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29.月. 비
떠나는 사람, 만나는 사람.
한 차례 연장을 했던 한 주일이 지나고 주방장님의 근무가 오늘로서 끝이 난다. 그래서 오늘은 영업을 조금 일찍 끝내고 주방장님의 환송파티를 하기로 한단다. 손님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부산한 점심시간에 비해 저녁시간 홀의 분위기가 한가하다. 하기야 원래 토요일은 점심시간이 평일의 그것보다 더 길고 대부분 저녁시간보다 더 붐비기 마련이다. 홀이나 주방이나 사장님 눈치를 슬슬 살피다가 사장님의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서둘러 문을 닫고 우리들의 만찬 준비를 한다. 튀기고, 굽고, 볶고, 끓이고, 무쳐놓았던 것들을 식탁 위로 옮기고 사장님이 특별히 내오신 양주 두 병이 곁들어진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 지난 10년 동안의 세월이 주방장님에게는 40대라는 인생의 황금기였고, 요리사라는 새로운 세상으로의 전환점이었으며, 자신의 식당을 마련하기 위한 인고의 시간이었다며 주방장님은 권하는 술을 사양하는 법 없이 연거푸 들이킨다. 술을 권하는 사장님의 붉은 눈가에도 지난 10년의 세월이 잔주름 되어 이리저리 흔적을 남기고 있다. 평소에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 사장님께서도 오늘 밤에는 술을 사양하지 않는다. 10년 동안 자신이 가르치고 칼을 함께 나누어 쓰던 동지가 자신의 이름을 건 식당을 이루어 독립을 해 나가는 마당에 가슴을 스치는 감회가 없을 수 없는 모양이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웃으며, 한바탕 소란스러운 회포를 나누고 나서 각자가 준비한 선물을 주방장님께 드린다. 사장님은 주방장님이 평소 욕심을 내던 칼을 선물하시고, 홀에서는 준비한 봉투를, 주방에서는 주방장님의 양복 두 벌과 자전거 한 대를, 그리고 나는 지난 한달 동안 주방장님께 지도를 받았던 요리수업을 정리해서 일지형식으로 쓴 요리일지에 내 글을 덧붙여 드린다. 2차는 가까운 노래방에서 시간을 갖기로 하고 모두 먼저 자리를 옮긴 뒤 나는 대충 뒷정리를 하고 나서 노래방으로 다시 합류하기로 한다.
어떤 3월의 밤은 봄이라 말하기에는 여태 완강한 겨울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음식물 쓰레기를 비닐자루에 담아 끌면서 주방 뒷문으로 나가 뒷마당을 가로지르면 구석진 곳에 쓰레기장이 있다. 어두운 뒷마당에 아직 차가 한 대 주차되어 있고 누군가가 차 안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저 차는 우리와 뒷마당을 같이 사용하고 있는 옆 건물 일층에 있는 약국의 약사의 차일 것이다. 토요일 밤인데 오늘 퇴근이 좀 늦나보다고 생각을 하며 그 옆을 지나 쓰레기장에 음식물 쓰레기 자루를 바싹 붙여놓고 돌아서서 주방을 향한다. 그 때 차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여자의 목소리가 귀로 슬며시 달려온다.
“저, 여보세요. 아저씨!”
“네? 저 말입니까?”
“네. 저, 그런데 차가 시동이 안 걸려서요. 조금 전에 퇴근하려고 나와 보니 일단 전조등이 올려져 있는 것이 아마 하루 내내 등이 켜진 채로 있어서 배터리가 방전되었나 봐요. 토요일이라 그런지 서비스센터로 전화를 해도 연결이 안 되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요.”
“아, 네. 저, 약국 약사님 맞으시지요?”
“네.”
“저번에는 고마웠습니다. 약국에서 약사님이 직접 약을 발라 준 건 또 처음이었거든요.”
“아, 그 때요. 베인 상처는 다 나으셨어요? 칼에 베인 자리가 피가 너무 나서 약 바르고 반창고 발라드린 것밖엔 별거 없었는데요.”
“덕분에 거의 다 나았습니다. 그런데 차 기어가 수동 변속입니까, 오토형입니까?”
“기어요, 수동변속인데요. 왜요?”
“다행입니다. 오토형 같으면 서비스 카가 와야만 되는데 수동 변속이라면 될지 어떨지는 몰라도 시도는 해볼 수가 있거든요. 우선 차를 밖으로 빼야 하니까 차에 타서 핸들을 돌리세요. 내가 뒤에서 밀 테니 기어를 중립에 놓고요.”
“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건데요?”
“그 게 방법이 다 있습니다. 이래 보여도 제가 군에서 수송대 근무를 했거든요.”
“혼자 차를 밀려면 힘드실 텐데요. 같이 밀게요.”
“걱정 마시고 차에 타세요. 제가 이래 뵈도 공병대에서 힘꼴이나 썼던 사람이거든요.”
“방금 전에는 수송대 근무라고 하신 것 같은데...”
“뭐 그렇다는 이야기이지요. 자, 설명을 잘 들으세요. 우선 밖으로 나가면 그대로 큰길로 나갈 겁니다. 이 시간에는 큰길이 한가할 테지만 그래도 맨 우측 차선으로 차를 붙이면서 밀고 조금 가면 내리막길이 나오거든요. 그럼 거기서부터 제가 차를 힘껏 밀면 차가 내리막이라 속도가 붙을 겁니다. 그러면 그 때 왼발로 클러치를 깊이 밟고 있다가 한순간에 클러치에서 발을 떼세요. 그러면 차가 꿈틀하고 시동이 걸리는 기미가 보이면 바로 악셀레이터를 오른발로 깊숙이 밟으며 기어를 빨리 중립에서 2단이나 3단으로 바꿔줘야 합니다. 아시겠죠? 전조등이나 라디오는 모두 꺼주시고 창은 열어놓으세요. 내리막길에서 속도가 붙으면 제가 신호를 할게요. 자, 그럼 갑니다. 영차, 영차.”
“자, 차가 잘 굴러 내려가지요. 영차, 영차. 조금만 기다리세요. 자, 왼발 떼세요!”
“쿨럭, 쿨럭, 쿨쿨 쿠르르...”
“안 걸렸네요. 다시 갑니다. 영차, 영차.. 왼발 떼세요!”
“쿨럭, 쿨럭, 쿨쿨 쿠르릉.. 부웅..”
“와! 시동이 걸렸어요.”
“자, 빨리 기어를 2단으로 바꿔주시고 달려서 한 바퀴 돌아오세요.”
“아저씨 고맙습니다. 내일 아침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난감했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네, 잘 되서 다행입니다. 배터리 충전을 시켜야 하니까 앞으로 삼십 분 이상은 달리든지 멈추더라도 발동을 걸어놓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 잘 다녀오세요.”
“네, 아저씨께서도 좋은 주말 보내세요.”
올림픽 공원 주변은 본격적인 꽃의 계절을 맞아 화사하다. 목련꽃은 절정을 지나 낙화의 서정을 보여주고 있지만 진달래와 개나리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청춘처럼 아무데서나 불을 지피고 다니는 듯하다. 그런 와중에 사람들 가슴에 봄바람을 호오~호오~ 불어넣기로는 그야말로 선녀의 비듬 같은 벚꽃만한 것이 드물다. 지하철에서 내려 올림픽 공원을 따라 꽃향기를 맡으며 커피숍을 향해 걸어가노라니 은근히 설레는 마음이 꼭 봄 때문인지, 꽃 때문인지, 혹은 편지를 쓴 어떤 여인 때문인지는 분간이 쉽지가 않다. 지정된 시간과 장소에 나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갈등하는 순간까지는 그 일방적인 약속이 내 시간을 불법적으로 빼앗고 두통을 유발시키는 곤란한 문제였지만 나가자 하고 마음의 결정을 하고 난 뒤에는 어느새 설렘의 대상으로 바뀌어 있다. 아마도 시기와 시점이 절묘했는지도 모른다. 완고한 겨울에서 벗어나고 격정의 환절기를 지나며 겨우 얻어낸 4월이라는 긴장 끝에 선 이완을 맛보는 듯한 나른함 덕분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한 女人을, 낯 모르는 女人을, 내가 몇 번이고 읽을 만큼 완숙한 느낌의 글을 쓴 女人을, 내게 러브레터를 보낸 女人을 만나려고 가고 있는 중이다.
- 계속 -
첫댓글 선녀의 비듬같은....^^*
그 여인의 [내가 몇 번이고 읽을 만큼 완숙한 느낌의 글을 쓰는] 문장력이 부럽네요.
이럴때 나는 무어라고 써야하나 한참을 생각하여도.... 그냥 긴울림은 좋~~~겠다 입니다.
예사로운 만남이 아닌 듯 한 약국 약사님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