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육산악회--5월산행이야기
일시: 2008년 5월 25일 일요일
장소: 연인산
참석: 박정천(회장), 김간진, 김경식 부부, 김승섭, 김용만, 김호표, 문상두, 박형수, 이용일, 정영준 부부, 홍륜, 모두 13명(총동문과의 합동 산행으로 우리 일행을 포함하여 선후배 모두 46명이 참여하였다)
철쭉이 그윽한 향기와 함께 인사한다. 뒷 봉우리는 바로 연인산
산록에 활짝 펼쳐진 꽃의 향연을 모두 담을 수가 없다
김승섭,김간진, 이기용 교장, 박형수, 이용일, 문상두--상태가 불량하고 일부회원만 나온 관계로
삭제하려하였으나 그래도 아쉬워서----
성동동문산악회(www.sdamt.com)에 들어가시면 연인산 풍경과 동문들의 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陽川閑談
기억 속에 심은 또 하나의 즐거움
연인산은 화악산(華岳山:1468M)에 이어 경기도경계(京畿道境界) 안에서는 두 번째로 높은 산인 명지산(明智山:1267M)의 연봉(連峰) 중의 하나다.
명지산은 군립공원(郡立公園)으로 이전부터 잘 알려져 있었으나 연인산은 가평군이 이 일대를 철쭉군락지(群落地)로 조성하여 도립공원으로 지정하면서 새로이 등산객의 눈길을 끌게 되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명지산의 제2봉과 주변의 몇몇 무명봉(無名峰)에 새로 공모(公募)를 하여 연인산, 우정봉 등으로 이름 붙였다고 한다. 어느 지도 책에는 우목봉 또는 월출산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으나 옛 지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근거를 알 수 없으니 옛 이름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큰 산인 명지산조차도 전해지는 바가 별로 없고 명지봉(明芝峯)이라고는 드물게 나온다.
옛 지도를 보면 화악산(花岳, 華岳)을 주산(主山)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명지산과 그 연봉들은 화악산의 산세(山勢) 속에 가려진 이름없는 무명씨(無名氏)들로 전락(轉落)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나온 지도를 보면 비로소 현재와 같은 이름들이 붙여져 있으니 아마도 제대로 이름을 불리게 된 것은 근세에 들어와서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사실 이름의 변천사(變遷史)를 조사하려면 큰 작업이 될 것이다.
연인산의 입구가 될 백둔리까지 도로가 잘 닦여 있을 뿐 아니라 등산로 입구까지도 도로를 확장하고 있고 주변에는 팬션과 같은 레저 시설물들이 한창 공사 중이다. 기반공사, 시설물공사, 테마공원조성의 순서로 진행되어야 할 공원조성계획이 거꾸로 혹은 뒤섞여서 진행이 되고 있는 느낌이다. 이것은 아마도 정책(政策)의 관행(慣行)으로서 무언가 결과물을 먼저 보여주고 싶은 조급성(躁急性)때문이 아닐까?
주능선(主稜線)을 타기 위해서는 소망능선이라고 이름 붙여진 30도에 가까운 긴 오르막길을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타고 올라야 한다. 그렇지만 흙산이라 그런지 우레탄포장을 한 듯 발바닥에 밟히는 촉감(觸感)이 부드럽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소나무, 전나무, 잣나무들이 가득히 하늘을 가리고 있어 햇살은 드문드문 나뭇가지 사이로 화살처럼 내려 꽂일 뿐이다. 게다가 오늘따라 시원한 바람이 휘휘하고 몸에 착착 감겨 드는데 그때마다 꼭 냉장고 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듯 냉기(冷氣)가 느껴지니 오르막길이 계속되어도 그다지 힘들지 않다.
드디어 나무숲을 벗어나 능선에 오르니 갑자기 라이트가 켜지듯 환하게 하늘이 보였다. 여기서 연인산 정상까지는 1키로가 채 되지 않는다. 평탄한 능선 길을 타고 가는데 정상 안부(鞍部)에서 철쭉들이 짙은 꽃향기와 함께 광장에서 환영 퍼레이드를 하듯 활짝 펼쳐 있다. 꽃과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니 꽃이 사람인가, 사람이 꽃인가? 철쭉앞에서 사진을 찍던 아가씨(?)가 “철쭉꽃이 너무 예뻐서 내가 못난이 같이 보일 것 같아.”라고 우스개를 하였다.
철쭉 꽃 향기에 푹 젖어 행복주(幸福酒)로 곤드레만드레 된 듯 하다. 이런 느낌을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으면 오죽이나 좋을까 만은 시간이 흐르면 어느덧 잊혀지고야 말겠지만 그래도 때때로 떠오르는 그 잔상(殘像)으로 잠깐씩이나마 기쁨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지금껏 우리는 부귀공명(富貴功名)이라고 하는 많은 것을 가지려고 애쓰며 살고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애써 일구어놓은 그 많은 소유물(所有物)들은 언젠가는 다 놓고 가야 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물질적인 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그런 것을 이루기 위해서 왜 그리 욕심을 내고 사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소유하려고 애써왔던 애증(愛憎)이나 재산, 지위, 그러한 모든 것들을 이루어내었을 때의 뿌듯한 성취감과 같은 기억(記憶)들은 결코 없어짐이 없이 가져 가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기억에 관하여 불교에서는 구조적으로 분별하여 가르친다.
오근(五根:눈, 귀, 코, 혀, 몸)이라는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五官)을 통하여 보고 듣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5식(五識)이라 한다.
이 오식으로 들어온 여러 현상을 인식하여 분별(分別)하는 것을 6식이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의식(意識)이고 흔히 육감(六感)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7식을 마나식(末那識:manas), 8식을 아라야식(阿賴耶識=根本識:alaya)이라 하는데 아라야식은 오로지 저장(貯藏)만 할 뿐이다.
6식과 7식의 구분은 나와 같은 얕은 지식으로는 실로 설하기 어렵다.
다만 의식은 대상을 인식할 때만 일어나는 단속적(斷續的)인 행위이고 마나식은 6식의 행위를 쉴새 없이 판별하는 지속적(持續的) 행위라는 것이다. 또 사물을 인식하고 판별하는 방법에 있어 6식은 객관적 대상을 분별하고 인식하는 분별지(分別智), 7식은 8식에 저장된 기억을 기준으로 6식을 주관적으로 판별하는 것으로 사량식(思量識)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7식이 바로 아집(我執)과 번뇌(煩惱)를 일으키는 주범(主犯)이 라는 것이다
이를 컴퓨터에 비유하여 본다면 “연인산”을 키보드로 치는 것은 5식이다. 모니터에 떠있는 “연인산”을 저장하려고 하면 “저장하시겠습니까”라는 메시지에 응답하거나 또는 관련자료를 찾으려고 ‘열기’를 눌러 폴더를 뒤져보는 것을 6식이라 할 수 있다. 7식은 저장, 혹은 열기 등의 명령이 있을 때 응답을 하거나 하드디스크를 뒤지며 자료를 찾는 행위일 것이다.
6식과 7식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명령하는 입장과 명령을 수행하는 입장으로 명령하는 행위는 단속적이지만 명령의 수행은 언제나 준비하고 있는 상태로 잠자는 일 없이 언제나 “명령만 내려주시면 일하겠습니다.”라며 대기(待機)하고 있는 것과 같다.
8식은 저장매체인 하드디스크 그 자체다. 다만 컴퓨터와는 달리 아라야식은 5식에서 받아들인 모든 것을 무조건 저장하여 윤회(輪廻)를 벗어날 때까지 지속된다는 것이다.
아라야식에는 현생(現生) 뿐 아니라 전생(前生)의 모든 기록이 저장되어 있다 하므로 만일 그 메모리창고에 들어가 자료를 뒤지다가 황홀했던 사랑의 순간들 뿐 아니라 혹시 잊고 싶었던 부끄러운 행위들도 하나도 삭제됨이 없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을 본다고 한다면 등골이 오싹하지 않겠는가?
“있다, 없다”로 깨끗이 결판을 낼 수 없지만 만일 윤회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그저 하루살이의 삶과 다름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독교에서는 윤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으나 실은 부활(復活)이라는 말 속에 윤회의 의미가 이미 내포(內包)되어있다고 생각한다. 부활은 곧 또 다른 삶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요한묵시록(1:8)에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끝)다’하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혹 이렇게도 풀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너희들이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해두었으니 모든 것을 알고 있노라”
지금까지라는 말 속에 숨어있는 의미는 당연히 현생뿐 아니라 전생, 더 거슬러 올라가 빅뱅(big bang=우주의 시작?)의 그 순간까지도 포함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육체라는 껍질은 언젠가 벗게 되는 날이 올지라도 8식인 아라야식은 결코 없어지지 않고 가져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가지려고 애쓰고 이루어낸 성취감(成就感)같은 것은 죽은 후에도 가지고 갈 즐겁고 아름다운 기억들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도 해볼 수가 있다. 우리가 함께 담아둔 아름다운 기억들은 컴퓨터의 ‘내네트워크환경’에 들어있는 공유(共有) 폴더인 “쉐어독(share doc)”에 담겨져 있는 것과 같다. 컴퓨터에서는 하드디스크까지 공유가 되어 서로 마음대로 꺼내볼 수가 있지만 사람의 기억은 그러하지 못하고 다만 함께했던 기억의 일부분씩만 함께 저장할 뿐이다.
만약 서로의 기억을 완전히 공유할 수 있다면? 바로 내가 남이 아니고 남이 내가 된다는 것으로 서로가 같은 것을 지니고 기뻐할 것이니 성내고 탐내는 그런 마음이 생길 수가 없다. 그때야 말로 바로 성자(聖者)의 경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상에 오르니 1,000미터 이상의 고봉(高峯)들이 줄줄이 서있는 북쪽 외에는 눈 아래에서 군봉(群峯)들이 조아리고 있으니 말 그대로 일망무제(一望無際)라 가슴이 탁 트인다. 여기서 명지산 정상까지는 6.7키로를 더 가야 한다 하니 만약 명지산까지 가려고 한다면 상당한 근력이 필요하겠지만 그만큼 호쾌한 종주가 될 듯하다.
내려가는 길은 소망능선 길보다는 완만하여 산새소리를 벗삼아 오솔길 걷듯 내려갈 수 있다. 다만 능선에서 내려가는 마지막 짧은 구간에 급경사가 있을 뿐이다. 오늘의 산행코스는 전체적으로 4시간이면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다른 코스에 비하면 비교적 짧은 코스라고 보아야 하겠다.
화악산과 명지산과 같은 이런 큰 산에 어찌하여 고찰(古刹)이 없을까 하고 이전부터 조금 기이(奇異)하게 생각하였는데 여전히 답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아직 명지산을 오른 적이 없으므로 장담할 길은 없으나 느낌으로는 덩치만 큰 뒷산 같은 평범한 느낌의 산이라서 그러할까?
시냇가에서 발을 담그니 물이 어찌나 찬지 발을 넣었다 뺐다 하여야 한다. 옆에서 용만이가 얼굴은 세안(洗顔)이라 하고 발은 탁족(濯足)이라 하니 발을 더럽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가려 쓰는 것이 아닌가 하고 웃으며 말한다. 얼굴은 언제나 맨 얼굴을 보여야 되기 때문에 열심히 씻어야 하기 때문인가?
찬물에 발을 담그고 나니 내려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오늘 푸르른 하늘아래에서 예쁜 꽃들이 전해주는 향기가 코끝을 스치던 아름다운 광경을 함께 공유하며 기억에 담았으니 함께 나눌 작은 행복의 씨앗이 되어 마음의 창고를 채우게 될 것이다.
(양천서창에서 2008.5.31. 문상두 씀)
첫댓글 상두야~, 이제 당분간은 함께 못다닐 것 같다. 산에 갈 때마다 내 생각도 좀 해주라~. ^^
하는 일들이 잘되고 건강하기를 바란다. 잠시 돌아올 때마다 시간을 낼 수 있으면 산행날자에 맞춰 함께 숲길을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관순아!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