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38(견지동 111)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NH농협은행 종로지점이다.
1926년에 신축한 이 건물은 90년간 이 자리를 지켜온 옛 조선중앙일보 사옥이다.
당시 건축주는 조선일보였고 월남 이상재가 사장, 주필은 송진우였다.
조선일보가 경영난을 겪다 방응모에게 운영권이 넘어갔다.
친일 실업인들의 신문으로 출발한 <조선일보>는
1924년 9월 신석우가 판권을 인수한 뒤 지면을 대혁신하고
민족협동전선 신간회의 산파역을 담당하며 ‘조선민중의 신문’으로서 성가를 높였다.
이렇게 <조선일보>가 비타협적 민족운동의 대변지로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의
사옥이 1926년 7월 입주한 경성부 견지동 111번지의 신축 2층 건물이었다.
<조선일보>계속되는 조선총독부의 탄압과 더불어 재정난으로
사원의 월급을 제때 지급하지 못해 분규가 일어나고 휴간이 거듭되는 등 불운이 겹친다.
1932년 11월 개성 출신의 최선익이 인수해 여운형(呂運亨)에게 사장을 맡긴 다음부터
점차 안정을 되찾는다.
1933년 2월 16일 사장에 취임한 여운형은 3월 7일부터 신문 제호를
조선중앙일보로 바꾸게 된다. 신문 이름을 바꾸게 된 동기로는 당시 중국에서도
중앙일보가 발행되고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조선'을 붙이게 된 것은 민족을 내세워
독립정신과 의지를 자각시키려는 의도도 함축되어 있었다.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가슴에 단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게재하는 등 일제 권력과 맞서며
1937년 11월 폐간될 때까지 민족 정론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상하이에서 여운형과 인연을 맺은 심훈이다.
그는 여운형이 운영하는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활약한다.
심훈은 1933년에는 장편소설 <영원의 미소>, 1934년에는 장편소설 <직녀성>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다.
소설 <직녀성>은 봉건적 인습에 얽매여 결혼한 여성의 아픔을 소재로 한 작품이었다.
심훈은 이 작품에서 결혼 가족제도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억압과 차별 없는
새로운 형태의 남녀관계를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1917년 경성고보 시절 자신과
결혼한 철종의 후손 이해영에 대한 안타까움을 소설에 담았던 것이다.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한 1936년 8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다.
오른쪽 붉은 박스 안의 기사는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싣고있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당당히 우승한 것은 8월 9일이다.
한국 시각으로 1936년 8월9일 밤 11시에 시작된 마라톤의 결과를,
시민들은 신문사 속보판 앞에서 밤을 새우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새벽 2시가 다 돼 손기정의 우승 소식이 전해지고, 이어 남승룡이 3위로 들어오자
사람들은 한밤중인데도 구름처럼 몰려나와 기쁨을 만끽했다.
그러나 정작 월계관을 쓴 손기정의 표정은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역대 올림픽의 어느 금메달리스트도 이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시상대에 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올림픽 입상은 수많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민족의 자긍심을
불러 일으켰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심훈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두 선수의 입상을 보도한 당시
조선중앙일보 호외 뒷장에 다음과 같은 시를 즉흥적으로 썼다.
비록 일장기를 가슴에 새기고 달리기는 하였으나
우리 민족의 저력을 세계 만방에 과시하였으며
그들의 우승은 곧 심훈의 가슴에 맺혀 있는 울분을 터트리는 일대 사건이었다.
시인 심훈은 <조선중앙일보>가 발행한 호외 뒷면에 실린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시에서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을 울린 기쁜 소식을 듣고는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린 고토의 하늘”이 “화닥닥 밝으려 하는구나!”라고
노래하며 이렇게 외쳤다.
서울 중구 만리동2가 옛 양정고 터에 위치한 기념공원 손기정공원(孫基禎公園)에
있는 심훈의 시비 <오오, 조선의 남아여!>다.
오오, 조선의 남아여!
– 백림(伯林) 마라톤에 우승한 손(孫) 남(南), 양군에게
심 훈
그대들의 첩보(捷報)를 전하는 호외 뒷장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이천삼백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戰勝)의 방울 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故土)의 하늘도
올림픽의 거화(炬火)를 켜든 것처럼 화닥닥 밝으려 하는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속에서 조국의 전승을 전하고자
마라손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데네의 병사를 만나 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서로 껴안고 느껴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이제도 이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 부를 터이냐!”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동아일보(오른쪽)과 중앙조선일보(왼쪽)의 지면이다.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신문은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다.
조선중앙일보의 체육부장 유해붕(柳海鵬)은
양정고보 육상부 출신으로 손기정의 선배였다.
손기정이 처음 양정 유니폼을 입고 뛴 게이힌(京濱)역전경주에서
손기정에게 바톤을 이어받아 우승으로 이끈 마지막 주자가 유해붕이었다.
당시에는 요즘과는 달리 운동선수들도 다 공부를 제대로 해야 졸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문사의 체육담당 기자 가운데는 운동선수 출신들이 많았다.
그는 손기정 선수가 시상받는 사진이 전송돼오자 8월 13일자에
그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전송사진이다 보니 원본 자체가 사진이 흐렸다.
인쇄기술도 열악하고, 종이 질도 좋지 않은 시절이라 일장기만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손기정 선수의 얼굴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사진이 흐렸다.
<동아일보>도 월계관을 쓴 손기정의 사진을 입수하여
8월 13일자에 게재하면서 손기정의 유니폼 가슴에 그려져 있는 일장기를 지워서 실었다.
이 두 신문의 8월 13일자 기사에서 사람들은 이 사진에서 일장기가 지워진 것이
고의로 지운 것인지 모른 채
그냥 넘어갔다.
총독부 당국은 손기정의 우승에 바짝 긴장했다.
총독부 경무국장이나 도서과장도 하루 걸러끔씩 신문사 사장이나
편집국장을 불렀다.
그리고 손기정 선수 보도에 대한 주의를 단단히 환기시켰다.
이길용(李吉用)·현진건(玄鎭健) 등 <동아일보>의 몇몇 기자들은
현장사진이 입수되자 이를 게재하기로 하면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8월24일치 신문에서 총독부의 검열을 받는 1판에는 뚜렷이 일장기가 보였다.
그러나 2판부터는 일장기가 사라졌다.
일본군 20사단 사령부가 이 사실을 발견한다.
비상이 걸려 이길용을 비롯해 일장기 말소와 관련된 <동아일보> 기자와
사원 10여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같은 사진을 게재한 <신동아>의 관련자들도 체포됐다.
동아일보사가 간행한 여성지 <신가정>은 ‘논개’의 시인 변영로(卞榮魯)가
편집책임을 맡고 있었다.
일장기가 달린 사진을 내보내기 싫어서 손기정 선수의 두 다리를
클로즈업한 사진을 내보냈다. 일본 경찰은 이마저 문제삼았다.
재치로 당대 최고인 변영로는 손 선수가 두 다리로 세계를
제패했기 때문에 두 다리를 클로즈업했는데 뭐가 잘못이냐고 버텼다.
일제는 그래도 일장기를 잘라버린 게 아니냐며 난리를 쳤고
쓰레기통을 샅샅이 뒤져 잘린 사진을 찾아냈다.
변영로가 쓴 사진은 일장기가 달린 사진이 아니라 양정고보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진이라 변영로는 화를 면했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가 문제가 돼 <동아일보>에 무기정간 처분이 떨어진다.
이때 <조선중앙일보>의 일장기 말소도 문제가 됐다. <조선중앙일보>의 유해붕 등은
당국에 자수했다. 유해붕과 사진부 기자 등 4명이 체포됐다.
<조선중앙일보>는 9월4일치로 사고(社告)를 내고 다음날부터 자진휴간에 들어갔다.
당시 일본의 형법에 외국 국기의 훼손에 대해서는 처벌 규정이 있었으나,
자국의 국기에 대한 처벌규정은 마련돼 있지 않았다.
특히 일장기는 공식적으로 일본 국기로 채택된 바도 없었다.
그래서 일장기 말소 관련자들을 처벌할 법규가 없어
이들은 40여일 간 온갖 고문 등 고초를 겪은 뒤 풀려났다.
이들은 언론계를 영영 떠나야 했다.
1936년 심훈이 ‘상록수’ 출판을 앞두고 장티푸스로 죽는다.
여운형조선중앙일보 사장은그의 장례식에 참석해
심훈의 시 ‘오오,조선의 남아여’를 읊으며 심훈의 죽음을 애석해 했다.
2017년 9월 20일 오전 충남 당진시 필경사에서 열린 심훈 추모제에 반가운 손님 3명이 찾았다.
작가 심훈 선생의 종손 심천보, 독립운동가 여운형 선생의 동생(여운홍) 손자 여인성,
마라톤 손기정 선수의 외손자 이준승씨다.
81년 만에 후손 통해 만난 심훈(왼쪽) 여운형(가운데) 손기정(오른쪽)
일제강점기 독립과 국민의 자긍심 고취에 앞장섰던 심훈은
농촌계몽운동 소설인 <상록수>의 작가로 독립운동가인 여운형과 가까운 사이였다.
여운형이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있을 때 심훈이 ‘직녀성’ 등을 연재했고
학예부장으로 발탁돼 인연이 깊어졌다고 한다.
1935년 조선체육회를 설립한 여운형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
손기정(1912~ 2002)이 대표선수로 선발되자 기금을 모아 훈련을 지원했다.
1936년 8월 9일 손기정이 금메달을 따자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에 일장기를 지
운 사진을 올리면서 이 사실을 알렸다.
심훈이 호외 뒷면에 그날의 감격을 표현한 시 ‘오오, 조선의 남아여!’를 남기며
세 사람의 인연이 시작됐다.같은 해 9월 16일 『상록수』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상경했던 심훈이 장티푸스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세 사람이 모일 기회가 사라지게 됐다.
여운형은 심훈의 유작인 ‘오오, 조선의 남아여!’를 눈물로 읊었다고 한다.
손기정은 1947년 여운형이 극우파 일원에게 암살당했을 때
그의 관을 직접 운구하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심훈의 죽음,
10여 년 뒤 여운형의 죽음으로 생전에 함께하지 못했던
세 사람을 대신해 후손들이 81년 만에 만나 선조들의 인연을 다시 이어가게 됐다.
지난해 11월 손기정 평화마라톤대회와 지난 8월 손기정 기념관에
‘오오, 조선의 남아여!’ 시비 제막을 통해 심훈과 손기정의 인연이 알려진데 이어
여운형과의 관계가 새로 알려지면서 세 사람의 인연이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당시 마라톤대회에 참석한 심천보씨는 손기정 선수를 기리며 심훈을 대신해
‘오오, 조선의 남아여!’를 낭독했다고 한다.
지난 1일에는 서울 손기정체육공원에 ‘오오, 조선의 남아여!’ 시비가 건립되기도 했다.
이날 추모제에 참석한 세 명의 후손은 “세 분의 유지를 받들어 후손들이 선양사업에
다 같이 노력하자”고 뜻을 모았다.
여인성씨는 1936년 자신의 큰할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심훈의 시 ‘오오, 조선의 남아여!’를 직접 낭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