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새봄이 시작되면서 공연스레 마음이 설레고 발길이 바빠질 것이다. 아니, 벌써 퇴비를 사서 밭두둑에 뿌려 흙을 덮었다. 나라가 땅에 화학비료를 적게 쓰게 하느라 계분거름을 턱없이 싸게 팔아 한결 득을 봤다.
이렇게 설쳐대는 것은 텃밭을 일궈 남새라도 좀 뜯어먹자는 심보이겠으나, 실은 깡촌놈의 피를 못 속여서 뭔가 심어 키우자는 사육본능(飼育本能)이 발동한 탓이다. 마누라는 영감 낯바닥 탄다고 잔소리를 하지만 나에겐 소 귀에 경 읽기다. 저 할망구의 세설(細說,잔말)함이 정녕 나를 가엽게 여겨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여자 본성의 발로일까, 독자들은 알 것이다.
씨알의 자궁, 흙
그렇다. “봄볕은 며느리 쬐고 가을볕에는 딸 내 보낸다”하고, “봄볕에 그을리면 보던 임도 못 알아본다”고, 겨우내 햇빛 못 받아 여려진 살결에 세되 센 봄 햇살(자외선)이 갑자기 내리쬐는 날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얼굴이 새까맣게 탄다. 자외선은 양날의 칼 같아서 병균을 죽이고 살갗에서 비타민 D를 만들게 하지만, 오래 받으면 피부에 암이 생긴다. 그래서 낯에다 자외선 차단용 로션을 바르고 들일 나가는 것이 백 번 옳다. 피부는 햇빛에 쉽게 늙는다.
누가 뭐라 해도 흙은 생명의 숨결이 살아 넘실거리는 생명체다. 흙은 결코 무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체로 봐야 한다. “땅에 씨앗을 심는 것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사람의 성적 행동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고 어느 토양학자가 말했다. 맞는 말이다. 땅에다 씨앗을 묻어 거기에서 싹이 트는 것은 정자(精子)를 심어 아기를 낳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호박씨 하나를 심어 머리통만한 누렁 호박이 뒤룽뒤룽 열리는데, 이 어찌 그냥 흙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분명 우주의 섭리를 가득 안은 씨알의 자궁이 흙이다. 그러기에 흙은 우리의 어머니가 아닌가.
흙에서 배우라
흙을 닮으리라. 썩힘이 있어야 새 생명이 태어난다! 더러운 똥오줌에 퇴비, 죽은 쥐새끼, 생선뼈다귀 어느 것 하나 흙에 묻히면 썩고 발효하여 걸쭉한 거름으로 바뀌고 만다. 제 아무리 어렵고 고된 일도 세월이 지나면 잊히고 만다는 것을 알려주는 흙. 마음에 쌓인 옹이, 응어리를 풀어버려라. 비록 모나고 인정 없는 세상이라지만 긴 시간이 치료하지 못하는 아픔은 없다. 흙이 건강하지 않으면 우리의 먹을거리도 더러워져 몸에 해롭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방팔방 도시로 바뀌면서 보드라운 흙을 만지고, 또 밟아 볼 수 없는 것이 무척이나 안타깝다.
우리 모두 루소의 말을 따라 “자연으로 돌아가자”, 가서 흙을 만지자구나! 하루에 열 가지가 넘게 자연의 소리(the voices of nature)를 들으라고 한다. 그만큼 심성(心性)이 포실해지고 보드러워진다. 아무튼 흙살 찌우겠다고 산자락의 덤불에서 낙엽을 긁고 소나무 삭정이를 꺾으며, 떡갈나무 졸가리와 썩어가는 도토리깍정이(밑받침)까지 모아와 불 질러서 재(灰) 받아서 밭에다 흩뿌린다. 지난 가을에 뽑아 던져둔 고춧대·고구마줄기 따위도 함께 화장당하는 것은 두말 할 나위없다. 하여, 매콤한 연기 연(鳶)타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그런데 고춧대를 확! 뽑으면 헉! 냉이 냄새가 진동한다. 흙이 내는 냄새는 인삼의 사포닌(saponin) 내를 빼닮았다. 바로 토향(土香)인 것이다. 토향은 토기(土氣)를 품었으니 흙에서 기(氣)를 받는다. 지금 이 글을 쓰는데도 조건반사중추(條件反射中樞)가 발동하여 코가 벌렁거리고 침이 동하는 판이다. 사람들아, 이래도 흙을 만지지 않으려는가? 어디 냄새뿐일라고. 맨손바닥에 배어드는 촉촉한 흙의 감촉을 어떻게 설명한담! 보드라운 흙살에 손끝이 간지럽다. 찹찹하게 느껴지는 토양. 흙은 생명인 것이다.
흙이 무엇인가. 내가 낙지(落地)한 곳이다. 여느 생물이나 이 땅에서 태어나 살다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함소입지(含笑立地)란 말이 있다. 미소를 머금으며 땅으로 듦을 말한다. 그러므로 ‘낙지’는 탄생이요,‘입지’란 죽음이다. “흙내가 고소하다”는 말은 죽음이 가까워왔다는 뜻이란다. 구수한 땅내를 실컷 맡고 허허 웃으며 죽으리라.
사실 흙냄새는 흙이 내는 것이 아니다. 건땅에는 세균과 곰팡이(주로 방선균)가 많이 살아서, 그것들이 거름(유기물)을 분해하면서 구수한 지오스민(geosmin)이라는 냄새를 내는 것이다. 미생물이 풍기는 냄새가 흙냄새로군!
그런데 식물이 살아가려면 이들 미생물의 신세를 진다. 뿌리가 튼튼하고, 그것이 양분과 물을 잘 흡수하려면 미생물들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땅에다 거름을 넣는 것은 식물에 양분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미생물도 키우는 것이다. 큰 나무를 옮겨 심을 적에 미생물 배양액인 막걸리를 흠뻑 뿌려주지 않던가. 뿌리고 심는 것은 어느 것이나 신성한 것.
씨앗을 뿌리다
엇길로 샜다. 우리는 씨를 뿌려야 한다. 밭두렁 흙을 이리저리 뒤집으면서 자갈을 들어내고 나무토막, 가랑잎도 골라 버린다. 굵은 흙 알갱이 하나하나를 잘게 부숴가다 보면 보들보들한 흙고물이 된다. 이제 호미 날로 쓱쓱 끌어당겨 씨가 누울 자리, 작은 골을 낸다. 골 바닥을 손등으로 살짝살짝 눌러간다.
필자는 어릴 적에 시골에서 자라 농사기본은 제대로 돼 있어서 씨앗도 제대로 뿌리지 못하는 얼뜨기가 아니다. 왜 이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 농사를 누워 떡 먹기로 생각하다간 큰 코 다친다. 농사(農事)는 과학(科學)이요, 예술(藝術)이라 했겠다.
농사를 시작하면서 맨 먼저 난관에 부닥치는 것이 씨뿌리기다. 씨앗심기 하나에도 농부의 지극한 정성이 스며 있으니, 그러기에 씨나락(볍씨) 뿌리기 전날에는 밤자리(房事)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여러 개를 심어 나중에 봐서 비실거리거나 시원찮은 약골(弱骨)은 솎아버리고 총중에 센 피(유전인자)를 가진 괜찮은 놈 하나를 세운다. 프로 농부들이 어련하실라고!
우린 그저 그들 흉내내기에 바쁘다. 그렇다, 갖은 보살핌으로 가꿔야 한다. 농사를 아무나 짓나. 곡식은 농부의 발걸음소리를 듣고 자란다.
헌데, 으레 모든 것은 작고 둥근 것에서 시작하더라. 어린이들의 귀여운 얼굴도 덩달아 둥글다. 씨앗 하나에 우주가 들었다더니만…. ‘밀알’에 생기를 불어넣는 곳이 어딘가. 흙이다. 흙은 무슨 요술을 가졌기에 씨앗을 움트게 한단 말인가? 이윽고 씨를 심는다. 두 손 모아 합장기도(合掌祈禱)하노니 탈 없이 잘 태어나거라! 새 생명의 탄생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그나저나 낭패 중의 하나는 소밀(疏密)에 대한 감각이 둔해서 성기거나 배게 씨를 뿌리기 쉽다. 보통 씨앗 발아율이 80% 정도니까, 빽빽하게 뿌려주는 편이 좋다. 골골이 뿌린 다음 보드라운 흙을 씨앗 지름의 1.5배 두께로 흩뿌려주고 다시 가볍게 탁탁 손으로 두드려준다. 그러고는 골 따라 짚을 덮는다. 씨알이 마르지 말라고 그런다. 후유! 이제야 부러질 듯 아픈 허리를 펴본다.
뼈 빠지게 일만 한 농부는 죽어서 어깨부터 썩는다고 하던데, 나는 허리부터 나갈 모양인가. 그렇다, 젊어 흘리지 않은 땀은 늙어 피눈물이 되고, 춘불경종추후회(春不耕種秋後悔)라, 봄에 씨 뿌림 하지 않으면 가을에 후회하는 것. 누가 뭐라 해도 파종(播種)하는 일은 마냥 재미있고 기쁘기만 하다. 봄채소는 큰 놈부터 솎아먹고, 가을 것은 잔 것을 먼저 빼먹는다는데, 나도 때가 되면 저 놈들을 솎아먹으리라. 땅에 든 씨앗은 어느 것이나 봄에는 일주일, 여름엔 이삼 일이면 새싹이 돋는다.
내가 아무래도 반쯤 미쳤지, 밭에서 사는 재미라니, 참 즐겁다. 그렇다. 아무리 능력을 타고나도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는 못 따라가고, 제 아무리 열심히 해도 즐기는 사람에게는 못 이긴다고 했지. 잠자리에서도 줄줄이 자라는 녀석들과 영혼을 나눈다. 언제나 시간과 에너지를 쏟은 일이 뇌리에 뱅뱅 도는 법. 그렇게 밭 구석을 헤매다가 스르르 곤한 잠에 빠져든다.
그러한데 저 작은 씨알 속에 어찌 상추·열무·배추·쑥갓·시금치가 들어 있을까? 과일도 둥글지 않은가. 사람도 늙으면 모가 닳아 둥글둥글해져야 하는데, 노추(老醜),노욕(老慾)에다…,마뜩찮은 노태(老態)를 부린다. 아무튼 1%의 물도 없는 바싹 마른 씨앗이 물을 만나면 정신없이 빨아들인다. 씨알이 부풀어나면서 작은 눈(배꼽)을 뚫고 뿌리를 제일 먼저 내린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는 탄생의 흥겨움
바야흐로 땅바닥에 쩍쩍 실금이 갈라진다. 두런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여기저기를 살핀다. 조짐이 심상치 않다. 틀림없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탄생의 낌새였다. 설렘 그 자체다. 그러고 푸르뎅뎅하면서도 누르스름한 순이 수군거리며 배시시 고개를 치켜들고 내다본다. 세상에 처음 보는 신기한 세상! 어느새 여기저기서 삐죽삐죽 어여차, 영차!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잇달아 머리를 들이밀고 숨 쉴 겨를도 없이 치민다.
“아! 발아다, 싹이 올라온다!”
내 고함소리다. 샛노란 싹들이 힘차게 흙 더께를 떼밀고 오른다. 흥분의 극치다. 흙더미를 밀고 솟아오르는 싹틈은 해돋이나 다름없다. 희망의 싹틈이요, 꿈의 움틈인 것이다. 탄생의 기쁨을 만끽하는 순간이다. 그 즐거움을 필설(筆舌)로 다 못함은 나의 불찰이다. 저 연약하고 어린 것이 무럭무럭 자라 아리따운 꽃을 피우고 튼실한 씨를 맺을 것이다.
상처없이 어찌 봄이 오고, 아픔 없이 어찌 깊은 사랑이 움트겠는가? 뭘 그렇게 서두르는 것일까? 씨를 묻어놓고 나면 괜스레 마음이 졸이고, 언제 저놈들이 싹을 틔울 건가 하고 조급증(躁急症)이 난다. 그래서 성마르게도 자꾸 씨 심은 자리를 뒤지고 파본다.
그러다가 그만 여린 싹이 다치거나 목을 잘라버리는 수가 생긴다. “아야, 아야!”, 비명소리에 머리털이 바짝 선다. 손을 잘라버리고 싶은 심정이라, 가슴이 꽉 차오며 심장이 멈추는 듯 답답한 마음. 후후~! 가녀린 새 생명에 참말로 미안하다. 십 년은 감수(減壽)하였다. 그래서 며칠은 섣불리 흙을 만지지 못 하다가 어느새 개 버릇이 도진다. ‘탄생의 순간’이 보고 싶어 초조하게 안달을 부린다. 이렇게 몹시 급한 마음을 “열고나다”고 하던가.
싹틈과 애기의 탄생이 하나도 다르지 않기에 그런다. 노리끼리한 새순을 보는 순간 “야, 드디어 싹이 났다” 하고 환호작약(歡呼雀躍), 기뻐 펄쩍펄쩍 뛴다! 설렘, 가슴에 격랑(激浪)이 일고 머리에 불꽃이 튄다. 옆에서 누군가가 그 꼬락서니를 봤다면 틀림없이 ‘미친놈’이라 흉 꽤나 봤으리라!
뭐니 해도 농사에서 썩힘을 배우고 또 기다림을 배운다. 양수득양인술(養樹得養人術), 나무를 키워봐야 가르치는 법을 안다. 그게 어디 나무뿐일라고, 곡식과 채소 키우기도 다르지 않으니, 키움과 가르침은 마냥 기다리는 것. 절대로 닦달한다고 되지 않는다. 어린 싹의 목을 잡아 빼서 늘인다고 키가 크지 않는다. 결국은 죽이고 만다. 이 봄도 씨 심기에서 거듭 기다림을 배운다. 그 기다림은 꿈이요 바람이며, 참기 어려운 갈구(渴求)요 갈망(渴望)인 것.
심었다고 끝난 게 아니다. 물 주고 거름 주며, 풀매고 벌레 잡아줘야 한다. 잘 가꿔야 한다. 한 마디로 텃밭은 심신(心身)을 닦고 바로 잡는 나의 수도장(修道場)이다. 그래서 농사는 나에게 마음의 양식도 준다.
소원컨대, 삶의 끝이 초라하지 않게 차라리 밭을 매다가 스르르 엎어져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왜 갑자기 만해(卍海) 선생의 <나의 길> 한 구절이 떠오르는 것일까! 저벅저벅 걸어가는 길(道) 말이다. “…나의 길은 이 세상에 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임의 품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죽음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한때 그리워했던 못 다한 사랑을 보듬고 가야 할 낯선 죽음이 어느 새 내 곁에 오고 있나보다. 요새 와서 글을 쓸 때면 자꾸 죽는 이야기가 나도 모르게 나오니 말이다.
아픔 없는 탄생이 있겠는가?
대지(大地) 밟고 일어선 의연한 새싹들아! 너의 한살이를 너저분하거나 추레하게 끝내지 말고, 무럭무럭 자라나서 곱게 살다 가야 한다. 삶을 만만케 여기지 말고 굳세게 살아 갈 것이다.
여기 글 쓰는 이도 세상을 꽤 오래 살아봤지만, 한 살이가 그리 녹록치 않고 호락호락하지도 않더라. 숱한 어려움이 너를 기다리고 있으매…, 더러는 삶을 포기하는 자도 나오겠지. 그러지 말고 꿋꿋이 버텨라. 갓 난 귀여운 핏덩이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아 보이는 너희들, 참따랗게 살라는 말이다.
아무튼 새로운 탄생은 정녕 찬란하고 아름답다. 새봄의 열림이 또한 그렇지 않은가? 그럼 그렇지, 정녕 아픔 없는 탄생은 없다. 권오길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흙에도 뭇 생명이』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