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의 일이다.
그 날도 한낮의 더위는 심했다. 6인승 미니버스 맨 앞에 앉아 있는 나에게 햇볕은 그야말로 천벌과 같았다. 마치 두 다리를 산채로 익힐 것처럼 사납게 내렸다. 할 수 없이 모자를 벗어 두 다리를 가렸지만 이번엔 얼굴이 뜨겁다. 썬크림을 두껍게 발랐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렇다고 스탭들이 앉아 있는 뒤칸으로 물러서는 것도 그렇다. 지들 딴에는 나에게 좋은 자리를 내준다고 한 것이었으니.
문제는 3,4월이다.
2월인 지금이 이 정도라면 가히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물론 캘커타나 첸나이 더위만 같지는 않을 거다. 내가 겪은 캘커타와 첸나이의 더위는 살인적이었다. 사실 내가 위도 상으로 북쪽인 지금 인도르로 온 것도 그런 이유가 가장 컸다. 하지만 겪어 보니 그게 그거였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각적인 작용이란 절대비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다시 말해 50도의 더위나 45도의 더위가 별 차이 없다는 거다. 비록 수치로는 5도라는 큰 차이가 있지만 이미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어 본 35도의 한계를 넘어 선 상태에서는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는 거다.
하여튼 벌써부터 더위와의 싸움이 큰 걱정이었다. 하지만 4월 중순에는 귀국할거다. 그러면 앞으로 두 달이 문제다. 그러나 내게는 더 큰 문제가 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렇게 고생을 하고는 있지만.
잠무리는 곳은 나환자 마을의 이름이다. 내가 처음에 왔을 때만 해도 50여 가구가 살고 있었지만 모두들 떠나고 지금은 35가구에 150여명의 나환자와 그들의 가족들이 살고 있다. 아이들이 74명이나 되는데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불과 서너 명 뿐이다. 대부분 그냥 집에서 놀거나 어른들을 따라 구걸을 나간다. 동네는 마치 귀신이 나올 것처럼 스산하고 그들이 사는 방은 차마 눈뜨고 들여다 볼 수도 없다.
맨바닥에 쇠똥을 발라 이는 먼지를 막았다. 파리나 곤충도 덜 꼬인다고 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엔 조금씩 뜯어내어 연료로도 쓰인다. 그 맨 바닥에 눕고 자는 거다.
이불이라는 것을 보니 시커먼 솜은 뭉쳐 둥우리를 틀고 있고, 천은 낡아서 여기저기서 솜뭉치가 삐져나온다. 그것을 덮어준다고 하면 돼지도 싫다고 도망할 거 같다. 그런 이불이 두 채씩 있고, 냄비와 식기로 쓰이는 접시 몇 개가 살림의 전부다. 그리고 한 결 같이 집안에는 악기가 하나씩 있는데 구걸할 때 쓰이는 것이다.
그날 내가 그곳에 간 것은 지난 번 성탄절 때 찾아보고는 처음이다. 다른 곳에는 이미 한 두 차례씩 둘러보긴 했지만 거리가 먼 이 곳엔 성탄절 이후로 처음이다. 그 마을 뒤편에 바로 마트야 프라데쉬 주 정부에서 준 땅 20여 만 평이 있다. 이제 올 9일 이후엔 우리 나환자들이 경작을 할 수 있게 된 땅이다. 그 땅도 보고, 또 잠무리 나환자들의 생활도 살필 겸 가는 길이었다.
마을에 들어서자 나를 알아 본 몇 사람이 차 가까이로 와 웃는다. 우리처럼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이 여기엔 없다. 그렇다고 반갑다고 손을 들어 보이는 법도 없다. 그저 웃으면 그게 인사다. 영어를 할 줄 모르고, 나는 힌두어를 할 줄 모르니 그저 서로가 웃는 게 인사다. 나마쓰테, 한 마디면 통하는 인도 인사지만 그래도 어떻게 잘 지냈느냐 건강은 좀 어떠냐? 점심은 먹었느냐 하는 말을 묻고 싶지만 힌두어를 모른다. 어서 힌두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묻고 익히고 있지만, 더 시급한 것은 힌두어가 아니라 영어였다.
그 때였다.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는 나선균이 얼굴 전체를 파먹은 사람이다. 화상 입은 사람처럼 얼굴 전체가 일그러졌다. 심지어 눈까지 침범을 하여 눈이 시뻘겋고, 입술도 뒤집어 졌다. 그가 나에게 다가와 먼저 나마스떼 하며 합장을 한다. 나는 차에서 나려 그에게 다가가 가볍게 안아 주었다. 몸에 땀이 물씬 배어 있었다.
나는 그가 몰고 온 염소를 보고 스탭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서 염소를 갖게 되었는지.......그런데 그 대답이 너무 충격이었다. 나는 그것이 어느 누구의 소작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3년 전에 그동안 구걸하여 틈틈이 모은 돈으로 새끼 염소 한 마리(한국 돈 3만 원 정도)를 사서 키웠는데 그것이 지금의 열 마리가 된 거다. 그러니까 지금 이 잠무리 마을에서 그가 제일부자다. 염소 열 마리가 있으니 말이다.
그 때 바로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그래, 바로 이거다. 내가 바랐던 것, 그리고 내가 시작하려 했던 것의 실상을 본 거였다. 심장이 뛰었다. 지독하게 내려 찌던 태양 볕도 두렵지 않았다. 입에 침을 튀겨 가며 열심히 물었다.
지금 나의 계획은, 우선 염소 100마리(시가 300만 원 정도)를 사서 한 집 당 열 마리씩 열 가정에 나눠 주는 거다. 마을 전체에게 주지는 못하겠지만 우선은 젊고 의욕 있는 사람 열 가정을 선발하여 시범으로 시작할 생각이다. 그 선발된 가정은 우리 -아름다운 사람들의 작은 모임-에서 지원하는 월 2만원을 우선 배정하고 또 염소를 키우는 대가로 2만 원 정도를 더 주는 거다. 그러니까 다른 가정에는 월 2만원씩 생계비를 지원하지만 염소를 맡아 키우는 집에는 4만원이 지원되는 셈이다. 그 정도면 생계유지에 어려움이 없고, 잘만 하면 약간의 돈도 모을 수 있다. 그렇게 돈을 모은다면 3년 뒤엔 몇 마리의 염소를 자기 몫으로 살 수 있다.
그 염소 100마리가 넉넉히 3년 뒤엔 적게는 5백 마리에서 많게는 7백 마리 이상이 된다. 그러면 전체 가치가 8천 만 원이 넘고, 이 돈이면 고아원을 설립할 수가 있다. 현재 고아원을 짓기 위해서는 약 6천 만 원 정도의 돈이 필요하다. 물론 그만한 돈이 나에게는 없다는 것이 첫 째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만약에 돈이 있다 해도 선뜻 고아원을 지어 주고 싶지 않은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할 수 있다면 이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자기들 스스로가 지을 수 있기를 바라는 거다. 내가 돈을 어디서 들여와 지어줄 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이들 스스로 땀 흘린 노력의 대가로 자기들 자식들이 공부하고 성장할 집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그들 스스로에게도 보람 있는 일이며 자랑스러운 일이 될 거다. 그것을 마련해 주고 싶은 거다.
나는 스스로 일어나는 사람을 더 도와주고 싶다. 더 나아가 일 하기를 싫어하는 사람과는 대화조차도 거부한다. 물론 나환자는 또 다르다. 그들의 수족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 말초신경이 이미 파괴되어 형체를 보존할 수 없으며 손발로서 기능도 상실한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하지만 그나마 멀쩡한 육신을 갖고 있으면서도 게으름을 피우거나 구걸을 더 즐기는 사람은 더 이상 돕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일단 알워싸 라는 마을 지도자에게 나의 이 계획을 이야기했다. 잠무리 마을을 기피한 이유는 마을의 가구가 너무 많기에 서로 지원했을 때를 가정하여 작은 마을로 정한 거다. 알워싸 마을은 20가구가 살고 있으며 마을 전체가 구걸을 하며 연명하고 있다. 그 어느 마을보다 더 열악한 곳이다. 그리고 잠무리는 그 마을 뒤에 정부에서 기증한 땅이 있어 농사를 지을 수 있지만 여기 사람들은 그나마도 차지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다. 다음 주나 그 다음 주, 멀리 구걸을 떠난 사람들이 돌아 오면 마을 회의를 하겠다는 거다.
그들이 어떤 결정을 하게 될지 모른다. 그냥 지금 이대로 구걸로 연명을 하겠다고 하면 또 다른 지원자들을 찾아야 한다.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수 십 년을 구걸로 살아 온 이들은 구걸이 수치가 아니며 정당한 방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 통념을 어떻게 무너뜨려야 할지 아직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잠무리 에서 본 나환자처럼 건전한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은 거다.
염소 1백 마리 값과 축사 지을 돈 합해 4백 만 원이라는 돈이 아직은 크게 보인다. 할 수만 있다면 알워싸 마을 전체 20가정 모두에게 각 10마리씩 똑 같이 주고 시작하고 싶지만 지금으로서는 꿈일 뿐이다.
하여튼 어떻게든 시작을 해 볼 작정이다. 높이 나는 새는 늘 외롭다. 하지만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나는 지금 당장이 아닌 3년, 10년, 아니 그 이후의 세상을 보고 싶다. 흉측한 몰골로 구걸마져도 힘겨운 이들이지만 언젠가는 스스로 일을 한 것으로 온 식구들이 온기종기 모여 행복한 식사를 하리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