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서 인간이 3만5000년 전쯤에 처음으로 악기를 제작했다고 썼다. 이것은 사실 매우 단순화된 주장이다. 이 주장을 재검토해보면 인간과 악기에 대해 조금 더 많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창의적인 작곡가들은 악기가 아닌 것을 악기로 썼다.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오페라 [라인의 황금]에서 16개의 모루(anvil)를 써서 강력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2010년 9월 11일 뉴욕시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열린 [라인의 황금] 중 한 장면.
인간은 더 오래전에 악기를 만들었을 수 있다. 그런데 나무나 갈대와 같은 재료로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연약한 재질의 악기들은 독수리 뼈로 만든 플루트에 비해 잘 마모되고 잘 타며 잘 훼손되었을 것이다. 분명 만들어 사용했으나, 언젠가 사라져버렸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발굴되지 못한 악기도 있을 것이다. 분명 조상은 악기를 만들어 사용했는데, 후손들 중에 고고학자가 없다면 그 악기는 발굴될 수 없다. 사실 과거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증거에 기초해 구성되는 진지한 이야기로 인정받고 존재한다. 그러니 역사가가 없다면 역사도 없고, 고고학이 없다면 선사시대의 역사도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 고고학은 인기가 없지 않은가.
한국의 어떤 대학에서 고고학과를 개설해 교수들을 임용한다면, 그 교수들이 발굴활동을 포함해 연구를 열심히 한다면, 혹시 5만 년 전의 한반도에서 조상들이 악기를 제작해 음악활동을 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발굴되더라도 인정받아야
▎글래스 하모니카.
3만5000년 전의 뼈 플루트보다 더 오래된 악기와 관련된 주장이 있긴 하다. 6만 년 전에서 4만5000년 전 사이에 제작된 것이 분명하며, 악기로 추정되는 유물이 1995년에 발굴되었다. 그런데 3만5000년 전의 것이 비교적 분명하게 악기처럼 보인다면, 1995년의 유물에는 어딘지 불분명한 구석이 있다. 악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아닌 것 같기도 하다는 것. 슬로베니아의 수도인 류블랴나(Ljubljana) 서쪽 약 65㎞ 떨어진 동굴에서 발견된 동물 뼈에 구멍 두 개가 나 있는데, 인간이 뚫은 것인지 하이에나와 같은 맹수가 물어뜯은 결과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학계의 모든 연구자가 악기라고 인정하는 3만5000년 전의 뼈 플루트와 달리, 구멍 난 이 동물 뼈는 모든 연구자에게 악기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맹수가 물어뜯은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고 그 주장에 설득력 있는 답이 없다고 판단하는 이들이 있다. 다음으로, 이 동물 뼈 유적은 우리의 사촌 네안데르탈인의 것이 분명한데, 네안데르탈인이 과연 악기를 제작할 정도로 영리했는지 의구심을 갖는 학자들이 있다.
네안데르탈인 혹은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neanderthalensis)는 우리 종(種) 호모 사피엔스와 더불어 호모 속(屬)에 속한 동물로서, 사람 혹은 인간이 맞다. 그런데 약 2만 년 전에서 4만 년 전 사이에 멸종했다고 알려져 있다. 최근 여러 연구가 네안데르탈인을 과거의 학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영리한 존재로 보게 해주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멸종된 존재는 어리석고, 어리석은 이들은 악기를 만들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있다.
의심의 이유는 또 있다. 그것은 이 악기의 발굴지가 슬로베니아라는 사실과 관련돼 있다. 슬로베니아는 1919년에 오스트리아에서 독립했다가, 1992년 다시 독립하기 전까지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속해 있었던, 인구 200만의 소국이다. 정치경제적으로 강대국이 아닌 나라들은 대체로 학문의 영역에서도 대접을 받지 못한다. 미국과 영국, 독일과 프랑스 등 고고학 강국들로부터 이 나라가 은연중에 무시되고 있고, 그래서 그 발견이 의심받는 것일 수 있다.
2018년에 인류가 핵전쟁으로 인해 멸종한다고 치자. 10만 년 후, 다른 지적인 존재가 다시 문화와 문명을 발달시키며 삶을 영위하다가 10만 년 전 인간사회의 유적을 발굴했다고 치자. 콘크리트 아래서 발굴된 그림 1의 물건을 보고 악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지그프리트]의 등장인물인 미메는 지하세계 대장간에서 칼을 만들었다. 그 앞에 놓인 '모루'는 대장간 작업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용됐다.
이것은 아르모니카(Armonica), 볼 오르간(Bowl Organ), 글라스(유리)하모니카(Glass harmonica) 등으로 불리는 독특한 악기다. 가로 방향으로 일렬로 겹쳐진 서로 다른 크기의 유리컵들을 손잡이를 잡고 돌리거나 컵 아래쪽에 놓인 페달을 밟아 돌리며, 그 컵들을 젖은 손으로 터치해 묘하면서도 황홀한 소리를 낸다. 18세기 오스트리아의 고전주의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91년에 이 글라스하모니카와 다른 악기들을 위한 작품을 작곡했다. [글라스하모니카, 플루트, 오보에, 비올라와 첼로를 위한 아다지오와 론도 다단조, KV 617]. 몇몇 작곡가가 이 악기를 위해 곡을 썼지만, 여전히 희한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설명을 듣지 못한 사람은 이것을 악기로 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넓고 악기는 많다. 창의적인 작곡가들은 악기가 아닌 것을 악기로 썼다. 19세기 중후반에 활동했던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오페라 [라인의 황금]에서 16개 모루(anvil)를 써서 강력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원래 대장간에서 무언가를 그 위에 올려놓고 두들기기 위해 강철이나 주철로 만든 도구였는데, 바그너의 손에서 타악기가 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활동했던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교향곡 6번]에서 카우벨(Cowbell, 소방울)을 악기로 사용했다. 이것은 알프스산에서 방목하는 소의 목에 매달아 놓는 방울이다. 모루와 카우벨 역시 앞서의 글라스 하모니카와 마찬가지로, 어떤 이들에게는 악기로 보이지 않는 도구들이다.
선사시대의 조상들도 악기가 아닌 것을 악기로 사용하는 창의적 행위를 하지 않았을까. 3만5000년 전보다 더 오래전에 어떤 특이한 도구가 만들어졌고 당시 조상들은 그것을 때론 악기로 사용하고 때론 다른 용도로 사용했을 수 있다. 하지만 막상 그것이 발굴되었을 때 발굴 주체가 그것을 악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알게 모르게 자신의 경험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악기를 찾으려는 고고학자는 이런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다양한 발음원리에 앎으로 무장한, 열린 마음의 고고학자는 어떤 유물의 용도가 음악적일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앎과 개방된 자세가 그의 성공을 이끌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들린다
▎네안데르탈인이 만들었다는 플루트.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필드에 나가면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른다. 숙련된 고고학자는 어디에 무엇이 있을지 대략 감을 잡는다. 그는 경험이 많고 지식도 많다. 그런 만큼 잘 보인다. 그리하여 넓은 필드 모든 곳을 뒤지기보다 유물들이 나올 성싶은 곳을 뒤진다. 아마추어 고고학자는 어쩌다 어떤 유적을 발굴하더라도 그것을 유물로 생각하지 못할 수 있다.
프로 고고학자는 매의 눈으로 유적 같지 않아 보이는 것을 유적으로 판단한다. 고고학자만이 아니다. 어린아이와 아마추어는 물리학자가 보는 것을 볼 수 없다. 어린아이와 아마추어는 전문음악가가 듣는 것을 들을 수 없다. 우리는 아는 만큼 보고 듣는다.
이것을 철학자들은 반토대론이라고 말한다. 반토대론에 따르면 인식 혹은 지식, 사유와 같은 고차원적 정신작용은 우리의 감각 및 지각 과정, 즉 저차원적 정신작용에 영향을 준다. 반토대론자들은 우리가 생각을 달리하면 감각과 지각도 달라진다고 말한다. 반토대론에 따르면 고고학자와 물리학자, 음악가는 많이 알고 깊고 넓게 사유해야 무언가가 잘 보이고 잘 들릴 것이다. 어떤 분야에서건 이것은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원리다.
그런데 무얼 많이 알아야 할까. 앞서의 이야기는 고고학자들이 음악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할 필요성을 알려준다. 세상은 사실 연결된 것인데, 학자들은 그간 세상의 단면들만 보아왔다. 세상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즉 통합적 혹은 통섭적인 지식이 있어야 그만큼 잘 보이고 잘 들릴 것이다.
고생물학자들도 음악을 많이 알면 방법이 생긴다.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생명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 우리 인간보다 대략 세 배 더 크고 무게가 3톤이나 나가는 공룡 파라사우롤로푸스(Parasaurolophus)는 지금으로부터 약 6500만 년 전에 일어났던 대멸종 직전까지 생존했었다. 작지 않은 이 공룡에게는 콧구멍에서 머리 뒤까지 자그마치 1.5m가 넘는 아치 모양의 관이 있었는데, 이 관의 정체에 관해 많은 학자가 다양한 주장을 펼치던 중에 어떤 학자가 이 관이 지구상 최초로 등장한 일종의 자연적 악기, 즉 조악한 트럼펫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이 주장은 학계에서 큰 공감을 얻는다. 이러한 창의적 주장을 할 수 있었던 학자에게 음악적 식견이 있었다.
과학자들은 파라사우롤로푸스의 관이 진동할 경우 나는 소리를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했고, 그 소리는 웅장한 금관악기 소리로 들린다. 독자 여러분은 인터넷에서 이 소리를 조회할 수 있다.
파라사우롤로푸스처럼 성악가들의 몸도 악기다.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몸을 악기로 사용할 수 있었을까. 즉 인간은 어떻게 둔탁한 소리만 낼 수 있었던 다른 영장류와 달리, 분명하며 맑고 고운 소리들을 낼 수 있게 되었을까. 두 발 보행이 여러 계기 중 하나였다. 두 발 보행으로 인해 인간의 후두는 길어졌고, 이것이 좋은 질의 소리를 내게 해주었다. 이전보다 덜 탁해진 소리로 인해 감정을 노래 비슷한 것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공룡과 인간만이 아니다. 저마다 독특한 모습의 몸을 가진 동물들은 자신의 몸을 악기 삼아 노래했고, 여전히 하고 있다. 인간처럼 후두를 가진 새에게는 포유류 동물의 후두에 있는 성대가 없다. 대신 울대에서 소리 내고 노래 부른다. 울대는 성대와 계통적인 관점에서는 다르지만 기능적으로는 같은 기관일 수 있다. 이렇게 계통적·해부학적으로는 다르지만 기능적으로는 비슷하고 종종 외관이 닮은 기관들을 유사기관이라고 부른다.
몸이 악기인 한, 음악은 인간뿐만 아니라 많은 동물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행하고 향유하는 어떤 것이 된다. 이제 (고)생물학자들은 고고학자들, 음악학자들과 함께 화석으로 발굴된 동물의 몸과 살아 있는 동물의 몸을 악기로 보고 연구해야 한다. 음악사는 이런 연구물에 기초해 다시 쓰여야 한다. 다시 쓰인 음악사는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통찰력을 키워줄 수 있을 것이다.
울대의 영어 시링크스(syrinx)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요정이기도 하고, 팬플루트를 가리키는 고대 그리스어이기도 하다. 시링크스 요정은 그녀에게 반한 목축신 판(Pan)에게 쫓겨 도망치다가 강에 이르러서 갈대로 변했다. 판은 그 갈대를 잘라 팬파이프(panpipe)를 만들었다고 한다.
김진호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