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적 관점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이미지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자상한 목자의 이미지다.
오랫동안 예술가들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목자되신 구세주를 시각적·음악적으로 형상화해왔다.
요한복음은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에 관한 은유들을 섭렵하여 그것을 “나는...”(“I am”)이라는 선언의 방식으로 성육신에 적용한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선한 목자에 관한 대망을 완성하는 분으로 소개된다.
이스라엘의 전통 깊은 곳에는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목자와 같이 친밀하게 돌보실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 있다.
그것이 다윗과 같은 목자 왕이든, “어린 양들을 팔로 모으시고, 젖을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시는”(사40:11) 약속의 메시아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지키신다.
몇 가지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가 본문에 등장하는데, 이들을 해석할 때 우리는 요한복음 자체와 정경 전체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예수가 사용한 다양한 비유는 당시의 독자들뿐 아니라, 오늘의 해석자들에게도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과 도전을 준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주제는 자신의 생명을 내주는 목자에 관한 기독론적이고 속죄론적인 이해이다.
“목자가 누구인가,” “구속적 희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구원의 본질이 무엇인가,” “목자의 사역은 배타적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된다. 따라서 해석자는 다른 목자들의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다.
또한, 생명을 주는 공동체(life-giving community)를 강조하는 요한 특유의 교회론도 본문에서 고찰해봐야 할 주제이다.
요한복음의 기독론에 관한 논쟁의 역사는 길다.
많은 학자들이 요한의 기독론은 성육 이전부터 하나님의 생명 속에 있었던 말씀으로서의 성자에게 초점이 맞춰진다는 데 동의한다.
어떤 의미에서 복음 자체가 어떻게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가에 관한 서술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위로부터 온 분이 로고스의 구현이라는 깨달음이 깊어질 때 복음의 핵심에 도달하게 된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가 그리스도로 선포되는 것이 그의 사역 끝부분에서 일어나지만 - 이를 연역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 요한복음은 예수의 신적인 기원이 모든 것의 전제가 된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고차원적인 서론으로부터 시작하여 도마가 부활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결말 부분(20:28)에 이르기까지, 요한복음은 예수의 신성을 전제로 받아들인다.
속죄론적 내용은 이와 같은 기독론적 확신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예수는 양들이 따라야 할 분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양 하나하나를 알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기 때문이다.
그분의 유일한 관심은 양 떼의 안전이다.
그분은 양들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고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분이다.
그분은 목자일 뿐 아니라 문이다.
사람들이 그 문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 된다.
여기에서 어느 정도 배타적인 구원론의 요소가 보인다.
그분을 통해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
어느 사람도 이 구원의 입구를 놓쳐서는 안 된다.
본문은 한때 강력한 대체주의적(supersessionism:그리스도인이 이스라엘을 대체한다는 주장) 관점에서 해석된 적도 있었다.
그 관점에 따르면 예수보다 먼저 온 사람은(8) 가치가 없는 존재들이다.
9장에는 예수와 유대교 회당 지도자 간의 갈등이 묘사된다.
이 논점은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요한복음 전체를 대립의 관점에서만 파악하는 것도 문제다.
더 적절한 해석은 잘못된 목자를 따라는 것은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단순히 강조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백성을 노리는 거짓 메시아를 경계하라는 말씀을 하신다고 해석한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1세기 팔레스타인에는 그런 종류의 혁명가들이 있었다.
목자의 역할은 양들을 보호하고, 공포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보존시켜주는 것이다.
예수는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9절)라고 말씀하신다.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는 자와 달리, 이 믿을만한 목자는 풍성한 생명을 주신다.
풍성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포함할 수 있다: 공공의 선에 공헌하는 보람된 직업, 생산적인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기, 생명을 살리는 지속적 관계의 기쁨, 어떤 일이 생기든 그리스도를 통한 평정심.
요한복음에서 공동체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관심사이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공동체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예수는 나사로를 살리시어 공동체로 복귀키셨다.
(11:38-44) 예수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예수와 그의 공동체 간의 유기적 관계를 강조하신다.(15:1-11).
끝으로, 온갖 종류의 물고기가 가득 차도 찢어지지 않는 그물의 이미지를(21:11) 통해 예수의 공동체는 다양한 구성원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오늘 본문에서 목자는 양들을 모아 한 공동체가 되게 하신다.
이것이 요한의 교회론의 특징이다.
양 떼를 모으고 흩어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은 예수가 양과 목자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신다는 것을 표현한다.
교회는 예수와 맺는 관계를 통해 그 본질이 구현된다.
교인들의 생활에서 기독론적인 의식이 약화될 때, 즉 예수의 이야기가 무시될 때, 교회는 키도 없이 정처 없이 떠도는 배와 같아진다.
기독론은 하나님이 우리한테서 멀리 떨어져 계시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반대로 신적 비하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품으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이는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와 같이 되신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 서문이 밝히는 것이다.
교회가 목자의 이미지의 신학적 의미를 다시 깨닫는다면 그것이 교회에게 큰 힘이 된다.
기독교 아이콘의 역사를 보면 4세기 이후 예수의 목자상은 우주의 지배자(Pantocrator)의 상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그 이미지는 콘스탄틴 황제가 교회와 세속 제국을 통일했듯이,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군주와 같은 모습으로 그려졌다.
교회가 제국적 권력의 표현 수단이 되면서 목자의 지팡이는 왕의 홀로 바뀌었고, 가시면류관은 교황의 3중관으로 바뀌었다.
교회가 목자의 이미지를 회복하려 한다면 교회는 단순함, 희생, 연대(simplicity, sacrifice, solidarity)– 많은 사람들이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오늘날 필요한 것들-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주석적 관점
예수를 선한 목자라고 설명하는 내용이 18장 전체에서 계속되지만, 오늘 본문은 처음 10절만을 다루고 있다.
9장에서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대립하여, 나면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치유 행위와 시각장애인의 예수에 대한 증언을 거부하고 그에게 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마침내 “그를 추방한” 종교지도자들의 행위를 날카롭게 대비시킨다(9:34).
시력이 회복된 사람은 예수를 "주님"(9:38)으로 경배하며, 바리새인들 자신은 "눈먼 사람"(9:40-41)으로 판단된다.
예수와 믿음 없는 종교 지도자들 사이의 대비는 10:1-10에서 다른 방식으로 계속된다.
지도력을 상징하는 목자의 이미지는 성경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레코–로망 문학에서도 익숙한 은유이기도 하다.
많은 구약 성경 구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목자로 묘사되어 있다.
아마도 시편 23편이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기록일 텐데, 여기에는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친밀감과 보호의 분위기가 있다(“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다윗 또한 이상적인 목자 왕으로 찬양받는다(삼상 16:6~13 참조).
그러나 에스겔 34:1-31보다 더 중요한 구절은 없다.
이 구절은 의심의 여지없이 요한복음 10장에 영향을 미쳤다. 에스겔 34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목자라는 사실을 일깨우면서, 백성을 인도받고 보호받는 “영”으로 그린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을 양을 해치는 가짜 목자라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러면서 다윗을 하나님의 양을 돌볼 참 목자로 찬양한다.
이 전통적인 이미지는 요한에게 예수를 “도둑이고 강도”인 지도자들과 대비시키면서, 그들과 달린 양들을 보호하고 인도하고 풍성한 생명을 주는 “선한 목자”(11절)로 그리도록 영감을 주었다.
이 구절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1~6절은 참 목자와 양을 해치는 “도둑”과 “강도”를 대비시킨다.
7~10절에서 지배적인 은유는 예수를 “문”으로 비유하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담론은 직접적으로 예수의 반대자들, 즉 9장의 바리새인들에게 선포된다.
말씀 전체는 분명하게 복음을 듣는 모든 청중들을 가르치려는 것이지만.
이 구절은 9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눈 멈”에 대하여 더 깊이 숙고하는 “아멘”으로 시작하지만, 지금은 문으로 양 우리에 들어가는 목자와 다른 방법으로 넘어 들어가는 “도둑”과 “강도”(1절)를 비교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통적인 농경 사회에서 양을 위한 울타리는 집 근처에 돌담으로 지어졌으며, 아마도 기어 올라가지 못하도록 가시나무 가지로 덮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양을 훔치려 고 들어오는 사람을 막기 위해 잠글 수 있는 문이나 입구가 하나 있었다.
양은 음식(고기와 우유)의 원천이었고 의류와 다른 필수품과 물물교환을 하는 주요 자원이었기 때문에 도둑맞는 일이 많았고, 그로 인해 손실이 컸다.
여기서 그리고 있는 상황은 특히 밤에 입구를 지키고 있는 “문지기”(3절)이다.
이것은 양 우리가 문지기를 고용할 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여러 가정이 그들의 양떼를 돌보는 장소일 것이다.
문지기는 진짜 목자를 알아보고 그를 들어오게 한다. 양은 목자의 목소리로 그들의 목자를 알아본다.
여기서 다시, 이 구절은 실제 상황을 반영한다.
전통 사회에서 고대와 현재의 경험은 목자가 종종 양들을 각각 이름으로 구별하고, 양들은 목자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인식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목자가 양떼를 따라 다니는 서양과는 달리, 중동에서는 목자가 자신의 양떼 앞에서 가면서 계속해서 양들을 불러서 그들이 함께 있도록 한다. 요한의 장면에서 참 목자는 양 우리에서 양떼를 데리고 나와 목초지로 인도한다.
이 부분은 예수의 반대자들이 예수가 사용한 “그림 언어”를 “깨닫지 못하였다”(6절)는 것을 지적하면서 끝난다.
요한은 헬라어로 파로미아(paroimian)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 용어는 “비유(parable)” 또는 연장된 은유 혹는 “그림 언어”와 유사하다. 예수와 대화하는 사람들은 종종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예를 들어 니고데모와 빌라도의 혼란을 보라). 그러나 예수의 말씀에 열려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의미가 분명하다.
예수는 다윗의 정신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섭리적인 사랑을 반영하는 진정한 목자이다.
예수와 제자들과의 관계는 친밀감과 신뢰이다. 그들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를 알아본다.
그는 그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보호한다. 그들은 기꺼이 그를 따르며, 그는 제자들을 생명의 근원으로 인도한다(10절 참조).
마지막 부분(7-10절)은 다소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또 다른 중요한 “아멘”은 예수를 “양들의 문”(7절)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9절의 “나” 말씀에서 강조된다. “나는 그 문이다.”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서 요한이 선포하는 예수는 인간의 갈망 혹은 생계를 표현하는 특별한 특성들을 신적인 이름(“에고에이미”)과 융합시키는 계시를 선포한다.
빵(6:35), 생명(11:25), 빛(9:5), 진리(14:6), 길(14:6). 요한의 그리스도론에 비추어 볼 때, 예수는 신성한 현존(1:18)을 드러내시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랑을 인간의 갈망과 생생하게 접촉하도록 한다(3:16-17).
양들이 "목초지를 찾으러" 갈 수 있도록 하는 “문”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세상에 가져 오는 예수님의 역할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 (3:17). 도둑이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반면, 예수는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하려고” 오셨다(10:10).
“생명”이라는 개념은 요한복음의 근본이다. 복음의 시작 부분에서 “생명”은 말씀(1:3)를 통해 세상으로 온 하나님의 본질로 선언되며, 수난의 위기에서 절정에 이른 예수의 담화에서, 생명을 주시는 것은 예수의 사역의 목적 그 자체라고 선언했다(17:2, 3).
예수 자신이야말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생명”의 구체화이다(11:25, 14:6).
그러므로 요한이 말하는 “생명”은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생명력일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이해되어야하며,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공유하는 것이다(20:31).
목회적 관점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사화를 이야기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양식이 있다.
요한복음 9-10장에서는 3막짜리 연극으로 제시되었다. 제1막(9:1-12)에서는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예수가 기적적으로 고쳐주신다.
도입부에서 제자들(9:2)이 시각장애의 원인을 "죄"라고 하는 것은 본다는 것이 은유임을 즉각적으로 상기시켜준다.
요한복음에서 눈이 먼 것이나 보는 것은 생물학적인 능력이나 한계가 아니라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영적 지향과 개방성이다. 요한복음에서 본다는 것은 예수의 비전을 가리키는 것이다.
제2막에서, 예수가 함께 있는 장면과 예수가 함께 있지 않은 장면이 분리되어 이루어지는데, 기적에 의해 촉발된 종교적 논란을 보여준다. 연극은 제3막에서 마치는데, 예수가 해설자가 되어 선한 목자의 담론(요 10:1-21)을 이야기한다.
요한복음의 독특한 패턴은 기적 이야기를 소개하고, 뒤이어 대화 또는 논쟁을 하고, 해석적인 담론으로 삼부작을 종결하는 것이다.
우리 삶의 이야기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처럼, 장을 나누는 것은 단지 표시하기 위해서일 뿐이고, 이야기는 전체이다.
어떤 목회적 변화에서도 중심은 우리가 돌보는 사람들의 환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텍스트는 콘텍스트 없이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를 형성하는 만큼 이야기가 우리를 형성한다. 우리가 "진리"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구체화하느냐를 통해 이야기로 우리를 알리게 된다.
우리 삶의 한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다음 사건의 초점을 결정한다.
부활절의 넷째 일요일, 오순절로 가는 중간에 있는 주일의 말씀은 예수의 침으로 치료받은 사람과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은혜로운 비전에 대해 눈 먼 채로 있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에 대한 이야기이다.
요한의 연극의 제3막은 독백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그들"(6절), 즉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다. 이 문맥상의 청중과 독자는 들어야 한다.
선한 목자 담화에서 이 부분은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볼 수 있게 해주기 위한 노력의 연속이며,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제공하려는 시도이다.
종교적인 학자들와 지도자들에게 예수는 “비유”(6절)를 수수께끼처럼 전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는 수수께끼이며, 오늘 말씀이 끝날 무렵 우리 모두는 우리가 시각장애인이 아닐까 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위한 예수의 비전을 이해하고 있는가? 시각장애인이 되어 예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볼" 수 없는 사람에게 도전하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는 것은 혼란스럽다.
예수의 치료 사역은 그의 메시지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다. 그의 행동은 말보다 크게 말해왔지만 지금은 그의 말이 조금 혼란스러워 보인다.
예수는 자신을 목자라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문이라고 하려는 것인가? 서로 얽혀 있는 은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그의 메시지에 대해 눈이 먼 것일까?
예수의 수수께끼는 고대 그리스 극작가의 눈 먼 예언자와 셰익스피어의 지혜로운 어릿광대의 지혜 전달 방식과 일치한다.
오이디푸스와 리어왕은 하찮은 혹은 눈 먼 지혜 전달자를 무시하여 우리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을 경고하는 이야기이다.
예수는 선사禪師와 함께 선문답을 연구했나? 한 손으로 치는 박수 소리는 무엇인가? 선문답의 도전은 단지 “올바른” 대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섬세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좋은 파이처럼 층과 층 사이가 풍성하다.
당황은 우리를 오답에서 끌어내서, 간단히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명확한 미묘함으로 끌어들인다.
요한이 말하는 예수의 퍼즐을 풀기위한 해석학적 열쇠는 10절에 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목자 연극에서 누가 문지기인가, 누가 목자인가 하는 역할을 규정하는데 집중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풍성한 삶의 이미지를 놓치게 된다. 풍성한 삶은 예수가 모든 사람을 위해 가진 비전이다.
선한 목자 담화의 비유에 대해 목회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려면 예수회 고생물학자인 떼이야르 드 샤르댕 (Deilard de Chardin)의 개념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우리가 영적 경험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의 경험을 가진 영적 존재라고 말한다.
미묘하지만 중요한 해석의 렌즈는 독단적이고, 신비를 포용하는 요한복음의 저자와 일치한다. 같은 저자가 종교적인 학자인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3:3).
예수는 요한복음을 통해 풍성한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인 물(4:14), 생명의 빵(6:35), 세상의 빛(9:5), 그리고 양 우리 안에 있는 쉼터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어떻게 어머니의 자궁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지 궁금해 했던 니고데모는 이제 양 우리를 측량할 것을 고려하거나 양떼를 돌보는 데 드는 비용을 계산할 것이다.
그러면, 그의 머리는 그의 마음을 시편 23편의 목가적인 이미지에 대해 무감각하게 할 것이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들판을 안전하고 영양을 섭취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것은 목자가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신비와 수수께끼 담론의 일부는 양의 우리와 풀이 무성한 푸른 들판에도 위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낯선 사람, 도둑, 강도떼가 있다. 양떼는 "죽음의 그늘의 골짜기"(시 23:4)를 건너야 할 때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제1막에서 제자들처럼, 누구의 죄 때문인지 물을 수도 있다(9:2).
종종 있는 그대로 평안을 누리기보다 비난할 이유를 찾는 것이 더 쉽다.
양들은 자기들이 누구에게 속해있는지를 안다.
그들은 그들의 이름을 부르면 응답한다.
위험과 혼란이 있을 때에도 양들은 목자의 음성과 목자가 거기 있는 것에 위로를 받는다.
부활절 백합꽃이 피면서, 우리는 믿음의 수수께끼를 계속 받아들이도록 초대받는다.
목자는 죽음으로 풍성한 삶을 제공했다.
때로는 보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한 손은 여전히 박수를 치고 있다.
설교적 관점
오늘 본문 맨 앞 세 절은 수많은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문은 우리로 들어가는 공식적인 입구이다.
목자는 문을 통해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양들에게 간다. 문에는 목자를 위해 문을 열어 주는 문지기가 있다.
그리고 문으로 들어오는 목자에 관한 상세한 묘사가 나온다.
그의 목소리는 친숙하고, 목자는 양의 이름을 부른다.
목자는 양 떼를 우리 밖으로 인도한다.
목자는 그들 앞에 간다.
예수는 어느 은유를 당신과 가장 밀접한 은유로 제시하시는가? 문, 문지기, 목자?
오늘의 성서정과는 그 답이 목자라고 우리가 생각하기를 예상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몰이해에 대한 조치로, 예수는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 “나는 문이다”라는 말씀을 통해 문의 은유에 집중하신다.
문은 문 안에 있는 자들과 밖에 있는 자들을 구분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이해된다.
문은 문 안에 있는 자들에게 보호와 특혜를 제공한다.
이천 년 동안 교회는 예수가 문으로서 그런 역할을 해 주셨다고 주장했다.
요한복음 14장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는 말씀을 교회는 문의 은유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신학적 지침으로 삼았다.
문을 통해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문밖의 다른 무리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아야 한다.
문의 양편에서 배타주의과 포괄주의의 주장이 충돌한다.
신학적으로, 도덕적으로, 인종적으로 누가 안에 있고, 누가 밖에 있는가?
요한에 의하면 문(그리스도)으로 들어가는 양들은 피가 아니고 물의 표식을 받았다.
[역자 주: 요3:5를 가리키는 말인가? 원문:According to John, water and not blood marked the sheep that entered through the gate that was Christ.] 요한의 시대로부터 수많은 신학적 표식들이-종종 목자가 아니고 낯선 목소리에 근거한- 여러 무리를 다양한 우리로 인도했다.
본문의 상황이 오늘의 목회적 현실과 매우 다르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주일 아침에 예수가 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신학적으로 방황하는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특별히 오늘날 영성에 관한 수많은 낯선 목소리들이 외쳐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하다.
교인들에게 filioque(성령이 성부와 또한 아들로부터 나온다는 주장) 논쟁을 소개하고, 아들이 하나님을 완전하게 계시해주는 문이라는 구체적인 주장이 오늘날 일으킬 수 있는 다양한 논란에 관해 생각해보라.
예수가 사용한 다른 이미지에 근거하여, 아들의 목소리로 다른 낯선 목소리를 판단해보라.
오늘날 종말의 때에 수많은 양 떼의 생명을 훔쳐가는 도둑과 강도들의 주장을 검증해보라.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세미나 참석이나, 책이나 DVD 값을 내면 길과 진리와 생명을 준다고 주장할 때, 목자의 목소리와 다른 목소리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교회도 헌금을 작정함으로 길과 진리와 생명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예배, 성경공부, 교제가 목자의 음성을 분별하고 누가 풍성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인지 깨닫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문은 원래의 목적과 반대되는 기능을 할 수도 있다.
수 세기 동안 도덕적으로 너무 타락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해 교회는 문을 원래 목적과 반대되는 방식으로 사용해 왔다.
오늘날 교회가 성소수자를 대하는 방식과 어느 정도 연관이 되는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16세기로 가보자. 그때에는 성찬 식탁을 울타리로 보호하는 관습이 있었다.
물론 문은 울타리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이때 예수는 문인데 교회는 문지기가 된다.
교인들은 칼뱅의 신학적 전통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성찬에 관한 제네바 예식서를 읽으면 누구라도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잠시 머뭇거리게 될 것이다.
16세기에는 자유주의자가 문제였다.
20세기에 독일의 고백교회서는 나치 장교들이 성찬 식탁과 성수반으로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울타리를 치기도 했다.
이런 관습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면서 Michael Welker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성찬은 항상 평신도들이 민감한 도덕성과 종교성을 유포하고 확산하는 장이었다. 또한, 성직자, 목회자, 장로,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도덕성과 종교성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확산하는 장이었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규정의 준수와 밀접하게 연관된 성찬은 더는 화해의 잔치로 이해되지 않았다... 그 대신 성찬은 많은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하는 도덕적 검열관(문지기)의 도구로 전락했다.
교회가 문지기가 되고 예수가 문인 것은 도덕적으로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자들을 보호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윤리적으로 순수한 공동체에게 특혜를 주기 위함인가?
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병자를 위한 병원인가, 펠라기우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도덕적으로 완전해질 수 있는 자들의 모임인가?
문인 그리스도는 양 떼가 세상에 의해 타락하지 않도록 보호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잃은 양을 위해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는가?
예수만이 문이어서 종말에 다른 무리들도 그를 통해 모두 하나가 되는가?(17:20-21)
끝으로, 본문은 전후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성서정과에 따른 오늘의 구절 선택은 “나는 목자다”라는 너무 잘 알려진 비유(11절에서 시작)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을 끌었던 “나는 문이다”라는 비유에 좀 더 초점을 맞추게 한다.
우리가 요한복음 10장 앞부분에서 소개한 이미지들이 단순하지 않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으면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예수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또한, 성서정과 위원회가 첫 다섯 절에 관한 예수의 설명에 귀 기울였다면, 오늘 복음서에 더 적합한 시편으로 다음을 택했을 것이다: “구원의 문들을 열어라. 내가 그 문들로 들어가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겠다.
이것이 주님의 문이다.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갈 것이다.” (시 118:19-20) [역자 주:이번 주 성서정과 시편은 23편이다. 필자는 요10장 11절부터 목자의 이미지가 본격적으로 소개되니만 10절까지는 “문”의 이미지가 중심적이므로 시편 23편보다는 118편이 더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