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산묘소(墓所) 폭발 참사소식이 외무부에 전해진 것은 한국 시간으로 9일 오후
1시10분께였다. 폭발이 일어나고 10분쯤 지난 시각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미얀마
방문과 때맞추어 외무부는 본부와의 신속·원활한 통신을 위해 버마 대사관에 외신관을
파견해 놓고 있었다. 이 외신관이 사건 제1보를 보낸 것이었다. 내용은 『경호상의
문제가 발생했으니 외무부 간부들은 대기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는 사건의
성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무부 사령탑을 맡고 있던
노재원(盧載源)차관은 그날 방한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이탈리아의 거물 정객
안드레오티를 김포(金浦)공항에서 전송한 뒤 시내로 나와 점심을 먹고 있다가 카폰을
통해 버마참사 소식에 접했다. 그는 국·실장의 비상소집을 지시한 뒤 정부 종합청사
9층 총리실로 올라갔다.
김상협(金相浹)총리가 참사소식을 들은 것은 오후2시 좀 지나서였다. 시내에서 일단
공관으로 돌아온 김총리는 총무처에 비상 국무회의 소집을 지시했다. 1차 비상
국무회의는 오후3시20분께부터 50분까지 총리 집무실에서 열렸다. 오후 3시에 김총리가
집무실에 들어선 데 이어 박종문(朴鍾汶)농수산, 이정오(李正五)과기처 장관, 노(盧)외무,
금진호(琴震鎬)상공부차관, 이희성(李熺性)교통부 장관, 김성배(金聖培)서울시장,
김정례(金正禮)보사부 장관, 조영길(趙英吉)총리 비서실장 등이 잇따라 도착했다.
연락이 잘 닿지 않았던 일부 국무위원들은 회의가 거의 끝나갈 무렵 헐레벌떡 참석,
취재진에게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묻기도 했다.
국무회의가 끝난 뒤 이진희(李振羲)문공부 장관은 10층 중앙청 기자실을 찾아와 사건
발생에 관해 간략한 첫 공식 발표를 했다. 이 장관은 발표를 마친 뒤 총리실로 다시
내려가 관계 국무위원들과 한 동안 논의를 한 뒤 오후 4시50분께 사상자 명단을
발표했다. 이 발표는 랭군發 사상자 수와 차이가 났는데 조금 뒤에 한국측 사망자 15명,
부상자 16명으로 바로잡혀졌다.
폭발 현장에 우리 기자들이 있었는데도 사건 기사를 본사로 보내는 데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우선 랭군에서 통신 수단을 확보하기가 매우 곤란했다고
한다. S신문의 K기자가 가장 먼저 본사로 상황을 보고했다고 한다. 이날은 일요일이라
우리나라 기자들은 거의 쉬고 있었으므로 오후3시께까지 상황을 모르고 있다가
텔리비전에서 오후 4시를 넘어 문공부 장관이 발표하는 것을 보고 상황을 알게 된
기자들도 많았다.
오후 4시 직전 문공부에서 각 언론사에 중대 발표가 있다고 연락을 취함으로써 종합
청사로 기자들이 몰리게 되었다. 이 폭발 사건은 랭군發 AP통신을 통해 제일 먼저
세계로 퍼져 나갔다. 오후 2시40분에 나간 이 1보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종합한 것이
였다. 사망자가 생겼다는 내용은 없었다. 교오또오 통신 서울 지국 구로다 기자는
AP통신을 받은 일본본사로부터 확인 요청을 접수한 직후 텔리비전에서 이문공부
장관이 발표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 일본으로 송고했다. 오후4시 이후에는 세계
매스컴이 거의 서울발 외신을 받아 보도하기 시작했다.
군(軍)은 이날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기 전에 전군(全軍)에 비상령을 내렸다. 외출과
외박을 금지시키고 외출나간 장병들은 귀대토록 했다. 치안 본부는 비상 국무회의가
열리기 15분 전인 오후2시45분 갑호 비상령을 내렸다. 이 비상령에 따라 비번, 휴가
중인 경찰관들까지 비상근무에 총동원되었다. 경찰은 신속하게 대처했다. 9월15일에
내려진 추석 비상 근무령이 ASTA, IPU 총회로 이어지면서 해제되지 않고 있었던
데다가 경찰서장들이 집무실에서 24시간대기 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응이
빨랐다. 주요 관공서와 방송국 신문사 등 공공 기관에 제복 경찰이 배치되면서 한가
하던 일요일 오후의 서울은 아연 긴장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오후 4시를 넘어서 일본의 매스컴은 서울발 기사로 이 테러 사건을 일제히 머리기사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랭군에 특파원을 두지 못하고 있는 일본의 신문들은 서울발 기사로
주요 지면을 채우면서 랭군의 자국 대사관과 상사(商社)로 국제 전화를 걸어 그곳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전했다. 공동(共同)통신만이 랭군에 휴가 가 있던 하노이 특파원
이또리끼시 기자를 이용할 수 있었다. 중공(中共)도 논평 없이 「랭군 참사」를
전했고 KAL기 격추 사건 때와는 달리 북괴 평양 방송도 재빨리 이 사건을 보도했다.
소련에 의해 동포2백69명이 살육 되었을 때는 침묵을 지키고 있던 북괴가 모든 선전
기관을 동원, 『폭탄 세례를 받았다』는 식의 악담으로 동족의 비극에 환호성을
지른 것, 그 자체가 비극이었다.
일본의 매일신문(每日新聞)은 10일자 사회면에서 『아이고 서울, 또야!』라는
커트제목을 뽑고 비극이 겹친 서울의 표정을 꼼꼼하게 전달했다. KAL 격추 뉴스 때는
워싱턴과 동경(東京)이 주된 뉴스공급원이 되었으나 이번 참사에서는 랭군보다도
서울이 핵심 뉴스 공급처가 되었다. 그것은 랭군에 외신 기자들이 많이 주재하고 있지
않은데다가 미얀마 당국의 엄격한 보도 관제와 취재 제한으로 1차적인 소스 접근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정보기관도 미얀마에서만은 정보 수집 네트웍이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히려 동남아의 정보 센터인 방콕이 랭군을 앞지르는 뉴스 공급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한국의 방송·신문·통신사는 이날 오후 기자들을 비상소집, 호외를 연달아
내면서 철야 근무 체제로 돌입했다. 우리 언론은 전두환 대통령이 랭군에서, 사과 겸
위문 차 영빈관으로 방문한 산유 버마 대통령에게 『이번 사건은 북괴의 소행이다』
고 밝힌 것을 크게 보도하면서 북괴의 범행으로 처음부터 단정하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