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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
유럽원정 몽골군의 총 병력은 12만 명이었지만, 순수 몽골 기병은 5만 명이었고 나머지는 새로 조직한 투르크계 보충병이었다. 이미 점령한 킵착 지역의 수비병을 빼면 실제 야전주력은 5만여 명이었다. 1241년 1월 수베데이 (Subotai) 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접경지대인 카르파티아 (Carpathians) 산맥 북쪽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정보를 수집 정리하였다. 당시 알라스평원을 빙 둘러싸고 있는 헝가리와 폴란드, 프러시아, 실레지아, 보헤미아의 왕족들은 복잡한 정략결혼으로 인척관계에 있었으며, 국가간의 경계 역시 모호하였다. 따라서 몽골군의 2-3배에 달하는 유럽 최강군 헝가리를 공격하기 위하여 카르파티아 산맥의 고갯길로 쳐들어가는 것은 우측면을 공격당할 위험이 있었다.
수베데이는 몽골군을 4개 종대로 나누어 부채형으로 감아 도는 기동을 생각하였다. 넓게 여러 종대로 나누어 유럽최강의 헝가리군을 목표로 멀리 돌아가는 외선 작전을 하기로 한 것이다. 1241년 3월, 몽골군은 헝가리군을 향하여 전격적으로 진격하여 3월 17일 다뉴브 (Danube) 강 서안의 페스트에 모이기로 하였다. 3개 종대는 헝가리로 향하면서 빠른 속도로 적진 깊숙이 들어가 고립된 세력들을 각개 격파하면서 진군하기로 하였으며, 나머지 1개 종대는 우측의 적군을 묶어 놓아 주력의 우측위협을 없애도록 하였다.
카이두가 지휘하는 제1종대는 북쪽 날개로서 2개 사단 2만 명으로 구성되었다. 카이두는 독일과 폴란드의 연합군을 쳐부수어 주력의 우측위협을 없애게 되었다. 1241년 3월 카이두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북서쪽으로 멀리 돌아 1개월 동안에 640km 이상을 달렸으며 두 차례의 결전을 통해 폴란드와 갈리시아 그리고 비스툴라 (Vistula) 강 지역의 저항세력 등을 각개 격파하였다. 그 후 수베데이와 연합하기 위하여 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꾼 후 오스트리아군이 헝가리로 이동할 경우에 대비하였다. 카이두는 집결시간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때로는 배후에 적을 남겨두고 앞으로 나아갔다.
속도를 중시하는 경기병으로만 구성된 제2종대는 주력의 우익종대로서, 주력과 제1종대 사이의 연락과 주력의 우익을 다시 한번 엄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제2종대는 일일 평균 150km로 행군하였으며, 카르파티아 산맥을 따라 가다 방향을 꺾어 페스트로 전진하면서 북쪽의 카이두군의 남쪽 측익과 주력의 북쪽 측익을 보호하면서 전령을 수시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3월 17일 다뉴브강에 나타나 강 동쪽의 있는 바크를 차지하였다.
카다안(오고데이의 아들)이 이끄는 제3종대는 주력의 남쪽 측면을 맡은 좌익종대였다. 이들은 몰다비아, 부코비나를 거쳐 상당한 거리를 남서쪽으로 빙 돌아 트랜실바니아 (Transylvania) 로 들어갔다. 카다안은 강력한 거점은 돌아갔으며 팃자 (Tisza) 강 계곡을 건널 때에는 가죽주머니에 바람을 넣고 말을 묶어 건넘으로써 하루평균 64km로 전진하여 4월 3일 페스트에 도착하였다.
제4종대는 중앙을 맡은 주력 종대로서, 바투 (Batu) 와 수베데이가 직접 지휘하는 4만의 정예병력이었다. 헝가리 군이 방어하고 있는 눈 덮인 카르파티아 산맥 통로를 지나는 데 조금 지체되었지만 3월 12일 산맥을 통과한 후 팃자강 계곡 상류를 지나 헝가리평원에서는 하루 평균 100km이상 씩 곧바로 달려 선발대는 모이기로 예정한 날 2일 전에 다뉴브강 연안에 도달하였다. 3월 17일, 주력종대가 페스트에 도달하였고, 제2종대는 다뉴브강을 따라 수색 전진하며, 제1종대의 전진상황을 보고하였다. 이렇게 몽골군은 적이 전혀 알지 못하게 재빠르게 움직였으며 병력의 집중과 분산을 자유자재로 하였다.
후퇴 포위 작전
한꺼번에 3 방향으로부터 위협을 받게된 헝가리는 후방을 공격당하거나 중요한 도시나 지형을 빼앗길까봐 견고한 성에서 싸움에 임하였으며, 병력수가 10여 만에 이르자 사기가 왕성해졌다. 4월 3일 다뉴브강 동쪽에 도착한 수베데이가 살펴본 헝가리 군은 병력수가 많고 투지가 높아 섣불리 공격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게다가 정면으로 다뉴브강을 건너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또 강기슭에서 오래 지체하면 할수록 헝가리의 구원군이 더해질 가능성이 많았다.
헝가리군을 이기려면 우선 이길 수 있는 형세로 바꾸어 놓아야 했다. 이 바꾸기에 성공하면 승리는 확실한 것이요, 바꾸기에 성공하지 못하면 승리를 얻을 수 없다. 수베데이는 능하되 능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운용하되 운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로 하였다. 그는 다뉴브강에 있는 기병들을 동쪽으로 철수할 것을 명하였다. 몽골군은 형세를 바꾸기 위해 물러선 것이다. 헝가리 군이 추격한다면, 이것은 헝가리군의 형세가 자동적으로 변하는 것이며, 바로 이런 상태가 몽골군이 바라는 것이었다.
과연 헝가리 연합군들은 몽골군이 강을 건너 공격하지 못하고 뒤로 빠지는 것을 보자 전군에게 추격명령을 내렸다. 헝가리군 전위가 몽골군이 쏘아대는 화살 세례에 주춤거리자 헝가리는 나머지 기마병 모두를 공격에 가담토록 하였다. 몽골군 전위대는 분열 소산을 거듭하며 헝가리군이 따라오도록 천천히 물러섰다. 그러나 헝가리군은 몽골의 소수 기병대만 접할 수 있었지 몽골군 주력은 전혀 보지 못하였다. 이때까지 헝가리군은 그들을 다뉴브강의 보호막에서 끌어내어, 증원받을 기회를 차단하려는 수베데이의 생각을 몰랐던 것이다.
헝가리군은 동쪽으로 계속 추격해 나갔다. 헝가리군은 무려 6일간이나 추격하여 부다페스트 북동쪽 160 km 지점의 사조 (Sajo) 강까지 이르렀다. 사조강 바로 서쪽 모히 평야 (Mohi Plain) 에서 팃자 (Tisza) 강으로 진출하기 직전에 바투와 수베데이는 반격하기로 하였다. 이 지역은 기병이 돌진하기에 적합한 지형이었고, 6일간의 행군거리는 이들의 묘지로서 적합하였다. 만약 거리가 짧다면 헝가리군의 투지는 여전히 왕성할 것이며,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고 그러한 상태에서 몽골군이 싸움에 승리한다 하여도 커다란 손상을 입을 것이었다.
추격 6일째인 4월 9일 바투군은 사요강 돌다리를 건너 서쪽의 덤불 속으로 16 km 가량을 더 들어가 널찍한 은신처로 숨어들었다. 이 장소는 하천의 장애물로 행동을 비밀리에 진행시킬 수 있었고, 세를 얻게 되었다. 그 날 헝가리군은 모히평원에서 야영에 들어갔다. 헝가리군은 야영지 바깥쪽으로 사슬과 밧줄로 마차를 묶어, 화물수레를 원형으로 배치함으로서 하나의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또 오른쪽은 팃자강의 늪지대가, 황야 건너편의 그들 정면에는 사조강이 있었으며 왼편에는 언덕과 숲이 가로놓여 천연방어로 삼았다.
돌격
다음날 새벽, 바투의 지휘 아래 4만의 몽골군이 북쪽 방면에서 사요강의 돌다리를 향해 돌진하였다. 이를 막으려는 헝가리 군에게 노포 7문을 발사하여 뒤로 물러서게 한 다음 기병대가 즉각 다리를 건너 평원에서 대열을 갖춘 다음 헝가리군의 서쪽 측면을 뚫고 전진을 시작하였다. 바투의 기병이 새벽에 사요강에 있는 교량을 넘을 때는 속도, 충격력, 타격력 뿐 아니라 강력한 화력까지 발사하며 쏟아져 들어갔다. 그렇지만 수적 우세인 헝가리군은 강력히 저항하였다. 2시간의 격렬한 접전 끝에 몽골군은 헝가리군의 대규모 공격을 화살공격으로 겨우 막아냈다.
그사이 남쪽에 숨어있던 수베데이와 3만의 몽골군이 헝가리군의 배후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투가 헝가리군 전체를 정면에 붙들어두는 동안에 수베데이는 사조강 하류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놓았고, 이 다리를 건너 헝가리군을 포위하게 되었다. 헝가리 군이 잠에서 깨어난 시각은 몽골군이 숙영지 주위 고지에 이미 집결된 때였다. 수만 인마의 움직임에도 조용하였으며 숙영지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먼저 헝가리 기병대가 밀집 대형으로 정면 충돌을 시도하였으나, 몽골군의 정면은 쩍 갈라지면서 그대로 양 날개 포위가 되었고 빗발치는 화살공격에 큰 손실만 입고 숙영지로 되 쫓겨갔다.
몽골군은 일단 정복을 달성하게 되면 반드시 정복지의 기술 인재를 수용하여 무기를 만들게 하였으며, 이로써 무기장비의 진보 속도는 대단히 빨라 상대보다 우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몽골군의 포위망이 조금씩 좁아지기 시작하면서 먼 거리에서 화전이 날아와 천막을 불태우자, 헝가리군의 인마는 혼란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이어 몽골군은 투석기로 맹렬한 공격을 가하였다. 이와 같은 신무기의 출현은 헝가리군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으며, 반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이날을 하늘이 내린 재앙의 날로 알았다.
이때 헝가리군의 두 번째 공격이 시작되었다. 몽골군은 원거리 무기로 우선 상대에게 치명타를 가한 후 연막을 피우고는 뒤로 물러섰다. 이 연막은 상대의 유인에도 사용되어 연합군은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가운데 점차 기복이 심한 지형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때 몽골군의 수베데이에게 분할 포위되어 도처에서 섬멸되었다.
헝가리군의 마지막 공격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면서 몽골군은 낮은 곳에 위치한 숙영지로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엄청난 손실을 받은 헝가리 군은 마치 우리에 갇힌 야수와 같아 이리저리 날뛰었다. 몽골군은 연속적인 공격으로 헝가리군이 마지막 발광상태에 도달되었다고 생각되는 순간, 돌연 서쪽으로의 탈출구를 열어 주었다. 이때 헝가리군은 몽골군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V자 대형을 갖추고 있었지만 탈출구가 생기자 대다수가 그곳으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은 빨리 도망하려고 무기, 갑옷, 그리고 투구마저 버린 채 달아났다.
몽골군이 불화살과 중기병을 이용하여 남아잇는 헝가리군의 V자 대형을 오래지않아 완전히 분쇄하였다. 만약 몽골군이 포위망 한쪽을 열어 주지 않았다면, 헝가리군은 숙영지에 남아 지휘계통을 따라 전투의지를 불태우면서 반항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최소의 희생으로 풍성한 전과를 올리게 된 것이다.
추격섬멸
몽골군은 헝가리군의 사투를 방지하면서 전멸시키기 위하여 서쪽 다뉴브강 쪽으로 갈 수 있는 통로를 슬그머니 열었고, 봇물이 쏟아지듯 헝가리군이 빠지기 시작하자 기병대를 양쪽으로 나누어 헝가리군의 양측에서 천천히 추격하였다. 6일간의 추격 공간은 몽골군의 작전계획에 이미 설정되어 있던 것이었고, 포위망 한쪽을 열어 준 것도 당연히 수베데이가 결정한 일이었다. 만약 페스트와 현지간의 거리가 이 정도로 크지 않았다면 적의 조직계통이 어지러워 질 수가 없고, 병사들 역시 전투의지가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6일간의 추격공간을 통과하면서 헝가리군은 대열도 없고 지휘자도 없는 기아와 공포에 얼룩진 패잔병이 되었다.
그런데 몽골군은 여기서 협격 추격이라는 독특한 추격법을 선보였다. 상대의 뒤를 따르는 것도 아니며 상대의 속도를 추월하여 앞을 끊는 것도 아니다. 상대를 끼고 양측에서 같이 전진하는 것이다. 마치 오리를 몰아 우리로 넣는 식이다. 골짜기를 거쳐 서쪽으로 도주하던 헝가리군은 살았다고 믿었으나, 실제로는 몽골군의 덫에 걸려든 셈이었다. 몽골군의 경 기마대는 달아나는 사냥감처럼 헝가리군을 쓰러뜨리면서 양 측면에서 이들을 추격했다. 양쪽에서의 연속적인 압박은 혼란과 공포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6일째가 지나려는 순간 기진맥진한 헝가리군에 몽골군은 속도를 내어 돌진하였다. 마치 풀을 베듯 헝가리군은 칼에 맞았고 페스트로 돌아오는 45 km의 길 위에는 7만여 명의 헝가리군 시체가 뒤덮였다.
이 전투를 본 사람들은 몽골군이 흑색과 백색기의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기동과 놀랄만한 속도, 그리고 작전수행 중의 고요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또한 적의 병사들과 말이 지쳐 쓰러질 듯한 때 화살을 쏘아 이들을 공격하는 방법에 놀라워했다. 사조섬멸전 이후 헝가리군의 저항은 무너졌다. 몽골군은 다뉴브강으로 돌진하여 페스트에 불을 질렀지만 강을 건너지는 않았다. 이후 바투와 수베데이는 군대가 휴식을 취하도록 하면서 동부 헝가리를 다져나갔다. 몽골군은 섬멸과 점령을 두 개의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수행한 것이다.
첫댓글 이 전투에서 유럽의 중장 기병은 몽골의 경장 궁기병에게 철저하게 당하고 말았죠. 하지만... 만약 이들이 사정거리가 긴 궁병 등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겁니다. 오로지 중장 기병만 중시했으니... 당연하 결과죠. 강력한 군대는 여러가지 병종이 결합된 군대입니다.
헝가리 연합군? 독일 십자군 아닐까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독일십자군 전멸당하게 해놓고 사살됬다고 아는데..
독일 과 헝가리 , 폴란드 연합군입니다. 글쎼요 십자군이라...
역시 최강 몽골기병들입니다....그리고 지휘관인 수베데이도 탁월한 명장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