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이순신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6년째 되는 1957년(정유재란) 4월 1일 감옥에서 석방된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전세가 약해진 조선해군을 재건하고 10만 왜병들의 서해 진출을 막기 위해 그는 하동 노량진으로 향하게 된다.
7월 16일 원균의 함대가 왜군에게 무참이 패전하자 7월 23일 선조는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하였다. 8월 3일 이른 아침 선조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이순신은 우수영이 있는 해남으로 가기 위해 우리 하동을 지나게 된다.
다음은 1597년 8월 3일의 난중일기를 풀어 실은 것이다..
8월 3일 맑음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오다. 명령은 곧 겸 삼도 수군 통제사의 임명이다. 숙배를 한 뒤에 다만 받들어 받았다는 글월을 써서 봉하고, 곧 떠나 두치(하동읍 두곡리)로 가는 길로 곧바로 가다. 초저녁에 행보역(횡천면 여의리)에 이르러 말을 쉬고, 한밤 12시에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새려한다. 남현 현령 박대남은 길을 잘못 들어 강정(하동읍 서해량 홍수 통제소 서쪽 섬진강가)으로 들어가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기다렸다가 불러 와서, 쌍계동에 이르니, 길에 돌이 어지러이 솟아 있고, 비가 와 물이 넘쳐흘러 간신히 건너다. 석주관(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 이르니, 이원춘과 류해가 복병하여 지키다가 나를 보고 적을 토벌할 일을 많이 말하다. 저물어서 구례현에 이르니, 일대가 온통 쓸쓸하다. 성 북문(구례군 북봉리) 밖에 전날의 주인집으로 가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 갔다고 한다. 손인필은 바로 와서 볼 겸해 곡식까지 가져오다. 손응남은 올감(보통 품종보다 일찍 익는 감)을 바치다.
이어 구례. 곡성. 옥과. 순천 .낙안. 보성을 거쳐 8월 20일 해남에 도착한 이순신은 군대를 정비하여 1597년 9월 20일 불과 12척의 패잔선으로 일본의 정예 함대 200여 척과 10만 대군을 격멸시켜 세계 해전사에 믿기지 않는 신화 ‘명량대첩’을 이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