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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구성민족 : 크로아티아인(78%), 세르비아인(12%), 유고인(2.2), ㅇ. 화폐단위 : KUNA (쿠나) (US $1 = 7.1 KUNA) |
2) 지리 및 동식물 분포
크로아티아는 아드리아 해의 북동 해안에 위치하며, 북으로는 슬로베니아 와 헝가리, 동으로는 유고슬라비아, 남쪽과 동쪽으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동쪽에는 슬라보니아(Slavonia)지역으로 판노니안(Pannonian)평원으로 연결되며 땅이 비옥하여 농업하기에 적당한 지형이다. 구릉이 많은 중부 크로아티아를 지나면 이스트리안 (Istrian)반도와 울퉁불퉁한 아드리아해까지 이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부메랑모양으로 빙 돌아 나오는 현태이다. 두브로브니크가 있는 아드리아해 남쪽 끝은 바다와 접한 산만 넘으면 바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영토로 들어갈 만큼 아주 좁고 뾰족한 모습을 하고 있다. 크로아티아 해변과 섬들은 서유럽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에 속한다. 여름 휴가 철이면 온 섬과 해안이 관광객들로 붐빈다. 해안선의 길이는 1778km이며 섬까지 포함하면 5790km에 이른다. 대부분의 해변은 모래보다는 돌이 많다. 바다의 섬들은 그리스의 섬들처럼 아름답다. 1185개의 섬들 가운데 66개의 섬에 사람이 산다. 크로아티아에는 7개의 아주 훌륭한 국립공원이 있다. 풀라 근처의 브리유니 (Brijuni)는 잘 보존된 지중해 털가시나무 오크 숲이 있는 가장 잘 가꾸어진 공원이다. 산악지대의 리스니야크(Risnjak) 국립공원은 스라소니의 보금자리인 반면, 파클레니차(Paklenica) 국립공원의 우거진 숲에는 곤충, 파충류, 멸종위기에 처한 그리폰 독수리를 포함한 조류 등이 서식한다. 플리트비치(Plitvice) 국립공원에서는 곰, 늑대, 사슴 등을 볼 수 있다. |
3) 기후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와 내륙성기후로 나뉜다. 지중해성 기후를 보이는 아드리아(Adria) 해안에 위치한 이스트라 반도와 달마치아 지역은 태양이 내리쬐는 덥고 건조한 여름 날씨와 비가 오는 온화한 겨울 날씨를 지녔다. 특히 해안의 높은 산들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아서 봄은 빨리 오고 겨울은 늦게 오도록 해준다. 내륙에 위치한 자그레브를 포함한 평원지역은 대륙성 기후를 보여 년 교차와 일교차가 심하다. 평균 최고기온은 7월에는 27도이지만 1월에는 2도까지 내려간다. |
크로아티아의 역사
기원전 3세기 크로아티아의 토착민이던 일리리안족은 로마제국에게 영토를 잃었고, 서기 285년 로마제국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스플리트에 궁전을 겸한 요새를 지었는데 오늘날 이것은 동부 유럽 최고의 로마유적지가 되었다. 서로마제국은 5세기에 몰락하고 625년경 슬라브족이 오늘날의 폴란드에서 이주해왔다. 크로아티아 종족은 과거 로마제국의 한 주였던 달마시안-크로아티아와 북동쪽의 판노니안-크로아티아를 점령하고 지금의 크로아티아로 이주했다. 이 두 주는 925년 합쳐져 단일한 왕국이 되었고 12세기까지 번영을 누렸다.
1242년 몽고의 타타르족 침략으로 크로아티아는 황폐화 되었다. 16세기에는 터키인들이 발칸반도를 점령하고자 위협하기 때문에, 북부 크로아티아는 방위목적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그에게 도움을 구했고 1918년까지 그 영향권에 있었다. 그 동안 달마티안해안은 15세기 초 베니스에 점령되었다가 17세기말 나폴레옹이 지배하던 프랑스에 점령되어 일리리안 주(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와 함께)의 일부가 되었다.
크로아티아의 문화와 정치의 부활은 농노가 해방되고, 헝가리 지배하에 북부 크로아티아가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했던 1835년부터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세계 1차 대전의 패전국이 되자 크로아티아는 세르브, 크로아트 그리고 슬로벤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 후 이 왕국들은 1929년 유고슬라비아가 된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은 베오그라드가 연합국의 수도가 된데 불만을 품고 저항의 표시로1934년 알렉산더 왕을 암살한다.
1941년 독일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괴뢰 파시스트정권(우스타샤)을 크로아티아에 세운다. 우스타샤는 크로아티아의 모든 세르비아인을 몰아내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인종청소의 일환으로 약 35만 명의 세르비아인, 유태인, 집시를 학살했다. 모든 크로아티아인들이 이에 동조하지는 않고 다는 우스타샤를 전복하기 위해 공산빨치산이 되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100만 명의 사람들이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헤체르고비나에서 죽었다.
전쟁이 끝나고 크로아티아는 공산주의자 "티토"가 지배하는 유고 연방 내 하나의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크로아티아가 경제적으로 남쪽 공화국들을 크게 앞지르자 더 많은 자치를 요구하였고, 이로 인해 1970년대에 한 차례의 주민대표 숙청을 몰고 왔다. 티토가 1980년에 죽자 공화국이 해마다 교대로 대통령을 하는 우스꽝스러운 제도가 시작되고 크로아티아의 경제는 마비상태가 된다.
동부 유럽의 공산국가들이 몰락하자 크로아티아인들은 자치를 요구하는 소요를 일으켰고 공산주의는 끝났다. 1990년 프란죠 투즈만(Franjo Tudjman)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이 선거에서 승리한다.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인을 국가의 구성원이라기보다는 소수민족으로 규정하는 새 헌법이 제정되었다. 새 헌법에 의해 권리를 보장 받지 못하게 된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국가공무원자리를 잃었다.
슬로베니아에 이어 1991년 6월 크로아티아는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세르비아인들의 크로아티아 내의 영토 크라지나(Krajina)는 크로아티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격렬한 전투가 전국에서 일어나며 세르비아 공산군이 우위를 점하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세르비아를 돕기 위해 개입한다. 상황이 복잡해졌을 때 크로아티아는 3개월간 독립을 유보하기로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계속되고 크로아티아 영토의 4분의 1은 세르비아 민병대와 연방군의 수중에 떨어진다. 1991년 연방군은 두브로브니크로으로 진격하고 자그레브의 대통령 궁을 폭격한다. 이에 유럽연합 (EC)은 세르비아를 제재하기에 이른다. 11월 부코바르(Vukovar)는 3개월의 봉쇄 끝에 세르비아에게 점령된다. 6달 동안 약 1만 명이 죽고 수십만이 피난을 가고 수 만 채의 가옥이 파괴된다.
몇 차례의 휴전이 실패한 뒤에, 1992년 유엔은 세르비아가 점령한 크로아티아지역에 보호군을 배치한다. 연방군은 크로아티아에서 철수하고, 1992년 크로아티아는 소수그룹과 인권을 보호하도록 헌법을 고친 다음 유엔에 가입한다. 크라지나에서 세르비아 준 군사그룹이 우세하게 유지되었으나, 1993년 1월 크로아티아는 이 지역에 공격을 감행한다. 이에 크라지나는 공화국임을 선포하고 크로아티아인의 수를 거의 98% 추방하는 것으로 응수한다. 1994년 크라지나는 휴전에 서명하지만 다시 1995년 5월 폭력이 재발한다. 크라지나는 베오그라드의 지지를 잃고, 크로아티아 병력이 이 지역을 휩쓸어 15만 명의 세르비아인들은 그들의 조상이 수 세기 동안 살아왔던 마을을 떠났다.
1995년 12월 데이튼 협정(Dayton agreement)은 마침내 크로아티아에 안정을 가져왔다. 하지만 많은 피난민들이 중간지대에 살며 그들의 운명이 결정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반면에 정부는 고용되지 않은 제대 군인들을 이용하여 크로아티아인의 가옥문제, 심하게 손상된 사회하부구조를 해결하려고 힘쓰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는 전쟁 중 입은 손상을 상당히 회복했고, 특히 두브로브니크는 성공적으로 보수되어 여행객들이 다시 찾고 있다.