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타령
지은이 박재희
1
- 이거이 꿈이여, 뭐여.
위이이잉 귀울음인가, 퉁소 속을 지나는 바람소린가, 도둑고양이 흘레 붙는 소
린가. 소풍 온 개구쟁이들처럼 뒤란의 왕대숲을 들깨우는 소리에 달실네는 간신
히 눈꺼풀을 열었다.
사르르사르르 댓이파리를 흔들며 바람 나부랭이나 찝쩍이던, 늘 듣던 바람소
리가 아니었다. 물결처럼 솨아 허리를 굽혔다가는 돌연 대노하며 솟구쳐서 몸통
을 맞부비며 울부짖는 대나무, 그 왕대숲을 통째로 뒤흔드는 바람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우수수 무리를 지으며 돼지우리 쪽으로 몰려가는 콩지스러기를
본 것도 같았다. 엊그제 서너 접의 곶감을 부리고 헐거워진 감나무에서 후드드
득 감잎들이 떨어지는 걸 본 것도 같았다.
꿈결인지 생시인지, 머릿속에 질펀히 엉겨 붙은 소리의 부스럼딱지들은 필시
비를 몰고 올 바람의 짓거리일 터였다.
- 잠이나 한숨 들었남.
어둠 속의 몸을 배추벌레처럼 움츠리며 달실네는 세게 도리머리질했다. 잠자
리에는 들었으나 잠이 든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눈을 감은 채로 무당 방울 같은
색색의 소리 귀신들에게 머리 끄덩이를 휘돌림 당한 기분이었다.
"야아, 자귀질하다 죽은 귀신 붙응겨! 거 좀 퍽퍽 못 찍냔 말여! 저런, 저런,
오메, 미련곰퉁이가 따로 없구마잉! 나무가 아야아야 할라, 이 오살할 밥통들아!"
소스라치게 놀라 달실네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얼쩡대던 잠이 찬물을 뒤집
어 쓰고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당신들, 할망구라구 얕잡다간 국물두 ㅇ응게 알아서들 겨. 이래 뵈두 노가다
판에서만 반생이란 말여. 눈 감구 아웅 헐라거든 모가지를 걸라구들!"
- 뭔 놈의 잠꼬대여.
화다닥 장지문을 열고 서울네에게 지청 구를 주려다가 달실네는 쓴 물 삼키듯
이 말을 삼켰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으로 쓴 물을 삼킨 것이 처음이랴. 어제도 그제도 달실네는 서울네에
게 하고픈 말들을 서투르게 삼켰었다.
"안 들려? 아, 방 하나 쓰자구우. 한 사나흘, 아니 한 달포쯤. 얼마 주면 되겠
어? 아, 특별한 일 따윈 없어. 서울 바닥이 하두 골지끈거려서 바람 쐬러 내려가
는 거라구. 정말 별일 없으니까 신경 끊구서 방값이나 불러. 얼마 주면 되겠어?
십만 원? 백만 원? 아, 그냥은 싫어. 글쎄 싫대두. 이런 답답이! 알았어. 이따 갈
게. 차가 끊어졌다구? 염려 푹 놔라. 자가용 타구 갈 테니까. 전화 끊어, 정순아."
날콩 볶듯 빠르고 급한 목소리를 한 바구니 쏟고 전화는 끊어졌으나 달실네는
어안이 벙벙하여 수화기를 놓지 못했다. 띠띠띠띠 다좆치는 신호음이 꼭 금방
전화한 서울네의 목소리 같았다.
서울네는 사십 년 전에 서울로 이사 간 뒤 만난 일조차 없었던 달실네의 소꿉
친구 덕례였다. 방금의 전화가 바로 그 덕례인지 아닌지를 목소리로는 알아보기
어렵지만, 높고 빠른 말투와 불여시라는 별명답게 깐죽거리는 낌새로 보아서는
영락없이 그 덕례임을 달실네만은 알 수 있었다.
- 이기 뭔 씨나락 까는 소리여.
'정순아'라는 끝말이 생급스럽고 흉물서러워서 달실네는 노래기 떨구듯 수화기
를 떨구었다. 환갑 진갑 다 지내고 칠순이 낼모레인 늙은이에게 정순아, 라니.
덕례야, 맞대거리 못한 게 쓴 물이 되어 목울대를 건드렸다.
더구나 생뚱맞게 여기 와서 무슨 바람을 쐬겠다는 말인지 깜냥할 수 없었다.
사나흘이든 달포든 간에 여기가 놀이터도 아니고 유원지도 아니고 그 흔해 터진
온천도 해수욕장도 아닌데, 남도 끄트머리 촌구석에 와서 바람은 무슨 바람... 나
무를 타고 오르는 덩굴풀처럼 주절주절 많은 말이 치받쳤다.
- 장득만.
달실네는 급히 손가락으로 바람벽을 짚어서 서울네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손때
로 저러어서 희미하기는 했지만 장득만이라는 이름 곁에 전화번호는 있었다.
- 오메, 미안혀서 워쩐다냐잉. 여그는 방이 셋뿐인디 말여. 하나는 고추를 널
어놔서 발 디딜 데도 ㅇ어라. 또 하나는 내 방인디 쪼까 헐어서 말시. 또오 우리
막둥이가 오믄 나랑 한방을 써얄 틴디... 미안혀서 워쩐다냐잉. 아, 느그 돈 있구
시간 있구 세월 좋은디 하필이믄 이런 촌구석에 와서 뭔 바람을 쐰다구 그래싸.
내야 느그 얼굴 보고 잡지만도, 그려, 처녀적 꽃바람 싱싱헐 때 보구는 여즉 못
봤응게 보고 접제잉. 그라믄 그란 줄 알구 퍼뜩 들가거라, 덕례야.
그렇지만 달실네는 02로 시작되는 그 전화번호를 끝내 돌리지 못했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달실네는 며느리를 불러 전화의 내용을 말했다. 집안을 구석구석 잘 치우고
저녁상도 잘 보도록 일렀다. 말을 다 듣고도 며느리는 멀뚱하게 서서 움직일 기
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긴 연우 애비가 죽은 뒤로 찾아오는 사람은 더러 있었어
도 묵어가는 손님은 없었던지라 이상해 할 만도 했다.
"묵는 밥값은 주겠다여."
서울네에게 밥값 받을 생각이란 조금도 없으면서 달실네가 던딘 말이었다.
'년'자에 개구리 배 터지는 힘을 넣어서 '서울년!'이라고 손가락질하는 마을의 말
돌림을 모를 리 없는 며느리였다. 이 마을에 삽 꽃은 이래 제일 큰 부자가 바로
서울네라는 것도 잘 알 터였다. 남편 장득만의 이름으로 된 선산 말고는 이 마
을에 밭 한 뙈기가 없는 서울네인데도 사람들은 서울 갑부라고 시샘하듯 수군댔
다. 누가 서울 가서 보고 온 것도 아니고 마을 동구에 반반한 정자 한 채 세운
일 없지만 - 덕수 장씨 문중에 제각을 마을 복판에 떠억 지은 일 말고는 - 사십
년 세월 저켠에서 마을을 뜨고도 여태껏 토박이들 입질에 시달리는 서울네였다.
"뭔 밥값이다요. 엄니 소꿉동무람서."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발걸음 가벼이 부엌으로 향하는 며느리 뒤에다 달실네
는 한마디 덧대었다.
"십만 원이든 백만 원이든 부르는 대로 준디야."
불침 맞은 듯 화급히 돌아보는 며느리의 토끼눈에다가 달실네는 자신도 모르
게 배시시 웃음을 보였다.
그날로 자가용을 타고 온다던 서울네는 이틀이나 지난 해거름에야 왔다. 이제
나 저제나 기다리다가 송이볶음도 닭도리탕도 다 동난 뒤여서 달실네는 적이 당
황했다. 달실네를 더욱 놀래킨 것은 서울네가 가져온 짐보따리였다. 장롱만 없다
뿐이지 웬만한 집 이삿짐 같았다. 서울네는 자가용이라기엔 좀 뭣한 트럭의 앞
자리에서 내리자마자 운전사에게 한 자 겨웃 넓이의 아랫방 툇마루를 가리켰다.
"짐은 저기다 부리구 빨랑빨랑 가라구. 길이 좀 멀어야지. 후지긴 또 얼마나
후지구. 성질 같아선 아스팔트를 십 차선으루다 쫘악 깔구 싶다만. 아유, 엉덩짝
아파 죽겠네!"
말눈치로는 엄청나게 변한 고향길 찾아오느라 꽤 고생했나 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끼리 눈인사 차릴 겨를도 없는 사람 같았다.
덕례.
친정집에 온 양 만만하게 들어선 여자는 분명 이덕례였다. 언뜻 보기에도 달
실네보다는 열 몇 살이나 젊어 보이는, 늙은이라기엔 좀 이른 중년의 여자는 분
명 사십 년 전에 샛터를 등진 덕례였다. 웃을 때면 눈꼬리가 샐쭉 올라가고 보
조개가 얄밉도록 옴쏙 패이던 처녀적 모습은 간 데 없이, 허리며 배에 군실이
보기좋게 붙은 서울네였다.
"이기 다 뭔 짐이여?"
자동차소리에 놀란 양 헐레벌떡 텃밭을 뛰어나오는 며느리를 보며 달실네는
짐짓 볼멘소리를 냈다.
"잘 있었어?"
달실네에겐지 며느리에겐지 모르게 말을 건네고 서울네는 손수건으로 목덜미
께를 활활 부채질했다. 서울네는 혼이 달아난 듯 멀뚱하게 선 허리 구부정한 백
발의 달실네와 스물 몇 살에 본 박정순의 모습이 조금도 헷갈리지 않는 모양이
었다.
"편안하셨어라우?"
며느리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럼, 그럼. 잘 있었구말구. 아유, 이렇게 조신한 며느리가 삼시 세 때 따신
밥 지어 바치니 네가 그렇게 살이 오동통 찌지. 후분 팔자가 처억 늘어졌어, 년."
며느리 앞에서 정순아 어쩌구 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다 싶어서 달실네는 서
둘러 서울네의 손을 끌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엄니, 저 짐은 모두 어째라우?"
"아, 그거. 나둬, 놔둬. 한숨 돌리구 나서 내가 치울 테니까."
뭐라고 하려는 달실네를 손막음하고 서울네가 며느리에게 일렀다.
"아가, 시원한 냉수 한 그릇 줄래?"
"예에."
조금 뒤 며느리가 쟁반에가 누리끼리한 꿀물을 받쳐들고 왔다. 서울네는 낚아
채듯 대접을 받아 꿀꺽꿀꺽 소리나게 들이켰다.
"어, 시원타!"
"웃뜸에서 사온 진짜배기 꿀이라요."
돈 든 보람을 느끼는지 쟁반을 들고가며 며느리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말야, 정순아."
며느리에겐 대꾸도 없이 서울네가 달실네의 무릎을 쳤다. 드디어, 라고 달실네
는 생각했다. 사십 년 간 호적에서나 써먹는 박정순이란 이름을 가까이에서 듣
게 되는구나, 하는 감회 때문이 아니었다. 소꿉동무 네 사람 중에 산 사람은 박
정순과 이덕례뿐이니, 세상에서 '정순아'를 부를 사람이 덕례인 건 당연했다. 그
럼에도 왜 이리 가슴이 떨리는 것일까.
"나, 잠 좀 잘게."
"뭐여? 어디서?"
"아, 여기서. 여기가 내 방 아니니?"
"그려. 여그서 같이 자야제."
"같이? 아유, 난 같이 못 자. 너 딴 방 없니? 옆에서 누가 부스럭대면 토옹 잠
을 못 자서 말야. 내가 전화로 그랬잖아. 방하나 쓰자구."
나무라는 말투에 놀라서 달실네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뭐라고 했다가
는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몰아붙일 기세였기 때문이었다.
"그려, 그려, 여그서, 이 안방에서 혼자 자더라고. 잔 뒷방을 쓸 텡게."
"뒷방이 있어?"
대답 대신 달실네는 얼른 장지문을 열어서 뒷방을 보여주었다. 바둑판 위의
텔레비젼과 높이 쌓인 이불과 거울이 삭은 앉은뱅이 장롱 사이로 사람 하나 겨
우 누울 만한 자리가 나타났다.
"이만허믄 넉넉제잉."
여차하면 며느리와 한방을 쓰게 될 것 같아서 달실네는 괜찮다는 고갯짓을 하
며 재빨리 장지문을 닫았다.
"나, 잠 좀 잘게."
진자주빛 비로드 원피스 위의 얇은 덧옷을 벗어 발밑으로 던져놓고 서울네는
목침을 당겨 머리에 괴었다.
"곤한가벼."
달실네가 뒷방에서 이불과 베개를 내었을 때 서울네는 이미 축 널브러진 채
깊이 잠에 빠져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록 서울네는 잠에서 헤어날 줄을 몰랐다. 부스럭
대면 못 잔다더니, 거칠게 흔들어 깨워야만 겨우 가자미만큼 눈을 떴다. 뒷간 출
입도 감기는 눈을 억지로 떠가며 했고, 며느리가 시아버지 생일상만큼이나 떡
벌어지게 차려오는 밥상도 숟갈을 드는둥마는둥 하고 놓았다. 그리고는 내쳐 잠
이었다. 찾는 거라고는 냉수 한 사발, 커피 한 잔뿐이었다. 이따금 전화 온 데
없느냐고 묻긴 했으나 딱히 기다리는 눈치는 아니었다.
- 하마 일났능감.
다섯 번을 치는 시계소리와 조심스레 마당을 지나는 발소리가 어둠 속으로 들
어왔다. 이어 뭔가를 쌓는 소리, 고르는 소리, 비료 푸대 꺾는 소리들이 바람에
섞여 간간이 들렸다. 어제 며느리가 날 저물도록 솎은 늦배추와 고추 농사 짓는
집이라면 거들떠도 안 볼 서리 맞은 어린 고추와 달실네가 벗겨 가른 도라지 한
삼태기와 곶감 지스러기가 장에 나갈 채비를 차리는 소리일 것이었다.
제 몸보다 큰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여섯 시 차로 나가서는 언제나 마을에서
제일 좋은 값에 팔고 아홉 시 차로 들어오는 며느리였다. 봄철에는 질경이, 참비
름, 다북쑥, 명아주 따위를 캐어 장에 냈다. 여름에는 장대비 쏟아진 이튿날로
소나무밭을 쏘다니며 송이버섯과 고사를 해다가는 냈다. 가을에는 유자, 단감,
배, 밤 따위를 냈으며, 만물이 뼈뿐인 겨울철에는 땅에 묻어 둔 도라지, 더덕, 무
따위를 캐내어 돈을 만드는 며느리였다. 농사꾼보다는 장사꾼의 아낙 노릇이 제
격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재가 밝은 며느리지만, 그래서인지 달실네에게는 고린
전 한푼 용채 삼아 준 적이 없었다.
- 워쩐다요, 엄니. 연우가 그새 또 등록금을 달라누먼요. 기성회빈가 뭔가도
내야 된다요. 책도 사야 쓴다는디, 오메, 워쩌까잉.
딴 주머니 차는 달실네가 아닌 줄 뻔히 알면서 들으란 듯이 돈걱정을 할 때면
제일 민망했다. 영감이 땅 마지기나 남기고 죽었으니 망정이지 아들없는 며느리
밥 얻어먹기가 이 시린 날은 참말 무덤에라도 들어가고픈 심정이었다.
그러잖아도 며느리에게 용돈 얻어 쓸 생각은 조금치도 없는 달실네였다. 막둥
이 길수도 지난 달 회사에 들어갔으니 설령 며느리가 돈주머니를 내준다고 해도
마다할 달실네였다. 에미의 치맛바람 한 번 쐬지 않고도 유 학년 전체 수석이라
나 뭐라나, 공부를 잘하는 장손자 연우가 기특하고, 늘 누런 코를 훌쩍이고 다니
면서도 고뿔 한 번 앓는 일 없는 둘째 손자 성우가 기특하고, 또 밥사에 비린
것 떨어지지 않게 해주는 며느리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울 뿐이었다.
- 그만 일나야제. 누웠음 뭐혀.
첫차가 떠나는 소리, 암탉들이 꼬끼오 우는 소리, 동네의 개들이 요란스레 짖
는 소리에 더는 누웠지 못하고 달실네는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을 더듬어 은비
녀를 찾아서는 입에 물고, 손빗질로 가지런히 머릿결을 빗어다 똬리를 틀어서는
가운데다 은비녀를 단단히 질렀다.
"웬 잠을 그리 퍼잔다냐."
그저께처럼 어저께처럼 똑같은 아침 인사를 중얼거리면서 달실네는 장지문을
열었다. 곧 살금살금 서울네 옆을 지나서 방문을 열고 나갈 참이었다. 허나 장지
문턱을 넘다 말고 달실네는 흠칠 놀라 그 자리에 섰다. 희부연 봉창의 빛을 받
으며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은 사람 때문이었다.
"오메, 언제 일났능감?"
"...."
"바람이 꽤 시끄럽제잉."
달실네는 천천히 몸을 전기 스위치 쪽으로 움직여갔다. 켜야 될지 안 켜야 될
지 몰라서 몸이 더 굼떴다.
"내가 언제 여기 왔니, 정순아."
서울네의 말소리에 놀라서 달실네는 하마터면 자리끼로 떠놓은 사발 물을 밟
을 뻔했다.
"나, 나흘 돼, 됐제. 그, 그것두 모르구 죽은드키 잠만 잔겨?"
쑥쓰러움과 무안함이 범벅된 목소리였다. 형광등은 몇 번 깜박이다가 이내 환
해졌다. 헝클어진 파마 머리, 아직도 윤관만은 뚜렷한 입술 연지, 구겨지고 먼지
낀 비로드 원피스가 불빛을 받았다. 어느모로 보나 옛날의 샛터 미인 이덕례는
아니었다. 방물 판만 보면 환장하고 달려들던 처녀, 마을에서 제일 먼저 귀를 뚫
어 귀걸이를 달고 다니던 멋쟁이의 모습은 어느 한구석도 남지 않았다. 첫날의
그 수선스러움은, 집주인의 안방을 뺏은 그 당당함은 잠 속에 묻어 둔 모양이었
다. 뭔가에 지치고 지친, 뭔가에 닳고 또 닳은, 칠성판에 눕혀도 까탈없이 잠들
것 같은 얼굴의 서울네였다.
"전화... 나 찾는 전화 없었니? 회장님이라든가, 이 여사님이라든가... 그렇게 찾
는 전화 말야."
실성한 듯 보이나 낯빛보다는 또렷한 말씨여서 달실네는 마음을 놓았다.
"ㅇ었는디. 기다리는 전화 있능가베. 아, 그리 속 타믄 먼첨 걸잖쿠서."
선반의 전화기를 내리려고 일어서는 달실네를 만류하듯 서울네는 방문을 열구
나갔다. 열린 방문으로 기다렸다는 듯 달려드는 바람덩이에 몸서리를 치며 달실
네는 궁둥이를 덮는 털조끼를 찾아 입었다. 말이 좋아 가을이지 추석 명절을 쇠
고 나서는 찬물에 손 담그기도 섬뜩했다.
"웬 바람잉감."
방문을 나서니 바람은 왕대숲뿐 아니라 온 천지를 뒤흔들고 있었다. 여름이라
면 장마를 몰고올 바람이요, 겨울이라면 눈보라를 몰고올 바람이지만, 이 가을에
새삼 태풍이 올 리도 없고보면 이상한 조짐이기는 했다. 뒷간에라도 가는 줄 알
았던 서울네는 마루 끝에 서 있었다. 바람을 보는지, 바람에 휘둘리는지, 어두워
서 얼굴빛을 살피기는 어려웠다.
"아무려나 다행이제잉. 얼추 가을걷이는 끝냈으게 말여."
어둠 속에서 익숙하게 고무신을 찾아 신고 달실네는 하늘을 보았다. 새까만
하늘에 많고 많은 별들이 성우놈 눈동자처럼 반짝반짝 빛을 냈다.
2
별밭 고르고 쾌청한 날씨였다. 더위가 시작된다고는 해도 아직은 그늘 밑이
서늘한 때였다. 날이면 날마다 벌건 햇덩이가 두말봉 꼭지에 걸렸지만 단오빔을
하기 전에는 어느 집이나 부체조차도 내놓지 않았다.
- 오늘이 단오랑게.
푸른 댓잎을 팔랑이며 이 집 저 집늘 기웃거려 보는 오십 척 대나무숲도 오늘
따라 괜스레 정겨웠다.. 마을의 여기저기를 두루 도는 척하다가 아랫마을로 뻗은
샛강 꽁지에 척 들붙는 개울물도 정겨운 단오였다.
오늘만은 수건 동이고 땡볕에 나앉지 않아도 되었다. 고무래로 아궁이를 쳐내
다가 재를 뒤집어쓰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 어제는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감
아 반드르르 윤을 냈고, 화채 거리로 앵두를 한 소쿠리 따다 놓았고, 수리치떡
빚을 어린 쑥도 말끔히 다듬어 놓았다. 득만이가 샛강에서 잡아다 준 준치도 양
푼으로 가득 넘치니,
- 오매, 좋은 거!
정순의 입은 저절로 벙글어졌다. 그뿐이랴. 난생 처음으로 황소꿈을 꾼 것이었
다. 득만이가 황소를 타고 가면서 따라오라고 손짓하지 않았던가. 따라가려고 허
우적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꿈을 깼지만, 황소꿈이라니. 정순은
꿈에 황소를 만난 것이 참으로 꿈만 같았다.
"황소만 타믄 말여. 득달겉이 달려올 텡게 아무 디도 가덜 말고 집에 딱 붙어
있으란 말여. 느그 아부지헌티 넙죽 절 허구설랑은 널 색시루 달랄 꺼니께. 알겄
제?"
준치를 양푼으로 옮겨 담다 말고 정순의 입귀가 길게 올라갔다 요즘 들어 매
일이다시피 듣는 말인데도 들을 때마다 가슴속이 환해지는 걸 어쩌랴. 그렇지만
정순이 또한 언제나처럼 득만이에게 퉁바리를 놓았다.
"치이... 허풍은. 아, 딴 마을 남정네들은 씨알머리두 ㅇ는 줄 아나베? 석구만
혀도 니보담은 머리통 하나가 크잖여? 윗마을 덕수두, 종욱이두, 장신이두 모다
니보담 크든디 워쩔 꺼여? 갸들은 모두 팔다리 비끄러맹 꺼여? 그래두 황소가
니꺼여? 치이..."
키는 작아도 유난히 주먹이 큰 득만이었다. 실팍한 가슴, 떡벌어진 어깨, 발
빠른 득만이를 당해 낼 남정네는 없으리라 믿는 정순이었다. 괜히 해보는 투정
인 줄 알면서도 득만이 또한 지지 않았다.
"그눔들 다아 속 빈 강정이여. 허우대만 멀쩡허제 붕알에 단물두 덜 든 놈들이
랑게?"
"뭔 말을 그리 흉허게 허능감?"
"일테믄 그렇다아 이 말이제. 아, 워디 씨름이 덩치루 가간? 씨름은 거 뭐이라,
순발력이라는 거, 그거이 좋아야 혀. 제아무리 힘이 장사래두 기술 ㅇ으면 말짱
헛거랑게."
"치이..."
"얄밉게시리 입 삐죽이지 말구설랑 그저 니는 꿈이나 자알꾸란 말여. 용꿈도
좋구 돼지꿈두 좋으니께. 알겄제, 요겄아!"
소리가 나도록 군밤을 먹이고 으하하하 되바라지게 웃으며 득만이가 고샅길로
줄핼랑을 놓은 것이 바로 어제였다. 그런데 황소꿈이라니. 용꿈이나 돼지꿈은 아
니었지만 정순은 결코 그것에 뒤지지 않는 꿈이란고 생각했다.
올해 해토모리부터 시작된 득만의 꿈은 곧 정순의 꿈이었다. 아니, 작년 단옷
날 웃뜸에서 벌어진 씨름 대회에서 시작된 꿈이라는 게 옳겠다. 씨름판 틈틈이
연분홍 치마 저고리 차림의 처녀가 들노래, 육자배기, 흥타령 - 특히 흥타령은
박수소리가 끊어지지를 않아서 씨름판도 쉴 겸 두 번이나 더 불러야 했다. - 을
부를 때 넋을 앗긴 당지마을 총각이 바로 장득만이었고, 씨름의 마지막 판에서
메치기당한 총각이 저물도록 모래판을 치며 통곡하는 것을 지켜본 샛터마을 처
녀가 박정순이니 말이다.
본디 놀기 좋아하고 술 마시기 좋아하고 처녀들 곯리기 좋아하고 힘 자랑하기
좋아하는 득만이었다. 노래는 지지리도 못하지만 장단 맞추기는 워낙 좋아해서
젓가락이건 지겟발이건 잔가지를 치는 손도끼까지도 그의 손에 뒤어지면 음악소
리가 났다.
음률에 좀 밝은 어른들은 그가 지나가면서 무심코 두드리는 지겟발 장단에 목
이 근질거려서 참지를 못했다. 꼭 당나무 밑으로 끌고가서 백발가든 청춘가든
그 장단에 소리목을 풀어야만 간신히 놓아주었다.
시누대에 구멍을 뚫어 피리소리를 낸다거나 대나무로 퉁소를 만들어 부는 일
따위는 예사였다. 짤막한 밀짚 토막이나 버들가지의 통껍질로도 그는 귀신 부르
는 호드기소리를 곧잘 내었다. 감잎, 뽕잎, 담뱃잎까지도 그의 입술에 닿으면 그
대고 삐르삐륵삐이 음악소리를 냈다.
정순이도 재 넘어 당지마을의 명고수 장득만을 귀동냥으로 익히 알고는 있었
지만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장득만 또한 호드기보다 고운 목청으로 노래하는 처
녀를 만나기는 처음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명년 단옷날의 씨름 대회를 기다리며
꿈을 키워 온 것이었다.
"절대루 씨름판에 얼쩡대문 안 돼야. 사람덜이 또 니보구 노래허라구 헐 텡게.
알겄제?"
"알았응게 니나 몸조심 혀. 이겼다구 우쭐해서 술 퍼마시믄 안 돼야 잉? 어른
들이 권해두 입에 대는 척만 허란 말여. 알았남?"
어젯밤에도 두 사람은 절터에서 굳게 다짐을 주고받았다. 달이 왕소나무를 지
나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올라왔을 즈음에는 이미 호리병의 고구마술을 비워진
뒤였다. 술이 오르는지 득만이가 팔베개를 하고는 길게 누웠다.
"아이고 대고 gm응... 성화가 났네 흐응...."
낯을 씻거나 밥을 먹을 때는 가슴 가득 고여 있다가도 행주를 집어들거나 호
미를 잡을라치면 기다렸다는 듯이 졸졸졸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노래였다. 새삼
목을 가다듬거나 풀거나 헛기침으로 청을 맑히지 않아도 되었다. 높낮이에 걸림
이 없도록 정순의 목소리는 늘 시월하고 부드럽게 트여 있었다. 그 목소리를 놓
칠세라, 손톱으로 호리병을 두드리는 득만의 손장단이 따라왔다.
"우레같이 소리나는 임을 벌개같이 번득 만나 비같이 오락가락 구름처럼 흩어
지니 심중에 바람 같은 한숨이 안개처럼 흩어져라아...."
"좇제!"
득만이가 발을 구르며 추임새를 넣었다.
"어찌 그리 목이 고운가!"
한숨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가 득만의 입술에서 새나왔다.
"참말로 사람소리 겉지 않네잉."
"새삼 뭔 말잉감?"
달빛뿐인 침침한 어둠 속에서 뒤를 힐끔 돌아보며 정순이는 짐짓 눈을 흘겼
다. 늘 듣는 소리인데도 득만의 칭찬에는 언제나 가슴이 빛으로 가득 차는 정순
이었다.
"꾀꼬리가 따로 없네잉."
"치이... 사람덜은 내 목청이 니 퉁소만 못허다고 흉보든디?"
"아녀, 아녀. 서울 가믄 명가수 깜이여. 딴 디서는 그러코롬 노래 부르믄 못써.
알제? 돼지 겉은 놈들이 흰 눈을 까발기며 달려들믄 워쩌냔 말여."
정순이는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이 바로
곁에 있다고 생각하니 콧날이 시큰 하도록 기뻤다.
- 에그, 그눔의 주둥이 좀 다물어라잉. 아, 바뻐 죽겄는디 일손이 잡혀야 말이
제. 아, 그 코맹맹이소리 당장 못 집어칠껴!
하루에도 몇 번씩 부모님께 꾸중을 들으니 동생들도 언니를 밉상으로 여기는
데 득만은 달랐다.
정순이 노래를 잘한다고 부추겨 줄뿐더러 허기지도록 밤새 노래를 불러도 군
소리 한마디,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들어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득만이밖에 없
었다. 그와 혼인한다고 생각만 해고 정순의 가슴은 둥당둥당거렸다. 혼인만 하면
설거지하면서, 불 때면서, 나물 뜯고 밭 매면서도 거리낌없이 실컷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황소야 퍼뜩 이리 오너라잉.
정순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가슴 복판에 모두었다.
"말 안 헐라구 혔는디...."
"뭔디? 아, 싸게 말혀."
"저어... 어제 보성에서 사람이 왔는디."
"그란디? 어여 털어놔!"
"별말 아니여. 그냥 저어... 보성 장날에 나오라구... 노래자랑허는디 돈두 주구
선물두 많이 준다잖여. 일등만 허믄."
"그려서, 나간다구 혔단 말여?"
목소리를 높이는 득만의 등에 정순의 손이 닿았다. 가볍게 두어 번 두드리고
손은 곧 떨어졌다.
"염려 놓으랑게. 당퇴 말두 꺼내지 말라구 딱 잡아뗏만 말여."
"그려, 그려 잘혔구먼."
득만이는 다시 두 손으로 머리를 괴고 뒤로 벌렁 몸을 눕혔다.
"어여, 또 불러보더라고."
노래를 하는 대신 정순은 득만을 뚫어지게 내려다보다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
밀었다.
"치이...,"
"아, 왜 또 그러능겨. 노래허라니께."
- 오늘 아침에 덕례네 누렁이 잡아 묵었담서?
따지고 싶었지만 정순은 참았다. 내일 씨름에 나갈 사람에게 개는커녕 애돼지
한 마리도 못 잡아 먹인 것이 미안해서였다. 눈을 감고 오직 정순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기만을 고대하는 득만이 믿음직해서였다.
3
"엄니, 이기 겁나게 비싼 낙지라요, 잡숴보시요잉."
장이세 돌아온 며느리가 급히 차려낸 밥상에는 별나게도 비린 반찬이 많이 올
라 있었다. 쇠고기 장국이야 며칠 전에 밑반찬으로 끓여 놓은 것이니 그렇다 치
지만 병어튀김이며 산낙지와 꼬막무침이 여느 때와는 달랐다.
꼬막만 해도 그랬다. 보통 된장을 멀겋게 풀어서 찌개인 양 국인 양 끓이는데
오늘은 알맹이만 발라서 갖은 양념으로 무친 것이었다. 목구멍에 쩍쩍 달라붙으
며 넘어가는 고소한 산낙지도 생일날 외에는 먹어본 적이 없었다. 낙지를 고르
던 젓갈질을 멈추고서 달실네는 남은 밥을 국에 부어 후르륵 마셔버렸다.
"더 드시오, 엄니. 찬이 입에 안 맞으요?"
병어살을 성우의 밥숟갈에 얹다 말고 며느리가 토끼눈을 떴다. 아마도 달실네
와 거의 동시에 굳강을 놓는 서울네에게 묻는 말이리라. 서울네의 밥그륵은 고
봉으로 올린 윗밥만 슬며시 깎여 있었다.
"아냐, 아냐. 간이 썩 좋은데. 난 실컷 먹었으니 어서 애나 멕이라구."
실컷 먹다니. 더덕구이와 물김치와 메밀묵이나 좀 건드렸을까. 그러나 서울네
는 정말로 맛나게 먹었다는 듯이 넓적한 얼굴 가득 헤픈 웃음을 퍼뜨리며 아직
숟갈도 들지 않은 며느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배가 좀 나온 것 말고는 뚱뚱하지
않은 몸피였으나 그 배가 웃음소리를 따라 꿀럭였다. 아까도 저런 헤픈 웃음으
로 며느리의 혼을 뺀 것이 아닐까.
"우선 찬값이나 하라구."
돈을 만진 지 오랜 달실네로서는 열추 어림할 수도 없는 빳빳한 뭉칫돈을 꺼
내어 며느리 치마에 앵기며 서울네가 말했다. 대문으로 들어서는 바깥 시척만
듣고 서울네가 아가, 에미야, 성우 에미야, 불러댄 통에 놀라서 달려온 며느리이
니 아직 장보따리도 풀지 않은 채일 것이다.
온 지 나흘째지만 서울네가 그렇게 기세 좋게 며느리를 부르기는 처음이었다.
달실네조차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당차게 며느리를 불러본 적이 없었다. 더욱
이 아들을 잃은 지지난 해부터는 꼭 필요한 경우에만 나직이 에미야, 불렀을 뿐
담 밖으로 목소리가 튀도록 며느리를 불러보지는 못한 달실네였다.
치마에 앵기는 돈을 엉겁결에 끌어안은 채 며느리는 잠시 아무 말도 못했다.
- 잠시 바람 쐬러 왔담서 소꿉친구끼리 이기 뭔 해괴헌 짓이여.
이렇게 퉁을 줘야지, 벼르면서도 달실네 역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뱀껍질처
럼 번들번들한, 말로만 듣던 악어 가방 속에서 의뭉하게 똬리 틀고 앉아 살모사
대가리처럼 시퍼런 귀퉁이만 내민 지폐 뭉치 때문이었다. 말만 잘하면 어느 때
든 가방을 열고 한 움큼씩 집어내 줄 것 같은 서울네의 헤픈 웃음 때문이었다.
영감이 영면했을 때의 조의금 이후 처음 보는 뭉칫돈이었다. 그 조의금이 목숨
과 바꿔치기한 양 징해서 이후로 낱돈 만지기도 싫어진 것이니 돈 모양조차도
낯선 달실네였다.
"아가, 따끈한 커피 한 잔 줄래?"
썩은 밀가루처럼 칼끝도 안 들어가게 굳은 두 사람을 흔든 사람 역시 서울네
였다. 그제야 며느리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둔 듯한 말을 두서없이 꺼내었
다.
"돈은 뭔 돈이라요. 울엄니 소꿉동무람서요. 우리도 살 만큼은 사요. 쌀 있것
다, 밭에 푸성귀 널렸것다, 빈 방 있것다, 남정네도 ㅇ는 집이니께 맘놓구 푸욱
쉬셔두 되야요. 우린 참말이제 암시랑토 안 혀요. 울엄니 말벗이 생기니께 외려
좋은디 돈은 뭔 돈이라요. 돈은 뭔,,, 경우ㅇ이."
먼저 며느리가 질겁을 하며 왕지네 털 듯 손사래를 치고는 부엌문으로 나갔
다. 그 바람에 앵길 치마를 잃은 뭉칫돈은 가지런함을 허물고 소반만하게 흩어
졌다. 달실네가 해야 할 말을 며느리가 재빠르게 쏟아놓았으므로 그녀 또한,
"커피는, 식전 댓바람에 뭔 놈으 커피여."
중얼거리고는 설사끼라도 있는 듯 허겁지겁 방을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다.
- 시에미보구 알아서 챙기라는 거여, 뭐여?
시꺼먼 물에다 노른자를 동동 띄워 방으로 들여가는 며느리의 뒤통수에 달실
네는 원망스러운 눈길을 꽂았다.
새벽녘의 바람은 아침이 되었어도 여전히 마당의 낙엽이나 콩지스러기를 휘몰
고 쏘다녔다. 대숲의 일렁임으로 보아서는 바람기가 숙은 것 같은데 털조끼의
앞섶을 헤치는 바람은 코끝에서 알짱대는 바람보다 한결 매서웠다.
밭두둑에 앉아 철 늦게 올라온 당파며 시금치 따위를 일 삼아 거두어서 달실
네가 돌아왔을 때 돈은 다시 가지런한 모습으로 선반에 올려져 있었다. 돈 말고
도 악어 가방, 작은 보석 상자, 드라이어, 커피병 같은 낯선 물건들이 선반이 좁
아라고 들어 차 있었다. 때 절은 왕골 바구니와 약상자와 전화기는 어디다 치웠
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눈에 선 것이 비단 선반뿐은 아니었다. 한 벽을 온통 물들이며
걸린 옷들도, 장지문을 허리 높이로 가로막은 이불도 방문을 반의반쯤 막고 선
이 층짜리 화류장도 모두 처음보는 것들이었다. 미루어오더니 첫날 툇마루에 부
려 놓은 짐더미를 이제사 풀었는가 보았다.
"엄니, 저 옷들 다아 엄니 드린다요, 서울엄니가."
아침상을 들여놓고 며느리가 한쪽에 쌓인 울긋불긋한 옷들을 턱짓했다. 찹쌀
을 섞었는지 자르르르 윤기도는 밥맛이 없는데도 억지 춘향이로 고봉밥을 비운
까닭이 알아지는 것 같았다.
- 서울 엄니? 남정네두 ㅇ응게 푸욱 쉬라구? 누구 맘대루? 덕례, 지년이 뭔
낯으루다 내 집 문턱에 발을 들인다여?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누르느라 달실네는 뜨거운 숭늉을 입바람 불 새도 없
이 서둘러 들이켰다. 그래도 여태껏 먹은 산낙지들이 떨어진 제 발들을 찾으러
목구멍 가득 기어오르는 아주 고약한 느낌을 떨쳐버리기는 어려웠다.
4
밑 모를 고약한 기분에 곤두박질치던 그 처음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단옷
날이었다. 준치국이며 앵두 화채며 수리치떡까지 채반 가득 부쳐 놓고 정순이가
허리를 폈을 때 라디오는 정오를 알렸다.
사윗감과의 첫 만남은 부모님에게도 즐거운 일인가 보았다. 마당 구석에서 닭
털을 뜯으며 주고받는 입씨름이 한결 정답게 들렸다.
"아따, 거 임자는 단옷날 항우장사헌티 막걸리 못 ㅇ어 묵으믄 여름내 더위 탄
다는 속담도 모르능가베."
"뭔 걱정이다요. 항우장사가 집으루 와설랑은 철철 넘치게시리 술사발을 올릴
틴디."
"이제 정온가 본디 은제나 온디야. 목 타 죽겄네잉."
"황소를 타두 곧장은 못 올 게라우."
"그라제잉. 황소 타구설랑은 마을마다 한 바퀴 돌아야 헐 텡게."
"씨름판 생각 그만허구, 거 털이나 야물게 뽑으쇼잉."
"암튼 말여. 머리털 나구는 첨잉게 알구나 있으란 말여."
"오메, 이 양반. 씨름판 귀경 놓치믄 병날 사람 겉네잉."
어머니의 호들갑이 웃음을 터뜨렸다. 밝은 감빛 햇살이 이제 막 댓돌 위로 올
라서는 참이었다. 아버지가 집 안팎을 빗자국이 나도록 쓸고 황소금을 뿌리는
사이에 어머니는 약밥과 수정과를 안쳤으리라.
오가며 들은 소문은 많아도 부모님이 직접 득만이를 대면하기는 처음이었다.
처가에다 황소 한 마리를 갖다 바치지 않고는 절대로 딸을 달라지 않겠다는 득
만의 고집 때문이었다.
- 맹물 떠놓구 맨숭허니 그냥은 못혀. 넘의 집 귀헌 딸을 그러코롬 데려와서
야 쓰것남. 도둑놈 심뽀제.
세 딸의 맏이로 태어나 허드렛일꾼처럼 구박만 받고 자란 정순에게 득만의 고
집은 더없이 귀중한 것이었다. 지금껏 아무도 그녀를 귀하게 여겨준 사람이 없
었다. 말뿐이언정 말 한마디, 눈짓 한 번 따듯하게 받아보지 못한 정순이었다.
황소라니, 모자란 데 없는 남자가 못난 딸을 달라고 나선 것만으로도 애물덩어
리를 치우는 양 반가워할 식구들에게는 참으로 감지덕지할 혼례품이었다.
타고난 목청으로 노래 하나 잘 부르는 - 그것도 식구들은 간살맞은 코맹맹이
소리라고 싫어했다 - 것 외에는 내놓을 것이 없는 그녀였다. 작달막한 키와 오
종종한 얼굴은 그렇다지만, 특히 몸매와는 어울리지 않게 펑퍼짐한 엉덩이에 득
만의 눈길이 머물면 정순은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쩌다 득만의 손
이 손을 더듬을 때에도 어쩔 수 없이 정순의 얼굴은 벌개졌다. 처녀답지 않게
굵은 손복, 불거진 손마디, 못 박힌 손바닥이며 지문 없이 두꺼운 손가락이 못내
민망해서였다.
"농투사니 우리덜 손이사 다 같제. 누군 뭐 별난감."
뒷짐 진 손을 우악스럽게 끌어다가 솥뚜껑만이나 넓은 자신의 손바닥에 얹는
득만이었다.
"하늘 아래 니겉이 맘 넓은 사낸 다시 ㅇ을 꺼여."
글썽이던 눈물을 기어이 쏟으며 정순이가 훌쩍이면, "어여, 한 가락 뽑더라고
잉. 하늘 아래 니겉이 멋들어지게 노래하는 처녀두 ㅇ응게 말여."
씨익 웃으며 그 큰 귓바퀴를 정순의 입 가까이 대는 득만이었다. 그럴 때면
으레 그가 늘상 가슴에 꽂고 다니는 긴 퉁소가 그녀의 젖부리를 살짝 건드렸다.
댓돌에서 놀던 햇살은 어느새 마루 끝을 따스하게 적시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소세를 깔끔히 하고서 정순은 마루에 올라 앉았다. 색경을 넘어지지 않게 세우
고는 대바늘로 머리에 가르마를 곧게 타서 동백기름으로 빤드르르 윤을 냈다.
엉덩이까지 찰랑대는 어리채도 세 갈래로 잡아 꼭꼭 땋아서는 고무줄을 칭칭 동
인 뒤에 빨간 비단 댕기를 들였다.
"서둘 꺼 ㅇ응게 목간이나 혀."
부산떠는 딸이 못마땅한지 아버지가 말끝을 높였다. 삼월이라 삼짇날 제비 새
끼 봄나들이 바람개비가 떴다아 - 하다 말고 정순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버지
의 말소리가 높을 때만큼은 노래는 금물이었다.
"혼인날두 아닌디 목간은 왜 헌다요. 남사시럽게시리."
손질 끝낸 닭 속에 밤, 대추, 인삼, 찹쌀을 잔뜩 넣어서 어머니가 건네면 아버
지는 속이 나오지 않도록 닭의 양허리에 칼집을 내고 닭다리를 서로 꼬이게 집
어넣었다.
"딸년 몸단속은 잘혔능감, 임자?"
음흉하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마루로 올라왔다.
"오메, 이 양반! 별 흉측한 소릴 다 허네잉. 아그들 듣는 디서!"
어머니가 기급스레 목청을 높이는 바람에 놀란 아버지의 손에서 칼이 떨어졌
다.
"아니믄 아니제, 뭔 소릴 지르구 난리여, 여편네가!"
바닥의 칼을 줍는 손에 매서운 성깔이 담겼다.
"에잇! 빌어묵을!"
새삼 신경질이 뻗치는지, 잡고 있던 닭을 흙바닥에 패대기치고 아버지가 일어
섰다.
"참, 아버지두. 지가 뭐 어린애간디요."
애교스럽게 웃으며 정순이가 마루에서 내려섰을 때 이미 아버지는 등을 보이
며 삽짝을 나서는 참이었다. 어머니를 도울까 망설이다가 정순은 색경을 버선목
에 넣고 집을 나왔다. 흙 속에 처박힌 계삼탕이 뱃구레 터진 짐승처럼 보기가
끔찍해서였다.
그날, 득만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돌아오기는 왔지만 식구들이 다 잠든 뒤
황소 등에 업혀서 돌아왔다. 그마저도 먼빛으로 동구에 들어서는 황소를 발견한
정순이가 엎어지며 넘어지며 달려 내려왔을 때는 이미 덕례 집으로 들어간 뒤였
다.
"쉬잇, 억병으루 취한 걸 워쩌. 시방 골아 떨어졌으니께 밝는 날 보더라고잉."
지쳐 놓은 삽짝 밖으로 덕례의 오빠가 숨죽은 목소리만 내보냈다.
"뭔 일루 이제사 온다요. 씨름은 버얼써 해거름 전에 끝났다든디."
원망과 반가움이 반반인 목소리를 다시 숨죽인 목소리가 막았다. 소리가 들릴
때마다 술내와 입구린내가 정순의 코를 찔렀다.
"쉬잇."
여느 때처럼 임의롭게 덕례 집의 삽짝을 밀고 들어가려는 몸을 떡메 같은 남
자의 팔이 막았다. 돼지, 염소 따위의 집짐승을 도살하는 동네 대사 때마다 앞장
서서 도끼를 휘두르고 배를 가르는 일치레를 하는 덩치이니 정순은 그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사지가 묶인 기분이었다.
"오메, 음전헌 처녀가 이기 뭔 짓이여. 이 야밤에 워쩔 꺼여어? 합방이라두 헐
참잉겨, 시방?"
기가 딱 막힌 채 입을 벌리고 선 정순에게 흐흐, 누린내 나는 잇몸을 달빛에
비춰 보이고 덕례 오빠가 들을 돌렸다.
다음날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설거지도 미룬 채 달려간 정순에게,
"버얼써 새벽에 갔는디."
삽짝을 막고 서서 잇몸을 보이며 비아냥거린 사람도 덕례 오빠였다.
- 술허구 웬수졌남. 몸뚱이가 술통이 되도록 퍼마시게. 아, 황소만 타믄 득달
겉이 달오마구 혔잖여. 그러니께 울엄니가 계삼탕꺼정 한 솥 끓여 놨제. 덕례가
아니었다믄 황소뿔에 받혀 죽은 뻔혔담서? 그기 참말여? 덕례 그 지지배 죙일
코빼기두 안 뵈든디... 참말여?
해 떨어지기 무섭게 정순은 통닭과 호리병과 고르고 또 고른 말을 목젖이 닿
도록 싸가지고서 절터로 나갔다. 그러나 밤이 새도록 기다려도 득만을 볼 수는
없었다. 그 이튿날도, 다시 그 이튿날도 득만은 절터에 얼씬대지 않았다.
- 씨름판에서 겁나게 욕봤제? 그깟 황소 ㅇ어두 사위 구박헐분들 아니여, 우
리 부모님. 얌생이 과 준다구 벼르시든디, 은제 올겨?
투정은 싹 빼고 어르고 달랠 말만 가슴에 남았어도 정순은 득만을 볼 수 없었
다. 대신 까닭을 알 수 없는 소문의 형틀에 묶여서 정순은 숨도 제대로 쉬 수
없었다. 누가 누구를 먹었다는니, 누가 누구를 버렸다느니, 고약한 말질이 돌림
병처럼 마을에 돌고부터는 동네 사람도 집안 식구도 얼굴 보기가 소름끼쳤다.
왜 무엇 때문에, 도대체 뭘 잘못했기에 갑자기 하늘이 새까만 먹통처럼 보이
는 것일까. 세상을 살기가 이리도 싫어지는 것일까. 끼니를 잇는 것이 이리도 징
그러운 것일까.
다시는 바람을 타고 흐르는 퉁소 가락을 들을 수 없으리라. 솥뚜껑 같은 손바
닥에 험투성이의 손을 얹을 수 없으리라. 퉁소가 젖부리에 닿는 것을 모른 척하
고서 아이고 대고 흐응, 하는 흥타령을 부를 수도 없으리라.
"사내나 지집이나 그저 두리뭉실허게 생겨야제. 인물 잘나믄 못쓰능겨. 인물값
꼴값 두루 허기 십상잉게 말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득만네와 덕례네가 서울로 솔가했다는 말을 전한 다음 어
머니가 정순을 위로한다고 덧붙인 말이 고작 이것이었다. 뼈에 도배한 듯 깡마
른 딸의 얼굴을 맞보지 못한 채 어머니는 이를 옥물며 피눈물을 쏟았다.
5
"지옥 같애!"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찍어내며 서울네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부르르 머리
를 털자 불을 때던 달실네에게 물이 튀었다.
"일, 일, 일! 그저 넌 밤낮없이 일이로구나. 예나 지금이나, 젊어서나 늙어서나
일벌레야. 지겹구 넌더리가 나지두 않니?"
서울네는 부엌 구석에 쌓인 볏단 하나를 가져다 아궁이 가까이 놓고 털퍼덕
주저앉았다. 그바람에 부지깽이로 불구멍을 터주다 말고 달실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 살판 났능감. 뭔 심술이여.
말을 내는 대신 달실네는 눈을 흘겼다. 눈치를 아는지 모르는 지, 서울네는 볏
단을 털어서 아궁이에 들이미는 중이었다. 타타다닥 발춤처럼 재빠르고 경쾌한
소리와 잔불꽃들이 아궁이 밖으로 나오자 서울네가 윗몸을 뒤로 젖혔다.
"그만 때두 돼야. 웬만큼 엉겼응게."
몸을 일으켜서는 솥에 간수를 치고 달실네는 서울네와 좀 떨어진 곳에다 볏단
을 깔고 앉았다. 짚수세미에 재를 듬뿍 묻혀서는 놋그릇을 썩썩 닦기 시작했다.
스텐그릇이며 사기그릇까지 며느리는 푼돈이 목돈 되는 대로 사다가 쟁였지만
제사상에 올리기는 놋그릇이 제격이었다. 가스 렌지 놔두고 장작불에 두부 만들
기가 제격이듯이.
"아, 일 좀 그만하구 쉬어. 쉬라구."
서울네가 돌아보며 쯧쯧 혀를 찼다.
"일손 놓으믄 숨도 놓은 거이제, 워디 사능 거 겉응감."
"아유, 이런 답답이. 어떻게 사람이 일만 하구 살아 그래. 짬내서 커피두 마시
구, 낮잠두 자구, 마실두 다니구, 음악두 듣고, 테레비도 보구 그래야 동물이 아
닌 인간이지. 며느리가 그러는 데 집 밖에두 안 간다며?"
"나갈 일이 있어야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촌에서 밖일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덕례가 서울로 간 몇
년 뒤, 아버지의 주먹다짐을 못 견뎌서 쫓겨나다시피 시집 간 곳은 아들 둘 딸
린 홀아비집이었다. 열 살 아래인 새댁이 이뻐선지, 마을의 말돌임을 막아줄 셈
에선지, 그는 정순의 뜻대로 밖일을 시키지 않았다. 달실네 또한 죽은 듯이 들어
앉은 달팽이처럼 바깥 세상은 눈짐도 하지 않았다. 대낮에 나들이한 것은 친정
어머니와 아버지가 죽었을 때뿐이었다. 연우 애비 때에도 달실네는 물에 불어터
진 주검과 함께 병풍 뒤에 있으면서 문상객들을 보지 않았었다.
"나갈 일이 없다구?"
기가 차다는 듯이 서울네가 뒤로 돌아앉으며 혀를 끌끌 찼다. 아랑곳없이 달
실네는 짚수세미 가득 재를 묻혀서 놋그릇의 더께를 힘들여 닦았다.
"아유, 나갈 일이야 천지지. 테레비 보면서두 몰라? 넌 제주도도 울릉도도 못
가봤다며? 남들은 동남아루 유럽으루 날아 다니는 판에 넌 정말 딱하구나. 이제
어디 사람 사는 꼴이냐. 염라대왕만 없다뿐이지 여긴 지옥이라구. 밖에서는 달나
라를 가는지 별나라를 가는지도 도통 모르고 시골 구석에 두더지처럼 처박혀서
죽도록 일이나 하구 사니 원."
말 끝에 서울네는 다시 쯧쯧 혀를 찼다. 가마솥에는 허연 순두부가 불기운을
따라 떠다니며 구수한 냄새를 풍겼다.
"불이나 꺼부러. 너무 쫄믄 두부맛이 ㅇ응게."
딱하다는 듯한 서울네의 눈빛이 보기 싫어서 달실네는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
다. 서울네가 코를 벌쭘이더니 잽싸게 돌아앉아 아궁이의 장작들을 꺼내어 재에
비볐다. 투실한 몸피에 비해 잰 몸놀림이었다.
"노는 입에 염불허기제. 일 놓으믄 뭔 맛으루다 살 꺼여. 일맛이 나야 살맛두
나구 밥맛두 나능겨. 시상 귀경이야 가만히 방에 앉아 테레비만 봐두 실컷 허
제."
말하고 나자 새삼 지난 사십 년 세월의 무게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아서 달
실네는 짚수세미를 놓고 두 다리를 뻗었다. 일이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개
미떼처럼 달려드는 많고도 많은 시간들. 문어발처럼 휘어감고 놓아주지 않는 득
만과의 추억들. 버림받은 여자라는 그 뼈시린 눈총들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살아서 욕되느니, 이렇게 욕되게 사느니 차라리 죽으리라. 득만이가 준치를 잡
던 샛강에 빠져 죽으리라. 죽창처럼 날카롭게 베어낸 대밭에 엎어져 죽으리라.
흥타령을 부르던 절터에서 통곡이나 한바탕하고는 얼어 죽으리라.
기필코 죽으리라. 텃밭에 감자를 심고 나서, 고춧대나 세우고 나서, 콩이나 털
고 나서, 설이나 쇠고 나서 그리고 나서는 반드시 몸뚱이라는 욕된 껍질을 벗으
리라던 맹세는 언제나 그 다음 일에 치여서 다시 미루어졌다.
- 또 하루가 가부렀네잉.
막막하게 남은 길고긴 세월의 길이에 몸서리치며 흐느껴 울면 어둠 속으로 퉁
소소리와도 같은 나직한 득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밤도 있었다.
- 니는 성깔이 물러서 탈이여. 원체 모지락스럽지 못허니께 평생 손해만 보구
살 게 뻔혀. 니가 잘허는 거라곤 노래뿐이여. 정순이 흥타령은 서울 가믄 명가수
깜이제. 어여 노래나 뽑아봐.
집 뒤로 유자나무밭을 병풍처럼 감싸면서 치솟은 대밭은 시집 온 첫날부터 달
실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득만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퉁소 가락을
콧노래할 수 있었던 지난날처럼, 멀리 텃밭에서 댓이파리들이 햇살을 튕기며 흔
들리는 것만 보아도 대밭이 내려는 가락쯤은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가락
은 한 번도 달실네의 입에 오르지 못했다. 퉁소 가락뿐 아니라 육자배기도 흥타
령도 잊은 지 오래인 달실네였다.
"엄니, 이것 쪼까 드시요잉."
며느리가 고소한 내음을 풍기며 들어오자 달실네는 놀란 듯 다시 짚수세미를
집어들었다.
"뭔디?"
"핫케이크란다요."
어느새 달실네 쪽으로 돌아앉은 서울네 앞에 며느리가 쟁반을 놓았다.
"어서 났다냐?"
달실네가 뜨악한 낯으로 묻자 며느리는 서울네의 눈치를 살폈다. 날이면 날마
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먹어대는 서울네의 군것질에 며느리는 매달려 살다시피
했다. 꿈도 일꿈만 꾸는 가을 복판인데 서울네가 돈푼이라도 내놓았으니 망정이
지 집안 들어 먹을 짓거리였다.
"입이 궁금해서 말야. 내가 사오라구 한 거야. 아유, 색깔 제대로 냈네. 노릿노
릿 먹음직한데?"
칭찬이 즐거운지 며느리가 활짝 웃었다. 연우 애비가 죽고서 이렇게 활짝 웃
는 며느리를 언제 보았던가.
- 서울엔 특수 학교라는 게 있어. 연우처럼 머리가 비상한 천재들만 다니는
데야. 열 몇 살에 박사 딴 애두 있으니 말 다 했지 뭐.
그 특수 학교에 연우를 넣어주겠다고 장담했으니 며느리가 신이 난 것도 무리
는 아니리라. 바로 오늘 아침 밥상머리에서의 일이었다.
- 은제꺼정 있을 참이여. 낼모레가 제산디.
오늘은 꼭 이 말을 하고야 말리라 벼르던 참이어서 달실네는 어이가 없었다.
친구 남편의 제사를 앞두고도 서울네는 떠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아침 잠자리에서 커피를 마시고, 다시 늘어지게 잔 다음 맞선 보는 큰애기처
럼 공들여 치장하고는 점심상을 받고, 그 다음부터는 줄창 달실네를 따라다니다
가 텔레비전에서 자정 뉴스를 보고 애국가가 나와야 밤세수를 나가는 것이 서울
네의 일과였다. 집장사 잘해서 떼부자 된 얘기, 자식 넷을 한자리하도록 잘키운
얘기, 아메리카로 아프리카로 쏘다니며 여우 목도리와 밍크 코트 산 얘기, 유럽
어느 나란가의 경치가 너무 근사해서 눈물 흘린 얘기.... 달실네가 새로운 일거리
를 찾아 몸을 놀리는 것만큼이나 부지런하게 새로운 얘기 거리를 쏟아내는 서울
네였다. 가끔 가다 말 끝에,
- 여긴 지옥 같아. 일, 일뿐이야. 사람 사는 낙이 없으니 말야.
후렴처럼 붙이기도 했다.
- 왜 온겨. 지옥에 왜 왔능감. 시방이라두 싸게 가랑게. 안 잡을 텡게 말여.
일을 거들기는커녕 허구한 날 졸졸 붙어다니며 쓸데없는 참견만 하는 서울네
에게 매몰차게 쏘아주려다가도 달실네는 참았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아
서였다.
쑥을 캐면 한식경도 못 돼서 쌀사루와 섞어 찐 쑥버무리를 해오던 친구였다.
들놀이를 나갔다가도 먹음직한 배추만 보면 그 자리에서 겉절이를 해내던 친구
였다. 귀걸이에 목걸이에 매니큐어까지 바르고 다녔지만 닥치는 대로 시원시원
하게 해내던 그 일솜씨만 아니었다면 달실네와 어울렸을 리도 없었을 것이었다.
달실네가 참은 것은 서울네의 옛모습을 안 잊었기 때문이었다. 집장사를 하면서
자식 넷을 키운 억척이가 일에 몸서리를 치는 까닭이 꼭 늙음 탓만은 아닐 것
같아서였다.
온 지 얼마 안 돼서였다. 바깥 툴입도 안 하고 어디 전화 한 번도 걸지 않고
심심해 하는 눈치길래,
"영감 산소에 벌초나 갔다오제잉."
달실네가 먼저 말을 걸었었다.
지난 봄, 당지마을 선산에다가 장득만을 안장할 때 서울서 장의차가 다섯 대
나 오는 바람에 샛터마을까지 뻑적지근했던 기억이 나서였다. 그러나 며느리가
전해 준 말대로라면 이번 추석에는 아무도 성묘를 오지 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영감? 어느 영감?"
"어느 영감이라니, 그리 뭔 말."
말 끝을 서울네가 낚아챘다.
"장득만? 아이고, 그 인간 말도 꺼내지 말아. 무덤을 파버리고 싶도록 치떨리
니까."
서울네가 낯빛을 바꾸며 쏘아댔다. 옆모습이 어찌나 싸늘하게 굳어 있는지 겁
이 나서 다시 말도 못 걸 지경이었다.
"서울엄니, 이렇코롬 설설 끓을 때 묵는 순두부맛이 기가 막히다요. 쪼까 드시
요잉."
언제 들어왔는지 며느리가 사기 대접 가득 순두부를 퍼서 서울네에게 안겼다.
메밀가루와 말린 쑥, 두부판, 두부를 짠 보자기가 부뚜막 여기저기에 널린 것을
보니 그새 몇 번 들락인 모양이었다.
"아따, 성우야. 제사 음식 손 타믄 못쓴다잉!"
부엌문께에 놓인 채반의 전을 잽싸게 집어 도망치는 성우에게 며느리가 소리
쳤다. 날이 저물면 광주에 사는 둘째 아들 길수와 큰손자 연우와 아랫마을의 시
동생 내외도 제사를 지내러 들이닥칠 것이었다. 제기로 쓸 놋그릇만 닦아 대충
챙겨놓고 달실네는 허리를 쭈욱 폈다. 순두부의 뜨거운 김을 받아서인지 서울네
의 얼굴은 부황든 듯 누렇게 떠보였다.
- 내일은 가겄제. 설마 허니 남의 영감 제사상을 구경헐라구.
즈그 영감 제사도 입동 전이람서, 설마 허니 여그서 지내기야 허겄남. 자손들
도 쌨담서.
성우에게 줄 순두부를 한 그릇 떠가지고 달실네는 부엌을 나섰다. 실비라도
흩뿌릴 듯 잔뜩 흐린 하늘에는 대바람 소리가 가득했다.
6
그날따라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랜만에 푸지게 내리는 눈을 맞으며 영감은 마을의 남정네들과 토끼몰이를
나갔다. 아이들도 썰매를 지고 샛강으로 가버려서 달실네는 한갓지게 바느질감
을 벌려 놓고 인두질을 하던 참이었다.
"실례합니다."
숨소리, 발소리, 기침소리, 부스럭대는 작은 기척에도 임자를 알아채는 여느
아낙들처럼 달실네는 방안에서도 단박 그 목소리의 임자를 알 수 있었다. 날마
다 듣는 낯익은 목소리처럼, 바람의 결이 달라질 때마다 음정이 변하는 대숲소
리처럼 단박 알 수 있었다. 물론 단옷날 이후 한 번도 부르지 않았고, 또 한 번
도 듣지 못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은 입만 열면 오랜 시간의 문턱을 가벼이
넘어서 술술 풀려나올 것 같은, 바로 정순의 흥타령을 청하는 득만의 퉁소소리
가 아니겠는가.
"실례합니다."
버선코를 꺾던 인두를 화로에 꽂고 달실네는 일어섰다. 갑자기 일어나 탓인지
눈앞이 캄캄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깊이 모를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것 같은
어지럼증으로 문 쪽이 어딘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달실네는 무조건 찻
발을 내딛었다. 고쟁이가 화로를 스치면서 인두를 떨구었는지 탁 소리에 이어
탄내가 났지만 괘념치 않고 달실네는 방문을 화들짝 열었다.
- 따져야제잉. 독허게 맘묵고 따져야제잉.
무엇을 어떻게 따져야 할지 아무 마련도 없었다. 그저 고장난 축음기처럼 머
릿속을 뱅뱅 도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주인은 안 계십니까?"
정강이까지 닿는 밤색 외투에 밤색 모자를 눌러 쓴 남자가 말했다. 멀끔한 허
우대에 몸피도 굵어졌지만 우뚝 솟은 콧 등에 비해 눈매가 서글한 그는 역시 황
소꿈을 앗아간 그녀의 남자 장득만이었다. 대충 쓸어넘긴 더벅머리와 서투르게
깎은 수염자리와 여기저기 긁힌 상처가 떠나지 않던 얼굴이 십여 년 세월의 인
두질로 희멀끔해지긴 했지만 그녀의 남자임에는 틀림없었다.
"안 계신디요. 뭣 땀시 찾으시오?"
달실네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숫돌에 벼리고 벼린 기나긴 세월의 날이 치잉
우는 듯한 귀울림을 추스르기 어려웠다.
- 황소만 타믄 득달겉이 달려오마구 철썩같이 맹세혀놓구, 워쩐 일이여! 딴 년
이랑 눈 맞아 도망쳐놓구설랑 이제사 뭔 낯으루 날 찾아온 겨!
목청 돋우어 따지기에는 사내의 얼굴이 너무 편안해 보였다. 머리를 틀어올리
고 털조끼의 앞섶을 여미고 부숭숭한 얼굴로 신발을 질질 끌며 나온 깡마른 여
자를 그는 알아보는 것 같지 않았다.
- 정순이, 나여. 아, 득만이랑게.
사내가 웃으면서 솥뚜껑같은 손을 내밀었다면,
- 그란디... 뭔 일로 왔능감.
시원찮은 듯 대답하면서도 달실네의 가슴에는 환하게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을
것이었다. 헌데 달실네의 느낌대로라면 사내는 사죄하러 온 것도, 데려가려 온
것도 아니었다. 그가 달실네를, 아니 박정순이를 전혀 몰라보고 있다는 점이 너
무 기가 막혔다.
한밤중에 일어나 미친 듯이 절터로 달려가던 일, 말라깽이 딸을 홀아비에게
여의자마자 어머니가 죽은 일, 영감 몰래 뱃 속의 것을 지워버리고 몸져 눕던
지난 일들이 이빨을 으드득 갈며 부아를 돋우었다. 드렇제만 달실네는 끓는 속
을 지구시 누르고소 말없이 장득만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저 멀리 고샅길을 달
려 오는 영감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이고, 서울양반. 이 누추헌 집에 워쩐 일이시요잉. 귀헌 걸음 허셨네요잉.
어서 안으로 싸게 드시오, 추웅게."
영감은 일찍이 장득만을 알고 있는가 보았다. 그러고 보니 달실네도 영감에게
서 서울양반에 대한 말을 들은 것이 있었다. 제가 지을 터를 잡으러 왔다느니,
동네에 스피커를 설치해 준다느니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 서울양반이 장득만인 줄 달실네는 정말 몰랐다. 영감 또한 이웃 동
네까지 뚜르르 퍼지도록 흉한 소문 끝에 서울로 뜬 덕례의 남편이 서울양반인
줄은 모른 모양이었다. 알았다면 득만의 손을 끌어다 아랫목에 앉히고 달실네에
게 고구마술을 내오도록 이르지는 않았으리라.
장 프러덕션 대표
한국 국악기사 사장
장 득 만
전화 00-000-0000-0
"집장산지 건축업인지루 떼돈 벌었다드먼 아닝가베. 이기 뭔 뜻이다요?"
장득만을 문 밖까지 배웅하고 온 영감에게 달실네는 방바닥의 명함을 손가락
질했다.
"어, 잃어블믄 큰일나제, 클나."
대답도 없이 영감은 금박으루 테두리를 두른 명함을 두 손으로 받들 듯이 집
어서는 바람벽에다가 이름과 전화번호를 옮겨썼다.
"횡재여, 횡재. 임자! 돈 생기믄 거 임자 나들이 입성이나 반반한 걸루 한 벌
하자구. 시집 올 때 못해 준 비단 두루마기두 한 벌 허구 말여."
술동이가 바닥나도록 지나치게 마신 모양이었다. 영감의 얼굴은 전에 없이 발
그레 홍조를 띠었다.
"대체 뭔 일루 왔다요."
술김을 피하느라 얼굴을 돌린 채 달실네 또한 전에 없이 샐쭉하게 말을 뱉았
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장득만에의 노여움이기도 했고 그를 지극 정성으로
대접해 보낸 영감에의 분풀이이기도 했다.
"허허, 임자. 대밭 말여, 그걸 큰 거 한 장 주겠다지 뭐여. 논 열 마지기 사구
두 남을 돈을 말여. 허허, 참 별일이시."
"뜬금ㅇ이 그기 뭔 소리다요."
뜻밖의 일이어서 달실네의 눈은 자연 휘둥그레졌다. 부엌으로 내가려던 술상
을 든 채 발을 옮기지 못했다.
"허허, 뭔 소리긴. 대밭을, 아니 밭을 사겠다는 말두 아니구 대나무만 몽땅 사
겠다아 그러더란 말시. 허허, 거 서울양반이 눈 하나는 밝드먼. 이 근동에서 젤
로 크고 오래 묵고 또 다들 누렁댄디 우리 해만 오죽이라나 하는 꺼먹대니께 맘
에 쏘옥 들었든 거이제."
벌써 돈을 받기라도 한 듯, 영감은 턱을 손바닥으로 쓸며 사람좋은 웃음을 자
꾸 웃었다. 생각할수록 기분이 좋고 생각할수록 신명이 솟는 모양이었다. 장득만
은 저녁까지 먹고서는 자정이 넘도록 앉아 있다가 돌아갔다. 가면서 부엌으로
난 작은 문을 열고는 "저녁 맛있게 먹었습니다." 뜻밖으로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반절을 했다. 달실네가 외면하자, "술이 참 맛있습니다." 한동안 그녀를 쳐다보더
니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는 문을 닫았다.
"꺼먹대는 뭣에 쓴다요?"
"낸들 아남? 거 퉁손가 젓댄가 그런 거 만든다고 허등만. 대밭이야 싸악 비어
부러도 석 달이믄 시퍼렇게 솟으니께 횡재한 택이제, 횡재. 허허. 이참에 광주의
큰놈 방도 얻어 주고 텃밭도 늘려야 쓰겄구먼."
"안 돼야요!"
호리병이 깨지는 듯한 목소리에 스스로가 놀라서 달실네는 하마터면 술상을
메칠 뻔했다. 엎드려서 뭔가를 끄적이던 아이들도, 술기운으로 녹작지근해진 몸
을 이불더미에 기대려던 영감도 벼락맞은 나무처럼 일그러진 눈을 달실네에게
치떴다.
- 이라믄 안 돼제. 안 돼야.
속마음에 채찍질하듯 그녀는 눈시울을 위로 흡떴다.
"죽으믄 죽었제, 그 인간헌티는 못 판당께요!"
다시 똑똑하게 말그루를 박고 나서 달실네는 방을 나섰다.
- 후우 -
알지 못할 설움덩어리가 목구멍을 메웠다. 까마득하게 잊은 줄 알았던 눈물이
후드득 개수통으로 떨어졌다. 시집 온 뒤로 울음자국을 보인 일도 없었고, 소리
를 지른 적도 없었는데.... 험한 꼴을 보인 것이 못내 열적었다. 달실네는 식구들
이 모두 잠 든 뒤에야 방으로 들어갔다. 불은 꺼져 있었으나 영감의 코고는 소
리는 들리지 않았다.
"섭섭했남?"
이불 속에서 영감의 손이 달실네의 손을 찾았다. 달실네가 골아눕자 허허, 영
감의 나직한 웃음과 뜨거운 몸뚱이가 어둠 속으로 거너왔다.
"팔기 싫음 말제. 한 팔믄 되잖여. ...나이가 몇인디 그랴, 시방. 여직두 처녀적
맘인가베."
7
괘종시계가 일곱 번을 쳤다. 달실네는 천천히 다래끼를 들고 일어섰다. 며느리
가 유자 상자를 이고 첫차로 나간 뒤 줄곧 마루에 앉아서 맥을 놓고 있었나 보
았다. 올해는 유자가 유난 스럽게도 많이 열려서 가지 휘어지게 열린 것도 놀랍
지만 때깔 또한 얼마나 고운지.
- 아유, 이쁘기두 해라. 샛노란 약병아리 같구나. 이 유자를 받는 조상은 기분
두 째지겠는 걸.
서울네가 호들갑을 떨 정도였다. 유자뿐만이 아니었다. 해마다 간신히 모양새
나 갖추던 포도와 양다래도 올해는 단물이 흠뻑 들어서 가을내 성우와 동네 꼬
마들의 군입거리가 되었다.
- 다아 임자가 걱정돼서 허는 짓이닝께 말리지 말란 말여. 늙은이는 손에 쥐
구 죽을 망정 돈쌈지가 비믄 안 돼능겨. 아무래두 낫살이나 더 먹은 내가 먼첨
죽을 테니께, 거, 영감 ㅇ다구 삯일하러 밖에 나댕기지 말구 저것들 팔아 쓰란
말여. 유자나무 한 그루면 딸 시집 보낸다구 허니께 자식들이 아무리 보채두 유
자밭을 팔지는 말어. 알것남? 망녕 들기 전에는 광 열쇠두 며느리 주믄 안 돼.
임잔 모지락스럽지 못해서 그거이 늘 걱정이랑게.
벌써 십 년이나 되었나 보다. 뱃구레가 졸아들도록 천식이 심해지자 영감은
무슨 생각에선지 집 안팎으로 과실수를 심기 시작했다. 몸이 축난다고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마당 구석에서 구렁이 같은 몸체를 뻗어올려 잔줄기를
친 포도나무, 장독대 옆으로 들어앉은 양다래밭, 대문 앞의 아름드리 개오동나무
와 감나무는 모두 영감이 죽던 해 봄에 몸 사리지 않고 터 잡아 놓은 것들이었
다.
- 성님두, 참. 아, 장대 겉은 아들이 넷이나 되는디 형수님이 뭔 걱정이라요.
논농사를 배메기하라는 영감의 부탁이 유언을 듣는 기분이었던지 시동생이 떨
떠름한 낯으로 핀잔을 주었다.
- 거, 모르는 소리여. 애비 ㅇ는 자식덜, 의붓에미 등이나 안 치믄 효자제, 효
자.
그러나 영감의 걱정과는 달리 아들들은 별탈없이 제 갈 길을 찾아갔다. 광열
쇠를 받은 며느리도 품앗이에 지쳐 몸살을 앓을 망정 달실네를 내보내지는 않았
다. 마음에 늘 걸리는 것은 일찍 애비를 잃은 손자들뿐이었다. 물난리가 나던 지
지나 여름, 불어 난 개울물을 얕잡아본 것이 탈이었다. 휩쓸려 내려가던 사람은
구했지만 연우 애비는 살아 돌아오지 않았다.
"엄니, 유자 따러 가실라요?"
"오오냐."
발소리를 들었는지, 아랫방에서 길수의 잠 덜 깬 목소리가 새 나왔다 어제 늦
게까지 친구들과 술추렴을 했으니 아마도 며느리가 돌아와야 일어날 것이었다.
"그냥 두시오, 엄니. 이따 지가 싸악 따버릴라요."
곳집 앞에 세워 둔 장대를 들고 뒤꼍으로 돌아드는데 다시 하품을 문 소리가
따라왔다.
유자밭에 오르자 마을이 한눈에 잡혔다. 언제나처럼 마을은 돼지, 닭, 개들이
짖는 시끄러움과 산등성이를 넘어오는 빛살로 아침을 꾸미는 중이었다. 마을의
아랫도리께를 적시며 흐르는 샛강도, 마을 옆의 산으로 치뻗어오르는 길 끝의
절터도 이제 막 말갛게 태어나고 있었다.
- 망할 것. 왜 안 가능겨!
밤새 불을 켜놓은 채 뒤치락거리길래 짐을 싸나보다 했는데 첫차가 떠나도록
서울네는 일어나지를 않았다.
"첫차로 가야제. 낮차로는 해 안에 서울 못 떨어질껴."
어제 한마디 슬쩍 던졌을 때도 못 들은 척 대답을 않던 서울네였다. 설마 오
늘 첫차로는 가겠거니 하던 마지막 기대마저 없어지자 달실네는 야릇한 감정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아마도 딱히 뭐라고 집어 말하기 어려운 그 느낌을 삭이
기 위해서 첫 차가 떠난 뒤의 시간 반을 마루에 앉아 있었나 보았다.
서러움이랄 수도, 원망이랄 수도, 한이랄 수도 없는 그 무엇이었다. 뿌리 없는
물풀처럼 작은 물주름에도 간단 없이 휘둘리는가 하면, 떠 다니는 풍선처럼 실
바람에도 곤두박질치는 그 무엇이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느것 하나도 가질
수 없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깨고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
옆에서 치이기만 하는 울분의 그 무엇이었다.
"아유, 숨 차. 숨이 차서 죽, 겠네."
서울네가 숨을 할딱이며 올라와서는 달실네를 보자 발을 멈추었다. 아직 유자
는 반 다래끼도 못 차 있었다.
"아니, 정순아. 새벽부터 이게 무슨 짓이냐, 응? 아들, 손자, 며느리, 그 시퍼런
것들 다아 놔두고서 왜 환갑 늙은이가 유자를 따냐구."
"날 찾응겨?"
이렇게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난 적이 없었으므로 달실네는 서울네가 떠날 인
사를 차리러 올라온 줄 알았다. 버스를 놓치기는 했어도 감이며 유자를 실어나
르는 트럭이 빈번해서 서울행 차편을 구하기는 손쉬웠다. 그러나 부수수한 파마
머리와 보라색 긴 치마는 결코 떠날 사람의 차림새가 아니었으므로 달실네는 곧
시큰둥해졌다.
"아유, 제 키보다 서너 배는 긴 장대를 들고서 휘청대는 꼴이라니. 늙은이 노
망이 아니구서야 원. 그거 이리 내, 정순아."
어제는 연우와 성우와 달실네가 길수에게서 장대 끝에 물린 유자를 받아 다래
끼에 담고 한쪽에서는 며느리가 크기를 갈라 상자에 담고 서울네는 먼발치에서
구경만 했었다.
"아, 뭔 참견이여?"
"장대 이리 달라구, 정순아."
"정순아? 정순아, 라니."
장대를 뺏기지 않으려고 힘겨룸하다가 갑자기 장대질을 멈추고서 달실네는 서
울네를 맞보았다. 늘 발치에서 어른대던 어떤 기운이 머리털을 세우며 길길이
뻗는 기분이었다. 쌀쌀맞은 댓거리에 서울네는 움찔 놀란 모양이었다.
"왜, 왜 그래, 정순아. 네가 힘들어 하길래 내가 대신 장대질 하겠다는 데 뭐
잘못 됐어?"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조금도 숙어드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 맨들맨들한 사투리 말여. 그 사투리가 듣기 싫어서 그려."
"사투리?"
서울네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어 까르르르 웃음소리를 날렸다. 달실네의 얼굴
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 서울말이 왜 사투리야. 정순이 네 말리 사투리지. 이상괴상한 전라도 사투
리!"
장대는 어느 틈에 서울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내 말이 사투리라고요? 원 별 망측헌 소리 다 듣겄네잉. 아, 전라도 사람이
전라도말 쓰는 거이 워찌 사투리여? 니 그 괴쩍은 말뽄새가 사투리제잉. 그라믄
니는 뭣 땀시 잠꼬대를 전라도말고 한다냐잉?"
힐끗 달실네를 보더니 대답할 필요도 없다는 듯 서울네는 장대질을 시작했다.
서울네라고 장대질이 손에 익을 리는 없었다. 장대 끝의 가위에다가 유자 꼭지
를 넣고 비틀거나 잘라서 유자를 잎사귀에 묻은 가지째로 따내야 하는데, 서울
네는 꼭 감을 따듯이 장대로 가지를 툭툭 쳤다. 꼭지 실한 유자이므로 잘 떨어
지지도 않으려니와 떨어져도 멍이 들기 십상이었다. 멍이 든 유자는 제사상에
올리지도 않지만, 저며서 유자차를 끓이기에도 나빠서 장에 내봤자 값이 똥금이
었다.
"안 돼야, 안 돼야! 그러코롬 마구 치면 워쩌!"
보다 못한 달실네가 잔소리를 했다.
"어쨌거나 유자만 따면 될 거 아냐. 저리 비켜. 다친다구!"
"안 돼야! 저런, 저런. 큰 가지를 마구 꺾잖나베. 아, 나무 버린당게 그라네잉."
"거, 참. 천리 먼데서 찾아온 소꿉동무한테 되게 야박하게 구네. 아, 이깟 나무
몇푼이나 간다구 그래. 이 유자, 몽땅 내가 사면 될 거 아냐!"
"오메! 아까운 유자 다 죽네잉!"
"저 엄살 떠는 것 좀 봐. 아, 내가 나뭇값 준다니까. 얼마야, 대체. 오십만 원?
백만 원?"
심통맞게 큰 가지 하나를 우지끈 꺾어놓더니, 무슨 재미가 들렸는지 서울네
는 유자나무를 마구 후려치기 시작했다.
"미쳤남?"
달실네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밤나무 털 듯 모진 모잴에 나뭇잎들이 우수
수 떨어지자 나무는 금세 앙상해졌다. 가리개를 잃은 유자는 가지째로 꺾인 채
나무에 볼썽사납게 매달려 대롱거렸다.
"잡년!"
달실네가 달려가서 거칠게 장대를 낚아챘다. 장대는 휘우뚱 중심을 잃고 쓰러
지면서 서울네의 명치끝을 때렸다.
"정순이, 네 년이 날 쳤겠다."
"그래, 쳤다! 어쩔텨!"
"흐흥!"
비웃음과 함께 서울네가 몸을 날리더니 달실네의 머리채를 잡았다. 머리털이
뭉턱 빠져나가는 아픔을 참느라 달실네의 입술에서 피가 번져나왔다.
"아이구구! 나 죽는다아!"
끌려만 다니던 달실네가 돌연 서울네를 힘껏 발길질하자 벌렁 나동그라지며
서울네가 비명을 질렀다.
"이 쌔려 쥐일 년!"
틈을 주지 않고 달실네는 서울네의 튼실한 몸뚱이를 덮쳤다.
"덕례, 이년! 이 잡년! 내 다아 알제. 알았다구! 니년이 먼첨 치맛속을 보이며
득만이를 꼬셨제?"
"뭔 소리여, 뜬금ㅇ이!"
"바른 대루 대란 말여! 니년이 단옷날 득만이를 술 멕여설랑은 꼬셨제? 니 오
래비랑 작당해서 꼬셨제? 바른 대루 대란 말여, 이 잡년아! 그러잖음 오늘이 니
년 제삿날잉게!"
눈을 번득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달실네는 나무에 걸어 놓은 낫을 발견
했다. 얼른 낫을 가져다가 서울네의 목에 날을 대니 서울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오메, 득만이 땜시, 그 잡눔 땜시 시방 이 지랄잉겨? 오메, 정순이. 너 이제
보니께 사람 몇 쥐일 년이구나잉. 내 워쩐지 고향 땅에 꼭 한 번 오고 접다 혔
드먼. 뭔 빚 갚을 것이 남은 것 마냥 찝찝하다 혔드먼. 아, 이 낫 못 치울겨!"
사지를 벌벌 떨면서도 서울네의 얄팍한 입술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잡년, 잡
년, 잡년, 달실네도 입술을 달싹였으나 스스로는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흰자위를 드러낸 눈, 딱딱 맞부딪는 이빨, 낫을 든 손이 신대를 쥔
양 덜덜 떨렸다.
무슨 짓을 저지른다 해도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신력이지 자신과는 아무 상
관이 없는 듯했다.
"잡년! 어디 사내가 ㅇ어서 남의 사내를 붙어 묵냐, 이년아!"
"아이고메, 잡년! 내가 니년 액막이 해준 줄이나 알더라고."
"싸가지 ㅇ이 뭔 소리여. 덕례, 니년 땜시 내 신세가 요래 뒤틀렸는디. 외려 나
헌티 덤터기를 씌우구 지랄이여, 지랄이!"
"신세 뒤틀린 건 나여, 나. 아, 날 보믄 몰러! 순 날건달 겉은 놈 잘못 만나서
꽃 겉은 내 청춘 홀라당 말아먹구설랑은 늙어서 오두가두 못허는 내 꼬락서니를
보믄 모르냔 말여!"
"잡년! 그라믄 내 청춘을 요지경으루다 망친 년눔들 뒤끝이 좋을 꺼여?"
"그려, 니년 말이 맞어! 좋은 것두 다 한때제. 일껏 고생 고생혀갖구 배가 부
를 만허닝께 거 무슨 프러덕션인가 뭔가를 차려설랑은 노래께나 허는 년들 꽁
무니를 쫓아다니는디, 오메, 징헌 거, 징헌 거어어엉."
깔린 몸을 뺄 생각도 않고 달실네는 입을 크게 벌려 울기 시작했다. 갑작스러
운 울음소리에 달실네는 잠시 멍했으나 곧 낫을 거두고서 서울네 옆에 몸을 눕
혔다 눈을 감자 몸뚱이가 땅 속으로 스며드는 듯 아득한 느낌이 몰아쳐왔다.
"전생에 니년허구 뭔 웬수가 졌길래에... 이기 뭔 팔자땜인가 혔는디이...."
달실네가 할 넋두리를 서울네가 가락을 얹어서 늘어놓으며 울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서울네가 아무리 구슬프게 목놓아 통곡해도 - 무슨 울 일이
그렇게 많은지 서울네는 제 설움에 겨워서 울고 또 울었다. 어미 잃은 송아지처
럼 - 달실네는 전혀 슬프지가 않았다. 슬프기는커녕 해묵은 근심을 벗은 듯 홀
가분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일거리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결코 죽을 생각 따위
는 일 것 같지가 않았다. 문 밖을 나가서 이 집 저 집 기웃거리고 멀리 절터까
지도 가보고 싶어졌다. 뿐만 아니라 묵은 건초더미에서 새움이 돋듯 흥타령의
느슨느슨한 가락이 줄줄 흘러 나올 것 같아서 달실네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
물었다.
- 하필이면 고향의 그것도 신성한 절터에서 약을 먹을 게 뭐람.
진작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화류장의 쇳대와 악어 가방을 며느리에게 맡길
때, 동전 지갑 하나 달랑 들고서 서울 다녀오마고 집을 나설 때, 웬만한 눈치를
가진 사람이라면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더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남부러울
것 없는 서울갑부가 보잘것없는 고향 친구 집에 바람 쐬러 온다고 했을 때 알아
차렸으리라. 적어도 이십 년을 소꿉동무로 지낸 어릴 적 친구라면 그만한 눈치
쯤은 있어야 했으리라. 비록 세상으로부터 내동댕이쳐진 늙은이일지라도 늙은이
라면 누구나 살아온 옛길을 더듬어 보게 된다는 것을 받은 사람조차 없는 오랜
감정의 빚일지라도 그 빚을 갚기 전에는 결코 눈감지 못한다는 것을.
- 말이 씨가 된다드먼, 옛말 하나두 그른 거 ㅇ네잉.
한 달이나 지나서야 미국에서 날아온 서울네의 딸에게 뼛가루를 내주며 달실
네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왜 화장했느냐고 다그친다면 달실네로서도 대답할 말
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화류장에도 악어 가방에도 묏자리를 살 만큼의 값진 금
품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장씨 문중의 선산에다 산소를 쓰려고 했지만
간신히 연락이 닿은 장득만의 집에서는 이덕례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경
찰이 찾아낸 이덕례의 호적에도 올라 있는 것을 딸 하나뿐이었다. 그나마도 딸
이 먼저 전화해 오지 않았더라면 뼛가루를 샛강에 뿌려야 했을 것이었다.
- 오늘이 니년 제삿날잉게.
아무래도 말이 씨가 된 것만 같아서 달실네는 딸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