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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는 어떻게 찾아오는가? (前) -대한민국 국민에게 고함(2)- 1. ‘진보’ ‘개혁’ ‘혁신’타령의 복판에서, 미래를 열지 못하고 과거를 열어재낀 사회운동 ‘우파*자유주의*보수세력’에 뿌리깊이 내린 ‘수사학(修辭學)’적 ‘형식주의적(形式主義的)’ 반공주의의 실상을 극복하지 못하면, 새로운 시대는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공산주의 이론의 전형적인 단어들을 완곡하고 완화된 표현으로 썼던 좌파들의 수사학과 다를 바 없으면서, 그 논리구조를 그대로 가져다 쓰면서 ‘명사’만 고쳐 쓰는 것은, 타자들에 계속 두들겨 맞는 기교파 투수이지 기본에 충실한 언히터블 강속구 투수는 아닐 것이다. 시속 120킬로 미터 대 공을 던지는 기교파 투수이되 타자에 실컷 얻어맞으면 그야말로 볼장 다 본 것이다. 하체 단련부터 시작해서 시속 145킬로미터(메이저리그 선발투수 직구 표준기준인 90마일)이상을 쾅쾅 찍어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아는, 야구 선수로서는 노장을 넘어서 ‘기량저하’단계에 접어든 입장의 말장난 차원의 반론은, 이해는 가도 단순한 나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기는 너끈했다. 서두를 이렇게 꼽는 이유는 ‘제목’에서 판단이 멈춰 버리고, 깊이 있게 파고 들지 못하도록 하는 일정한 움직임에 대한 불만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 때문이다. 이 글의 소제목 수준에서 판단이 멈춰 버리고, 좌파의 전형적 문법에 명사만 바꿔 쓸 수 있으을 과대포장하는 것을 통한 엄청난 반복이 끝나야 자유주의 세력은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다. 사회를 바꾼다. 개혁한다. 혁신한다. 그런데, 그대는 개혁의 걸림돌이다. 수구세력이다. 대학가에서 사물의 근본을 천착하는 ‘格物致知’의 앎을 갖지 못하는 철부지 포함하여, 대중문화 시대에 매스미디어의 반응에 목석같이 반응하는 스펀지 차원의 대중들은, 피곤해 하면서도 매스미디어의 유도에 대체로 끌려가고 있다. 대중들을 기준으로 보면 답찾기가 어렵다. 이러한 문법을 외치는 중심주체들을 바라보면 답찾기가 어느 정도 가능하다. 자신들이 아는 앎을 절대화하여 자기 식대로 사회가 되어야만 뭔가가 이루어진다고 믿으며, 그러한 전제로 학생운동권의 ‘마르크스’를 신비화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떠오른다. 형식주의적 수사학적 반공주의 비판에 치중했던 본질 이유는, 공산독재 전체주의 사회를 만들 사고의 핵심을 우파들이 인정할 수 있는 ‘유효한’요소로 만드는 일종의 ‘추인’효과가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 때문이다. 좌파세력에 공격적 차원의 언어적 과격성보다도, 우파 본질을 지킬 때 절대로 추인할 수 없는 요소에 추인하지 않는 진정한 ‘지조’를 지키는 것이 진정한 강함일 것이다. -인용문 시작- 결과적으로, 북한의 지배세력은 북한 주민들을 도구적 인간으로 변형시키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주민이 이러한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하지 못할 경우에 그는 사회의 적대세력으로 분류된다. 도구적 인간을 모범적인 인간으로 상정하고 있는 현실에서 탈락한 인간은 정치범수용소에 감금된다. 북한식 ‘합리화’는 역사과정의 제작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역사과정의 제작에 폭력이 행사되듯이, 북한식 ‘비시(인)민’으로 분류된 사람이나 집단에 대한 폭력의 행사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북한식 인간상이 강조되는 상황에서 서구식 인권의 개념은 끼여들 여지가 없다.(중략)(홍원표, <북한사회의 이해를 위한 우리의 이야기하기>, 홍원표 외, [북한사회의 이해], 인간사랑, 414쪽.) -인용문 끝- 군사권력의 복귀란 기대감을 특정한 노인층에 불어넣으며, 공산체제 비슷한 것을 유효하게 하도록 인정하라는 순환회로가 분명히 있었다. 북한공산집단은 궁극적으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비판한 이성의 도구적 사용에 따른 사회의 전체주의 문제에 도달되고 있다. [계몽의 변증법]의 유명한 에세이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자주 기고했던 문학평론가들이 자주 썼던 표현으로, 두 신문을 즐겨보며 문학평론을 읽어본 이들에겐 헷갈리지 않는 어떠한 진리치를 인정한다. 할아버지 세대에 낯설더라도, 두 신문 문화면 문학평론을 본 젊은 세대에겐 아도르노의 유명한 에세이는 전혀 낯설지가 않다. 오히려, 파시즘체제를 긍정적일 수 있다고 힘의 숭배 차원에서 바라봄은 온당하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힘의 숭배 차원에서 파시즘 체제를 긍정적이라고 바라보며, 격정적인 웅변조로 이야기하는 차원이 파시즘적인 긍정적이라고, 지나가는 표현이라도 되뇌이는 편이 자유민주주의를 자포자기하고 공산독재를 향해 다가서는 것이라고 본다. 나는 [조선일보]의 문화면에서 대학가를 장악한 좌파 지식의 도구적 사용과, 그 도구적 사용의 극대화로서 현재의 좌파의 과거사 문제에 억압성을 느낀다. 그런데, 2세대 보수주의의 대부분은 오래전 자신의 체험에 반추하며 보편이성에 근거하지 않은 상황으로, ‘반민주’이거나 ‘무효’라고 할 부분의 항변에서 ‘역사의 발전’이거나 ‘유효’라고 추인하고 있다. 국민학교 때 운동회 응원단장 맞고서, 목소리 안 외치려고 잔머리 다 쓰는 반친구들의 몫까지 다한다고 목이 팍삭 쉬는 느낌 비슷하다. 이러한 상황 전체가 보여지기는커녕, 속병이 자주 들어서 몸이 지쳐 버리는 나의 발언을 젊은 세대 전체로 설명할까 두려운 마음이 있다.
진보, 개혁, 혁신 타령이 과거를 열어제낀 과정에는, 분명히 보편이성과 대학가 교양교재와 格物致知의 논리로 사물의 본질에 다가갈 때 파악할 수 있는 관점에서, 세계 지성들의 파악과 거의 같이 가는 좌파 학생운동 논리와 곁에서 생겨난 보수주의 논리를, 2세대 보수주의가 무시하면서 좌파논리가 긍정적이라고 지속적으로 인정해온 요소가 끼어 있다. 어쩌면, 거의 중심적일 수 있다고 본다. 2세대 보수주의의 젊은 시절의 어떠한 요소가, 좌파들의 미래를 열어제친 다는 내용의 그것과 닮아 있고, 그것이 기회주의란 의미를 갖는 ‘중도주의’비판과 개혁적 자유주의란 이름의 포퓰리즘차원의 중도주의 긍정으로 반복된다는 말이다. 세계 지성들의 이론근거나 대학가 학생운동 시대에 더불어 핀, 좌파 논리에 대한 직접적 반론을, 2세대 보수주의자들이 어떻게 어떠한 방식으로 인정해왔나를 이해해야, 자유주의세력의 몸안에 끼어있는 ‘중도주의’란 마귀가 박멸될 것이라 본다. 2. 공산사회 이데올로기의 개략적 구조 20세기 현실공산주의는 성공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시작되지 않고 농업국가 소련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북한공산당의 기반도 식민지 시대에 농업국가의 자취가 중요한 기초이다. 여기에서, ‘농업(후진)’ 대 ‘도시산업(선진)’의 개념적 이분법을 내세우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강강수월래, 길쌈, 같이 모내기. 같이 식사. 농한기 때 고스톱 등등..... 전원일기 같은 농촌 드라마 전체에서 묘사된 전체적 생활현실(농민들은 너무 낭만적 소설이라고 욕하고 있다고 알지만)을 지적해야 한다. 농촌에서 떠나지 않고 정주하는 사람에겐 도시가 선진이고 꼭 따라야 할 모범일 이유가 없다. 농촌적 정서를 이어온 이들은 대학에서도 농촌문화 비슷한 것을 만든다. 반면에, 도시적 정서를 지켜온 이들은 대학에서 농촌문화 비슷한 것을 만드는 테두리 속에서 씩씩하게 도시의 전형적인 개인적 문화를 만든다. [자본론]을 읽지 못한 사람들의 좌파 공산주의를 향한 문화적 집결은, 사실은 매우 간단한 것이다. 가난 언저리에서 맴도는 모든 국가는 얼마간의 공산주의적 공동체 문화가 반드시 존재한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는 자유의 진정한 발현의 의미보다는, 공동체적 폐쇄성으로 멈추게 된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정신의 모순에 의한 역사발전을 뒤집어서 근로자의 실천성으로 역사발전을 해석했다. 그러나, 근로자들의 결집이 이루어지기 전에 근로자들의 생활습관의 한계성으로 결집은 자주 부서졌다. 소련을 오야붕으로 치받드는 공산권이 아닌 곳에서, 마르크스주의 운동은 거의 실패했다. 그런데, 소련은 무슨 일로 성공했던가? 수학자 김용운 교수는 농촌 마을에서 물꼬를 움켜쥐는 장수의 통제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입에 침을 바르지 않고 방송했던 것이, 도올씨가 ‘노자’로 한창 떴을 무렵임에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수학자 김용운 교수는 조갑제 기자의 몽고주의 논리의 가장 기원이자 심층이자 근본을 제시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수학자 김용운 교수는 농촌 마을에서 물꼬를 움켜쥐는 일본 마을이 바로 ‘레닌공산당’의 원초적 기초임을 주장하는 내 주장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국내 최고의 소련 정치 전문가인 이인호교수가 ‘미르’농촌에서 소련공산당의 기초를 바라보는 사고 모델에서 영향 받은 것이다. 북한공산당은 기본적으로 ‘레닌스탈린체제’의 변형임은 세계 학계의 공통 이론이다. 레닌 스탈린 체제는 모든 것을 ‘정치 우위론’으로 두고 있으며, ‘정치우위론’은 사물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레닌 스탈린 체제는 무기로 다수를 옥죄는 논리를 썼다. 결국, ‘물’을 통치의 도구로 썼던 일본 무사 지배의 농촌 마을인, 칼을 찬 총독부 관리 지배의 식민지 근대화 논리가, 북한공산당의 심리적 기초임이 드러난다. 레닌스탈린공산당(변이형)은 권력의 제일 위층에서 어떻게 집단을 도구화하고 체계화하느냐에 치중한다. 레닌스탈린공산당은 권력의 필요에 의한 개편을, 무의식이 잠탈된 군중들의 이름으로 해온다. 도구와 미끼에 말리고 위에서의 강한 통제술에 말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일본 문화의 ‘오야붕’-‘꼬붕’문화 비슷하게, 도구와 미끼에 말린 군중의 공산당에 대한 ‘오야붕’-‘꼬붕’문화가 만들어진다. ‘국가’에 대하여 국민의 마음 속에 이상적 국가를 만들어 가며, 그곳에 ‘참여’욕을 불러일으켰던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관과, 강력한 권력의 논리에 따라가도록 복종하는 문화를 만든 2세대 보수주의자의 국가관의 장단점은, 이러한 의미에서 살펴보았다. 2세대 보수주의자의 국가관에서는 국가에 대한 참여의 이유가 없다. 이는 공산당 하층이 공산당 엘리트나 공산당 지도자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기대하며 피동적인 것과 관련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을 ‘레닌스탈린’공산당으로서의 모택동 논리를 버린 등소평의 수정공산주의를 따르는 중국이 왜 배우려 했는지가 의미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 논리의 심층은 ‘명치유신’의 영향이 명백하다. 일본의 중앙집권적 근대화정치 참조의 박대통령의 정치가, 어떻게 계급투쟁중심에 지쳐 버린 중국의 수정공산주의에 참고문헌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반일 없는 반공(2세대 보수주의가 왜 말장난 반공주의에 매달리며, 세계 지성의 논리에 걸맞는 보편이성을 못 보여주는가?)이 가짜고, 반공 없는 반일(최근의 ‘독도사태’에 우파가 쏠린 이유는, 어리버리한 우파의 숫자를 말해준다)이 가짜인 이유가 드러난다. 1인 장수-소수 엘리트 후원(이익독점)/그 이익독점층을 향한 대중층의 흥망성쇠. 이 구조를 이해해야, 공산당 역사의 전체주의와 도구주의가 이해가 된다. 그 전체주의와 도구주의는 실제로 억압적이라도 이익독점층과 그것을 향한 인물들의 돌진에 중대한 이해 관계요소로, 떨끝하나 고치기가 매우 어려워 진다. 대한민국이 지방자치제가 벌어지되 인물중심의 카리스마 논리로 치우치며, 단순한 논리 이상이 넘지 않게 될 때, 꿈결에서조차 ‘반공’을 되뇌이더라도 실제적으로 공산주의의 세뇌극에 참여된다고 보면 적절하다. 그리고, 이 구조가 ‘경상도 권력’에서 ‘전라도 권력’으로 교체를 울부짖던 1980년대 정치 권력의 기본 바탕이라 추정된다. 북한공산당에 인권 침해를 당하는 층의 요소에 해당될, 중심 권력에서의 패배자의 역사에 부정적인 해석의 연속은, 미래의 대체 권력도 새로운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에, 좌파 정치의 나쁜 요소를 유효화한다고 본다. 공산사회에서 일체의 지식은 전부 공산당 권력의 안녕을 위한 시녀화 논리로 귀결된다. 그리고, 한국 현대사 속의 사실상의 모든 정치 권력은 학문의 시녀화 논리를 의도해 왔다. 학계에서 다루어야 할 내용을, 국가만이 유일한 절대 무오류의 목소리라고 하는 시도도 학문의 정치 시녀화 논리의, 독재 전체주의 논리가 맞을 것이다. 참으로 신비스러운 것은 ‘한나라당’내부 포함해서, 헌법재판소의 보수적 평결을 재주 내린 위원까지, 학문의 정치 시녀화를 통한 반민주 요소에 대단하게 너그(?)럽다는 것이다. 3. 한때, 소련공산당이 미국과 군사경쟁을 벌이던 산업화국가였음을 자주 잊는 사람들. 소련공산당에 시장이 지속적으로 있었고, 소련공산당에 산업화도 있었다. 이러한 요소를 잊는 사람들은 북한공산당의, 소련공산당의 그러한 요소의 과장에 깜빡 속는다. 소련공산당은 미국 자본주의 발전에 뭐를 더한 수준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마르크스의 역사발전단계론에서 자본주의 이후라는 차원은, 자본주의의 어떠한 요소를 승인했다는 차원의 해석을 포함한다. 소련공산당은 공산당의 중앙통제 아래의 계획경제 속에서 추진된 산업화와 근대화 논리이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의 장점을 살리지 못해서 경제적 붕괴로 한때 큰 위기에 처해있다. (수정공산주의로 경제 위기는 어느 정도 봉합한 러시아의 행보는 향후 주목된다. ) 산업화된 국가와 국익의 이익이 있다면 교류되어야 함은 긍정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자유세력은, 제 정신 속알머리를 내 내주고 말았다. 대한민국과 교류하는 공산국가와 주도적으로 끌려 다닌(?) 사례는 체험적으로 엄청나다. 그 바탕은 공산사회는 왕조이며 후진이며 전체이며 봉건이며 답답하고 폭정이다 차원의 ‘이미지’사고 때문에 자리한다. 4. 공산당 담론은 백번 천번 만번 개혁 타령이 되어도, 공산당권력 중심은 평안해라 하는 변하지 않는 타령. 그리고....... 나는 자주 궁금해하는 부분이 있다. 현재의 좌파 정치 권력이 ‘전대협권력’으로 말해진다면, 1980년대 정사를 상대주의적으로 해체 해 버린다면(좌파들이 학생운동으로 했던 그 방식대로), 그리고 반대 급부로서의 대중들에 양보되어서 안되는 자유세력의 대중적 입지점을 주장했다면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 좌파 권력이 ‘전대협권력’으로 말해진다면, 그들을 배경으로 한 천번의 ‘개혁’타령, 만번의 ‘혁신’타령, 억번의 ‘변화’타령은, 모두 김일성의 ‘통일론’의 전 사회적 구현에서의 ‘남쪽좌파’의 직선적 역사와 관계된다. 이들은 6.25 전쟁의 무용담을 털어놓는 군인들의 퇴역이후의 이익단체적 결속을 모방하며, 몇 십 곱절의 이익단체적 행각을 보인다. 내가 몽고주의 주류 우파들에 반대 의견을 제시했던 것은, 헌법 상에서의 학문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가능하게 하여, 대중들에게 요구했어야 할 부분을 왜 적극적으로 은폐했는가 문제이다. 가령, [조선일보]에 자주 했던 김윤식교수는 어떻게 얼굴마담으로 약간의 보수주의 인물을 내세우고, 어떻게 속에 다수의 좌파들을 홍보해왔는가? ‘우리학문의 길’로 떵떵거리며 요란한 조동일교수의 학문은, 국내에 영인된 북한문학사 어느 판본의 목차 모방-이는 논문 쓰기에서 목차 모방하면 절반을 모방했다는 말과 연관해서 보아야 한다.-을 하고 말았으며, 그 목적의식도 북한문학사의 정당성쪽에 가까울 수 있다는 반론. 등등의 요소를 ‘하거나 했었어야만 하는 순간’을 여러 차례 넘겼다. 결국, 서울대 좌파 지식인들의 지식의 테두리도, 4.19 때 좌익학생운동권들은 착하고 아름답고 예쁘고 하는 무용담으로 귀결되며 그 테두리에서 모든 것이 시녀화되고 있다. 그럼, 왜 반론이 안되는 것인가? 모든 변화나 개혁 타령임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변화타령을 가능하게 되는 심리적 기반과 기저는 왜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대화주의적 토론주의적 내용이 도구주의적으로 자행되어서, 검찰의 권력에 검증과 안전 시험없이 충격을 가하는 부분에 대해서, 대중들의 반응이 근본 취지는 옳을 수 있다는 차원으로 쏠릴 수 있음에 애써 무관심하는 보수 세력에 답답함을 준다. 변화와 개혁 타령이란 모든 것은 결국은 지배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당근에 뿅가는 대중들 끄집어내는 정치적 연례 행사일 뿐이며, 진부하며 케케묵은 것이란 판단은 다수에게 공유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새로운 시대’는 오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