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즘은 허구다 - 알튀세르와 브라만테
원근법은 눈속임에 불과하다
이탈리아의 밀라노에는 시를 대표하는 밀라노 대성당(Milan cathedral)에서 불과 100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산타 마리아 프레소 산 사티로 성당이 있다. 밀라노 대성당에 비해서 규모나 건축사적인 면에서 그 비중이 크지 않기에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이 성당 역시 15세기에 지어진 매우 오래된 역사적 건물 중 하나다.
그러나 브라만테(Donato Bramante, 1444~1514)가 설계한 이 건축물에는 매우 흥미로운 특징 한 가지를 찾을 수 있다. 일반적인 성당의 구조를 보면 앞부분에 사도들이 의식을 진행하는 제단부가 있으며, 그 뒤로 앱시스(apsis)라 불리는 텅 빈 공간이 존재한다. 사제들이 있는 제단 뒤에 빈 공간은 시각적으로 보자면 천상의 세계 혹은 무한한 세계라는 느낌을 주며, 사제들은 무한한 신의 세계와 인간을 연결하는 천상의 메신저처럼 나타난다.
브라만테, 산 사티로 성당 Santa maria presso san satiro
산 사티로 성당의 제단 뒤쪽에는 앱시스 공간을 낼 수 없었다. 브라만테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신도들 좌석에서 볼 때 빈 공간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그림을 그렸다.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착시를 일으키는 원근법을 과학적 발견으로 믿었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원근법이 인간의 눈에만 작용하는 왜곡된 묘사에 불과하듯, 인간을 이론의 중심에 놓는 이론은 과학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산 사티로 성당은 외부의 도로 탓에 이러한 앱시스 공간을 내기가 불가능하였다. 말하자면 교회의 제단 뒤에 빈 공간 없이 편편한 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것이다. 브라만테는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기발한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이 해결방안이란 비록 제단 뒤의 벽은 편편하게 가로막혀 있지만 신도들의 좌석에서 볼 때는 마치 빈 공간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마치 반원형의 공간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벽에 그림을 그렸다. 이는 르네상스 회화의 산물인 원근법이 창출한 가장 극적인 효과 중 하나가 아닐까. 원근법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빈 공간까지 만들어낸 것이다.
당시 예술가들은 원근법을 가장 위대한 과학적 발견 중 하나로 믿었다. 원근법이란 엄밀한 기하학적 측량과 계산에 의거하여 평면의 벽에 현실과 똑같은 3차원의 공간을 표현할 수 있는 과학의 산물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란 원근법이라는 과학적 원리가 예술에 적용된 것이므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예술가이자 동시에 과학자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에게 ‘원근법=과학’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고 있었지만, 후대의 학자들이 보기에 이는 소박한 믿음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도상해석학(Iconology)’이라는 미술해석학의 한 방법론을 창안한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 1892~1968)는 원근법을 과학이 아닌 일정한 역사 시기에 사용된 하나의 표현 방식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파노프스키의 주장이 더 흥미로운 사실은 원근법의 발견이 르네상스 예술을 관통하는 휴머니즘(humanism, 인간주의) 원칙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휴머니즘을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매우 이상적인 원칙으로 생각하며, 이를 어떤 당파적 이데올로기도 넘어선 궁극적 가치로 믿는다.
그러나 파노프스키에 따르면 휴머니즘이란 모든 것을 인간의 잣대로 환원하는 원칙으로서, 예술사적으로 볼 때 원근법에 의해서 현실을 재현하는 15세기의 협소한 예술 원칙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원근법이란 과학이 아닌 단지 인간의 눈에만 유효한 일종의 눈속임이며, 이 원근법이 과학으로 통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인간의 잣대로만 환원시키고자 한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휴머니즘에 대한 파노프스키의 폄하(?)는 20세기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의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과 사회철학의 형태로 공명하는 듯하다.
마르크스주의를 구조주의로 재해석한 것으로 잘 알려진 알튀세르의 사상적 기반은 마르크스주의에서 휴머니즘을 제거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인간 소외와 그로부터 해방이라는 이른바 인간해방을 외치는 휴머니즘의 관점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가 지닌 진정한 과학적 의미를 왜곡하는 ‘왜곡된 마르크스주의’라고 주장하였다. 원근법이 세상을 과학적으로 묘사하는 방법이 아닌 인간의 눈에만 작용하는 왜곡된 묘사에 불과하듯이, 인간을 이론의 중심에 놓는 어떤 이론도 과학과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해방을 외치는 이러한 비과학적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적 세계관으로부터 이탈하여 마르크스주의를 또 다른 이데올로기 속으로 몰아넣을 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원근법은 눈속임에 불과하다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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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와 우발성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는 이런 마주침의 문제를 깊이 고민한 철학자이다. 그는 떨어지는 비를 보면서 니콜라 말브랑슈의 의문을 떠올린다. “왜 바다에, 큰길에, 해변의 모래사장에 비가 오는가?” 정작 비가 필요한 곳은 농부들이 애타게 비를 기다리는 논밭인데 왜 이곳엔 비가 오지 않고 다른 쓸데 없는 곳에만 비가 주구장창 오는 걸까? 알튀세르가 주목한 점은 “우연한 순간에 인간이 비와 마주칠 수 있고 아니면 전혀 마주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p.92). 이것이 바로 우발성(contingency)이다. 만나고 싶다고 다 만나는 것이 아니다. 우발성은 접촉이나 마주침이라는 사건을 전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