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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남정맥 3 구간(배토재 ~ 선들재)
1. 산 행 일 : 2011년 4월 10일(일)
2. 산 행 지 : 낙남정맥 3 구간(배토재~선들재)
3. 소 재 지 :
4. 참가인원 : 김명자, 노승애, 박상호, 안상경, 윤희원, 이용준, 장현옥(7명)
5. 날 씨 :
6. 준 비 물
(1) 전 체 - 차량, 안전장구, 구급약, 사진기, 지도
(2) 개 인 - 비상식, 등산화, 배낭, 윈드쟈켓 및 우의, 스패츠, 아이젠, 예비옷(보온)과 양말, 모자, 장갑, 후레쉬, 식수(보온통 등), 세면도구, 신분증, 다용도칼, 휴지, 도시락과 수저세트 등 기타 개인용품
7. 산행개요(산행 길잡이)
경상남도 하동군의 북천면에서 옥종면으로 넘어가는 1005번 지방도상의 배토재에서 날등 따라 동남진 해 내려가다가, 사천시 곤양면과 곤명면과의 1001번 지방도 고갯마루에서 마감하는 이번 구간은 최고봉이래야 245.5m봉의 무명산이다.
도상거리로 보면 18km가 넘지만 낮으막한 야산 오솔길은 걷기에 편하고 사방으로 조망도 뛰어나서, 날등길 북쪽으론 산청군의 옹골찬 산하들이 줄달음치며 따라오고, 남쪽으론 사천시의 야산 구릉 뒤편으로 사천만 수평선이 햇살에 눈부시다.
이번 구간의 북쪽 계곡물은 진양호로 흘러들어 남강~낙동강 물길따라 흘러가고, 남쪽의 계곡수는 사천만이 있는 남해바다로 곧장 유입된다.
8. 산행계획
[1] 총 산행 거리 및 소요 시간 : 총 산행 약 18.6km, 8시간 30분 소요
[2] 산행지 이동 경로 및 시간
옥종불소유황천여관 기상(05:00) ∼ 아침(05:30/아침/06:00)
[3] 산행 구간 거리
배토재(170m,1005번도로)--2.0km--안남골재(160m)--3.0km--옥정산(244m)--2.2km--밤재--1.6km--원전고개(2번국도)--2.0km--245.5봉--5.1km--딱밭골고개--2.7km--선들재(1001반도로)
[4] 산행코스 및 시간
배토재(06:30) → 안남골고개(07:15) → 237m봉(07:40/07:50) → 마곡고개(08:50/09:50) → 2번국도(10:30) → 헬기장(10:45/점심/11:25) → 245.5m봉(12:00) → 234.9m봉(12:50/13:00) → 딱밭골고개(13:50) → 183.5m봉(14:30) → 선들재(15:00)
[5] 산행 후 이동
선들재(15:20) ∼ 진주(15:40/저녁/17:10) ∼ 대전통영, 경부고속 ∼ 수원(21:10)
[6] 탈출로 및 편의사항
○ 서울남부터미널(02-521-8550),
○ 원지매표소(055-973-0547)
○ KOBUS(1588-6900),
○ 옥종개인택시(055-882-8094, 011-850-8364)
○ 원지개인택시(055-972-0752),
○ 사천읍개인택시(080-750-8282)
○ 원지마을(대구뽈찜,생선구이, 055-973-8518)
○ 옥종불소유황천여관(055-884-5950),
○ 산촌식당(055-882-2655)
○ 서울-원지(06:30 버스, 1인 17,400원),
○ 원지-길마재(택시, 4인 35,000원)
○ 진주-수원(17:10 버스, 1인 25,500원),
○ 선들재-진주(택시, 4인 25,000원)
9. 2구간 참고자료
▣ 배토재
♣ 화정에서 옥정면(경남 하동군 옥정면) 정수리와 곤명면(경남 사천시 곤명면) 삼정리로 넘어가는 고개
♣ 백토고개(백토티) 서전 서쪽에 있는 마을. 고개 밑이 됨. -한지총
♣ 백토고개 마을 인근에 백토(고령토)광산이 있어 이 광산으로 인하여 이 고개에 마을이 생겼다 하여 백토고개라 함 - 국포
▣ 경남 사천시 곤명면
♣ 연 혁
고려 태조때 곤명현, 현종때 진주군, 조선 세종때 곤양군 곤명리 개칭
고종 32년 곤양군은 사천군에 편입되었다가 곤양군에 환원
1914년 사천군 편입, 1995년 통합사천시로 되면서 오늘에 이름
♣ 지역특성
▶ 지 리 : 우리시 최북단에 위치하며 국도2호선(진주~하동간) 및 철도(경전선)이 통과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2개시군 6개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음.
▶ 산 업 : 낙동강 수계구역(덕천강)으로 농업용수가 풍부하고 농업기반 조성이 양호한 전형적인 농촌지역으로 녹차, 딸기, 쌀, 고추등 다양한 농산물 생산
▶ 문 화 : 도지정 문화재로 등록된 다솔사 대양루, 극락전, 응진전이 있어 예로부터 명지로 알려져 있음
▶ 관 광 : 세종․단종태실지와 봉명산 다솔사의 명소가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단일 단지 면적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인 47.7ha의 다자연 녹차단지가 있으며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한 덕천 강변도로와 수질이 뛰어난 중탄산나트륨 온천인 진양호캐리비안온천이 있어 웰빙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음
▣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隱士里)
♣ 본래 곤양군 소곡면의 지역으로서, 예전에 난(亂) 때 선비들이 이곳에서 숨어서 살았으므로 은사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조동을 병합하여 은사리라 하여 사천군 곤명면에 편입됨. 은사, 옥동 2개 마을로 형성되었음. 중은문집에 사인(士人) 진진사(陳進士)가 은거하여 여생을 보낸 곳이고 등과(登科)를 싫어하는 많은 선비들이 숨어 살았다 하여 은사동이라 불렀다한다. 면 소재지에서 4km이고 소실골의 중간지점이다. 유청산에는 산정에 성성대(星星臺)라는 널따란 바위가 있어 선비들이 모여 영시(詠詩)와 시론(時論)으로 담론(談論)을 펴고 놀았던 곳이라 하여 사집봉(士集峰) 또한 경치(景致)가 좋아 많은 선비가 모여 놀던 곳이라 하여 이름 지워졌다 한다. 정자관(程子冠) 산이 백호등(白虎嶝)으로 옆으로 감싸 들어 풍수설에 의한 마을 형국(形局)이 이루게 된 바라 한다. 점골에는 연대가 오래된 옹기점굴이 있어 간혹 유물이 나옴으로 고고학자가 몇 번 답사한 곳이니 곤남군 때에 자기공물 출처지로 추정되니 확증은 없다. 가장 교통이 불편했던 “소실골”이 1958년 송백도로의 개통으로 주민의 불편해소는 물론이요 오지 농산물과 기타 경제작물의 반출입에 큰 도움이 되어 소득 향상에 이바지 하였으니 이면에는 당시의 도의회의장이던 이정한의 숨은 공로가 있다. 은사국민학교의 소재지이며 보건진료소도 있고 하여 주민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나 초등학교는 폐교되었다. 부락은 본땀과 점골마을 독산동 등 세 마을이 은사리이다.
<출처> 사이버사천
http://4000news.com/sachon/sajiname/gonmyeong/eunsari.html
♣ 은사(隱士)마을 : 예전에 난(亂) 때 선비들이 이곳에서 숨어서 살았으므로 은사동이라 하였고, 은사마을과 옥동마을이 있다
♣ 옥동(玉洞)
도금, 옥동의 두 마을로 형성되어 있고 서편의 산능선을 끼고 북천면과 경계하고 있다. 1418년 세종 어태(御胎)를 조동산에 이안하였고 안태지가 와우(臥牛) 형국이다. 소가 밥그릇(구시)을 안고 배부르게 누운 지형곡(地形谷)이라 하여 동명(洞名)이 “구시골”이라 불리어 오다가 그 후 구시(槽)가 구슬(玉)로 바뀌어져서 옥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이 마을에는 세종(世宗)과 단종(端宗)의 어태가 안치되었던 사적지가 있으나 유적으로는 산록에 비석만 보존되어 있고 그 외는 거의 형태가 사라졌음이 안타깝다. 주변지형을 보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분지(盆地)를 이루고 있는 마을 앞에는 들판이 단종 태능이 있었던 곳은 들 가운데 뚝뫼이다. 이것은 꿩이 들에 내려와 기어 다니는 설이라 하는데 마을 뒤에 매봉산 매가 꿩을 덮치려고 하니 “소리골”에서 소리를 질러서 포수(捕手)설의 포수가 총을 겨누어 매가 꿩에 접근치 못하게 하는 형국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마을은 산간지대로서 수도작의 단일 경농이다. 또한 7명지가 있는데 그곳은 호수(虎鬚“ 호랑이 수염), 호미(虎尾), 노서하전(老鼠下田), 사두(蛇頭), 복치(伏雉), 와우(臥牛), 옥녀도금(玉女搗錦) 등 일곱 곳을 말한다.
♣ 옥동(玉洞)마을
소가 밥그릇(구시)을 안고 배부르게 누운 지형곡(地形谷)이라 하여 동명(洞名)이 “구시골”이라 불리어 오다가 그 후 구시(槽)가 구슬(玉)로 바뀌어져서 옥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 곤명면 은사리의 문화재
곤명면 은사리에는 세종대왕태실지(경상남도 기념물 제30호)와 단종태실지(경상남도 기념물 제31호), 대방진굴항(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5호)가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사천읍 선인리의 사천향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0호), 곤양면 송전리의 곤양향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1호) 등이 있다. 그밖에 사천읍의 판소리 고법(鼓法: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8호), 판소리 〈수궁가〉(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9호) 등이 전해오고 있으며, 곤양면 성내리에는 비자나무서식지(천연기념물 제287호)가 있다.
▣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세종대왕태실지(世宗大王胎室址)
왕실에서는 태를 왕자와 공주의 신체와 같이 여겼다.사천시에 있는 ‘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 수개(修改) 의궤’와 남아있는 석물 등의 자료에 따르면, 태실은 8각의 대석 위에 중동석과 상개연엽석을 놓은 뒤 주변에 전석을 깔고 돌난간을 돌린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730년에 제작된‘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 수개(修改) 의궤’는 현존하는 유일한 왕의 태실 보수 기록으로 알려져 있고, 문화재나 보물 등의 지정 가치가 높다. 세종대왕 태실지(世宗大王 胎室址)가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산 27번지에 있다. 1975년 2월12일 경상남도기념물 제30호로 지정돼 사천시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세종이 탄생한 지 22년이 되던 해인 1418년(세종 즉위) 조성되었다. 태실은 태를 묻은 곳이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태를 몸의 일부라고 여겼고, 그래서 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풍습이 있었다. 특히 왕실에서는 태를 왕자와 공주의 신체와 같이 여겼고, 태실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왕의 태실은 그 왕의 즉위년에 주로 만들어졌는데, 왕의 재위 기간 나라를 잘 다스리느냐 혹은 잘못 다스리느냐를 이 태실에서 시작한다는 의미를 두었다. 그래서 태실지는 길지(吉地)를 찾았고, 태실도감을 만들 정도였다. 당연히 풍수지리학으로 태실지는 명당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태실을 중시하는 풍습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최초의 태실 기록은 신라시대 김유신의 태실로 알려져 있으며, 충북 진천에 있다. 사천시 곤명면에 있는 세종대왕 태실지는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당시 왜적들에 의하여 도굴, 파괴된 것을 1601년에 중수하였다. 그리고 1733년(영조 9) 태실비가 세워졌다. 태실비의 규모는 높이 180㎝, 너비 33㎝, 두께 27㎝이다. 태실은 일제 강점기인 1929년 경기도 양주군으로 이전하였고 태실지에는 민가의 사설묘가 들어섰다. 현재는 당시의 조형유물인 태실비와 태항아리를 안장하는 중동석(中童石), 상개연엽석(上蓋蓮葉石),돌난간, 지대석, 주춧돌, 팔각대 등의 석물을 산자락에 한데 모아 두고 있다. 사천시에 있는 ‘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 수개(修改) 의궤’와 남아있는 석물 등의 자료에 따르면, 태실은 8각의 대석 위에 중동석과 상개연엽석을 놓은 뒤 주변에 전석을 깔고 돌난간을 돌린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730년에 제작된‘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 수개(修改) 의궤’는 현존하는 유일한 왕의 태실 보수 기록으로 알려져 있고, 문화재나 보물 등의 지정 가치가 높다. 세종과 단종의 태실 보수는 경상도 관찰사 박문수의 장계로 시작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두 태실에 표석을 세우기 위해 돌을 진주(대곡)에서 사천(곤명)으로 옮기는데 1170명이 동원되어 닷새 동안 일을 했다고 한다. 돌을 옮기면서 농작물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기록도 있다. 사천시에서는 산자락에 대충 모아둔 세종대왕 태실 유적들을 원래 태실지로 옮겨 복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세종태실지가 개인 소유로 성역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종태실지에는 4기의 민묘가 있다. “옛날 왕의 태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세종대왕의 ‘자주정신’과 ‘과학정신’이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반드시 심어줄 정신임을 상기해 볼때, 세종대왕 태실은 그냥 태실로서의 의미보다 ‘세종정신’의 교육 도장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2003년 06월 26일 12시 08분 / 문화
Copyright (c) 1999 사천신문 Co. All rights reserved.
<출처> http://www.4000news.com/gisa/view.html?hosu=489ho&number=9
▣ 단종태실지(端宗胎室地)
♣ 종 목 : 시도기념물 31호
♣ 소재지 :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산438
♣ 소유자 : 국유
♣ 연락처 : 사천시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재위 1452∼1454)의 태(胎)를 봉안하는 태실이 있던 곳이다. 조선 왕실에서는 태를 사람 신체 가운의 근원이라고 생각한 도교사상과 풍수지리설에 바탕을 두고,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태를 묻기 위해 태실도감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태를 봉안할 명당을 물색하고 안태사를 보내어 태를 안치하였다. 특히 다음 왕위를 이어갈 왕자나 왕세손 등의 태실은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현재 단종의 태실터에는 민간인의 무덤이 들어섰으며, 영조 9년(1733)에 세운 태실비와 태실석재 일부만이 한데 모아져 보호되고 있다.
<출처> http://www.rfo.co.kr/inquire/view.php3?id=4&mode=view
▣ 안남골고개
♣ 안남고개 : 하동군 북천면 옥정리에 있는 고개
♣ 안남골 : 남포 북쪽에 있는 마을
♣ 남포 : 빙옥정 서북쪽에 있는 마을
♣ 옥정리 ① (玉亭里=빙옥정=빙옥동=옥정)
본래 진주목 대야천면의 지역으로서 빙옥정이란 정자가 있었으므로 빙옥정 또는 빙옥동, 옥정이라 하였는데, 융희 4년(1910년)에 하동군에 편입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등황동, 빙옥동, 신촌동과 곤양군 초량면의 삼거리를 병합하여 옥정이라 해서 북천면에 편입 됨
<출처> 한국지명총람 권 10, 하동군
♣ 옥정리 ②
▶ 가구수(인구수) :204가구(454명) ▶ 자연마을 : 신촌마을, 빙옥마을, 남포마을▶ 마을의 특징
○ 신촌마을은 옥정리에 속해 있으나 고려말엽에 가리동은 곤양군 초량면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옛 국도에 삼거리가 있는데 하동군과 진주와 곤양군의 삼군(三郡)을 통하는 세 살래 길이 있어 삼거리라 칭하였고 지금의 당산보(북천역) 옆을 말하는 것을 보면 신촌은 3개 군의 경계지역으로 가리동은 곤양군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동리는 새로이 형성되었으므로 부락명(部落名) 그대로 새로 생긴 마을 즉 신촌(新村)이다.
○ 빙옥마을은 고려말엽에는 진주의 대야천면(大也川面)의 선천(鐥川)에 속했으며 빙옥(氷玉)이라 했으며 약 400년 전에 인가(人家)가 형성되어 살았으며 어씨(魚氏)가 집성촌(集成村)하고 살았다 하나 그 근거는 어득강정(魚得江亭)터가 있는 것 이외에는 근거를 찾을 길 없고 1914년에 대야천면의 일부(빙옥, 남포, 화정 등)가 하동군으로 이속(移屬)할 때 하동군 북천면으로 이속되었다.
○ 남포마을은 북천명의 동북쪽에 위치하는 마을로 연대는 미상이나(고려중엽으로 추정) 부락명을 난곡(蘭谷)이라 불리워졌는데 고려 공민왕 7년(1358년) 남해현(南海懸)이 왜침(倭侵)을 당하자 주민들이 일부는 현 삼천포(三千浦)로 일부는 진교의 대치사로 분산 피난을 하였는데 당시 진주 목사의 명에 의하여 대야천변(大也川邊)으로 옮겨 살게 하였던바 난곡에다 현청(懸聽)을 두고 약 70년간(공민왕 7년(1358년) ~ 세종 9년(1428년))까지 있으면서 난곡을 개명하여 남포(南浦)라 불리워졌다. 뒤에 세종 원년(1419년)에 대야천변의 남해현과 곤명현(昆明縣)을 명하여 곤남현(昆南懸)으로 하였다가 순종 8년(1914년)에 지방행정구역개편으로 대야천면(大也川面)이 하동군으로 편입되므로 남포부락도 하동군으로 합병되었다.
▣ 옥정산(玉井山, 244m)
▣ 마곡고개(=밤재)
♣ 경남 사천시 곤명면 봉계리와 마곡리를 잇는 2차선 포장도로
♣ 마곡리(摩谷里)
본래 곤양군 소곡면의 지역으로서 마실 또는 마곡이라 해서 사천군 곤명면에 편입되었다. 옥종면 북방리와 접경 하고 있으며, “소실골”과 “톳골”길이 분기점이다. 마실 금오 막골의 셋 땀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마곡의 동명내력은 뒷산이 “매봉산”이고 응실형국으로써 “매실”이 “마실”로 부르게 된 것이라 하고 또한 갈마 음수정이 들 가운데 있었음으로 마곡이라고 하다가 구한말 때 마곡으로 개칭하였다. 금오(金烏)는 뒷산이 까마귀머리 형상이고 풍수설에 “금오설”이라 하여 동명이 지어졌고 이곳의 산로에서는 10여년 전에 석탄을 채굴한바 있으나 화력이 미약하여 지금은 폐광되어 버렸다. 막골은 골이 막다른 곳에 마을이 생겼음을 뜻한다. 해방 후까지 있었던 마곡양조장은 소실골 노장층이 가장 많이 놀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폐허가 되어 그 발자취는 없어졌고 마을 앞 정자나무만이 싱싱한 그늘로 길손과 주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명군 제독 마귀가 우리 의용군과 연합하여 왜군을 격퇴케 했는 바 진양강씨의 난중 무사피신은 명군의 힘입음이 컸다하여 마귀(麻貴)의 성을 따서 마곡이라 하고 송림은 이여송의 송자를 따서 명명 되었다는 설도 있다.
<출처> 사이버사천
http://4000news.com/sachon/sajiname/gonmyeong/magogri.html
♣ 마곡리(摩谷里)
마곡고개 지명이 유래한 "마곡리(摩谷里)"는 고개 우측 아래에 있는 마을인데, 뒷산이 매가 사는 응실(鷹室)형국이라 매봉산으로 불리고 동네명은 "매실" 또는 "마실"로 불리다 구한말쯤에 마곡으로 지명이 아예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 마곡[馬谷] 마곡리 : 동리 뒷산이 달리는 말과 같다고 하여 마곡 혹은 마실로 부르고 있음. - 국포
▣ 원전고개
♣ 원전고개 : 사천시 곤명면 봉계리 원전(院田)마을 위에 있는 고개
▣ 봉계리(鳳溪里)
본래 곤양군 초량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조 때 완사역에 딸린 봉계원이 있었으므로 원골 또는 봉계원, 봉계라 하였는데 일명 완사에서 15리의 거리에 있는 원이라 하여 십오리원(十五里院)이라고도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천동을 병합하여 봉계리라 해서 사천군 곤명면에 편입되었다. 충무공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삼가(三嘉)에서 노량(露梁)쪽으로 행여(行旅)할 적에 수군패보(水軍敗報)를 들은 십오리원(十五里院)이란 곳이 오늘의 원전(院田)이다. 봉계리의 유래는 앞산의 봉알자리(飛鳳包卵)와 초량천(草梁川)의 내가 흐르고 있으므로 봉계로 명명(命名)된 것이다. 원전, 오저(俉苧) 2개 마을로 이루고 있다. 원전(院田)에서 마곡(磨谷)으로 넘나드는 산길은 옛날 옥종(玉鐘)에서 곤양으로 통하는 대로였다 한다. 산마을 길옆에 돌무덤이 수기(數朞) 산재되어 있는데 사당(寺黨)무덤이라 전해지고 있다. 옛날 사당(寺黨)패에서 행여사(行旅死)하면 죽은 곳의 가까운 산길 옆에 묻는 것이 그들의 버릇인데 이곳도 그 무덤이었다 하며 길손이 그곳을 지나면서 지금도 돌을 던져 그들 원귀(怨鬼)를 달래고 있고 고개 먼당에는 서낭당이 현존하고 있다. 하동, 곤양 방향의 갈림길이기도 하여 옛날에 삼거리로 호칭된 바도 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이곳에 헌병분견소가 설치되어 면내 우국지사(憂國之士)를 고문한 곳이기도 하며 그 자리에 지금은 곤명지서가 들어서 있다. 1930년 사설 광명학원(光明學院)이 설립되어 민족교육도장으로 각광을 받았는데 당시의 강사진은 후일 건국 시 정계와 학계의 쟁쟁한 인사들이었다. 1968년 경전선철도의 개통으로 다솔사역이 마을 앞에 설치되었으며 1979년 취락구조개선으로 25호의 농촌주택이 개량되었다. 면사무소가 송림에서 이곳으로 이전 되었다. 마을은 “안마을”과 “바깥마을”로 되어 있고 두 마을 중간에 희귀목인 입화목(立花木, 일명 사화목)이 150년의 연륜(年輪)을 가져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사이버사천
http://4000news.com/sachon/sajiname/gonmyeong/bonggyeri.html
♣ 봉계리(鳳溪里)
봉계리의 유래는 앞산의 봉알자리(飛鳳包卵)와 초량천(草梁川)의 내가 흐르고 있으므로 봉계로 명명(命名)된 것이다. 원전, 오저(俉苧) 2개 마을로 이루고 있다. 일명 완사에서 15리의 거리에 있는 원이라 하여 십오리원(十五里院)이라고도 한다.
♣ 원전(院田) : 조선조 때 완사역에 딸린 봉계원(여관)이 있었으므로 원골 또는 봉계원, 봉계라 하였는데 일명 완사에서 15리의 거리에 있는 원이라 하여 십오리원(十五里院)이라고도 한다. 충무공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삼가(三嘉)에서 노량(露梁)쪽으로 행여(行旅)할 적에 수군패보(水軍敗報)를 들은 십오리원(十五里院)이란 곳이 오늘의 원전(院田)이다.
♣ 오저(俉苧) : 오저는 봉계리(鳳溪里)에 속한다. 초량천을 사이에 두고 오천, 저동(苧洞)의 양 마을을 합한 것이 오저 부락이며 구한말 때 초량면사무소가 소재하고 있었다. 오천(梧川)은 뒷산이 봉황산이고 봉은 오동나무에 깃든다 하여 산에 오동나무를 심었다 하고 마을앞에 초량천이 흐르고 있으므로 오천(梧川)이라 하였다고 한다. 저동(苧洞)은 옛날 모시(苧)가 많이 생산된 연유에서 나온 말이라 한다
▣ 사립재
♣ 조매동 남쪽에 있는 고개
♣ 조매동 : 성방 동쪽에 있는 마을. 매화목이 많이 있었다는 뜻에서 나온 동명이다.
<출처> 사이버사천
▣ 딱밭골(=저전동 : 楮田洞)고개
♣ 조선시대 당시 닥나무가 많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딱밭골이라 함
♣ 저전동, 딱밭골 : 성방 남쪽에 있는 마을. 딱나무가 많았음.
▣ 성방리(城方里)
♣ 본래 곤양군 성방면의 지역으로서, 성방면의 소재지가 되므로 본촌 또는 성방이라 하였는데 1941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우교동을 병합하여 성방리라 해서 사천군 곤명면에 편입되었다.
곤명이 4개면으로 분리되어 있을 적에 성방면(城方面)의 소재지였고 성지(城地)가 있으므로 성방이라 호칭되어 오고 있다. 사립재의 능선(稜線)을 따라 곤양면 포곡(浦谷)과 접하고 있는 마을로 쇠다리(牛橋), 난시골, 조매동(早梅洞), 딱밭골(楮田洞), 샘이골(井洞)의 다섯 마을로 산재되어 있다.
http://4000news.com/sachon/sajiname/gonmyeong/seongbangri.html
♣ 산성산 : 딱밭골 남쪽에 있는 산. 임진란 때 쌓은 성이 있음.
▣ 산성지(山城地)
일명(一名) 석장대(石將台)라고 하며 성방리(城方里) 저전동(楮田洞) 앞산 300m 높이의 산턱에 자리잡고 있다. 산정(山頂)에서는 사천만(泗川灣) 일대(一帶)가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왜장(倭將) 시마쓰(鳥津義弘)가 조선수군(朝鮮水軍)의 위협(威脅)에 대처(對處)코져 사천(泗川) 선진(船津)에 축성(築城)하였으니 부산(釜山)의 자성대(子城台)와 함께 침약교두보(侵略橋頭堡)의 전진기지(前進基地)였다.
지방의병(地方義兵)과 주민(住民)이 왜군(倭軍)의 동태감시(動態監視)와 침략(侵略)에 대비(對備)하여 성(城)을 쌓은 것이라 본다. 산성(山城)봉오리에서 선진(船津) 앞바다를 내려다 보이는 곳에 둔소(屯所)를 차려 왜군(倭軍)의 동향(動向)을 감시(監視)하여 상황(狀況)을 진주성(晋州城)에 보고(報告)할 수 있는 위치(位置)이다. 당시(當時)의 문헌(文獻)을 찾을 길 없어 축성(築城) 내력(來歷)과 활동상황(活動狀況)을 알지 못함이 유감(遺憾)이다. 다만 흩어진 석편(石片)에 석자(石字)의 각자(刻字)가 있고 석장군 (石將軍)이 놓았다는 돌다리가 있다. 이 돌다리를 미루어 보아 임진왜란때 이미 석씨(石氏)가 살고 있었다는 뒷받침이 되기도 한다. 지금 성터(城)에는 잡목(雜木)만 무성(茂盛)하며 성벽(城檗)의 석축(石築)도 허물어져 흔적만을 더듬어 볼수 있는 정도(程度)이다.<출처> 사천시사, 곤명면지
http://sisa.sacheon.go.kr/program/history/history.php?_view=view&d1=5&d2=10&idx=105&num=141
▣ 선들재(仙讀峙)
♣ 선들재(仙讀峙) : 경남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 갑사동 북쪽 고개, 곤명ㆍ신흥으로 통하고 있으며 신선들이 글을 읽었다고 붙여진 이름.
♣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와 곤명면 작팔리를 연결하는 1001번 지방도
<출처> 사천시사
http://sisa.sacheon.go.kr/program/history/history.php?_view=view&d1=4&d2=8&idx=80&num=2364
▣ 흥사리(興士里)
곤양군 가리면에 속해 있다가 1914년 갑사동ㆍ흥속동과 묵곡동 일부를 병합하여 흥속의 “흥”자와 갑사의 “사”자를 글자를 따서 흥사라 하여 사천군 곤양면에 편입되었으며, 흥사라는 말은 이름 그대로 선비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흥사리는 면의 동쪽 9km지점이며 남쪽은 검정리, 동은 탑동, 서는 묵곡리와 북은 곤명면 신흥리와 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 중앙에 천길봉이 솟아 있고 북쪽에는 신선들이 글을 읽었다는 선들재(仙讀峙)와 명당인 곽가등이 솟아있어 곤명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문둘방으로 문달사라는 고찰이 있었으나 지금은 절은 간곳이 없고 절터와 주춧돌들이 대밭 속에 남아 있다.
예전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하며, 구강언을 막기 전 까지는 회관이 있는 앞들까지 배들이 들어와서 염전용 화목과 기타 화물을 실어 날랐다 한다. 회관이 있는 앞들 아래에는 보물 제614호인 매향비가 있으며 비문과 건립 연대를 확인할 수 있어 향토사와 고고학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현재 마을 남쪽에서 북쪽까지 2차선 도로가 포장되어 완사까지 통하고 있으며, 입구의 맨 처음 마을은 단숙(흥속)이라 하는데 문달사가 있을 적에 세속과 연을 끓는다는 단속(斷俗)이란 말도 전한다. 재를 넘으면 몰구리 앞들에는 근래까지 인공호가 되어 부들이 꽉 차 있었으나 흙을 메워 농토로 이용하고 있으며, 회관이 있는 덕골은 중심 마을로 비석거리에는 옛 지주들의 시혜공덕을 기리는 소작인들이 세운 비석이 있고, 제방 밑에 깊은 골에 흥사 저수지(1998년 준공)가 있어 흥사는 물론 묵실ㆍ검정ㆍ고동포까지 농용수를 충분히 공급하고 있다.
생활은 벼농사 위주의 농사이며, 비닐하우스에는 토마토ㆍ고추 등을 촉성재배를 하고 있으며, 산지를 이용 밤ㆍ감 등의 과일을 수확하여 소득증대의 일익을 담당하며, 교통은 하루에 3회 사천으로 정기 버스가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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