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조나단 에드워즈를 만나다.
이 책은 평전이다. 즉 전기(자서전)와 연구서를 모두 아우르는 책이다. 그리고 객관적인 비평이라는 한 가지 요소가 다른 책에 비해 더 많이 깔려 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다른 책들보다 저자에 대해 더 애정이 어린 시선을 줄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그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고, 바로 그러한 시각에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의 삶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내가 이 책을 읽음으로 얻은 몇 가지 유익들에 대해서 간단 간단하게 이야기할 생각이다.
먼저 나는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 등에서 보았던 그의 결심문과 일기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상황에서 쓰였는지를 알게 되었다. 저자가 살았던 당시의 상황과 배경을 봄으로 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내가 그를 따라서 작성한 사명선언서가 얼마나 피상적으로 작성되었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책 전체를 통해 내가 생각해 온 '종론(흔히 말하는 기독교 리더십론)'에 대한 내 생각에 더욱 확신을 얻었고, 위로를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만들어진 자를 쓰시는 것이 아니라 쓰시고자 하는 자를 만드신다(진행형이다). 저자도 175쪽에서 이것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한다. 우리는 어떤 위인들을 대할 때(주로 전기들이 그렇게 쓰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어렸을 적의 몇 번의 어려움을 거친 후, 이후에는 특별히 큰 어려움이나 내면의 고통 없이(우리 생각에, '그들로서는 작은 것들이 간혹 있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온전히 만난 이후의 인생 대부분을 무척 거룩하고 흠 없게 살았다고 생각하며 막연히 동경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면에서는 부분적으로는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칭의받은, 구원하시는 은혜를 입은 사람도 여전히 죄인이며,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그 사람이 얼마나 죄와 허물에 대해서 평생 치열하게 싸우는지, 얼마나 괴로워하고 아파하는지, 얼마나 분투하는지에 대해서 잘 모를 뿐 아니라, 잘 모르고 싶어하는 것 같다. 우리는 은혜와 구원에 대해서 복권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당첨되기만 하면, 은혜 받기만 하면, 세상이 새로워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신앙의 삶은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더 지독한 싸움의 시작인 경우가 많다. 성경이 그것을 말하지 않는가?
어쨌든 에드워즈가 평생 자신의 결점들을 어떻게 하나님께 드리길 원했으며, 얼마나 그것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는지 나는 보았다. 그리고 위로받았다. 그리고 에드워즈와 같이 간절히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있는 내 영혼을 조금 더 분명하게 보았다.
대각성과 부흥, 신앙감정 등에 대한 정리를 새롭게 하였다. 그동안 주로 에드워즈 책을 읽음으로만 갖게된 시각들을 역사적인 시각과 반대자들의 시각에서 좀 더 살펴보게 됨으로써 정당하고 균형잡힌 비평에 대해서 좀 더 고민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복종(주로 366쪽 전후)에 관한 청교도들의 생각을 보면서도 고민을 많이 했다. 오늘날 어떤 면에서는(교회의 질서와 권위, 훈련 등) 좋은 미덕으로, 어떤 면에서는(개인의 자유와 존엄성 등) 권장할만하지 않은 덕목으로 인식되고 있는 복종이란 개념과 실재에 대해서 과연 어떤 것, 어떤 면, 어떤 태도가 성경적인가에 대해서 좀 더 고민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계속 공부하고 고민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 때에 다시 정리할 생각이 있지만, 일단 지금 생각에, 복종(복종의 여러 면과 위치가 있지만)은 우리의 상황과 처지와 감정, 생각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이러 이러하라'라고 내리신 명령에 대한 우리의 마땅한(물론 그것은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영광을 맛보게 될 때에야 온전히 가능할 것이다) 반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논쟁에 대한 태도도 다시 배울 수 있었다. 어떤 한 사람의 '주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그 사람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 나누기가 무척 애매하다. 왜냐하면, 그 주장과 그 사람을 사실상 개별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그 주장은 그 사람을(그 사람의 인격과 태도와 성향, 가치관 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주장과 개인의 인격(존엄성 등)을 나누어서 마땅히 비판해야 할 때는 신랄하게 하되, 그 사람과는 여전히 교제를 하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을 보면서 논쟁/비판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이 부분에 특히 약한데, 우리는 우리의 의견이나 주장이 비판받을 때 우리의 존재 자체도 거부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서로의 단점을 지적해주어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다거나, 균형 잡힌 가치관을 갖는 것이 절대 쉽지가 않다. 대부분 자신이 틀렸다거나, 잘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기 싫어하므로 균형잡는 것 자체가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한국인들의 기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우리 한국에서 정당하고도 인격적인 비판 문화가 온전히 정착되지 않은 탓도 있다고 생각한다.
감사하게도 독서 모임에서 매주 동역자들과 토의/토론을 하는 내게 이 부분이 어느 정도 잘 훈련되어가는 것 같아 기쁘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이제 우리 모임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지식을 내려놓고 성경이, 하나님께서 무엇을 어떻게 말씀하시는지에 대해서 가장 큰 권위와 가치를 두며(사실 이것은 단순히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때 단지 한 개인의 말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이야기를 듣고 질문하고 답한다. 내가 참 복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으로 나는 어떤 인물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시대적 상황과 배경을 반드시 고려하고 주의해야 함을 매우 깊이 깨달았다(최근 이 책과 함께 읽은 책인 <기독교 인물 사상 사전>을 통해서도). 이것을 기억하지 못하면 우리는 많은 실수와 잘못을 할 수 있고, 우리의 교만과 미련함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왜',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 사람의 사상과 행동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편협적으로(주로 우리 눈에 보이는 겉모습과 후대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 그 인물의 언행을 속단하게 될 것이고, 그를 좇는, 그를 스승으로 삼은 여러 사람에게 죄를 짓는 실수를 하게 될 것이다(특히 칼빈과 웨슬리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지혜롭지 못한 생각과 태도).
인간의 이성으로는 변증에 한계가 있음을 보았다(695쪽).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특별히 쉐퍼에게 영향을 받아), 에드워즈의 생각을 엿봄으로써 내가 정말 더 강하게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보게 되었다. 지식과 경험이 자라갈수록 자신을 의지하고자 하는 성향 또한 자라가는 것이 인간 같다. 전보다 더욱 많은 것을, 더 분명히, 더 명쾌하게, 더 탁월한 방법으로 알게되고 경험할수록, 우리는 하나님(과 그 사역)보다 우리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믿고 싶어하는 것 같다. 물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의 생각과 경험을 통해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 받는 것은 믿음의 일에서 무척 기쁘고 행복한 일임도 분명하다. 그러나 누가 주인이 되느냐의 문제는 우리가 수시로 자신을 점검하지 않으면 알기가 어려운 문제다. 하나님께 우리의 것을 복종시켜 사용되는 것과, 우리의 것으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루어내고자 하는 것은 무척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기억해야겠다. 또,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으면, 인간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자녀교육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고민을 하게 됐다. 어떻게 해야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알려주고, 그 믿음의 유산을 온전히 전해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어렸을 적부터 주의 율례와 법도를 사랑하며 그 기이함과 신묘막측함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장하게 할 수 있을까?
청교도들의 자녀교육 방법(나는 교육 부분에서 특히 웨슬리의 어머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은 오늘날의 자녀교육과 많이 다르다. 가정에서뿐 아니라 교회교육에서도 그러하다. 앞으로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하게 될 텐데, 아무 생각 없이 맞닥뜨려서는 안 되겠다.
다시 한 번 나에게 독서모임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모임에서는 종종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직 우리 모임에서 실제적인 얘기들이 오가는 것은 힘들지만, 성경적인 자녀 교육에 대해서 앞으로 더욱 깊이, 많이 고민함으로 우리가 나중에 그 일들을 대하게 될 때 우리가 최소한 성경적인 시각에서 그 문제들을 다루고 대할 수 있길 기대한다.
에드워즈와 사라의 비범한 연합에 대해서도 이제 막연하게 칭송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갈등과 위기, 어려움을 보게 돼서 참 감사하다. '그들도 인간이었구나, 그들도 갈등과 어려움이 있었구나, 그럼에도 그토록 비범한 연합을 이루었구나.' 이제 나는 막연한 낭만적 낙관주의에 의해 그들을 우러러보지 않고, 그들의 그 치열했던 자기 십자가의 길 위에서 그들을 존경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갈등이나 어려움이 없을 수 없다. 문제는 갈등이나 어려움을 어떻게 하면 생기지 않게 하느냐보다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일 것이다. 에드워즈와 사라는 내게 하나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순종과,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신앙,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모든 영역에서 살아내고자 한 그들의 지고지순한 사랑과 열정이 나와 내 가정, 내 이웃들에게도 가득하길...!
에드워즈에 대해서 막연하게 칭송하고, 그를 흠 없는 인간으로만 보아왔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그런 성향이 내게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읽음으로 인간 에드워즈를 알게 되어 감사하다. 인간은 누구나 모델을 갖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모델이 가능하면 흠이 없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믿으려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유일한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고자 했던 (불완전한) 이차적인 모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신중해야 할 것이다.
에드워즈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다. 그에게도 실수가 있었고, 그도 교만할 때가 있었고, 그도 죄 때문에 괴로운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나는 어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한 두 가지의 (치명적이지 않은) 결점 때문에 그 사람의 좋은 면 전부를, 그 사람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모두 무시하거나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에드워즈의 인간적인 모습들, 그의 책들이(또 신학과 사상이) 어떤 배경에서, 무엇을 위해 쓰였고, 그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그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투사로서 살도록 맡겨드렸는지, 그가 믿고 의지했던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가정과 교회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살아냈는지를 (전기 등에 비해) 거시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내게 참으로 귀한 도전과 위로였다.
특히 에드워즈가 한 편에서는 거룩한 투사로 인정되었지만, 반대자들에게는 고지식하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묘사된 것을 보면서 나는 많은 위로를 받았다.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려고 하며, 하나님만을 추구하기 위해, 하나님만을 높이기 위해 살려고 분투해도 적대자는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에드워즈와 같은 우리 신앙의 위인들은 그러한 사람들의 평가를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그들은 그들이 비난받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듣지 못하는 자였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부당한 비난에 대해서는 절대 참지 않는 사람들로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나도 참으로 그렇게 살고 싶다. 그처럼 의연하게 살고 싶다. 사람들의 평가와 이 시대의 가치와 요구가 나의 삶을 주관하도록 하고 싶지 않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만 살고 싶다.
마지막 페이지릎 덮은 지금 무엇보다 나는 감동했다. 울었다. 마음이 타올랐다. 나도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