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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디고 유니콘 원문보기 글쓴이: 봄날isu
건강과 영성
"몸이 하는 말을 듣자"
건강, 우리의 문제
현대의학은 한계에 달했다.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달로 의학은 끝없이 발생하는 새로운 질병들을 치료해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갈수록 더 건강하지 않다고 느낀다. 현대의학은 많은 병들, 특히 외부 감염으로 발생하는 병은 성공적으로 치료해 왔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약에 대한 이해와 함께 다루어져야만 하는 새로운 병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제대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의지해온 건강관리 체계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미 깊이 느끼고 있다.
사회는 건강관리를 위한 재정 부담에 지쳐버렸다. 정치가들은 그 부담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건강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의학 분야에서 대중의 일반적 견해를 반대할 힘이 없다. 더 진보된 과학기술과 더 좋은 약품으로 건강을 살 수 있다는 식의 태도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한 듯 하다. 사람들은 스스로 건강한 생활 태도를 익히는 대신 과학자와 의사들에게 그 책임을 떠맡긴다. 그 결과, 과식과 운동부족, 담배, 술, 마약 등 중독으로 인한 잘못된 생활을 고치기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낭비하고 있다. 사람들은 삶에 허황된 기대를 품는다. 건강이 마치 어떤 기술처럼 획득할 수 있는 것이고 자신들은 건강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환상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의학을 제외하고도 병을 치료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나타나고 있다. 심리치료와 여러 가지 요법들, 단식코스, 다이어트, 영적 치유 등에 대한 수많은 광고들이 우리 주위에 범람하고 있다. 마음과 몸, 그리고 사회적 요소를 두루 다루는 통합 치료를 찾는 이들은 고대에 사용된 방법들을 시도하기도 한다. 당시 의술은 병을 고치는 일만 한 것이 아니었다.
고대 의술은 건강하게 생활하는 자세를 가르쳤다. 그 당시에 가장 중요한 의학 연구는 식이요법과 건강한 삶을 위한 지침에 관한 것들이었다. 잘사는 비결이란, 빛과 공기,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운동과 쉼, 취침과 기상, 포기와 선택, 영혼의 상태들, 감정과 열정 사이의 올바른 균형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했다. 의술은 역시 그 기원에서 언제나 종교적인 행위였다. 의사들은 치유의 신(Aesculapius) 역할을 하였다. 고대의 의사들은 치유의 힘이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표현하는 예배는 건강한 생활에 꼭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우리 교회는 몸에 관한 문제를 지나치게 의학에 맡겨왔다. 교회는 오로지 영혼의 구원에만 주력하였고 몸과 영혼의 건강에는 관심이 없었다. 영혼의 구원은 단지 초자연적인 관점에서만 고려되었다. 그 결과, 건강한 삶을 위한 자연적인 법칙들이 무시되었다. 물론 늘 그렇지만은 않았다.
수행과 건강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 of Alexandria)는 예수를 참된 교육자 Pedagogue, 건강한 삶의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스승으로 묘사하였다. 4세기에서 6세기 경에 만들어진 수도승 생활의 규칙들은 수도승들이 몸과 마음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지침들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베네딕도 규칙서는 분별(discretio)이라는 기준을 탁월하게 보여준다. 이 지혜로운 기준은 규칙서 안에 다양한 인간적 양상들이 두루 다루어질 수 있는 여지를 허락한다. 건강한 삶을 살게 하는 식이요법으로 고대 의학이 알아들었던 것은 베네딕도 규칙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중세기의 대 알베르토(Albert the Great)나 빙엔의 성녀 힐데가르드(Hildegard of Bingen)는 몸과 영혼 모두를 건강하게 지키는 것을 중시하는 영성생활의 전통 안에서 유명하다. 그들은 식사법을 수도생활 가르침의 기본구조 속에서 다루었다.
바르게 먹는 것은 수행(Asceticism), 곧 영성생활에 관한 가르침에 포함된다. 식사법은 수도자들을 더 큰 자유와 건강으로 이끄는 수행방법의 하나이다. 영혼과 육체의 일치, 건강한 몸과 영성생활의 일치를 실천하고 가르치는 것은 오늘날 교회의 의무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건강 문제를 의사나 심리학자들에게만 떠맡기지 말아야 한다. 신앙은 치유를 포함한다.
그것은 신약성서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는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였고 그 치유를 믿음의 덕으로 돌리곤 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교회의 치유사목에 대해서는 많이 다루지 않겠다. 대신 그리스도교적 식사법이나 삶을 건강하게 하는 그리스도교적 가르침, 건강한 몸과 영혼에 관심하게 하는 영적 과제 등에 대하여 더 많이 다룰 것이다. 몸에 대한 염려는 여기서 우선적인 문제가 아니다. 몸을 영혼의 표현으로 이해하여, 몸과 몸의 느낌에 귀를 기울이고 몸이 일으키는 반응과 혼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영성생활을 위해서는 의식성찰뿐만 아니라 의식보다 더 정직하게 우리의 내면 상태를 드러내는 몸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I. 상징으로서의 병
몸의 움직임은 우연한 것도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대한 반응만도 아닌 그 사람의 진실한 상태, 무의식적 욕망과 욕구, 억압과 반응 등을 표현한다고 정신신체학(psychosomatics)은 거듭 강조한다. 인간의 몸은 그 영혼이 참으로 갈망하면서도 인정하지 않고 회피한 것을 밖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몸이 하는 말을 듣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자기이해를 돕는 네 가지 정보가 있다. 첫째는 생각과 감정, 둘째는 현재 상태를 표현하는 꿈, 셋째는 영혼을 표현하는 몸, 넷째는 행동의 수준으로 습관이나 매일의 일상을 사는 방법, 직업과 살아온 역사 등이다. 이 네 가지를 모두 고려할 때 비로소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 되짚어 반성하는 것만으로는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된다. 우리 안의 방어기제들은 과거를 돌이켜 반성하면서도 너무 고통스럽고 불쾌한 것들은 쉽게 옆으로 제쳐놓게 한다. 그러나 몸은 생각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것보다 더 정직하게 말한다. 자신이 야심이 없고 인정받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붉게 달아오르는 얼굴과 흐르는 땀은 그가 다른 이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서 긴장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 병은 영혼의 언어이다.
병은 영혼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상징이다. 병이 전달하는 상징적 언어를 알아들으면 우리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아픔을 통해서 자신의 진정한 필요와 욕구들을 깨닫고, 우리가 그것들을 어떻게 억압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 병을 통하여 우리 몸은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각과 감정, 충만한 삶에 대한 이상이 어디에서 조화를 잃어버렸는지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아픔은 우리의 상태에 대해 정직하고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의식 속에서나 꿈속에서 하느님의 소리에 점점 더 귀머거리가 되어 가고 있다면 우리는 이 메시지들을 필요로 한다. 자신을 무시하거나, 자신이 하고 있는 것들이 온통 잘못되었다고 간주하거나, 삶에 대한 우리의 기대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불안을 억누르고 있다면, 하느님은 우리가 기어이 듣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소리로 강하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다. 하느님은 병을 통해서 우리 자신과 우리 삶의 진실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병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이 메시지를 잘 들어야만 한다. 병은 자신을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정보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하느님은 고혈압 증상을 통해서 우리가 내면의 갈등을 허락하고 있지 않다고, 내적으로 자신을 억누르고 있다고 알려주고 있는지 모른다. 혈압은 우리가 자신을 더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고, 내면의 갈등을 피하지 말고 직면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자신의 요구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한다고 알려주는 일종의 경보신호이다.
우리 의식의 통제 하에 있는 인지력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꿈이 말해주는 것처럼, 병은 우리의 상태에 대해 중요한 암시를 준다. 테겐(F.Teegen)은 질병을 적으로 간주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차라리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었던 어떤 것을 가르쳐줄 수 있는 동료나 친구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내야 한다. 병은 우리 내면의 정신적 혼란 때문에 몸이 일으키는 일종의 소동이다. 테겐은 이 소동과 대화를 시작하라고 충고한다. 병의 증세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어디를 잘못 다루었는가? 무엇을 무시해 왔는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무엇이 나를 도울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증세가 무엇에서 나를 놓여나게 해 주는지 물어 볼 수 있겠다.
많은 증상들이 주위에 영향을 주기 위해 생기고 구체적인 반응을 끌어낸다. 어떤 증세는 다른 사람을 조종하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병에 걸려 어떤 일을 하는 것으로부터 제외되거나 다른 이들이 대신해서 그 일을 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에게 물어봐야 한다.“이 증세 때문에 내가 면제받을 것이 무엇인가? 이 불편함 때문에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무엇인가?”이런 종류의 대화를 시작하면 몸의 불편에서 오는 대답은 종종 놀라운 것이 될 수 있다. 자신이 병에서 간접적으로 이로움을 얻어낸다는 사실, 그것에서 이득을 취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비로소 행동하는 방식을 바꾸는 출발선에 설 수 있다. 그러면 좀 더 직접적으로 그리고 자신의 의도에 부합하는 바람직한 방법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며 이는 덜 파괴적이다(F. Teegen).
정신 신체적 문제의 경우, 몸의 이상을 지적인 차원에서만 다루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지나치게 설명하려는 유혹이 일어나고 이것은 종종 비정한 것이 된다. 그보다는 몸을 영혼의 목소리로 생각하며 내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통증을 느끼는 부위에 손을 대고, 그곳으로 숨이 흘러 들어가게 깊이 호흡하면서 그 부위에서 자신을 느껴보는 것이다. 눈을 감고 완전한 고요함 속에서 자신의 호흡을 느끼며 어떤 영상이 떠오르는지 볼 수 있다면 가장 좋다. 병은 우리 몸과 긴밀한 연관성을 보일 것이다. 때때로 아픔은 우리가 자신의 몸을 무시해 왔기에, 몸과 더불어 살지 않고 내팽개쳐 두었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러면 병은 자신을 좀더 주의 깊게 대하라는, 몸을 가장 내밀한 존재의 표현으로 감지하라는 도전이다.
병은 우리를 본성의 어두운 면(그림자)과 대면하도록 도울 수 있다. 병은 우리가 삶에서 유배시켜온 것이 무엇인지 지적한다. 억압되어 왔던 것, 우리 삶의 무대 뒤로 쫓겨났던 것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이것은 또한 어떻게 우리가 이런 것들을 우리 의식세계 안에 통합해야 하는지 말하고 보여준다. 그래야 아픔은 자기 치유의 시도가 된다. 그것은 자신의 그림자를 돌아보지 않을 때 미래에 당연히 겪게 마련인 영적 몰락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병을 좀더 긍정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야 한다. 때때로, 아픔은 그 순간에 유리한 해결책을 제공하기도 하고 그보다 더 나쁜 어떤 것으로부터의 의혹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오버벡(Overbeck)은 병을“일시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외적 현실이나 내적 요구들과의 타협”이라고 말한다. 병은 자신 안에 일어나는 아직 친숙하지 않은 감정들을 알아차리게 하고 그것을 통합하도록 돕는다. 인정되지 못한 채 떨어져 나간 우리 존재의 파편들은 질병이라는 길을 통해서 의식 안에 들어온다. 병은 우리자신을 더 폭넓게 이해하게 하여 성숙을 향한 여정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한다. 병은 자기보호의 역할도 한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심적으로 지나친 부담을 짊어지게 된다. 요즘 심리학자들은 아플 수 없는 병”에 대해 말한다. 이 아플 수 없는 병은 예기치 못한 심각한 와해 상태에 빠지게 하거나 건강한 중년기를 보낸 직후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아플 수 있는 능력은 신체적 자기파멸을 예방하는 보호책, 말하자면 생명보호장치가 될 수도 있다. 아픔은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게 하고 몸에 이롭고 건강을 지켜주는 절제된 생활을 하도록 만든다.
병은 우리가 병의 증상이 하는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그것을 충분히 고려할 때에만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게 된다. 병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가끔 그 병의 증상을 묘사하는 단어에서 알아차릴 수 있다. 누군가 “나는 코가 꽉 막혔어”라고 한다면, 그가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또 “나는 콧물감기에 걸렸어”라고 표현한다면, 이것은 모욕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낸다. 또 어떤 이는“감염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누군가가 나에게 너무 가까이 접근해서 지금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는 표현일 수 있다. 어떤 이는 “나는 감기(cold)에 걸렸어”라고 말하면서 주위의 다른 이들에게 느끼는 냉랭함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동료들의 얼음같이 차가운 분위기 때문에 추위를 느끼고 있다고 말이다. 아픔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자신의 상태를 매순간 더 잘 이해할 것이고 좀더 솔직하고 진실한 삶을 시도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가장 흔한 병의 원인은 공격성과 쾌락과 욕구의 억압이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공격성을 다루어야 하는지, 쾌락에의 갈망과 욕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병에 걸린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잘못된 극기는 이런 억압의 밑바닥에 있다. 그것은 쾌락이나 욕구의 충족을 부정한다. 그러나 인정되지 않은 욕구는 질병이라는 옷 속에 자신을 감추고 그 권리를 주장하게 된다.
만일 어떤 주부가 가정을 위해 계속 자신을 희생하면서 친밀감과 부드러운 보살핌을 원하는 자신의 욕구를 계속 억누른다면, 무의식적으로 병에 걸려 그 필요를 대신 만족시키게 될 수도 있다. 남편은 병에 걸린 아내를 걱정하게 될 것이고 아이들도 아픈 엄마에게 달라붙어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가족 모두 그녀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잘 보살펴 줄 것이다. 병을 이용하여 간접적인 방법으로 관심을 받으면서 동시에 다른 이들로부터의 요구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을 가족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질병은 애정과 거리감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그런 이유라면 병에 걸리는 것은 아주 효과적이다.
아내가 남편과 의견을 교환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체념한 채로 뒤로 물러서 버리거나 아니면 내적 에너지를 분출하는 수단으로 아픔을 이용하여 남편에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은 이런 공격성의 표현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앓는 병은 그 가정의 상태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가족이 병에 걸리면 다른 구성원들은 아픈 이를 가엾어하면서 약질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가 앓는 병을 통해 그들 자신을 들여다봐야 한다.
정신신체성 병을 앓고 있는 환자를 비난하거나 그의 정신적 문제가 무엇인지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신 그 병을 자신의 의식을 성찰할 기회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 어떻게 그 사람의 병을 비난할 수 있는가? 혹시 난 그가 다른 아무런 해결책을 찾을 수 없기에 결국 그렇게 병에 걸리도록 모른 체 한 것은 아닌가? 그가 앓고 있는 병은 내가 귀를 막고 무시해버린 그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 지금 나에게 보여주고 있진 않는가?
우리는 자신에게 진지하게 질문해야 한다.“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병에 잘 걸리진 않는지, 그렇다면 왜 그런지?”
가정의 주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 표현할 기회가 없다면 자주 아프게 마련이다. 남편의 병도 역시 그의 배우자와의 관계에 대한, 혹은 그 가정의 상태를 말하는 어떤 것을 담고 있다. 병은 때때로 다른 이를 위한 효과적인 치유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병은 다른 이가 지금까지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을 그들 안에서 보게 한다. 아내의 병은 남편이 지나치게 사업에 몰두하느라 밀쳐두었던 사랑의 표현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병은 남을 지배하고 억누르는 수단 또한 될 수 있다. 병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이 내 방식대로 행동하도록 강요할 수 있다. 만일 내가 모든 갈등 상황에 극심한 두통과 고열로 대응한다면,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나의 의견을 강요당하게 된다. 심장병이 있는 아버지가 그를 흥분하게 만드는 어떤 의견도 가족에게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 심장병은 폭군 노릇을 하는 것이다.
병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자기 본성의 어두운 면(그림자)과 화해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욕구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충족시키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나의 어떤 욕구를 인정한다면 다른 이들에게도 허용될만한 자세로 그 욕구를 대하게 된다. 인정되지 않은 욕구는 병을 통해 그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 모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병은 자신의 그림자를 받아들이고 욕구들과 더 가까워지라는 간청이다. 동시에 이것은 새로운 인간관계로 초대하는 하나의 도전이다. 이 새로운 관계에서는 다른 이의 욕구가 수용되는 공간을 제공하고 양쪽 모두 자신들의 갈망과 욕구를 서로에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병의 원인이 단순히 심리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못된다. 그것은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과 같다. 그것 보다는 다른 이의 병을 친구 관계를 원하는 요청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의 병은 나의 눈을 열어 그의 진정한 욕구가 무엇인지 이해하게 할 것이다. 만일 계속해서 눈을 감은 채로 인생을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처지를 똑바로 보여주기 위해 때로 나 자신이나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병을 허락하실 것이다.
병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알아듣는 다른 방법은 아픔과 우리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기 자신과 접촉하는 것이다. 가능한 한 빨리 병을 제거하려고만 애쓸 것이 아니라 우선 병을 이해해야 한다. 테겐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아픔과 접촉해 보라고 제안한다.
긴장을 풀고, 눈을 감는다. 우리 의식을 아픈 곳에 집중한다. 그러면 우리의 지각과 영상은 서서히 우리의 감정, 기억, 우리가 억압했던 것들과 연결된다. 이렇게 떠오르는 내면의 영상들을 수용하면 중대한 삶의 경험들이 다시 감정적으로 현존하게 된다.
우리가 겪고 있는 증상들 속에서 자신을 느끼며 그 이미지를 지켜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그러면 아픔 뒤에 숨어 있는 것을 지각하게 된다. 알레르기 증상은 삶의 어떤 상황에 저항하고 있지만 그 반대 상황도 인정하지 못하고, 그래서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킬 수 있다. 알레르기는 물론 유전적인 이유로 발생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나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이건 유전이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알레르기가 나중에 생긴 것이 아니라 선천적인 것이라도 그것과 상대해 볼 필요가 있다. 알레르기에 대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내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그 증상이 주는 메시지와 도전은 무엇인가? 알레르기의 경우, 내면의 방어적 투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합리적으로 처방된 식사법도 지켜야 한다. 그러다 보면 알레르기가 사라질 수도 있다.
이런 훈련은 영혼에도 이롭다. 자신을 스스로 조절하고 긍정적으로 병에 대응하여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다. 그 알레르기가 사라졌든 아니든 그것은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아마도 알레르기는 나에게 계속 메시지를 보낼 것이다. 좀 더 부드럽게 자신과 주위 환경을 대하라고, 끝없이 싸우지만 말고 그 환경을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메시지이다.
정신신체성 질환으로 분류되는 많은 증상들은 잘 치료되지 않는다. 치료받는 중에 그 병의 영적 원인들이 발견되고, 억눌린 욕구들이 인정되고 채워져도 병의 증세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이럴 때 희망이 전혀 없고 문제가 너무 심각하다고만 생각해선 안 된다. 이런 병은 증상과 싸우면서 철저하게 이겨내야 하는 그런 종류의 질병이 결코 아니다. 그 증상은 우리가 더 풍요로운 내적 생활을 하도록 가르치려고 했을 것이다. 증상은 죽을 때까지 남아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증상들과 함께 살기 시작하고 아픔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더 성숙하고 지혜로워질 것이고 영혼의 부를 누리게 될 것이다. 치료가 꼭 증상을 완치시키지 못해도 영혼의 평온이 찾아올 것이다. 병은 영혼을 다른 영역으로 초대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 병은 우리의 나약한 인간 조건을 거듭 거듭 상기시키는 충실한 동반자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신경성 기침을 심리학자와 상담하면서 어떻게든 고치려고만 든다면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기침에 고착되어 버릴 것이고 기침은 계속해서 재발할 것이다. 우선 기침과 화해하고 기침이 하는 말을 들어야 한다. 자신이 강요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요구를 거절하고 싶은데서 어떤 공격성을 감추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기침을 내적 속박을 끊어버리라고 격려하는 표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분석이나 지적 통찰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가 갖고 있는 공격성과 자유와 독립을 원하는 열망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어떤 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상징적으로 나뭇가지 하나를 여러 개로 조각내면서, 남들이 우리에게 지운 모든 짐들을 털어 버릴 수 있겠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또 말씀을 통해 속박으로부터 해방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일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와 비슷한 상징적 행동들을 하였다.
병은 우리에게 긴 시간이 걸리는 과제를 준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과제를 다 완수했어도 증세들은 남아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병과 화해해야 한다. 우리는 기침하는 것이 그렇게 못 견딜 불상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갑자기 알아듣고 그래서 자유를 느끼기도 한다. 아마도 기침은 때때로 사라질지 모른다. 그러나 우린 기침을 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다. 기침을 하는지 안 하는지에 따라서 우리의 상태를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기침이 내가 풀어가야 할 삶의 숙제를 거듭거듭 상기시키도록 수용하는 것이다. 그 숙제는 다른 존재와 더불어 살아가는 어려움 중에도 삶의 기쁨을 간직하도록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자유이다. 병의 증상들을 견뎌내는 데는 유머감각도 필요하다. 유머감각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병을 반드시 뿌리뽑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강박이나, 완전히 올바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건강하게 산다고 은근히 주장하는 완벽주의적 환상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유머는 우리가 인간적이 되도록 자유를 준다.
자신이 앓고 있는 지병인 천식을 통해서 가정으로부터 받은 억압을 인식할 수 있었던 한 여인은 자기 자신과의 작업으로 깊은 내적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천식은 계속 재발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거나 계속 속박당하고 억눌리고 있다고 판단해선 안 된다. 다른 이의 내적 감정에 대해 함부로 말하거나 거짓을 알아내겠다고 추측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옳지 않다. 어떤 병의 증상은 아주 오래 계속될 수 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그러나 그 증상은 그녀에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꾸준히 상기시키는 고마운 동반자가 될 수도 있다. 밤에 천식이 시작되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지만, 그 바람에 낮에 마저 다 끝내지 못한 일들을 마무리하게 될 수도 있다.
그녀는 천식 발작을 유용하게 이용하는 방법을 늘 발견했다. 천식이 일어나면 기도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 하느님 앞에 양팔을 벌리고 그녀에게 하느님이 주시는 자유를 경험하는 기회로 삼는다. 그 자유는 누구도 그녀에게서 앗아갈 수 없다. 이렇게 그녀는 천식과 친구가 되었다. 잠만 자지 말고 밤에 깨어 기도하라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렇게 하면 그녀의 몸뿐 아니라 영혼도 도움을 받을 것이다. 천식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왜 꼭 그래야만 하는가? 아마도 천식이라는 지병 덕택에 그녀는 더 생생히 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녀는 천식을 모든 믿음을 하느님께 두라고,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라고 격려하는 하느님이 보내는 신호라고 생각할 수 있다. 감사한 마음으로 자신의 병을 수용한다면 그 천식 없이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인간적 성숙과 영적 풍요를 누릴 수 있다.
+ 병은 기회이다
신약성서는 '병'이 우리의 내적 상태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과 은총을 보여주시는 수단이나 우리에게 접근하시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관복음의 치유 이야기들은 복음서에서 묘사된 여러 가지 병의 증세들 속에서 우리 자신을 인식하게 한다. 마르코 복음 2장에 나오는 절름발이는 절뚝거리는 우리 내면의 상태를 상징한다. 나환자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을 드러낸다. 밖으로 표현되지 못한 것이 피부로 솟아 나와 우리를 나환자로 만든다. 예수께서는 주로 정신신체성 증상들을 고쳐주신다. 우리는 성서에 나타난 병을 통해서 자신의 상황을 알아챌 수 있다. 성서에 등장하는 아픈 이들은 우리들의 영적 상태를 보여준다. 성서에 묘사되는 모든 병은 예수와의 만남을 통하여 치유된다. 절뚝거림, 중풍, 시각장애, 꽉 막혀 숨쉬지 못하는 호흡곤란 뿐만 아니라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능력, 내적인 귀막힘, 진정한 대화의 결핍을 반영하는 마비상태, 균형을 찾지 못해 속에서 절뚝거리는 것들, 삶에 대한 불안 등.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또 다른 관점을 발견하게 된다. 요한복음은 정신신체성 증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묻는다. 요한 9장에는 태생소경의 치유 이야기가 나오는데, 제자들은 예수께 그의 병이 그 자신 때문인지,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인지 묻는다. 물론 그들은 병이 언제나 죄의 결과라고 믿었다. 정신신체의학과 비슷한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 이유를 윤리적 차원에서 심리적 차원으로 돌린다. 그래서 쉽게 아픈 사람은 무엇인가를 억누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심리적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던가, 잘못된 방법으로 양육되었거나, 문제가 있는 집안에서 성장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관점도 일리가 있지만 독단적으로 주장한다면 역시 위험하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환자에게 좋지 못한 의식을 심어주고 그에게 알 수 없는 어떤 심리적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셈이 된다. 이것은 환자를 돕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를 윤리적이거나 심리적인 차원에서 다루지 않았다. 그는 "자기 죄 탓도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요한 9,3) 라고 말씀하신다. 병은 꼭 그 사람이 영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병은 하느님이 우리 눈에 보이게 활동하시는, 그분의 영광이 빛나는 장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혹은 무엇을 억누르고 있는지 찾아내기 위해 병의 원인을 너무 근심스럽게 조사할 필요는 없다. 이런 식으로 심리적 원인을 찾는 것은 자칫 비인간적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환자들은 자신이 앓고 있는 병 때문에 다른 이들이 자신의 내밀한 문제를 알아차리면 어쩌나, 세상 사람이 자신의 부끄러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어쩌나 하는, 아무 것도 감출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아프다는 이유로 다른 이들의 시선에 노출되어야 하고, 분석되기 위하여 심리학적 시도에 자신을 내맡겨야 하고, 엉터리 심리학자들의 호기심에 자신을 열어야 하고, 결국엔 인간 존엄성까지 박탈당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더 자유롭고 더 인간적인 시선으로 병을 다루신다. 병은 우리의 내적 상태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병은 하느님께서 우리 몸 안에서 우리를 만나시는 기회, 그분의 사랑 어린 손길이 우리를 쓰다듬는 기회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앓고 있는 병 안에서 하느님의 활동이 분명해 질 수 있을까? 요한복음 9장 태생소경을 치유하는 장면에서 하느님은 병을 고치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우리의 인간적 한계와 부서지기 쉬운 속성은 병 때문에 드러난다. 건강은 저절로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병은 나의 처지를 하느님 앞에 훨씬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하느님의 도움과 은총에 의지해야 한다. 그분은 우리를 치유하실 수 있다. 건강은 하느님의 선물이지 당연한 권리가 아니다. 병은 건강이 당연하게 요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생명은 언제나 하느님의 은총임을 보여준다. 하느님의 치유의 힘은 질병을 통해서 나를 상대하실 수 있다. 그러나 역시 내가 처한 현실을 지적하는 방법으로 그렇게 하신다. 내 인생에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내 인생에 가치를 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병을 앓으면서 인생의 진정한 가치가 강함이나 건강, 성취나 장수가 아니라 하느님께 마음을 여는 것임을 배운다.
내가 성취해온 것들, 가령 얼마나 강한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도왔는가 하는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나 자신과 나의 삶을 하느님께 양도하고 봉헌하는 것,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그분께서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어떻게 일하실 지 결정하도록 맡기는 것, 그분께서 내가 이 세상에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기를 얼마나 오래 갈망해 오셨는지가 내 인생에 가치를 준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그분의 선하심과 애정으로 가득한 호의에 나 자신을 열어야 한다. 하느님의 빛이 조금이라도 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 비치고 그 빛이 밝음과 따뜻함을 전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느님의 빛을 통과시키는 것이 나의 건강이든 나의 병이든, 나의 강함이든 약함이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 라는 등불을 들고 어디에 얼마나 빛을 비추실 지 그분께 맡겨드려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등불을 언제나 깨끗하게 준비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분의 빛이 환하게 비추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빛은 우리의 아픈 몸을 통해서도 빛날 수 있다. 때로 건강한 사람을 통해서보다 훨씬 밝고 강하게 말이다. 병을 앓으면서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건강이 아니라, 내 주위 사람들이 하느님을 경험하도록 우리를 쓰기 원하시는 그분의 사랑과 빛임을 느끼게 된다.
건강한 생활습관과 바람직한 영성생활이 우리에게 건강을 보장한다고 무조건 믿어선 안 된다. 우리는 병에 걸리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병은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물론 병은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결핍, 부족함이긴 하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결함과 잘못을 지녔으며 그것들과 함께 살게끔 허락된 존재이다. 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인간조건을 거부하는 것이다.
병을 거부하는 것은 우리 존재의 기반에서부터 인간적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병을 없앨 수 있다고 믿는다면 생명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욥은 그가 앓은 병 때문에 하느님과 대화하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그가 하느님께 받아왔던 것들을 두 배로 받았다.
병은 위기이다. 위기를 통해서 우리의 삶은 더 새롭고 단단한 기반을 갖게 된다. 이 위기는 자신을 새롭게 재정비하라고, 우리 앞에 하느님의 빛을 비추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라고 우리를 흔들어 놓는다.
빛은 위기로부터 나온다. 어떤 위기도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다.(F. Weinreb)
병과 건강은 서로에게 속한 현실의 양면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고 낫게 하시려고 오셨다. 건강을 잃어야 치유를 체험할 수 있다. 병에 걸려야 건강의 가치를 안다. 그러니 아프거나 병에 걸리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것보다는 그 안에 있는 우리의 인간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치유에 의지해야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건강하게 할 수 없다. 아무리 완벽하게 건강관리를 해도 병에 걸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병을 참 현실에 우리 눈을 뜨게 하는 위기로 맞이할 때, 병은 우리를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기회가 된다. 우리가 할 일은 건강한 생활을 통해 하느님의 치유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이 주신 계명은 건강한 삶을 위한 지침들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의 수행을 위한 규칙과 식사법들은 건강하게 사는 자세를 가르친다. 그 규칙들을 따르며 우리 건강을 위해 자신을 돌보는 것은 우리의 과제이다. 그러나 동시에 병에 걸릴 가능성,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 건강은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얻어질 수 없는 주어지는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인간성은 겸손하게 진리를 받아들이라고, 우리는 잘못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죄인이며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에 의지하는 존재라는 이 진리를 수용하라고 요구한다.
병은 우리 자신을 우리의 장점이나 건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입장에서 정의하게 한다. 나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병은 우리가 자연의 힘에만 의존할 수 없음을 가르친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사랑 받는 자로 그분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 나이가 들어 신체적으로 매력과 생기가 사라져 갈 때, 우리는 하느님이 자리하시는 우리 안의 내면의 궁방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아빌라의 데레사가 말한 궁방, 시에나의 가타리나가 묘사한 내면의 방,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자리는 사라질 수 없다. 병은 우리를 그 내면의 자리로 돌아서게 하고, 우리 자신을 새롭게 정의할 기회를 준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병을 앓는다. 그들의 정신이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듯 말하는 것은 대단히 무서운 상처를 주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체질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병은 지속적으로 풀어야 할 영적 과제이다. 그들은 늘 자기 몸에 신경을 써야 한다. 병은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게 제동을 걸 것이다. 병은 삶에 분명한 한계를 만든다. 병에 걸린 이들은 자신의 연약함에 계속 도전 받는다. 병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이 건강한 사람들로부터 제외된다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 스스로의 가치를 믿기가 힘들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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