무슨 마음을 품고 있든지 간에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살인하지 마라.”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증오하고, 화를 내고, 모욕하고, 폭행하면서도, 죽이는 것은 아니니까 십계명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죽이는 것만 살인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모두 십계명 제5계명 위반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살인하지 마라.’라는 계명은, 생명이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지 말라는 계명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그 뜻은 곧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거스르는 일은 제5계명을 위반하는 죄가 됩니다. 작은 상처를 입히는 일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재판, 최고의회, 불붙는 지옥’은 점층법을 사용한 표현으로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을 뜻합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계명을 겉으로만 지키지 마라. ‘마음으로부터’ 지켜라.”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사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네가 한 말에 따라 너는 의롭다고 선고받기도 하고, 네가 한 말에 따라 너는 단죄받기도 할 것이다.”(마태 12,34.37) 이 말씀은 ‘선한 말’만 하면 선한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뜻이 아니라, ‘선한 마음’으로 ‘선한 말’만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악한 마음을 감추고 겉으로만 선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위선자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이 말씀은 ‘용서하여라.’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용서를 청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준 피해와 상처는 생각하지 않고서, 자기가 받은 피해와 상처만 생각하고, 그래서 자기가 용서해야 하는 일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나는 하느님 앞에서는 죄가 없다는 말을 못 하지만, 사람들에게 죄를 지은 적은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위선입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나 행동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이 있긴 하겠지만, 그렇게 천사 같은 사람이라면 “나는 이웃에게 죄 지은 적이 없다.”라는 말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라는 말씀은, 형제와 화해하지 않는 상태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위선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먼저’라는 말 때문에 하느님보다 이웃이 먼저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하느님을 섬기는 일과 형제와 화해하는 일은 ‘동시에’ 실천해야 하는 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내가 먼저 가서’ 형제에게 용서를 청하고, ‘내가 먼저’ 화해하려고 노력해도 그 형제가 용서와 화해를 거부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경우에는 거부하는 쪽에게 책임이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거부당하더라도 ‘내가 먼저’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5-26)
이 말씀은,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고소한 자’는 나 때문에 상처받은 피해자일 수도 있고, 그 사람의 수호천사일 수도 있습니다.(마태 18,10) ‘법정’은 ‘하느님의 법정’이고, ‘타협’은 ‘회개’와 ‘화해’를 뜻합니다. 우리 인생은 ‘법정으로 가는 도중’입니다. 회개한 사람의 인생은 상을 받으러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회개가 부족하거나 회개를 거부한 사람의 인생은 심판과 처벌을 받으러 가는 길입니다. (결국 심판이란, 지금 각자 자기가 선택하는 셈입니다.)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게 되면 회개할 기회가 없으니, 회개는 ‘지금’ 해야 합니다.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이라는 말씀은, 보속을 ‘완전히’ 마쳐야만 연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만큼 했으면 충분하다.”라며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지 말고, 끊임없이 회개와 보속을 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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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요즘은 일기예보가 정확한 편입니다. 스마트폰을 보면 1주일간의 일기예보를 볼 수 있습니다. 일기예보를 보면서 잔디에 물을 주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운동 약속도 일기예보를 보면서 취소할 때도 있습니다. 특히 겨울에 눈이 온다는 예보가 내리면 될 수 있으면 외출을 자제하기도 합니다. 일기예보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일기예보는 자연의 현상이며 슈퍼컴퓨터는 기상의 흐름을 예측합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하지 않았던 고대에는 날씨를 예측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많은 제사장이 기우제를 드렸고, 임금도 기우제를 드렸습니다. 농사는 천하를 다스리는 근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엘리야는 바다 쪽을 바라보면서 비가 올 것을 예측하였습니다. 성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엘리야가 기도하자, 하늘이 비를 내렸다.’ 지금과 같은 일기예보 시스템이 없는 시대에는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기예보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형제와 다툼이 있으면 먼저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율법과 예언서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라는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바라는 만큼 남에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제물을 바치려고 할 때 형제와 다툰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찾아가서 화해하고 제물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특별한 능력으로 놀라운 업적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은 자연현상을 거스르면서 물 위를 걷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은 풍랑을 잠재우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신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것입니다. 베로니카가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린 것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은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굶주린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당한 사람을 업고 여관으로 데려간 일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정성껏 제물을 제단에 바친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것입니다. 세리가 고개를 숙이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한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것입니다.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그저 한 말씀한 마시면 종이 나을 것이라고 믿음을 보인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것입니다. 아이티에서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신부님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필리핀에서 아이들에게 따뜻한 밥을 먹여주는 수녀님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은 무엇으로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신앙인은 외모, 능력, 재산, 명예, 권력으로 평가를 받지는 않습니다. 신앙인은 남을 비난하고, 욕하고, 원망하고,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은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희생했는지, 얼마나 봉사했는지, 얼마나 겸손했는지를 가지고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율법과 규율이 우리를 해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편리한 문명의 이기들이 우리를 편안하게는 하지만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해방해주고, 자유롭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하느님의 뜻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새로운 계명을 줍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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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의로움은 일차적으로는 하느님 율법에 대한 충실을 뜻하며, 근본적으로는 하느님 뜻에 대한 충실을 뜻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의로움’은 매우 중요한 낱말로, 예수님께서는 특히 산상 설교(마태 5─7장 참조)에서 이 말을 자주 사용하시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조건으로 ‘의로움’을 강조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5장 21절에서 48절까지 이어지는 구절은 ‘여섯 가지 대당 명제’라고 하는 구절의 첫 번째 단락으로서 “너희는 …… 하신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구절이 반복되면서, 구약 성경의 내용을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있는 말씀이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3; 신명 5,17)라는 십계명의 가르침을 심화하시며 형제에게 성내고 욕하는 것까지도 엄격하게 경고하십니다. 또한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껄끄러운 형제와 먼저 화해하고, 그런 다음 돌아와서 예물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들은 주님께서 우리의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들을 마치 훤히 다 알고 계시는 듯합니다.
우리의 부끄러운 현실과,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주님의 이 같은 요구에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의로움은 결국 ‘사랑’이라는 한 낱말로 모아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없이 부족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사랑이신 예수님과 일치할 때,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고 형제들과 화해하며 형제들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하늘 나라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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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분노와 업신여기는 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탈출 20,13, 신명 5, 17에 나오는 "살인하지 말라! ..."는 계명을 들어 당신의 뜻을 말씀하십니다.
즉, "살인하지 말라" 하였으나 예수님은 살인 뿐 아니라 이웃 사람에게 대해 분노하는 것까지도 금지하십니다. 다시 말해 살인은 하지 않거나 남을 때리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타인을 적대시하여 마음 속으로 분노를 품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찬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강조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분노란 어떻게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1) 밀짚에 타오르는 불길과 같이 빨리 타오르고, 빨리 꺼져버리는 것 (분노의 불길, 분노의 포도(존 번연)). 2)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으나 정착된 분노, 이것은 화해를 거절하는 분노, 복수하려고 마음에 품고 있는 분노입니다.(꽁하고 있는 것)
예수께서 여기서 말씀이 천국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분노를 거절하라는 것이며, 화해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버 1,20 에 "화를 내지 마십시오, 화를 내는 사람은 하느님의 옳은 일을 이룩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이 분노는 말마디로 변해서 사람을 상하게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분노는 말로 변해서 사람을 압박하였습니다.
또 "모욕의 죄"를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또, "게헨나에 들어가서 나오지 못할 세 종류의 죄인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자기 이웃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사람 ..." 여기서 "바보"(Raca) - 라는 말은 어리석은 천치, 우둔한 자, 몰지각해서 실수를 범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바보라는 말은 오만한 자가 상대를 무시할 때 쓰는 말입니다
(랍비에 대한 설화)가 있습니다 : "어느 인상이 좋지 못한 동행인이 지나가면서 랍비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랍비는 인사도 받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너는 바보다, 추한 놈같으니라구! 너희 마을 놈들은 너처럼 모두 징그러운 놈들이냐?!".... 통행인은 대답했습니다. ".... 나는 모릅니다. 나를 만드신 조물주에게 가서 물어보십시오, 그분이 만든 내가 왜? 이렇게 징그러운지를! ..." 했습니다.
결국 랍비는 그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보고 그를 만드신 조물주를 욕한 셈이 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내키지 않는 이웃을 욕하는 것은 똑같은 결과를 가져 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요약해서 보면, 살인은 안됩니다. 그러나 분노하는 것까지도 그리스도인은 안됩니다.
그러나 더 안되는 것은 타인을 멸시하는 것은 더 나쁘다는 말씀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보다 천국을 얻고자 하는 우리들은 그들보다 이런 행실에 있어 더 나은 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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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상일 요셉 신부님]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날에는 올바름이 무엇인지, 참된 올바름이 있긴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만큼 저마다의 처지에서 각자의 상대적 시각이 팽배해 있다고 보아집니다.
그래서 일치라는 것이, 화해라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고 보아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이 바라시는 올바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올바름, 그것은 바로 의로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의로움이란 무엇입니까? 워낙 그 의미가 심오하기에 한마디로 규정하기에는 충분하지 않겠지만 그것은 관계성 안에서의 올바름을 뜻하리라 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의 올바름이라고 보아야할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의 올바름이 하느님 앞에서의 올바름과 곧바로 연결되기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더욱 능동적으로 실천하여 나가라고 다음 말씀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이 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
상대적 시각에서 본다면, 내가 누구를 원망한 것이 없기에 올바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의로움이 형제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면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로움은 나 혼자만의 옳음을 지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의로움이란 나와 상대방 사이라는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이것이 다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관계성으로 확장되어감을 뜻하지 않나 싶습니다.
한 가정 안에서 보면, 부모님은 자식들을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서로 옳고 그름으로 일치가 되어 있지 않다면, 부모는 누가 옳고 그르다는 그 사실보다 서로 일치하지 못한다는 점에 더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우리의 의로움도 모두가 하나로 일치되어 하느님 사람으로 연결 지어지는 의로움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나와 너가 일치하여 하느님과 연결 지어 의로움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되도록 끊임없이 살피고 다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좀 전에 형제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면, 화해하라 하셨는데, 나의 옳음의 방식이 형제가 나를 원망하도록 만든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려 합니다. 그래서 설령 내가 형제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해도 나의 옳음이 선택한 길이 때로는 형제의 옳음의 방식에 있어서는 원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자신이 아무리 옳다고 생각하는 길이라 해도 하느님 보시기에는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기에, 이것은 관계성 안에서 화해해야 하는 상황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옳음은 모두를 살리시는 옳음입니다. 나의 옳지 않음과 의롭지 못함도 당신의 사랑을 더욱 크게 볼 수 있는 도구로 쓰십니다.
이것은 태초부터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부족함이 없는 한결같은 사랑이시기에, 가능한 것일 겁니다. 사람이 어떻게 변해도 끝내 당신의 사랑 안에 있는 자녀로써 보고 계신다는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당신의 사랑에 우리가 일치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기에 의로움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그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눈이 사람을 보시는 하느님의 눈과 닮으려 함이 의로움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닮으려함이 의로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닮으려는 열망으로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에게 나의 옳음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옳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화해가 하느님께 바치는 우리의 참된 예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 화해는 하느님 사랑에 일치하기 위하여 우리가 마지막까지 답해야 할 사랑의 한 닢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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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와 나>
마태오 5,20ㄴ-26 (화해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너와 나>
너는
나의 너이기에
앞서
너의 너입니다
나는
너의 나이기에
앞서
나의 나입니다
네가
나의 너가 되기 바란다면
앞서
나는
너의 나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너의 나가 되기 바란다면
앞서
너는
나의 너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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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이른 아침 몸을 씻으면서 육체적인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인데 마음보다 육적인 것에 집착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외적인 더러움보다 지저분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탐하고 즐겼던 모든 것에 주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육적인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을 거스르게 마련인데 양다리 걸치기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잘해 보려고 하면 남의 단점이 유난히 잘 보이게 됩니다. 사람이 왜 저럴까?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하나!’하면서 사람을 판단하고 마음에는 화를 쌓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도 성장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늘 나는 잘하는데 남이 따라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단계를 넘어서서 남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도 여전히 탓을 남에게 돌립니다. 그러다 결국은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 덩어리가 되어 남의 입에 오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바보’라고 하는 자,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실까? 사소한 것을, 소홀히 하면 결국은 큰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마음을 다스려라.’'뿌리를 다스려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미움이 생기고 미움이 커지면 더 큰 죄를 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먼저 마음을 단속해야겠습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온갖 해악이 미치길 은연중에 바라기 마련입니다. 심지어는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첫째 편지 3장 15절에서는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행위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싹트고 있는 화에 대해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실 형제와 이웃 간의 관계가 중요하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서지 않고는 그 관계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흠 없는 나를 가꾸고 주님의 마음으로 빛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도 의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의롭습니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되새겨 봅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마태5,20). “능가하지 않으면!”, 세상의 의로움을 능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의로움의 징표는 화해입니다. 하느님과의 화해를 원하시거든 먼저 사람과 화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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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
<능가하는 의로움!>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이란,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는 율법 규정 그 자체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런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살인 금지 규정을 능가하는 것들, 곧 살인에 이르게 하는 분노를 잘 다스려야 하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5,23-24)
살인에는 '육체적 살인'도 있지만, '정신적 살인'도 있습니다. 정신적 살인은 '생각과 말로 너를 죽이는 행위들'입니다. 뒤에서 너에 대해 험담하거나 악담하는 행위들이고, 성을 내고 바보라고 하고, 멍청이라고 말하는 행위들입니다.
우리의 이런 살인 행위들로 인해 많은 교우들이 지금 냉담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육체적 살인 금지를 뛰어 넘어 정신적 살인까지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입으로 나오는 것들, 곧 마음 안에서 나오는 것들이 너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무심코 툭 던진 말 한마디가 때로는 너에게 비수로 꽂히기도 합니다.
비수를 꽂아놓고도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양 무관심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나의 모습은 어떤가? 내 마음 안에서 흘러나오는 나의 생각과 말은 어떤가? 나의 행위들이 너에게 힘이 되어주고, 너를 살리는 행위들인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복음 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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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다른 사람의 말에 큰 상처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이 듣기에는 별문제가 없는데도, 큰 모욕을 당했다며 그 사람을 향해 심한 욕을 하기도 하고,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자신이 받은 상처의 아픔으로 인해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이 경우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나의 말과 생각을 24시간 쉬지 않고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나’입니다. 그런 내가 자신에게 부정적인 말과 생각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남의 말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서 자기를 더 사랑하지 못하게 되고, 남에 대해서도 너그럽지 못한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자기에게 부정적인 말만 하면 똑같이 부정적인 말로 상대하면서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나도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도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를 향한 진심 어린 배려가 필요합니다.
긍정적인 말, 사랑 가득한 말, 용기를 주는 말…. 이런 말들이 나의 자존감을 높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너그러워질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배려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배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영국 작가 토마스 플러는 말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친구가 되어라. 그러면 다른 이들 또한 그러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에 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지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솔직히 ‘이 말씀은 너무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보’나 ‘멍청이’는 종교적인 의미의 말이었습니다. ‘바보’는 (머리가) 빈 놈이라는 뜻으로 생각이 없어 하느님을 따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멍청이’는 하느님도 모르는 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해서, 똑같이 잘못함으로 응답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의로움’은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철저하게 ‘사랑’에 기반하십니다. 사랑을 잃어버리는 모든 말과 행동은 의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반복되면서 하느님에게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화해라는 사랑의 실천이 지금 당장 이루어집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과 화해하면서 좋은 말들을 많이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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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 “참되고 단순하고 절박한 삶” -
“부끄럽다.”
“두렵다.”
때로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을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부끄러워할 줄 알고, 두려워할 줄 알아서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두려워할 줄 모르는 뻔뻔한 무지한 지도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제 갑작스런 수녀님의 부음을 듣고 의아했습니다. 평소 건강해 보였던 수녀님의 선종 소식이 궁금해 카톡으로 알아봤습니다. 선종하신 수녀님의 환히 웃는 사진과 전해온 메시지입니다.
“치매로 고생하시다가 5월말에 코로나 감염되어 회복하지 못하고 선종하셨습니다.”
충격적인 짧은 메시지를 받고, 새삼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자문했습니다. 답은 하나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모토요 좌우명으로 많은 분들이 공감하는 이 말씀대로, 하루하루 죽는 그날까지 오늘 지금 여기서 환상이나 거품없이 본질적 깊이의 투명하고 절박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선물입니다. 하루하루가 새 하늘 새 땅입니다. 다음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시 마지막 연은 제가 날마다 꼭 붙잡고 사는 고백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이 시간 태어나기 올해로 만 10년입니다. 2012년 수도원 설립 25주년 기념 축제 때 낭송했던 시입니다. 10년 동안 참 많은 분들과 나눴고 면담고백성사때는 보속으로 읽도록 했을 때 많은 분들이 울었습니다. 뭔가 가슴 뭉클하는 감동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참되고 단순하고 절박하게 살고 싶은 것은 하느님을 찾는 삶을 갈망하는 이들의 공통적 욕구일 것입니다.
5월 성모성월도 아름다웠지만 6월 예수성심성월도 초록빛 생명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계절의 연속입니다.
어제 새벽 밤하늘도 유난히 청명했고 흡사 푸른 하늘의 흰구름이 푸른 바다에 섬처럼 생각되었으며 저절로 흘러나온 “하느님”이란 고백시입니다.
“언제나
하느님 생각하며
사랑하며
보고 살라고
늘
눈들면 어디나 하늘이다
구름은 섬
푸른 하늘은 바다
바다가
보고 싶을 때는 하늘을 보고
하느님이
보고 싶으면 하늘을 보네
늘봐도
늘 좋고 새롭고 그리운 하느님이시다.”
오늘 말씀을 깊이 묵상하다 보니 떠올랐던 생각들입니다. 깊이 들여다보니 삶의 진실성, 단순성, 절박성에서 예수님과 엘리야가 서로 꼭 닮았습니다.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서 참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하느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엘리야에게서 하느님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요? “제로0” 허무일 것입니다. 하느님 없이 자기를 잃고, 희망을 잃고, 허무의 유령같은, 좀비같은 헛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추측컨데 예수님은 엘리야 예언자를 롤모델로 삼았음이 분명합니다. 엘리야의 평생 삶이 참 진실하고 절박했습니다. 어제 카르멜 산에서 450명의 바알 예언자들과 목숨을 건 싸움은, 기도는 얼마나 진실하고 절박했던지요! 오늘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뭄이 끝나고 폭포수같은 비가 내리기 까지 엘리야의 간절한 몸의 기도가 참 절박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오늘 제1독서 장면이 흡사 그림같이 선명합니다. 카르멜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으로 몸을 수그리고 얼굴을 땅에 양 무릎 사이에 묻고 자기 시종에게 바다쪽을 살펴보라고 지시합니다.
엘리야는 무려 일곱 번을 바다쪽을 살펴보라고 지시하며 기도하다가 마침내 일곱 번째 시종의 반가운 답을 듣습니다. “바다에서 사람 손바닥만 한 작은 구름이 올라옵니다.” 그러는 동안 잠깐 사이에 하늘이 구름과 바람으로 캄캄해지더니 큰비가 내립니다.
아, 얼마나 통쾌한 장면인지요! 엘리야의 목숨을 건 절박한 기도가 하늘에 닿아 하느님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한편 엘리야는 주님의 손이 자기에게 내리자 아합을 앞질러 이지르엘 입구까지 뛰어 갑니다. 주님께서 늘 엘리야와 함께 했음을 봅니다.
엘리야를 능가하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참되고 단순하고 절박한 가르침입니다. 두 분 다 늘 목숨을 건 참되고 절박한 삶으로 하느님을 감동시켰던 분들입니다. 다음 말씀이 어제 복음 내용을 분명히 밝혀 줍니다.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참으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과는 다른 하느님의 율법에 대한 새로운 충실성, 더욱 절박한 충실성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첫 대당명제입니다. 외적인 살인 행위를 넘어 그 마음의 뿌리를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권위를 지니신 절박한 어투의 명령입니다. 살인의 근본뿌리인 간접살인과 같은 성냄을, 형제에 대한 “바보!” 또는 “멍청이!”라는 멸시에 찬 말을 없이하라 하십니다. 바로 이들의 뿌리인 마음부터 정화하라는 것입니다. 멸시나 차별이 간접 살인의 큰 죄입니다.
어제 순간 실수로 면도날에 손가락 살을 약간 베이자 피가 나왔습니다. 면도날에 살처럼, 면도날 같은 예리한 말들에 얼마나 많은 마음들이 상처를 입는지요! 간접 살인과 같은 언어 폭력에 마음들이 받는 상처도 많을 것입니다.
이어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에 앞서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즉시 화해하고 와서 예물을 바치라는 말씀도, 또 재판에 넘겨지기전 고소한 자와 지체없이 타협하라는 말씀도 참 단순하고 절박하게 들립니다. 때를 놓치지 말고, 회개는 물론 지혜롭게 분별하여 즉시 조치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지혜와 사랑에 기초한 지체없는 결단과 실천의 절박한 삶이 바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삶의 자세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마태 5장에서 7장까지 계속되는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바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구체적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하루하루 당신 뜻을 실천하며 참되고 단순하고 절박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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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WkGGoWrG18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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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화해의 말씀을
다시 듣는다.
화해의 문을
여시는
주님이시다.
돌아보면
화해가 필요한
형제들이 많다.
형제와의
화해는 곧
나 자신과의
화해이다.
서로를 만나는
화해의 값진
시간이다.
서로에게 건네는
진심어린 마음이
우리의 인격이다.
산다는 것이
마음과 마음의
만남임을 다시
깨닫게된다.
화해의 마음을
먹고 걸어가는
우리들 새로운
삶이다.
부딪힘과
실망을
주님께
봉헌한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
회심의 마음이
있다.
모든 길의
시작에는
회심이 있다.
함께 살아가게
하는 회심과
화해이다.
화해없이는
평화 또한 없다.
서로
화해하는
새벽미사의
참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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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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